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88화
“이제 진짜 다 끝난 거지?”
“그럴걸. 다른 곳에도 연천우가 떨어졌으니까 인질로 잡혔던 애들도 다 구출됐을 거야.”
카사르가 직접 움직인 순간 사실 모든 전투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제이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이걸로 모두 끝났다.
그 사실에 제이크는 긴장이 풀리면서도 문득 자신이 베어낸 거목을 향해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전투를 곱씹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또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으나, 만약 두 번째 공격도 실패했다면 정말로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몸까지 던져가며 공격을 막아냈던 것일까. 제이크의 물음에 이세훈이 고민에 잠겼다.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라고 말하는 건 그렇지.’
비장의 한 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살짝 방향을 틀어서 대답했다.
“솔직히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럼 왜 그런 위험한 짓을…….”
“뭐, 그냥 사명감이야.”
“……사명감?”
“그래. 대장장이로서의 사명감.”
수면 아래로 손을 집어넣은 이세훈이 축 늘어져 있던 제이크의 오른손을 손바닥으로 받치며 위로 들어올렸다.
햇빛을 받으며 푸르게 빛나는 휘광검. 전력을 담아 휘둘렀음에도 부서지지 않은 그 모습에 제이크가 멍하니 보았고.
“자기 물건도 못 믿는 대장장이를 누가 믿어주겠냐? 그럴 바에 그냥 죽고 말지.”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팔을 옆으로 밀어 휘광검을 쥔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그렇구나.”
가슴 위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휘광검의 무게.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그 감각에 제이크는 뒤늦게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달았다.
“나는 너를…… 휘광검을 못 믿었어.”
휘광검의 검신을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제 부서질지 모른다고 무의식중에 위축되어 그 힘을 억제하며 어중간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네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나를 믿는 걸 보고 나서야…… 휘광검이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 거야.”
설마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허튼 생각을 하겠냐고.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내를 알게 된 제이크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 진짜 개새끼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불신이 쌓였다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리고 나서야 그것을 믿을 수 있게 되다니.
그 속물적이다 못해 역겹게까지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에 제이크가 자괴감을 느낄 때.
“그거야 뭐 당연한 거 아닌가?”
이세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막말로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믿냐? 제대로 된 증거가 없으면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물론 내가 만들어준 물건을 의심스럽다고 하면 망치로 머리를 때려주고 싶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대장장이에게는 대장장이의 입장이, 고객에게는 고객의 입장이 있는 법.
“너는 물건을 구매한 사람으로서 의심하고, 확인할 자격이 있어. 그게 네 입장이고 권리지.”
“권리…….”
이세훈의 이야기에 제이크는 과거에 만났던 장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소년은 아무래도 검에 적성이 없는 것 같군요.’
‘차라리 악력을 살려서 무투술로 전향하는 게 어떻소?’
‘저딴 능력을 가진 녀석에게 맞는 검을 만들어오라니! 날 속이려고…….’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졌기에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만 찾던 장인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증스럽다고 느꼈던 그 모습들을 떠올리며 제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도 의심해도 돼?”
“해야지. 안 그러면 싸우다가 부서져서 목이 날아갈 텐데.”
“더 좋게 만들어줄 수 없었냐고 불평해도 되고?”
“다른 곳에서 살 수 있으면 뭘 못하겠어.”
“푸흐흐. 그러네.”
능청스러운 이세훈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린 제이크가 가슴에 놓인 휘광검을 꽉 움켜쥐었다.
“야 이세훈.”
“왜.”
“방금 휘둘러 보니까 이거 하나는 알겠더라.”
그리고 자신의 믿음직한 대장장이에게 후련한 목소리로 평을 남겼다.
“네 검이 최고다.”
[대상 ‘제이크 마이어스’의 인연레벨이 Lv.2로 상승합니다.]
[인연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관계가 정립됩니다. 대상 ‘제이크 마이어스’와의 관계는 ‘신뢰’입니다.]
[관계 : 신뢰信賴]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타인을 믿으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언제나 믿음에 보답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안겨줄 수 있다면 이 관계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대상의 신뢰에 보답할 때 인연석이 생성됩니다.
*대상에게 신뢰를 받고 있을 때 인연석의 숙성속도가 증가합니다.
*현재 생성된 인연석 : 없음.
