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31화
“쿨럭!”
막혔던 숨이 단숨에 터져 나오고 이어서 붉게 물든 천장이 보였다.
매캐한 연기와 부서진 천장과 벽. 그리고 쉴 새 없이 점멸하며 울리는 경고등.
화르륵!
연구실 곳곳에 피어난 불꽃이 거세게 몸집을 불려나갔고, 화상을 입은 몸과 찢어진 내장에서 끔직한 격통이 밀려왔다.
“크윽…….”
불꽃의 열기와 함께 쉴 새 없이 숨을 조여오는 통증. 그 속에서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수십 명의 연구원이 서 있던 자국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증발했고, 그 중심에는 이 모든 사건을 만들어낸 원흉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우웅─!
사방으로 불꽃을 내뿜으며 끝없이 타오르는 도신.
저대로 놔둔다면 모든 불꽃을 분출하고 부서지겠지만, 놈들이 그것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후우…… 후우…….”
이를 악물고 미리 준비해뒀던 건틀렛을 착용한 다음 중심부로 걸어가 도신의 자루를 움켜잡는다.
치이익!!
자루에 닿기 무섭게 건틀렛을 녹이는 무시무시한 열기.
손에 직접 닿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 식은땀이 흘러나왔지만, 본대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사소한 것에 위축될 시간은 없다.
그리 생각하며 무거워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던 그때.
──자
끊어지듯이 들리는 소리.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고개가 천천히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돌아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잔해에 깔려 있는 검은 숯덩어리. 그 낯설면서도 익숙한 형태에 홀린 듯이 시선이 고정되었고.
배신자
사랑했던 연인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울려 퍼졌다.
* * *
“…….”
침대에서 눈을 뜬 김인철은 곧장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나와 같이 변함없는 침실. 방금까지 본 풍경이 모두 꿈이었음을 깨달으며 안도감과 함께 불길함이 느껴졌다.
‘느낌이 좋지 않군…….’
최근 부서진 불꽃의 연구에 진척이 보여서일까, 아니면 뭔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일까.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은 상황에 김인철이 눈매를 찌푸리다가 생각을 털어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지각인가.”
악몽 때문에 알람을 못 들었는지 원래 기상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난 상황.
자신답지 않은 실수에 김인철이 눈매를 찌푸리며 곧장 욕실로 향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차고를 향한 김인철은 붉은색의 거대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구구궁─
시동과 함께 울려 퍼지는 묵직한 엔진음.
온몸이 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남은 잠을 털어낸 김인철은 곧장 도로를 내달리면서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다른 건 평소와 같고…….전시회의 작품 확인만 남았군.’
제련학부에서 이번 전시회에 출품하는 작품은 총 4개.
그중 3개는 졸업생들이 이전부터 준비할 물건들이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문제는 남은 하나, 이세훈이 만든 작품이었다.
‘그쪽은 너무 잘 만들었을까봐 걱정이야.’
무슨 일이든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낫기야 하지만 그것도 적정선이 있는 법.
생도, 그것도 갓 입학한 1학년의 위치에서 너무 동떨어진 결과물을 만들어 버리면 자연스럽게 여러 사건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김인철이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그들, 『공양』이 이세훈에게 손을 뻗는 것이었다.
‘제이크 마이어스의 검을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눈독들일 만해.’
이름 있는 장인들도 만드는 데 실패했던 무구를 가볍게 만들어내고, 기존에 없던 언령마법이라는 특수한 기술에 맞춘 무구 역시 손쉽게 만들어낸다.
거기에 영웅 등급의 무구를 연달아 만들어내며 그 실력을 증명하고 있으니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장인을 찾고 있는 『공양』이라면 반드시 눈여겨보고 있으리라.
‘이때쯤 평범한 걸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이세훈에게는 조금 너무한 말일 수도 있지만 아예 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면 『공양』 쪽도 생각을 달리할 수 있으니.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리 그래도 작품을 망치길 비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기적인 자신의 생각에 김인철이 자책하며 본관에 도착했고.
“거, 검기다! 진짜 양산형 검기야!!”
“대혁명이다!!! 특이점이 왔다!!”
회의실에서 괴성을 내지르며 흥분한 교수들이 그를 반겼다.
최초로 불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교수들.
다른 때 같으면 작작하라고 뭐라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김인철도 그럴 수 없었다.
“검기 양산화라니…….”
날렵한 형태의 장검에서 흔들림 없이 맺힌 황금빛 검기.
내부 구조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인철은 이것이 완벽하게 ‘이론화’시킨 검기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력회로가 영웅에게 침식당해서 생겨나는 기묘한 느낌. 그것이 이세훈의 장검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렀군.’
그동안 검기 양산화가 실패했던 것은 ‘심상’으로 빚어지는 검기를 이론으로 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번에 이세훈이 가능하다고 증명해 보였으니 앞으로 검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들이 양산되거나 제품으로 만들어지게 되리라.
