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76화 (76/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76화

바벨의 중앙구획에 맞닿아 있는 보르시파의 본청.

보르시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는 장소로 바벨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본청의 크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수백 명의 행정 직원들이 근무하며 수만 명의 사람이 다양한 용무로 방문하는 10층 규모의 거대한 건물.

그 때문에 아래쪽은 여러 생활소음이 자잘하게 발생했지만, 최상층에 위치한 학과장실은 달랐다.

사각사각

서류에 사인하는 펜의 소리마저 선명히 들리는 방 안. 그 고요함 속에서 류은하가 평소처럼 서류를 살피고 있을 때.

콰앙!

거세게 열리는 방문.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금발 올백머리의 중년 사내, 미하엘 바르무트가 싸늘한 표정으로 류은하를 바라보았다.

“류은하 학과장.”

점잖은 말투와 달리 분노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부름.

어찌나 노골적인지 말끝에 마력이 실려 나와 학과장실 전체가 희미하게 떨릴 정도였지만 류은하는 서류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모르겠군요. 설명해 보시죠.”

대화를 할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 그 모습에 미하엘의 눈매가 찌푸려졌지만 금방 감정을 가라앉히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이 올린 편파적인 리뷰 영상 때문에 지금 바르무트 가문이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단 말입니다.”

류은하의 영상이 올라간 뒤. 바르무트 가문은 처음으로 주문량을 웃도는 환불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새로운 양산형 무구의 성능에 긴가민가하던 기업과 길드들이 류은하의 영상이 올라온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그쪽으로 갈아탔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시장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는데…… 고작 영상 하나 때문에……!’

영상이 막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을 때. 바르무트 가문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즉각 대응을 펼치긴 했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자료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내용이 아니며 이와 관련된 비방과 허위사실 유포는 강력하게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언급을 틀어막고 영상이 올라간 사이트를 압박하여 내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 대응은 시작부터 틀렸는데 영상을 올린 ‘류은하’의 위상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anger231] : 바르무트에서 입장표명했네요. 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홍삼민트] : 지켜보긴 뭘 지켜봐. 올린 사람이 류은하인데 ㅋㅋㅋ

└[anger231] : 류은하가 공식협회보다 위에 있나요? 말씀 이상하게 하시네요.

└[홍삼민트] : 100대 장인들도 류은하 앞에서는 무구 평가 가지고 찍소리도 못하는데 협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협회가 조사해 봐야 공식 인증 박고 끝날걸?

[HG빔] : 전체 성능은 30% 높은데 가격은 20%나 싸다? 이거 사기 아님?

└[네온블루] : S급 영웅이 뭐가 아쉽다고 사기를 쳐.

└[HG빔] : 칠 수도 있지. S급 영웅은 사람 아니냐?

└[네온블루] : 사람이 다 너 같은 줄 아냐?

[dd] : 류은하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나만 그럼?

└[류은하짱팬] : 처음 맞아요. 제가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은 다 봤는데 웃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보고 진짜 심장 멈추는 줄…….

└[라이트레프트] : 세라핌 길들에서 만들어준 영웅 등급 무구도 정색하면서 먹는 사람이 웃을 정도면 저 양산형 무구들은 도대체 정체가 뭐냐?

젊은 나이에 S급 영웅이 되었으며 각종 위험지역 정화와 몬스터, 마인 토벌에 엄청난 공적을 세웠던 류은하.

거기에 무구를 먹는다는 점, 미식가로서 관련된 일화들이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었던 덕분에 바르무트의 대응이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것이다.

‘우리 선에서 수습할 수 있는 단계는 넘어섰다.’

리뷰 자체를 걸고넘어지기에는 가감 없이 사실만 언급했기에 역풍이 불 수 있었으며 법적 공방 역시 류은하보다 더한 괴물, 루트비히 학원장이 무마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지금 바르무트 가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수용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영상부터 내리고 정정 영상을…….”

“부학과장.”

거래를 제안하는 미하엘의 말을 단번에 끊은 류은하가 검토한 서류에 사인을 하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 이외에 할 이야기가 없다면 돌아가십시오. 업무에 방해됩니다.”

