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41화
“으윽…….”
명치 쪽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혈류에 가시가 뒤섞여 온몸의 혈관을 쑤시는 듯한 그 불쾌한 감각에 눈매가 절로 일그러졌다.
‘조금 아플 거라더니…… 저 양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도중에 몇 번을 기절했는지 정신이 몽롱해져서 제대로 기억도 안 난다.
반사적으로 새어 나올 것 같은 욕지거리를 집어삼키며 명치를 쓰다듬고 있을 때.
“엄살이 심하구나.”
옆쪽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이 꺼진 어두운 사무실. 창문의 달빛 덕분에 탁자나 장식장 같은 것들은 어렴풋이 보였지만 목소리의 주인, 사부가 앉은 책상 쪽은 먹물이 칠해진 듯 윤곽만 살짝 보였다.
“혼원무구를 꺼낸 것도 아니고 마혈기를 조금 운용한 걸로 그렇게 기절을 해대다니. 쯧쯧…….”
의자에 등을 쭉 기대고 책상에 두 발을 턱 하니 올린 채 두 발을 까딱거리며 이야기하는 사부.
아픈 제자를 걱정하기는커녕 혀 차기 바쁜 그 모습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았다.
‘저러니 주변에 사람이 없지.’
실력이 좋아 봐야 뭐하는가. 성격이 저 모양이라 인정받기는커녕 습격이나 받고 사는데.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늘 말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때려치우고 나가도 된다. 대신 내가 가르쳐준 건 고스란히 두고 가고.”
태연한 사부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장기를 다 떼놓고 가란 말을 참 부드럽게 하십니다.”
다른 곳은 손이나 팔 한 짝으로 끝나겠지만 이쪽은 영연신마법으로 전신을 개조했기에 배운 것을 두고 가려면 살가죽 빼고 모조리 넘겨줘야 했다.
참고 배우거나 아니면 죽어라.
불합리한 선택지에 불만을 드러내자 사부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불만이면 나가거라. 대신…….”
“예예. 그때는 장기 다 떼놓고 나가겠습니다.”
계속 말해봐야 이쪽만 손해였기에 대충 대답한 다음 명치 쪽을 다시 살펴보았다.
처음보다 아물기는 했지만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흉터. 그것을 쓰다듬자 살짝 복잡한 감상이 밀려왔다.
‘여기에 검이 쑤시고 들어왔단 말이지.’
살짝 파고든 것도 아니고 심장을 관통해서 등 너머까지 뚫고 나왔다. 죽기 직전에나 느껴볼 법한 섬뜩한 감각.
그것을 다시금 곱씹어보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부.”
“뭐냐.”
“왜 하필 영혼입니까?”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시선. 그것이 계속 말하라는 뜻임을 알아차리고 설명을 이었다.
“피를 매개체로 영혼의 기억을 끌어와 무구를 재현해낸다. 이 효과 자체는 좋기는 하지만 굳이 영혼을 고집하는 게 비효율적이지 않나 싶어서요.”
“어떻게 비효율적이란 말이냐?”
“그냥…… 영혼이라는 거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마력이 생겨나고 사령술이 발달되면서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현실에 나타나자 영혼의 존재 역시 자연스럽게 인정되었다.
하지만 영혼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정의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어떤 놈은 마력이랑 심상이 결합된 거라 하고. 또 어떤 놈은 마력이랑 상관없는 제3의 힘이라 하고…… 정의가 제대로 안 되니 단련법도 중구난방이고.”
존재는 밝혀졌으나 불명확한 힘. 그것이 바로 지금 시대의 영혼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구나. 영혼보다 마력을 사용하는 기술로 만들어냈다면 지금보다 더 편하고 강력한 기술이 됐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하지만 그것들은 더럽혀지기 쉽다.”
짧게 단언한 사부가 그 모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네게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 기술을 배울 수도 있고, 마력을 건네받을 일도 있겠지. 어쩌면 불의의 사고로 신체를 이식받을지도 모른다.”
화륵
사부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언제부터 물고 있었는지 모를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그 잔재가 몸에 남게 되지.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어둠 속의 시선이 이쪽을 꿰뚫어 보듯 쏘아졌다.
“그 육체는 순수하게 너 자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부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니네요.”
다른 사람의 기술, 마력, 육체. 그것이 몸에 남는다면 아무리 스스로 소환한다고 해도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힘들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담뱃불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육체라는 것은 그렇게 타인에게 물들기 쉽지.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로 물들여질 수도 있고.”
“으음…….”
