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8화
회귀 전. 이세훈은 삼견에게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 겪은 불우한 사건들. 삼견이 각자 저질러온 범죄의 배경.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았던 기행의 이유.
처음에는 인연레벨을 올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시작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삼견은 자신들이 품어왔던 감정을 하나둘씩 푸념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연레벨이 올라가며 그 이야기들이 조금씩 깊어져 갔을 때.
화르륵!
삼견은 그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기술을 이세훈에게 알려주었다.
카앙!!!
창날을 노렸던 푸른 주먹이 단숨에 쳐내고 이어서 반대쪽의 단창이 쇄도해 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고들어 오는 검은 창날에 제이크가 재빠르게 주먹을 마주 내질렀다.
카앙!!
충돌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주먹. 그 사이 처음에 쳐냈던 주먹을 회수하여 재차 휘둘렀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가가강!
압축된 마나를 두른 푸른 주먹과 불꽃을 머금은 창날이 서로를 향해 쉴 새 없이 휘둘러진다. 사전에 합을 맞춰둔 것처럼 끝없이 맞물리는 공격들.
다른 이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칼쿠프의 학과 수석인 제이크가 이세훈에게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세훈이 처음 염륜을 만들어냈을 때. 제이크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월요일에 이세훈과 염성하가 플라비움을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친구들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염성하와 밀접한 관계. 그렇다면 염륜잔화창을 알고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후웅!
문제는 이세훈이 휘두르는 염륜잔화창이었다.
본래 염륜잔화창은 공간을 넓게 장악하여 상대를 압박하는 화력 중점의 창술. 그렇기에 상대가 똑같이 화력 중점이라면 보통 힘겨루기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또 온다……!’
카앙!
하지만 이세훈이 사용하는 염륜잔화창은 두 자루의 단창을 사용해 장악하는 공간이 좁아진 대신 밀도가 매우 높아졌다.
그 결과 힘겨루기를 통해 무기를 파괴하려 했던 제이크의 계획은 모조리 빗나가고 처음 빼앗긴 호흡을 되찾지 못해 시종일관 끌려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흐읍!”
후웅!
턱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창날.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창대를 붙잡고 있던 이세훈의 손목이 반 바퀴 회전하며 안으로 끌어당겼다.
“윽?!”
카앙!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흑십창의 창날.
십자 형태의 창날을 활용한 기교로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이만큼 날카롭게 펼치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다.
방벽에 막혔으나 실전이었다면 치명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격. 그 사실에 제이크의 몸이 아주 잠시 굳어졌고, 그 틈 사이로 이세훈의 공격이 더욱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후웅! 카앙! 콰아앙!
창날과 창대. 그리고 허공에 맺힌 잔화가 불꽃을 토해내며 쉴 새 없이 압박해 온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제이크는 두 눈을 빛내며 방어를 다졌다.
‘아직 기회는 있어……!’
지금 이세훈이 발휘하는 신체 능력은 어디까지나 스킬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 그 증거로 머리끝에 맺혀있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스킬의 효과가 끊어져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순간. 그 틈을 노린다면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으리라.
그 순간만 노리며 제이크는 방어를 굳건히 다졌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눈치 깠네.’
처음에는 계속 맞받아치더니 갑자기 방어에 집중한다.
아무리 봐도 탐철의 지속시간에 대해서 알아차린 것으로 보였는데 머리도 차분해졌는지 자세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아칼쿠프 수석은 괜히 단 게 아니다, 이거구만.’
이대로라면 탐철의 효과가 끝나는 순간 바로 역공을 당해 패배할 터. 상황이 바뀌었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일단 예상한 대로 몸은 잘 움직여.’
회귀 전 광견에게 직접 전수받은 염륜잔화창. 그때는 흉내도 더럽게 못 낸다고 온갖 욕을 다 먹었지만 지금은 어설프게나마 재현이 가능해졌다.
탐철을 통해 흡수한 사접석의 힘이 전신을 그에 맞춰서 ‘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기본기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기술’을 펼쳐야만 한다.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제이크의 몸을 걷어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좁혀졌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고 제이크는 뒤쫓는 대신 자세를 가다듬으며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다음 한 수로 끝낼 생각인가 보네.”
“일단은?”
“내가 안 받아주면 어쩌려고?”
