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51화
헬레나 헌트.
과거 제련학부에서 특수연마학을 가르쳤으며 김인철과 함께 세계 100대 장인으로 선정되었던 대장장이.
까칠한 성격 탓에 인망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능력만큼은 출중해 차기 지도교수로도 내정되어 있었으나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사직.
이후 아칼쿠프 쪽에 철물점을 차리고 잡화만 만들어서 팔다가 세계 100대 장인에서 퇴출당한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아주 정석적인 은퇴한 고수구만.’
프로필을 훑어본 이세훈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헬레나.
이번 회담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정말로 지도교수를 맡아주실 겁니까?”
김인철이 맡겼다고 하긴 했지만 본인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이세훈의 물음에 헬레나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한다고 했으니 해야지.”
조금 퉁명스럽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협조적이다. 그 모습에 이세훈이 연이어 물었다.
“마이스터의 운영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들어보니 별로 하는 일도 없더만. 겸사겸사 같이하마.”
지도교수와는 관련 없는 마이스터의 운영도 돕겠다. 그 대답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 깐깐해 보여서 협상하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협조적인데.’
김인철이 뭐라고 설득했기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일까. 그 의문에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대답을 떠올렸다.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구만.’
이전에 김인철이 화천태도를 수리하기 위해 자신에게 조언을 구했던 것처럼 헬레나 역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이세훈이 곧장 물었다.
“그럼 저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놈이 말한 그대로군.”
천천히 눈을 뜬 헬레나가 이세훈을 바라보다가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류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나?”
“…….”
헬레나의 물음에 류은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슬쩍 돌려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이세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류은하가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닫힌 문을 바라본 헬레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 일로 조금 많이 놀라신 상태라 그런 것 같네요.”
“그런 뜻이 아니라…… 뭐, 됐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고개를 가로저은 헬레나가 이세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앞서 말한 대로 지도교수로서의 업무, 그리고 네가 김인철과 하던 일이나 할 예정이었던 일도 모두 내가 처리해 주마.”
“예정이라면…….”
“같이 진행하려고 했던 연구나 그런 것들이지. 연구비는 내가 학원장한테서 적당히 뜯어올 테니 네 맘대로 사용해라. 난 별로 관심 없으니.”
귀찮은 일도 해주고 심지어 돈까지 모두 넘겨주겠다. 너무 좋은 조건에 이세훈은 도리어 의구심이 들었다.
‘도대체 뭘 부탁하려고 이러는 거지?’
헬레나가 자신에게 부탁할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대신 바르무트 가문을 없애다오.”
두 눈을 빛낸 헬레나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하지만 상상이상으로 과격한 대답에 이세훈이 눈앞의 노인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철물점에 처박혀 있던 퇴물 대장장이보다야 잘하겠지. 안 그렇나?”
자조적인 헬레나의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네요.”
“물론 하루아침에 없애 달라는 건 아니다. 이전에 그놈들의 양산형 무구산업을 무너뜨린 것처럼 네가 생각해 둔 방법과 흐름이 있겠지.”
앞서 김인철에게 이세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헬레나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수많은 설계도를 한 사람이, 그것도 며칠 사이에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하지만 이번에 이세훈이 만들어낸 양산형 검기무구를 직접 본 뒤, 헬레나는 곧장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놈은 진짜야.’
조금 뛰어나다고 우쭐대며 자만하는 반푼이가 아니라 정말로 몇 세대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천재.
그렇기에 헬레나는 바르무트 가문에 복수할 준비가 다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철물점에서 나와 지도교수 자리를 받아들였다.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고 그놈들을 없애버리겠다고 약속해라. 그게 내 조건이다.”
눈앞의 녀석이 바르무트 가문을 무너뜨리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
뭐든지 하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헬레나의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로만 약속하는 건 좀 그러니까 서약이나 그런 걸로 확실하게 가죠. 준비해 둔 거 있으신가요?”
“그럴 것 같아서 챙겨왔다.”
“그럼 바로 진행하죠.”