‘이놈 이거…….’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바라본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놈은 더 좋은 걸 만들어오라고 배부른 소리나 하는데 이렇게 감사한 줄 알다니.
오랜만에 예의범절이 바른 우수한 고객을 만난 것 같아 이세훈이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감사히 사…… 뭐야. 자냐?”
“…….”
말없이 눈을 감은 채 호수에 떠 있는 제이크. 얼굴이 창백한 게 죽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심장은 멀쩡히 잘 뛰고 있었다.
‘혈술을 무리해서 사용했나 보네.’
어느 정도 쉬면 해결되는 문제였기에 이세훈은 제이크가 떠밀려가지 않도록 흑령사로 고정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다가오기 시작한 인기척을 느끼며 신목의 잔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퍼펫 이 새끼들 다 도망쳤겠는데.’
본래 인간이나 마인이었으나 인형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개조당한 ‘퍼펫’.
십악의 수하들 중에서도 상당히 짜증 나는 녀석들인데, 주인이 주인인 만큼 본체의 핵을 부수지 않으면 육체를 계속해서 갈아탈 수 있는 녀석들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안 나타나고 신목을 이용한 걸 보면 보나 마나 몬스터로 만든 임시 육체를 사용했겠지.’
지금쯤이면 검은연꽃 수해 바깥쪽에 숨겨둔 본체로 돌아가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을 터.
‘여유만 있었어도 은신처까지 찾아서 다 죽였을 텐데…….’
지금도 하려면 할 수는 있었지만, 이세훈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그냥 넘기기로 했다.
전부 찾아내서 죽인다면 인형사에게 넘어가는 정보량이 줄어들어서 좋기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놓친다면 자신이 퍼펫을 역추격할 수 있다는 정보만 주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는 개나 소나 다 썼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인형사는 위험한 인물이지만 자신이 ‘흥미’를 가진 만큼만 대응한다. 이번에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주지는 않았으니 여기서는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이세훈이 생각하던 찰나.
까악─
신목의 잔해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울음소리. 거기에 이세훈이 다시금 시선을 돌렸고.
후웅!
까마귀 한 마리가 숲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
검은연꽃 수해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야산.
야생동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숲속에서 땅이 희미하게 흔들리더니 아래쪽에서 손이 솟구쳐 올랐다.
파스스슥
흙을 파헤치며 걸어가는 세 인영. 그중 가장 먼저 빠져나온 창백한 인상의 서양인 사내, 윌리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저딴 놈들이 신입생이라니…… 바벨도 미쳐 돌아가는군.”
연군검이 오기 전까지 버티기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설마 정면에서 자신을 쓰러뜨릴 줄이야.
몸이 반으로 갈라지던 통증을 떠올린 윌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이어스 그놈의 검기의 위력도 터무니없었지만…… 제일 말도 안 되는 건 이세훈 그 녀석이다.’
수해 전역에 뿌리를 내린 신목의 재생력은 최소 B+급. 검기에 베였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버틸 여력이 있었다.
하지만 검기가 이세훈이 새겨둔 궤적을 지나가는 순간. 손 쓸 틈도 없이 마력회로가 뒤엉키며 재생력이 사라진 것이다.
‘몸을 조종하고 있는 나조차도 신목의 마력회로를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냥 뛰어나다고 말할 단계를 넘어선, 비정상적인 재능.
어째서 자신의 주인이 이세훈을 재료로 눈여겨봤는지 깨달은 윌리는 부하들을 살펴보았다.
“나머지는?”
“반응이 없어서 정리했습니다.”
퍼펫은 모든 감각기관을 절제해 통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딱 한순간, 육체를 강제로 파괴당하고 정신이 본체로 돌아갈 때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그 고통을 버틴다면 본체로 돌아오거나 육체를 갈아 끼워 살아남을 수 있고, 아니라면 백치가 되어 아무런 반응도 못 하는 가사상태가 되는 것이다.
“일곱 명이라…… 뭐 싸게 먹힌 건가.”
S급 영웅이 지키고 있던 장소를 임시 육체로 들쑤셨는데 전멸하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이득이었다.
‘어쨌든 보고할 만한 정보는 얻었으니.’
이세훈은 의뢰와 별개로도 충분히 노려볼 만한 재료다. 그 정보를 되새긴 윌리가 둘만 남은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수색 들어오기 전에 빨리 빠지자고.”