“…….”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리는 류은하. 그 모습에 미하엘은 분노보다도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거래가 아니라 정말로 공격이었단 건가……?’

류은하가 이런 협상을 노리고 움직일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구를 사는 것 이외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던 별종이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설마 세라핌 그놈들인가? 아니, 그런 것치고 만났을 때 류은하의 행동에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어…….’

오랫동안 류은하를 지원해 준 스폰서, 세라핌 길드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원인인가.

하늘에서 바윗덩어리가 뚝 떨어진 것 같은 상황에 미하엘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똑똑

“실례합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이죽거리는 목소리.

듣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치는 목소리에 미하엘이 고개를 돌려 문에 기대고 있는 청년,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다 끝난 것 같아서 들어왔는데…… 아직도 계시네요?”

왜 안 나가고 있냐는 듯 의아하게 쳐다보는 이세훈. 그 건방지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미하엘이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노려보았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오셨군요.”

뒤쪽에서 들리는 류은하의 목소리.

방금까지 자신에게 말하던 것과 무언가 다른 것을 느낀 미하엘이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을 무슨 말을 하든 눈길도 주지 않던 류은하가 부드러움이 담긴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설마…… 이 모든 게 저 녀석을 위해서라고?’

믿을 수 없지만 지금 류은하의 반응을 보면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류은하와 이세훈의 협력관계. 그 사실에 미하엘은 자연스럽게 그동안 품고 있었던 다른 의문을 떠올렸다.

‘이번에 출시된 신형 무구들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건가.’

자신들의 정보망에 의하면 해당 공방들에게 그만한 무구를 만들어낼 만한 능력은 절대 없다.

그렇기에 당연히 다른 세력의 개입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미하엘은 불현듯 새로운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럴 리가…….’

자신이 떠올리고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미하엘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문틈에 기대고 서 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뭐하세요? 빨리 안 나가시고.”

자신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다른 생도들과 달리 여유롭게 이야기하는 이세훈. 그 안에 담긴 여유와 비웃음을 느낀 미하엘은 그제야 확실할 수 있었다.

“……너였군.”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신형 무구를 만들어낸 것은 눈앞의 이세훈이다.

놀라움을 넘어 이제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재능에 미하엘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경고를 남긴 미하엘이 옆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고 고개만 뒤로 젖혀 그 뒷모습을 바라본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제대로 열 받았네.’

아마 주변에 사람만 없었어도 바로 죽이려고 들지 않았을까.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에 이세훈이 만족하고 있을 때.

스윽

어느새 뒤로 다가온 류은하가 미하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방금 흘러나온 살의를 보니 처리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평소와 같이 무덤덤하면서도 두 눈에 살의가 비치는 류은하.

처리해달라는 순간 미하엘을 증발시켜버릴 듯한 그 모습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준비해둔 게 있으니까 안 그러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탐탁지 않다는 듯 대답한 류은하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이세훈이 문을 닫으며 물었다.

“영상 올리고 나서 학원장님한테 연락 왔었습니까?”

“예. 기왕 할 거면 편집자나 고용하라고 하시더군요.”

“흐음. 그럼 반대는 아니네요.”

바르무트 가문이 압박을 넣는 것은 무시할 수 있지만 루트비히가 압박을 넣는 것은 상황 자체가 다르다.

학과장이라는 신분도 문제이며 완등자인 루트비히의 영향력이 류은하보다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그 양반 성격상 나설 리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주의는 해야지.’

회귀 전의 정보를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결코 맹신해서는 안 된다.

가장 큰 걸림돌이 해결된 것에 이세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우웅

책상 위에서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 그에 류은하가 화면을 슬쩍 쳐다보더니 전화를 곧장 거절해 버렸다.

그 단호한 반응에 이세훈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길래 바로 거절해요?”

“영상을 올리니 이것저것 제안하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S급 영웅쯤 되면 길드에 가입하거나 기업과 계약을 하는 등 어느 쪽으로든 길을 만들어두기 마련.

