759화
“……실장님?”
성필은 히무라가 걱정되어 그를 불렀다.
히무라는 만년필을 든 채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오류가 난 로봇이 삐걱대는 것 같기도, 혹은 경련이 찾아온 환자인 것 같기도 했다.
성필이 긴장했다.
‘히무라 실장님은 이상주의자다.’
현실적으로 팔리는 뮤지션을 양성하기보다, 케이팝 시스템을 차용한 아이돌을 만들려고 했다.
만약 히무라가 안정적으로 발판을 쌓으려 했다면 아이돌관리본부가 아니라 가수관리본부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사토의 밑에서 착실하게 실적을 쌓을 수 있다. 회장의 아들이니, 미사토가 어련히 공을 차차 넘겨주겠지.
‘그런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아이돌 사업을 맡고 계시는 거야.’
사업도 정치처럼 보수와 진보로 갈린다.
보수적인 사업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더 가면 낭떠러지야!’
진보적인 사업가는 사람들을 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직 더 갈 길이 남았어!’
히무라는 과연 성필의 제안에서 낭떠러지를 보았을까. 아니면 웨벡스가 더 걸어가야 할 들판을 보았을까.
그곳에 있는 게 낭떠러지일지 들판일지 모른다. 결과를 정하는 건 사업가의 판단과 믿음, 능력이다.
히무라는 웨벡스가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또한 그것을 실현할 능력을 가로 엔터와의 협업으로 얻고자 한다.
남은 건 판단뿐.
‘히무라 실장님의 다음 계획엔 우리가 필요해.’
에스타스를 성공시켰다.
그의 다음 목표는 가로 엔터와 웨벡스의 합작 그룹이다. 가로 엔터에게 간접적인 도움을 받는 대신, 아예 가로 엔터와 함께 그룹을 만드는 것.
‘우리가 필요할 거야.’
그러한 미래로 나아가는 덴 기름칠이 필요하다. 중간에 녹슬어 멈추지 않기 위해서.
히무라는 소녀연맹에게 현재의 이익을 준다.
성필은 웨벡스에게 미래의 이익을 준다.
이게 둘 사이의 기름칠이 될 거라고, 성필은 판단했다. 하지만 히무라의 판단은 다를 수도 있다.
미래의 이익이란 어둠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있을지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결국은 현실주의자로 돌아서게 될까.’
지금도 고민하는 기색이 짙다. 만년필의 끝을 종이 위에 올려두지 못하고 있으니.
성필은 몸이 달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채찍, 당근, 채찍, 그리고 당근.
“처음에 소녀연맹의 매니지먼트 수익 비율을 조정해주시겠다고 하셨죠. 비록 저희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비율을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조정해주려고 하셨습니다. 그게 실장님의 상냥함에서 비롯됐단 걸 압니다.”
히무라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서류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성필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다.
“지금도 소녀연맹을 도와주는 데 부담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웨벡스도 소녀연맹과 같은 고민일 테니까요. 들이는 품에 비해 수익이 적다. 차라리 웨벡스 소속 아티스트에게 힘을 쏟으면, 소녀연맹을 상회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
“만약 이 이상 웨벡스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어진다면, 더는 소녀연맹을 푸쉬해주는 데도 한계가 오겠죠. 설령 히무라 실장님이더라도요. 그럼에도 히무라 실장님은 비율을 조정해주기로 하신 겁니다. 그런데…….”
가로 엔터는 그보다 더 큰 이익이 필요하다. 소녀연맹 멤버들을 위해서도, 가로 엔터를 위해서도.
“가로 엔터는 해가 다르게 커져야 합니다. 확장을 거듭해야 해요. 안 그러면 죽어요. 피투성이가 돼서도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 시장이 위기를 돌파할 해답이, 승리를 가져올 검이 되겠죠. 저희가 바라는 비율을 맞춰주시기만 한다면요. 또한 그에 따른 히무라 실장님의 부담을, 저희가 미래로 보상해주고자 합니다.”