“물론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지. 오히려 권장하는 이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마혈기는 아니야.”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한 차례 반짝이며 회색빛 연기를 뿜어낸다.
“재료와 도면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물건이 만들어질지 알 수 없지. 즉 재수 없으면 무기를 만들려다가 몸이 풍선처럼 펑하고 터질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기에 더럽혀지기 쉬운 육체 대신 영혼을 단련하여 재료이자 도면으로 삼는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면 영혼은 안전한 겁니까?”
“음? 그럴 리가.”
피식 웃은 사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육체에 비해서 유지하기 쉽다는 거지.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든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혼의 순수함을 유지한다. 앞으로 자신이 지켜야 할 숙명에 고민하고 있을 때.
“그러니 너도 명심하거라.”
사부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누구든 네 안에 들여보내선 안 돼.”
언제나와 같이 나른하고, 차가우며, 멀게 느껴지는 시선. 앞선 설명을 통해 그제야 그 시선을 이해했다.
‘삭막하구만…….’
비전을 전수받은 지금도, 자신과 사부는 완전한 타인이라는 것을.
* * *
“…….”
잘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벌린 이세훈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종종 본 적 있는 병실의 천장과 침대의 감촉.
자신이 있는 곳이 아스쿠스 병동임을 확인한 이세훈이 속으로 안도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나 보구만.’
누군지는 몰라도 제때 도착해서 암살자들을 처리해 준 모양이다. 목숨을 건진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이어서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음…… 개판이네.’
근육이나 뼈는 몇 군데 찢어지거나 금이 간 게 전부였지만 심장을 비롯하여 내장과 혈관, 그리고 마력회의 상태가 상상을 초월했다.
다 찢어진 누더기를 봉합해둔 것 같은 너덜너덜한 상태. 온몸에서 느껴지는 봉합 자국에 이세훈이 혀를 내둘렀다.
‘대충 수백 바늘은 되겠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련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이다. 회귀하고 처음으로 겪은 깊은 상처에 이세훈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마혈기를 무리해서 사용했으니 어느 정도 반동은 각오했지만…… 이건 좀 너무 심한데.’
자신이 예상한 것이 자전거에 부딪히는 정도였다면 지금 몸 상태는 덤프트럭에 정통으로 치인 수준.
예상을 벗어난 반동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사부가 그렇게 경고한 이유가 있었구만…….’
아직 원인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발동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분명 영혼 쪽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상황에 이세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으음…….”
아래쪽에서 들리는 뒤척거리는 소리.
거기에 슬쩍 시선을 내려보니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루이제의 모습이 보였다.
‘……요놈 봐라.’
언령마법을 연달아 쓰느라 본인도 많이 지쳤을 텐데 여기서 이렇게 간호하고 있다니. 그 기특한 모습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 크흠! 흠…….”
생각보다 갈라져서 나오는 목소리에 이세훈이 헛기침하고 있을 때. 졸고 있던 루이제가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 크흠! 어우. 야 일단 물부터 줘봐. 이상하게 목이 마르네.”
“그걸 왜 나한테 시키는……!!!!”
쿠당탕!
멍하니 대답하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루이제. 그리고는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마치 한참 동안 쓰러져 있던 사람이 깨어난 것 같은 반응. 그 모습에 이세훈은 뒤늦게 이상한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할 정도로 건조한 목. 전투 직후라기에는 편안해 보이는 루이제의 상태.
‘설마…….’
그제야 이세훈이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순간.
“간호사!!!!!”
루이제가 미친 듯이 호출벨을 연타하며 의료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직후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병동의 의료진들이 들이닥쳤고, 의식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하게 여기저기를 끌고 가며 정밀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검사가 끝난 뒤. 안정완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일주일이나 의식을 잃었다고요?”
하루나 이틀도 아니고 꼬박 일주일을 누워 있었다.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검사를 맡은 안정완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주일 만에 정신을 되찾은 게 기적일 만큼 상태가 심각했었지.”
전신의 장기와 혈관, 마력회로가 걸레짝이 된 상황.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지만, 이세훈은 그 상태에서도 숨이 붙어 있었다.
심장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전신의 혈류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며 피와 산소를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자네가 보유한 스킬의 효과로 추정되네만…… 맞는가?”
“예…… 아마 맞을 겁니다.”
영연신마법을 통해 피에 각인되어있는 영혼의 기억.
그것이 장기가 망가진 상태에도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신체를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회귀 전에도 겪어본 효과였기에 이세훈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영혼에 문제가 생겼으면 이것도 발동이 안 돼야 정상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혈기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는 영향이 없는 것일까. 이세훈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안정완이 설명을 이었다.