하지만 류은하는 그쪽으로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이 필요하다 생각한 계약만 했기에 자연스레 권유도 잘 받지 않는 편이었다.

‘그게 이번 영상 때문에 리셋된 건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류은하가 생각을 바꾼 것처럼 보일 테고, 그게 아니어도 파급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으니 끈질기게 제안할 터.

‘저거 엄청 귀찮은데…… 좀 미안하게 됐네.’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류은하의 휴대폰을 본 이세훈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많이 귀찮아지셨네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무시하다 보면 금방 사라지니까요.”

“아닙니다. 거래는 확실하게 해야죠.”

겉보기엔 무심해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지만 류은하만큼 맺고 끊는 것에 칼 같은 사람이 없다.

괜찮다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고 가만히 있다가는 언젠가 한 번 크게 낭패를 보리라.

“다음에 학과장님도 곤란하시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저도 도와드릴 테니까요.”

지금 수준으로 류은하가 곤란해할 만한 일을 도울 수 있을 리 없겠지만, 뭐든지 정성과 말이 중요한 법이다.

이세훈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에 류은하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두겠습니다.”

불만이 없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만족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 김인철 교수님이 다른 공방들도 합류해서 물류생산에 차질은 없겠다고 하더라고요. 남은 영상들도 순차적으로 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올린 영상은 어디까지나 맛보기.

지금부터 바르무트 가문이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는 양산형 무구 76종류가 자신이 준비해둔 양상현 무구와 철저하게 비교당하리라.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공방 쪽은 괜찮겠습니까? 경호 인원을 배치해도 지켜야 할 공방의 수가 많으면 대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류은하의 타당한 지적에 이세훈이 씩 웃었다.

“믿음직한 사람을 붙여뒀다고 했으니까요.”

* * *

어둠에 잠긴 도심.

가로등의 불도 꺼진 어두운 골목길의 그림자 안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측 담장. 38살 여자. 12살 남자. 9살 여자. 처리 후 주변 집에서 간단하게 작업해라.”

그림자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담장의 벽을 타고 올라갔고, 남은 그림자가 파문이 일어나더니 한참 떨어진 아파트의 계단 구석으로 이동했다.

“1802호. 68세 여자. 마찬가지로 처리 후 작업하도록.”

다시 그림자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계단을 올라갔고 남은 그림자는 다시 파문을 일으키며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도심 곳곳을 오가며 그림자를 흩뿌리는 존재. A급 마인 ‘잠영귀潛影鬼’는 자신이 받은 의뢰를 다시금 떠올렸다.

‘공방 대신 가족을 노린다라. 멀리 볼 줄 아는 녀석이군.’

경호인력을 배치한 공방을 습격해 봐야 실패할 확률도 높고 불필요한 의심만 사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의뢰주, 바르무트 가문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번 사태에 가담한 관계자들 중 몇몇을 골라 그 가족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이다.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지.’

오늘은 간단하게 암살로 처리했지만 앞으로는 시간을 들여서 사고사로 위장해 한두 명씩 천천히 죽여 나갈 것이다.

그러면 다른 이들은 그저 우연으로 넘기겠지만 당사자들은 그 경고를 알아차리고 두려워하며 모든 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으리라.

‘10년까지 갈 필요 없이 겁먹어서 모두 손을 떼면 좋겠군.’

마음 같아서는 타겟을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신도 추격받으며 환락가에서 신뢰가 사라질 테니 자중하는 편이 좋으리라.

귀찮음을 느끼며 잠영귀가 다시금 부하를 보내려던 그때.

푸욱

푸른색 화살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컥……!”

꿰뚫린 그림자가 크게 요동치는가 싶더니 안쪽에서 한 사내의 몸이 출렁이며 튀어나왔다.

심장에 화살이 꽂힌 채 즉사한 부하. 저주의 효과로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그 모습에 잠영귀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최소 S급. 도망친다!’

도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게 저격할 정도라면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결정을 내린 잠영귀는 즉각 자신의 스킬 ‘그림자 공물’을 발동했다.