소녀연맹의 일본 프로모터 권한.
“그 미래에 다다르기까지 히무라 실장님이 고생을 많이 해주셔야 할 겁니다. 직설적으로 방파제가 되어주셔야겠죠. 고된 일일 게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약속드립니다.”
리카의 일본 매니지먼트 권한 연장을 도중에 파투 냈을 때, 성필은 궁여지책으로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리카가 일본에서 쭉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인기 상승을 가져오겠다고.
양보해주는 대신, 소녀연맹이 훨씬 더 유명해지게 만들겠다고.
“그때처럼,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소녀연맹은 일본 내에서 최고의 공연 수익을 올리는 그룹이 될 겁니다. 히무라 실장님과 저희가 힘을 합치면…….”
“잠시만요.”
히무라가 만년필을 내려두었다.
성필이 침음을 삼켰다.
‘결국.’
현실적으로 판단한 건가.
“제가 지금 판단할 사안이 아닙니다.”
히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필이 당황하여 같이 일어나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시간을 주십시오. 1시간 정도. 어쩌면 그보다 더 길 수도 있습니다.”
히무라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재빨리 아이돌관리본부의 중역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회사에 부재한 사람들은 굳이 찾지 않았다. 또 공연 사업 부서의 관리자급 인물도 불렀다.
중역들은 자신보다 연차가 훨씬 낮은 인물의 호출에 응답했다. 히무라는 실장급이지만, 동시에 회장의 아들이자 미래의 회장이기도 했다.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르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소녀연맹과의 매니지먼트 계약 건으로 박 이사님을 만나고 있는 건 아시겠지요. 그 일 때문에 불렀습니다. 가로 엔터 쪽의 제안을 검토해주십시오.”
히무라가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이 이어지자 중역들은 물론 공연 사업 부서의 인물도 눈을 빛냈다.
“소녀연맹의 공연을 저희가요? 그냥 돈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네요!”
“내년에 콘서트 투어를 한다면 몇 명이나 모일 거 같습니까?”
“아직 소녀연맹이 컴백하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지만, 10만 명은 가뿐하게 넘기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돈이 제 발로 굴러들어온 상황.
“10만 수준의 공연, 저희가 프로모트 할 수 있습니까?”
“아 당연하죠!”
“100만은?”
“으에?”
“100만은, 저희 깜냥으로 가능합니까? 저희가 전문 프로모터는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어, 그게.”
“꼭 해내야 합니다. 앞으로 2~3년 내에 반드시. 할 수 있습니까?”
“기, 기회를 주시면. 다른 회사와의 적극적인 협업으로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규모의 공연을 진행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겁니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원해드리죠.”
“그러면, 예, 하겠습니다…….”
“실장님.”
아이돌관리본부 본부장.
미사토와 동급의 인물이 히무라를 공손히 불렀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그에 히무라가 현재 수익 비율 조정에 대해 말했다.
“그건…….”
본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수익이 줄어들면 위쪽에서 압력이 들어올 겁니다. 지금까진 히무라 실장님 덕분에 어떻게든 됐습니다만, 아시잖습니까. 수익은 줄어드는데 소녀연맹에게 쏟는 자원이 많아지면…… 그 얼마나 이상한 상황입니까.”
있는 말 없는 말 다 나올 수 있다.
히무라가 가로 엔터에게 리베이트라도 받는 게 아니냐고. 그게 아니면 향응과 접대라도 받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저 녀석 저거 평소부터 수상했어! 이상할 만큼이나 케이팝 아이돌에 미쳐있더니 결국 이런 상황을 만드는구나! 아버지의 반의반도 안 되는 자식!
그래, 히무라도 충분히 이해한다.