단기간에 끝내기 위해 달려들었을 뿐이지 장기전이 불리한 것을 안 이상 굳이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
스킬의 효과가 풀릴 때까지 도망치는 것도 제이크가 진지하게 염두에 두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쫄았으면 어쩔 수 없지.”
“……뭐?”
“아칼쿠프 수석이 보르시파 수석한테 두 번이나 깨지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네 마음도 이해하니까 편한 대로 해. 비겁하다고는 안 할 테니까.”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자세를 다잡는 이세훈.
그 모습에 제이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핏기가 가시며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뿌드득─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데도 냉정해진 적이 있었던가.
방금까지는 누님의 부탁 때문에, 그리고 다시 한번 계승식을 받기 위해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제이크는 그 이유가 변한 것을 느꼈다.
‘절대로…… 두 번은 안 진다……!’
처음으로 패배했던 날부터 생겨났던 승부욕.
비슷한 나이대의 상대에게 처음으로 느낀 감정에 제이크는 두 눈을 빛내며 자세를 낮췄다.
꾸우욱─
허리춤 옆에 세워진 두 주먹.
등은 아래로 굽어지고 고개는 바닥을 향해 팔꿈치만 하늘을 향한다.
상대를 눈앞에 둔 자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방비해 보였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중간하게 덤벼들면 그대로 박살 내겠는데.’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주먹 안쪽에서 압축되고 있는 마력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예상을 뛰어넘은 제이크의 악력에 혀를 내두르며 이세훈도 자세를 다잡았다.
‘그래. 이번에 끝내자고.’
두 창을 살짝 늘어뜨린 이세훈은 창날을 위아래로 교차시킨 다음 모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탐철로 달아오른 피와 화속성마력인 홍련이 영연신마법으로 구축된 통로를 타고 전신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질주한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아칼쿠프의 신입생들은 다 때려눕힐 수 있겠지만 상대는 1학년 최강인 학과 수석.
그렇기에 이세훈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오른팔과 오른발목에 채워진 묵주환의 마력을 해방했다.
‘폭환.’
스스슷─
평소와 달리 체내로 조용히 흡수되는 암속성마력.
염성하가 훈련 중에 묵주환에 남겨둔 ‘흑암혼’이 몸 안으로 들어왔고 이세훈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크으…….”
자신이 보유하지 않은 속성마력을 체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된 행동이었다.
비효율적인 것은 둘째 치고 마력회로를 갖추지 못한 육체가 반발을 일으키면서 마력이 폭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보기에 지금 이세훈의 행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임시통로는…… 오랜만이구만……!’
당연하게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키이잉!
체내에서 울려 퍼지는 쇳소리.
급조해서 만들어낸 길이 이세훈의 전신에 깔렸고 홍련이 침식해 오던 흑암혼을 그 안으로 걷어차 넣었다.
“흡……!”
쿠웅───!
영연신마법이란 하나의 몸을 산채로 해부하여 수십 개로 나누는 것.
처음 접한 이들에게는 무슨 미친 짓거리인가 싶을 만큼 위험했고, 실제로 회귀 전의 이세훈 역시 ‘길’ 하나를 만들어내는데도 엄청난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몸이 어떤 식으로 갈라질 수 있는지 이미 완벽히 파악한 상태. 그 말인즉.
화르륵!
이세훈에게 있어 다루지 못할 속성마력은 없다는 것이다.
교차한 창끝에 맺히는 불꽃과 어둠. 두 가지의 속성마력을 완벽히 끌어올린 이세훈은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며 두 눈을 가라앉혔다.
우우웅─
마력의 울림이 고요히 퍼져나가며 두 사람의 호흡이 멈춘다. 그리고 전신의 근육과 마력을 완전히 일치되어 모든 힘이 맞닿은 그 순간.
콰앙!
지면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 쇄도해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지는 거리. 충돌까지 1초도 채 남지 않은 그 찰나에 달려 나오던 제이크의 두 다리가 돌연 지면을 내려찍었다.
쿵!
진각과 동시에 꽉 움켜쥐어졌던 제이크의 두 손이 펼쳐지며 손바닥이 맞닿아 합장한다.
“그윽……!”
키잉───!
극한까지 압축된 마력의 충돌. 손바닥이 터져나갈 듯한 압박감 속에서 제이크는 맞닿은 손끝을 아주 살짝 벌려 분출구를 만들어냈고.