“예!”
인적도 없는 곳이었기에 남은 셋은 곧장 바닥을 박차며 숲을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연꽃 수해만큼 아니어도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 구름이 낀 탓인지 햇빛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 어두컴컴한 시야에 윌리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했나.’
임시 육체면 몰라도 B급 수준인 이 육체가 이런 어둠도 못 꿰뚫어 볼 정도도 아닐 텐데.
그렇게 윌리가 꺼림칙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던 그때.
까악─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그에 자연스레 윌리의 시선이 소리를 뒤쫓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시야가 어두워져서 그런지 까마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 모습에 윌리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재수 없게 까마귀가 왜 이런 곳에…….’
거슬리긴 하지만 마력도 안 느껴지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살피던 윌리가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돌렸고.
저벅.
저 멀리, 유일하게 햇볕이 내리쬐는 나무 앞으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은은하게 보랏빛이 감도는 두 눈. 갑옷도 없이 생도복 위에 망토 하나만 걸쳐 입은 그 무방비한 모습에 윌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노우에……?’
수해에 있어야 할 녀석이 어째서 자신들의 앞에 있는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윌리가 놀라고 있을 때. 문득 그 시선이 소녀, 에리카의 오른손에 들린 새장으로 향했다.
“까악.”
은빛 새장 안에서 꼿꼿이 서 있는 까마귀.
그리고 그 입가에 임시 육체에 사용했던 꼭두각시의 파편이 물려 있는 것을 본 윌리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부서진 단말로 우리를 역추격 했다고……?’
S급 영웅들도 쉽사리 해내지 못하는 일을 올해 막 입학했다는 신입생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윌리는 당황하면서도 재빠르게 뒤따라오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다른 놈들도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잡아!”
“예!”
여기까지 혼자서 왔을 리가 없다. 그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한 윌리와 부하들이 재빠르게 달려들었고.
스륵
에리카의 손에 쥐어진 새장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까아─”
우드득
날개를 펼치며 울던 까마귀의 목이 180도로 꺾이고, 힘없이 새장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투둑
축 늘어진 부리와 너덜거리는 목에서 흐르는 검은 피.
처음에는 방울방울 떨어지던 피는 점차 양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내 새장의 문이 열리며 끝없이 아래로 쏟아져 내려 주변의 땅을 뒤덮어갔다.
꿀렁꿀렁
피도, 물도 아닌 불길함과 불결함이 느껴지는 액체.
그 검은 늪이 에리카를 중심으로 끝없이 퍼져 이내 그 표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까아악──까악─
질척이는 늪 아래에서 기어 나와 끈적거리는 몸을 퍼덕이며 하늘로 솟구치는 까마귀들.
그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광경에 윌리는 에리카를 생포한다는 목적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고.
오혼탈백烏魂奪魄
하늘 높이 솟구쳤던 검은 까마귀들이 세 인형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각!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까마귀들의 돌진에 윌리와 부하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그 공세를 막아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까마귀들은 늪 안으로 스며들어 다시금 태어날 뿐. 거기에 바로 아래까지 퍼진 늪에서까지 까마귀들이 솟구치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우드득─콰득!
“아, 안 돼……!”
“몸 안쪽으로…… 컥……!”
안쪽으로 파고든 까마귀들이 육체를 파먹으며 자신과 ‘동화’시켰고, 몸이 점점 늪의 아래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까아악! 까악!
“하…… 하하…….”
자신의 몸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에 윌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학과수석이니 뭐니 해봐야 결국 신입생. 영웅의 탑도 들어가지 못한 보잘것없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상대한 둘, 그리고 눈앞의 에리카까지 본 윌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고.
“괴물같은…….”
그 몸이 늪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
세 인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본 에리카는 무심하게 앞으로 내밀었던 새장을 아래로 내렸다.
슈르륵
사방으로 흩어졌던 늪이 새장의 안쪽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고,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숲이 본래의 풍경으로 돌아갔다.
“……벌써 알려지는 건 곤란해.”
십악이든 무엇이든 이세훈의 잠재력을 모두 확인하기 전까지는 넘겨줄 수 없다.
목격자를 처리한 에리카가 몸을 돌려 숲의 그늘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