“대신 저희가 소녀연맹의 프로모터가 될 수 있잖습니까. 그 돈이 결코 적진 않은데요. 내년에 있을 공연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렇죠. 그게 방패막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수관리본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 이런 말이 나옵니다. 외부인 살펴줄 바에야 우리 가족을 살피라고…….”
“외부인요?”
히무라가 서슬 퍼렇게 반문하자 본부장이 흠칫했다.
본부장은 즉시 세이코 사태가 떠올랐다.
한때 같은 직급의 동료였으나 현재는 이사가 되어버린 친구가 있다.
그의 포르쉐 위로 성필과 세이코가 낙하했었다. 찌그러진 차를 보며 ‘내 포르쉐가아아아아!’라며 절규했다지.
“실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계약할 권한은 저에게 있습니다.”
“계약하더라도, 실장님이 가로 엔터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파기될 수도 있잖습니까.”
“가수관리본부가 이의를 제기해올 거라고요?”
“예,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밥그릇 싸움 가능합니까?”
아이돌관리본부의 인원들이 서로를 보았다.
본부장은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히무라에게 물었다.
“최근엔 사이가 좋았습니다만…….”
가수관리본부와 아이돌관리본부는 똑같은 밥그릇을 공유한다. 그런데 가수와 아이돌로 구분하고 부서를 갈라놓았으니, 사이가 나쁜 게 당연지사다.
승진에 눈이 먼 각 부서의 비즈니스맨들이 웨벡스 역사 수십 년 동안 암투를 벌여왔다.
그런데 최근 그러한 균열이 봉합되기 시작했다.
회장의 아들인 히무라가 아이돌 사업의 구심점이 되고, 그 친구인 미사토가 가수관리본부의 수장이 됐기 때문이다.
암투 대신 정상적인 거래와 대화가 오고 갔다.
그랬는데…….
“정말로, 옛날로 돌아가길 바라십니까?”
“소녀연맹이 끝이 아니에요. 소녀연맹을 시작으로 더 많은 케이팝 그룹의 매니지먼트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매니지먼트는 종전까지 있던 거죠.”
케이팝 아이돌을 매니지먼트하는 건 미사토가 내었던 의견이다.
웨벡스가 최초로 매니지먼트했던 케이팝 아이돌은 다키스트였다.
미사토는 웨벡스에 새로운 돈줄을 가져다주었고, 그 공로는 그녀에게 부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도 그럴 게, 첫 타자가 다키스트였던 것이다.
히무라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자 한다.
“매니지먼트 이상으로, 저희가 프로모터까지 될 수 있는 겁니다. 새 수익원이죠.”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히무라 또한 미사토처럼 권위를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로 엔터와의 일본 합작 그룹도 준비하고, 최종적으로는 웨벡스 홀로 걸그룹 프로듀싱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로 엔터는 고작 한 그룹으로 끝낼 인연이 아니에요.”
“소녀연맹 하나만으로는 가시적인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그런 말씀입니까. 그 외에 미래에 발생할 다른 이익을 근거로 들어…….”
“아니요.”
히무라가 결연히 선언했다.
“저는 소녀연맹이 콘서트 100만 집객을 이루게 만들 겁니다.”
“100만……?”
“더 많은 케이팝 그룹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웨벡스가 걸그룹 프로듀싱 역량을 갖추게 되는 건 부산물이죠. 소녀연맹을 지원하는 게 더 먼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요? 아니요, 저는 소녀연맹으로도 근시일 내에 이익을 낼 겁니다.”
히무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저는!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전부 가질 겁니다! 00년 이후 처음으로, 아이돌관리본부가 가수관리본부를 앞지르는 미래를 만들어낼 겁니다!”
히무라가 격정적으로 외쳤다.
“대체 아이돌관리본부에서 임원직을 배출하지 못한지 몇 년입니까! 아니, 몇 년이 아니죠. 십 년 이상입니다!”
본부장이 침음을 삼켰다.
그의 친구였던 가수관리본부의 본부장은 일찌감치 승진하여 임원이 되었다.