전시회의 테마답게 정말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이세훈의 작품에 김인철은 감탄하는 한편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정말 이런 걸 공개해도 되는 걸까…….’
이세훈의 실력이 뛰어난 거야 이미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뛰어나다.
이 정도라면 그릇을 만들 수 있는 후보가 아니라 아예 적임자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움직일지도 모르리라.
‘놈들의 사고방식이라면 가능한 설득을 하려고 하겠지만…… 재능이 재능인 만큼 납치를 시도할 수도 있겠군.’
그들에 대해서 모른다면 모를까 아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괜히 나섰다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정체가 『공양』에 발각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선택지에 김인철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근데 이 검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검기를 보며 눈매를 찌푸리는 교수. 그 이야기에 다른 교수들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특히 황금빛 검기는 보기 드문데.”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면…… 잠깐.”
교수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명문가.
처음에는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이세훈과 같은 학과수석이자 가깝게 지내는 1학년, 제이크 마이어스가 떠올랐다.
“설마…….”
“진짜 마이어스의……?”
검술의 명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이어스 가문의 검기.
그것을 이론화시켰다는 사실에 교수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가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저도 잘은…….”
검기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전이나 다름없는 기술이다. 그런데 그걸 외부인에게 양산이 가능할 정도로 분석 당했다?
마이어스 가문이 허락한 일이라면 그냥 대단하다고 넘길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도저히 예상이 가지 않는다.
“…….”
“…….”
방 안에 감도는 기묘한 긴장감. 거기에 김인철이 재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말해야겠군.’
이 정도면 납치를 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무조건 납치하려고 할 것이다.
“잠시 나갔다 오겠네.”
김인철이 황급히 학원장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보르시파의 전시장 역시 박람회 준비의 막바지로 매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쪽 출력이 조금 약하군. 33%정도 늘린 다음에 딜레이를 0.2초로 조정해라.”
“알겠습니다.”
설비를 점검하던 조교가 재빠르게 대답하며 수정했고, 그 사이 란 페이의 시선이 다시금 다른 곳으로 향했다.
“거기 술식결합이 엉성하다. 처음부터 다시 조여.”
“예!”
“그쪽 부스는 술식고정 똑바로 해두고.”
“넵!”
며칠 동안 조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고치면 두 군데에서 어설픈 곳이 나온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그 광경에 란 페이가 눈매를 찌푸렸다.
‘죄다 엉성하군.’
모르는 거야 그렇다 쳐도 제대로 설명하고 본인도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걸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재능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기에 란 페이는 화를 내는 대신 조목조목 지적했고,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인가?”
“맞는 거 같은데…….”
외곽의 방호설비 앞에서 술식을 조정하고 있는 이세훈과 루이제. 이전에 배운 대로 설비를 조정하는 그 모습에 란 페이가 잠시 살펴보았다.
우우웅!
비상시에 발동되는 방호용 장벽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주변을 둘렀고, 그 모습에 두 사람이 씩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았어.”
“옆으로 가자.”
이런 일을 몇 년간 해온 것처럼 간단하게 설비를 조정하는 두 사람. 그 빠르고 정확한 솜씨에 란 페이가 내심 감탄했다.
‘알려준 건 하나인데…… 그 이상을 하는군.’
마공학도 결국 마법처럼 마력과 술식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장치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차이가 은근히 크다.
그렇기에 마법 좀 쓸 줄 안다고 넘어왔다가 피보는게 마공학이라는 분야였는데 저 둘은 가르치는 족족 흡수하면서 완벽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재능 자체가 남달라.’
루이제는 기존에 없던 언령마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세훈은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두루 재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잠재력이 상당했다.
천재들만 모인다는 바벨에서 손꼽힐 재능. 그 모습에 란 페이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저 둘을 저렇게 놔두는 게 맞을까.’
다른 이들은 바벨, 승천제의 정원을 훌륭한 교육장소로만 생각하지만 란 페이는 조금 꺼림칙하게 여겼다.
수많은 기업과 연구소를 후원하여 다양한 실험을 하듯 생도들의 교육 역시 실험의 연장선처럼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실험적인 태도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은 이르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움직여봐야 기회를 놓칠 뿐. 지금은 마공학 교수로서 활동하며 조금씩이나마 증거를 모으는 것이 최선이리라.
자신의 임무를 상기한 란 페이가 다시금 시선을 옮겼고.
“……음?”
이세훈과 루이제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란 페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출품작이라도 훔쳐보러 간 모양이군.’
처음부터 그런 거래이기도 했고, 상아탑 사건 때문에 보안에 심혀을 기울인 만큼 이상한 짓은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일을 벌일 이유도 없고.’
맡은 구역은 다 정리하고 갔기에 란 페이가 자신의 일에 집중했고, 그 사이 박람회장의 뒤쪽 통로로 나온 이세훈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럼 확인도 얼추 끝났으니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
“근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해?”