푸화아악!

그림자 안에 있던 열 명의 부하가 검은 피로 변해 사방에 흩뿌려지며 마법진을 만들어냈고, 다시 스무 명의 부하가 연료로 사용되어 단숨에 스킬을 발동시킨다.

후웅!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뀐 풍경.

수십 킬로미터 밖의 숲으로 이동한 잠영귀는 안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스킬을 사용했다.

‘어떤 능력이 있을지 모르니 확실하게 도망쳐야 한다.’

부하를 다시 모으기가 쉽지 않겠지만, S급 영웅을 상대로 그렇게 재다가 한순간에 목이 날아가 버린다.

잠영귀가 다시 그림자 공물을 발동하자 연결되어 있는 부하들이 검은 핏물로 변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우우웅!

영혼은폐와 마기중화. 자연동화를 비롯한 강력한 은신마법이 중첩됐고, 이번에는 단숨에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지르며 그림자 사이를 오갔다.

부하의 목숨을 제물로 사용해서 펼친 기술. 과거에도 이렇게 S급 영웅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정말 이걸로 충분한 건가?’

화살이 꽂히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정밀한 저격.

심장이 꿰뚫린 순간 느꼈던 섬뜩함을 떠올린 잠영귀는 마지막까지 아끼려 했던 스크롤을 그림자 속에서 찢었다.

스스스─

스크롤에서 솟구친 보랏빛 마기가 전신을 뒤덮었고 온몸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흐물흐물 녹아내리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몸이 사방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던 순간.

쿠웅!

잠영귀의 몸이 보랏빛 마기에서 벗어나 폐건물에 떨어졌다.

“하아…… 하아…….”

그림자에 숨을 여력도 없어진 잠영귀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거렸고 그 소리를 들은 다른 마인들이 모여들었다.

“뭐야. 그림자 새끼잖아?”

“상태가 개판이네. S급 영웅한테 처맞고 왔냐?”

잠영귀의 모습을 보며 비아냥거리는 마인들. 똑같이 암살업에 종사하는 이들로 악명이 자자한 자들이었는데 이곳 ‘몽환의 쉼터’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이거면…… 됐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환락가의 주인, 십악 중 한 명인 몽환마가 직접 만든 은거지다.

어떤 S급 영웅인지 몰라도 절대 자신을 뒤쫓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 잠영귀는 긴장을 풀며 대답했다.

“저격당해서 바로 도망쳤어. 부하까지 다 써먹고…… 본전도 못 건지겠네. 젠장.”

“저격? 어떤 놈이 널 저격해?”

잠영귀의 이야기에 다른 마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모인 마인들 중에서 은신에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잠영귀였기 때문이다.

“몰라. 화살에 맞았는데 바로 도망쳐서 얼굴도 못 봤어.”

“……화살?”

무언가 불길한 울림에 마인들의 표정이 굳어가던 순간.

퍼엉

한 마인의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폭발했다.

“…….”

“…….”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본래라면 다음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즉각 움직였겠지만, 자리에 모인 마인들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마인을 꿰뚫은 무기를 바라보았다.

스스스

바닥에 단단히 꽂혀 있는 푸른색 화살.

겉보기엔 특수한 강철로 만든 것처럼 보였지만, 그 끝이 조금씩 바스라지면서 마력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궁수. 보이지 않는 저격. 몽환의 쉼터를 꿰뚫어 보는 눈. 마력으로 이뤄진 화살.’

모든 상황이 마인들의 머릿속에 조립되고 이내 한 존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서 홀로 오염된 아프리카 대륙의 몬스터를 사냥하며, 심심풀이로 자신의 눈에 ‘보인’ 마인들을 모조리 쏴 죽인다는 괴물.

“원견사…….”

하백연에게 자신들이 보여졌다는 것을 깨달은 마인들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이런 씨…….”

두두두두!

쏟아지는 화살비가 몽환의 쉼터에 존재하던 모든 마인들의 머리와 심장을 꿰뚫어 숨통을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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