그런데 자신은?
‘가망이 없지.’
히무라의 외침은 본부장의 가슴에 닿았다.
임원. 모든 직장인의 최종 목표가 아닌가.
이대로 몇 년 내에 퇴직하여 뒷방 늙은이가 되는 삶.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웨벡스는 아이돌에 약하다. 특히 걸그룹에. 그 평가는 사실입니다. 그럼 강하게 만들면 됩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작점입니다. 아이돌관리본부를 다시 위대하게! 위대했던 황금시대로!”
히무라가 타오르는 눈으로 본부장을 응시했다.
“어떻습니까, 본부장님.”
아이돌관리본부 직원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적이 이어졌다.
이윽고 그 시선은 본부장에게로 향했다.
히무라는 초조하게 본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 * *
토모에는 땀범벅이 되어 무대에서 내려왔다.
백스테이지로 오자 스태프들이 박수로 맞아주었다. 기분 좋은 나른함 속에서 토모에가 전방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그녀가 우뚝 멈췄다.
장하양이 보였다.
그녀는 토모에와 눈이 맞자, 안 그래도 싱그러운 미소를 더욱 짙게 했다.
“공연 끝난 거 축하해.”
토모에는 매니저가 준 얼음 주머니와 수건을 목에 걸고 장하양에게 다가갔다.
토모에가 팔을 펼쳤다.
장하양은 토모에가 땀범벅인 것도 전혀 개의치 않고 꽉 끌어안았다.
토모에의 첫 번째 콘서트 투어가, 물론 공연장 네 개에 관객 수 1만 명이 채 안 되어 투어라고 불리기도 뭐하지만, 아무튼 첫 번째 콘서트 투어가 끝난 것이다.
장하양은 소녀연맹의 첫 번째 콘서트가 끝났을 때 느꼈던 기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형용할 길이 없는 행복함 말이다.
“수고했어.”
“정규 앨범으로 내길 잘했어요……. 15곡이나 안 냈으면 콘서트도 못 했을 거잖아요…….”
“잘했어.”
토모에는 장하양에게서 떨어져 코를 훌쩍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기다려주셨네요, 언니.”
“응. 이왕 왔으니까 다 보고 갈까 해서.”
“저랑 밥 먹을래요?”
“아…….”
장하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토모에가 말하는 밥이란 공연 뒤풀이일 것이다. 이 공연과 관계가 없는 자신이 끼어도 될 자리가 아닐 텐데.
“내가 가도 될까?”
“자리 하나 더 만들면 되죠.”
매니저가 붙임성 좋게 끼어들었다.
그러자 토모에가 그를 향해 손을 저었다.
“하양 언니랑 둘이 먹을 거예요.”
“어, 으, 응? 그러면 우리 뒤풀이는…….”
토모에 없는 토모에 공연 뒤풀이가 되지 않은가.
“가서 개회사만 하고 빠질게요. 어차피 저 없는 게 모두한테 더 편한 거 아니에요?”
“그치만, 본부장님도 오신다고 했고…….”
“그럼 다른 날에 잡으면 되잖아요.”
“이미 예약을 했는데…….”
“그럴 기분 아니에요. 하양 언니랑 있고 싶다고요.”
매니저는 아연했다.
그는 세이코의 매니저로 일하는 선배의 한탄이 떠올랐다. 세이코는 뭐든 제멋대로라서 관리하기 너무 힘들다고 말이다.
토모에는 지금까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거의 세이코급이다. 매니저는 어쩔 줄 모르고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토모에.”
그때 장하양이 끼어들었다.
“그러면 실례잖아. 다들 널 위해 모이는 거야.”
“하양 언니는 나랑 있기 싫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잖아요. 제가 걱정이면 걱정 안 해도 돼요. 매니저님, 그렇게 할게요.”
“자, 잠깐만! 본부장님한테 연락해볼게!”