“일단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해뒀고 남은 건 약물과 재활을 병행하며 완치될 때까지 요양만 하면 되네. 자네는 회복력이 빠르니까 아마 3…….”
뭔가 심상치 않은 흐름에 이세훈이 재빠르게 안정완의 말을 가로챘다.
“3주죠?”
“3개월일세.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
3개월간 입원 생활. 그 이야기에 이세훈의 정신이 아득해지려다가 금방 정신을 다잡았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지.’
이번에 활약한 것도 있으니 적당한 영약 하나 받은 다음에 이전처럼 몸을 통째로 갈아엎어 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이세훈은 금방 냉정함을 되찾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영약 같은 건 함부로 먹지 말게.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
“물론이죠. 저도 위험한 짓은 안 합니다.”
“…….”
아무리 봐도 안 할 것 같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증거도 없이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안정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부디 조심해 주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병문안은 며칠간 막아둘 테니 일단 푹 쉬게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안정완의 모습에 이세훈이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김인철 교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응급처치를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다.
이세훈의 물음에 안정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양손이 거의 불구가 되셨네. 일상생활은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제련이 불가능해서 지도교수 자리에서도 물러나셨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정완이 병실은 떠난 뒤. 침대에 기댄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렇게 됐나.’
장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었고, 복원하고자 했던 화천태도 역시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김인철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세훈이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일세. 들어가도 되겠나?”
바깥에서 들려오는 김인철의 목소리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드르륵
문이 열리고 양손에 장갑을 낀 김인철이 과일바구니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깨어나서 혼란스러울 텐데 찾아와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앉으시죠.”
침대로 걸어들어온 김인철이 양손에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를 왼손으로 잡고 탁상에 올리려던 순간.
“엇…….”
쿠당탕
맥없이 아래로 떨어진 바구니. 바닥을 나뒹구는 과일의 모습에 김인철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 손이 예전 같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이 자주 생기는군.”
몸을 숙여서 떨어진 과일을 주워 담는 김인철.
그 와중에도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아 몇 개를 다시 떨어뜨렸지만, 말없이 모두 주워 담은 다음 바구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후우…… 그래서 몸은 좀 어떤가?”
“괜…… 찮지는 않지만 금방 좋아질 것 같습니다. 치명적인 부상은 없었으니까요.”
이세훈의 대답에 김인철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다행이군.”
자신의 과거 때문에 발목을 붙잡아 버리는 게 아닌가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진심으로 안도한 김인철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자네에게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어서일세”
“…….”
“과거에 내가 속해 있었고, 앞으로 자네를 노릴 이들이지. 그들은…….”
“아뇨.”
김인철의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세훈이 단호하게 가로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관한 것이라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뭣……! 하지만 이건 자네의 안위와도…….”
“제가 경험이 없긴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닙니다. 바벨을 습격할 만큼 간덩이가 큰 단체가 소속원에 대한 입막음을 안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세훈이 본 기억에 의하면 김인철은 『공양』에서 상당히 인정받던 연구원.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었을 만큼 제약이 수십 겹으로 걸려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한테 설명하려는 걸 보면 우회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진 하지만…… 다 말하고 나면 무조건 죽는다.’
만약 주시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김인철의 뜻을 존중하여 잠자코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양』에 대한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회귀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단호하게 그 무의미한 이야기를 끊어냈다.
“이번 사건으로 어떤 종류의 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접근해 올지도 대강 알아냈습니다. 그러니 굳이 목숨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제게 말씀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
이세훈의 거절에 김인철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목숨을 건졌는데도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듯한 모습. 그 반응에 이세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양반들은 어딜 가든 똑같군…….’
이대로 돌려보내 봐야 무슨 선택을 할지 빤히 보인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머릿속으로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지도교수직에서 물러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지금의 나에게는 과분한 자리니 말일세. 후임은 믿을 만한 사람으로 구해뒀으니 걱정할 필요는…….”
“그럼 앞으로 뭘 하실 생각입니까?”
이세훈의 물음에 김인철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앞으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무미건조한 반응.
끝낼 시기를 놓쳐 버린 듯한 그 허우적거리는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하게 물었다.
“혹시 죽을 생각으로 오신 겁니까?”
“…….”
이세훈의 물음에 김인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김인철이 말라붙은 나무였다면, 지금은 다 타버린 재와 같았다.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인물.
이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지 그 미래가 뻔히 보였기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그럼 그냥 죽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