그동안 차근차근 살펴본 결과 박람회장의 시설은 내부의 출품작들이 동시에 폭발해도 가볍게 막아낼 만큼 철통같은 설비와 보안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런 시설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또 자신들은 무슨 간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담긴 루이제의 물음에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전체적으로 뜯어고치기야 어렵지. 이럴 때는 흐름에 편승하는 거야.”
“흐름?”
“그래. 전시장에 적용되는 여러 효과를 교묘히 피해가거나, 관리자처럼 사용하는 거지.”
제 멋대로 뜯어고쳐서 쓰기는 어렵지만 허용된 권한 내에서 제멋대로 주무르는 것은 조금만 신경 쓰면 가능하다.
특히 언령마법의 경우 완전히 상극과도 같았기에 내부를 조사할 수만 있다면 식은 죽 먹기였다.
“일단 이쪽부터 하자. 〈술식연동〉, 〈환경동화〉…….”
이세훈은 회장의 외곽쪽을 위주로 언령각인을 새겨 넣었고, 대부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설이나 장치였다.
그 덕분에 검사 중에 들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진짜 이거 맞아?”
아무리 봐도 어떻게 써먹는 건지 이해가 안 갔기에 루이제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씩 웃었다.
“걱정 마라니까. 이게 확실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귀 전에 테러리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던 폭견이 건물을 장악하거나 터뜨릴 때 사용한 방법이니 의심할 필요가 없다.
자신만만한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가 아리송하면서도 묘하게 믿음직스러웠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준비는 이걸로 끝?”
“일단은 그렇지.”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저쪽의 수를 얼마나 파악했는지. 그리고 숨겨둔 패까지 얼마나 알차게 털어먹느냐는 것이다.
‘다시는 넘보지 못하도록…… 제대로 먹여줘야지.’
바벨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기로 한 만큼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주말을 생각하며 이세훈이 두 눈을 번뜩였다.
“제대로 한 방 먹여보자고.”
* * *
아스쿠스 병동 뒤쪽에 있는 작은 공원.
환자복에 가디건을 걸치고 나온 레아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두 눈을 찌푸렸다.
“수정…… 수정이야 할 수 있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세훈에게 완성된 양산형 검기무구에 대해서 전달받았을 때. 레아는 약간 수정된 인챈트를 보면서 밤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그대로 쓸 것처럼 말해놓고 자신의 인챈트를 고친 것에 대한 섭섭함.
그리고 두 번째는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완성도에 대한 경악스러움이었다.
‘그 인챈트가 살짝 건드린다고 뿅하고 수정될 만한 물건이 아닌데…….’
여러 술식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만큼 아주 조금만 비틀려도 효과가 일그러지기 마련.
그런데 이세훈은 그것을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수정해서 좀 더 세련된 검기를 만들어내게끔 바꾼 것이다.
‘뼈대는 그대로이긴 한데…… 거기서 그런 응용법이 있을 줄은…… 끄으응…….’
지금 그나마 후배보다 잘하는 게 인챈트인데 만약에 자신이 만족시키기 전에 아예 실력을 따라잡힌다면?
상상만 해도 끔직한 상황에 레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되겠어. 빨리 퇴원해서 연구든 뭐든 해야…….’
솔직히 오늘까지 얌전히 쉬었으면 충분한 것 아닌가. 레아가 결정을 내리며 빠르게 걷던 그때.
“……음?”
공원의 작은 연못 앞에 놓인 벤치.
입원하고 매일같이 지정석처럼 앉던 자리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낡은 분홍색 머리끈으로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카락. 뒷모습을 보니 남자로 보였는데 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잘 맞았다.
그 기묘한 모습에 레아가 빤히 보고 있을 때.
“음?”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피로감이 짙게 서린 얼굴. 그 때문인지 몰라도 상당히 그늘진 느낌이었는데 살짝 웃는 상이라 처연한 느낌을 주었다.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중년인. 그 모습에 레아가 머쓱하게 바라보자 사내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매번 여기에 앉아 있던 아이구나. 앉아 있어서 미안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내. 그와 동시에 오른쪽 소매가 나풀거렸는데 오른팔이 완전히 잘려나간 것처럼 보였다.
‘아. 저 사람이 전투 중에 오른팔이 잘렸다던 영웅인가…….’
간호사들이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린 레아가 자리를 비켜주는 사내에게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제 자리도 아닌데…….”
“괜찮아. 안 그래도 딸이랑 만날 시간이라서 일어나려고 했거든.”
부드럽게 웃어 보인 사내가 고개를 꾸벅이며 공원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그 뒷모습에 레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딸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만나러 간다고 해놓고 저렇게 처연한 표정을 짓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기묘한 사내의 모습에 레아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사내가 자신의 텅 빈 팔소매를 움켜잡았다.
‘조금만 더…….’
이제 곧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에 사내, 염도사냥꾼이 차가운 눈으로 병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