매니저는 토모에가 달아나기 전에 황급히 미사토에게 전화했다.
[토모에가?]
“네, 이게, 어떻게 해야 할지 저 혼자선 판단이 안 서서…….”
[그래서 나한테 전화를 했다고? 얘가 아직도 나 부장일 때 생각하고 막 연락하네.]
“죄, 죄송합니다…….”
[농담 좀 한 걸로 움츠러들지 마. 그래, 그렇단 거지? 그럼 그냥 보내.]
미사토는 너무나 시원스러웠다.
세이코를 10년 넘게 직접 맡아서일까. 뮤지션의 돌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어차피 내가 가니까, 체면치레는 되겠지.]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토모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모에는 장하양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언니, 갈 거죠?”
“…….”
장하양은 그녀가 처음 자신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를 떠올려야만 했다.
자신이 혹시 여자에게 인기 있는 타입인지 고민했던 것 말이다. 진소유도 그렇고, 토모에도 설마…….
“그래. 어디 가는데?”
“제집이요. 맛있는 거 사서 가요.”
얘 진짜 설마?!
장하양은 오들오들 떨며 토모에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게 렉서스야?”
“네.”
검은색 세단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모르겠다.
분명 성능 같은 게 좋겠지.
장하양이 조수석 문을 열자 운전석이 튀어나왔다.
“아.”
일본은 한국과 조수석, 운전석 위치가 반대였다.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자주 잊어먹곤 한다.
토모에가 그런 장하양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운전해주시게요? 국제 면허증 있으세요?”
“아니…….”
“그거 그냥 등록해달라고 하면 해주잖아요. 왜 안 했어요?”
“사실 면허증 자체가 없어.”
둘은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장하양은 고급 세단을 착실히 둘러보았다. 확실히 보통 차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녀가 비교하는 건 성필의 ‘붕붕이’였다.
‘박 이사님은 새 차를 안 가지고 싶으신가.’
보통 남자는 차에 관심이 많다던데.
“땀 냄새 많이 나요?”
토모에가 짧은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옷의 가슴께를 들어 코로 가져갔다.
그녀가 쑥스러워했다.
“노래만 불렀는데 땀이 왜 이렇게 나왔지.”
“조명이 덥잖아.”
“아이돌은 어떡해요?”
“파우더 바르지. 콘서트면 노래 끝나고 내려와서 화장 수정하고, 파우더 바르고…….”
“그럼 땀 안 나요?”
“나. 근데 오히려 땀나는 게 더 좋아 보일 때도 있어. 더 필사적으로 보인다고 할까.”
성필이 그런 무대를 좋아한다. 그는 꾸며진 음악방송 무대보다, 생생함이 드러나는 콘서트 무대를 더 좋아한다.
그가 최고로 꼽는 건 다키스트의 일본 콘서트 중 하나인데, 멤버들이 죄다 땀범벅이 되어 십수 분 동안 춤추고 노래하는 파트가 있다.
그건 장하양이 봐도 감명 깊었다.
“제 팬들도 그랬을까요?”
장하양은 토모에를 눈에 담았다.
이젠 땀이 꽤 말랐지만, 목 근처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흰 티셔츠가 살에 달라붙어 살굿빛을 띠었다.
“음, 모르겠어. 아이돌이랑 가수를 보는 눈은 다를 거라고 생각해.”
“으음…….”
이야기가 끊길 것 같아 장하양이 새로운 주제를 올렸다.
“아까 아무도 록을 안 듣는다고 했잖아. 무슨 뜻이야? 계속 궁금했어.”
“아, 그거요. 록은…….”
가벼운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토모에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의 눈에 질척이는 어둠이 담겼다.
“저항의 음악이었잖아요. 지루하고 되먹지 못한 체제에 반항하는 문화였어요.”
“그런데 이젠 록이 그 역할을 잃었다는 거야? 현재의 록은 그렇지 않으니까, 록이 아니라는 뜻?”