마이어스류 가검식假劍式.
청축靑築 광사光絲.
한 줄기의 빛이 경기장의 바닥을 가르며 이세훈을 향해 휘둘러졌다.
압축된 마력으로 만들어낸 마력의 칼날. 사용법이 거칠지만 저만한 압축률이라면 ‘검기’의 일종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다.
학과 수석다운 일격 앞에서 이세훈은 몸을 던져 피하는 대신 자세를 더욱 낮추며 양손에 잡힌 창대를 꽉 움켜잡았다.
‘조금 더 아래.’
보기에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압축된 마력을 마구잡이로 방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광사의 빈틈을 찾아낸 이세훈은 손목을 회전하며 교차한 두 창날을 동시에 겨눴고
염륜잔화창─改.
암명반월暗明半月.
어둠을 뒤쫓는 붉은 반월이 푸른 빛줄기를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충돌 직후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충격파.
경기장에 펼쳐졌던 보호장치가 단숨에 절반 이상 부서졌고 비상장치가 발동되며 몇 배나 두꺼운 방벽이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
“…….”
제이크의 목을 교차로 겨눈 두 창날과 이세훈의 명치에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있는 합장한 손.
방벽이 없었다면 목이 날아가고 명치를 꿰뚫려 동시에 죽었을 상황. 애매한 결과에 두 사람이 담담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가 졌다.”
한숨을 푹 내쉰 제이크가 명치를 겨누고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대상 ‘제이크 마이어스’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패배를 선언함과 동시에 성립된 인연.
이번 대련을 통해 제이크에게 제대로 인정받았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에 이세훈은 기뻐하기보다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승부가 아니고?”
영웅 등급의 장비에 아리아의 의뢰까지 엮인 대련인데 이렇게 시원스레 패배를 받아들이다니.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멋쩍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우기려면 우길 수야 있긴 한데…….”
목에서 떨어져 아래로 내려간 이세훈의 두 단창. 이만 살짝 나간 창날의 모습에 제이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무기만 부러졌는데 무승부라 하기엔 좀 그렇잖아.”
제이크의 무기라 할 수 있는 광사는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이세훈의 무기인 두 단창은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렇기에 제이크는 무승부를 고집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광사까지 사용했는데 무승부인 시점에서 이미 진 거나 다름없지…….’
제이크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에서 ‘필살必殺’을 붙여도 부족함이 없는 광사.
아칼쿠프의 동급생들에게도 펼친 적 없던 기술을 전력으로 펼쳤는데 이기지 못했으니 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끓어오르던 투지만큼이나 마음속 깊이 내려앉은 허탈함.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긴 했지만 제이크의 마음은 그리 개운하지 않았다.
‘검만 있었다면…….’
불리한 사정거리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고, 방금처럼 무기가 부러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 그에 제이크가 의기소침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물었다.
“너 혹시 검을 쓸 수 없는 거냐?”
이전 대련에서도 느껴졌던 기묘한 이질감. 그때는 그냥 착각인가 했지만 방금 대련으로 이세훈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이질감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놈 검술을 맨손으로 펼치고 있었어.’
마이어스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은 구분하기가 어렵겠지만 회귀 전에 분석한 적이 있었던 이세훈에게는 그 차이점이 느껴진 것이다.
‘저 정도로 검술에 능숙한 녀석이 검을 일부러 안 쓸 리가 없지.’
분명히 자신이 회귀 전에 몰랐던 사정이 있다.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사정이 있어서.”
“혹시 누가 억지로 막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미숙하다고 해야 하나…….”
쓴웃음을 지으며 빨갛게 부은 자신의 양손을 비비는 제이크. 그 모습에 이세훈은 대강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다.
‘저 악력 때문이었구만.’
신체 능력보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정체불명의 악력. 아마 저게 바로 제이크가 비효율적인 전투법을 고집하게 만든 원흉이리라.
“아무튼 대련은 내가 졌으니까 여기 망치…….”
“야. 제이크.”
“응?”
“검 한 자루 만들어줄까?”
“……어?”
당황하는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가 부러뜨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검 말이야.”
잘만하면 제이크의 인연레벨을 금방 Lv.2까지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이세훈이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대상 ‘마광수’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음?”
강의실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는 마광수를 뒤늦게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