의외로 철학적인 성격이구나. 오컬트를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뮤지션인 줄 알았는데.
“하하!”
토모에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현재에 록이 사라진 건 당연하죠.”
“록이 사라져?”
“록은요, 많은 걸 약속했어요. 낙원을, 전쟁 없는 세상을, 행복을, 착취를 없앨 것을, 쾌락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장하양은 68혁명을 떠올렸다.
소녀연맹의 데뷔곡인 ‘아니’의 비주얼적 주제가 혁명이었다. 장하양이 맡았던 68혁명은 젊은이들이 구체제에 대항하는 문화적인 혁명이었다.
로큰롤이 그 중심 중 하나였다.
확실히, 록은 토모에가 말했듯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다 거짓말이었어요. 다들 깨달은 거예요. 록은 전부 거짓말을 했다고요.”
“……그건 너무 비약 아니야? 음악가들이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그 메시지를 음악가들이 꼭 이뤄야 한단 법은 없잖아.”
“아니요, 거짓말쟁이예요.”
토모에가 핸들을 꽉 쥐었다.
“록은 체제에 저항하는 음악이었어요. 반체제 문화였다고요. 그런데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타락했어요. 사람들이 좋아할 걸 아니까 가사에 적당적당한 말이나 적어서 뿌렸어요. 자기들이 진짜 바라지도 않는 저항을 가사에 넣어서 뿌린 공수표예요. 록스타들은 사라지고, 체제에 대항해야 할 문화는 체제 그 자체가 됐어요. 돈이 전부인 음악이요. 록은 문화가 아니라 그냥 음악 장르인 거예요, 이제 와선.”
장하양은 토모에가 내뿜는 열기에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록의 타락을 꼬집으면서, 토모에 본인도 록 장르를 상품으로 팔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주된 노래 주제는 사랑이다.
록을 장르적 스타일로 이용할 뿐이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분노하는가.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것도 당연하죠.”
밴드 너바나의 프론트맨.
최후의 록스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세상에 저항하려고 록을 선택했는데, 록이 세상 그 자체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다 돈밖에 없었어요. 전부 다 거짓말이라서, 더는 살 가치를 못 느꼈을 거예요.”
“……너도 그래?”
장하양이 토모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토모에가 하는 말은 위험했다.
장하양은 토모에의 방이 어떻게 채워져 있는지 안다. 작업하러 갔을 때 보았었다. 그녀의 방은 젊은 나이에 죽은 음악가들로 가득하다.
토모에가 거기에 영감을 받고, 혹은 영향을 받는다면,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심지어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었다.
‘그냥저냥 길게 사는 건 최악이다. 젊은 채 전설이 되어 죽는 게 최고다.’
그런 그녀가 하는 말이기에, 장하양은 쉽사리 넘길 수 없었다.
“너도 그런 거야?”
“문화는.”
토모에는 장하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세계를 약속했어요. 더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상처입히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요. 철학도 그랬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약속했어요. 그런데 둘 다 실패했어요. 거짓말쟁이였던 거예요. 살아남은 건 자본 하나예요. 끔찍한 약속을 했던 자본 하나만요.”
타인을 짓밟아라.
그러면 너희를 풍요롭게 해주겠다.
“문화도 철학도 없어요. 산업만 남았지. 무의미하게 늘어선 SNS 피드, 리트잇 횟수, ‘좋아요‘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지 말지를 결정하는 세계…….”
“토모에.”
장하양이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신호를 받아 멈추고, 토모에는 장하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하양의 눈빛이 토모에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도 그렇냐니까. 이런 세상에서 더는 살 가치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뮤지션이 되고 업계에 실망했다거나 그런 거야?”
“……저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요.”
장하양의 심장이 철렁였다.
토모에의 방을 도배한 죽은 예술가들의 포스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자살했거나, 자살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었다.
“이름을 남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