아공간 포켓에서 서약서를 꺼내 준비하는 헬레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자연스레 물었다.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바르무트 가문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
이세훈의 물음에 막 서약서를 준비하던 헬레나가 손을 멈추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상당히 민감한 질문이었는지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며 눈매가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세훈은 말을 번복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건 확실히 들어야지.’
의뢰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그런 것도 파악해 둬야 혹시 모를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법이다.
“후우…….”
흔들림 없는 이세훈의 시선에 헬레나가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금 차분해진 얼굴로 이세훈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내 아들을 죽였다.”
* * *
서약은 류은하를 공증인 삼아 안전하게 진행되었고 그 내용은 정리하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세훈이 바르무트 가문과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동안 헬레나 헌트는 모든 힘을 동원해 보조한다.’
그 이외에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지켜지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여러 조항들이 있었는데 이쪽은 안전장치 같은 것이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럼 다음에 보지.”
서약을 끝낸 헬레나는 곧장 돌아갔고, 회의실에 남은 이세훈이 서약서를 힐끔 보았다.
‘확실히 일 처리는 잘하네.’
잠깐 만나봤을 뿐인데도 사무나 이쪽으로는 김인철보다 더 능숙한 것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마 미하엘도 이점을 위협적이라 생각하고 가장 먼저 헬레나를 쳐낸 것이 분명하리라.
‘그리고 아들을 죽였다라…….’
마음 같아서는 아들이 무슨 일을 했고, 또 어떻게 죽었는지도 묻고 싶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뤘다.
그런 상세한 이야기는 좀 더 가까워진 다음에 하는 것이 좋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직 준비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저쪽 상태부터 파약해야겠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이 류은하에게 물었다.
“학과장님. 미하엘 부학과장은 요즘 뭐 하고 있습니까?”
“휴가를 쓰고 본가에 가 있는 상태입니다. 장남의 장례식을 치른 뒤로 공식적인 활동은 없더군요.”
“장례식…….”
제련학부의 3학년 학부수석이자 루이제의 목을 다치게 만든 원흉인 비에르 바르무트.
언젠가 한 번 손봐줄 생각으로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테러 사건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조사에 의하면 제련학부에 침입하려던 마인과 싸우다가 죽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시체는 없지만 전투 흔적이 있었기에 유공자로 처리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지만.’
이전에 몽환규도를 통해 보았던 빙견과의 기억. 거기서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바르무트 가문은 오랫동안 주시자와 교류한 이들로 추측되고 있었다.
당장 루이제를 다치게 한 것만 해도 『여명』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 거기에 이번 테러 사건에서도 수상쩍은 부분들이 있었다.
‘대련용 무구로 변장했던 『공양』의 도구. 제련학부 지하에 숨겨져 있던 시설. 전부 수상해.’
지금은 몇몇 직원들의 문제로 수사가 마무리되고 있지만 당연히 꼬리자르기일 터. 이세훈은 그 배후에 바르무트 가문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의심 가는 점이 한두 가지 정도면 모를까, 이렇게 겹친 상황에서는 그냥 구린 놈이라고 생각하고 두들겨 패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거 없어도 두들겨 패야 하는 놈들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인류의 전력을 깎아 먹고 우회적으로 만마전과 협력하는 놈들은 놔둬서 좋을 게 없다.
이번에는 어떻게 접근을 해볼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그에 휴대폰을 꺼내자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시간 있으면 잠깐 좀 보자] - 마광수
‘입원해 있을 때는 연락 한번 없더니…… 자기 필요하니까 연락하네.’
조금 띠껍게 메시지를 바라보던 이세훈이 짧게 답장을 보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가볼 곳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곧장 따라붙으려는 류은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아까 일로 대부분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류은하가 그렇게 직접 안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피해 다녔는데 누가 뒤쫓을 생각을 하겠는가.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잠시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이전에 드렸던 호출장치를 사용해 주십시오.”
“아. 이거요?”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이세훈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열쇠고리 같은 것을 꺼냈다.
한쪽이 파괴되면 반대쪽에 알림이 가면서 위치를 알려주는 장치였는데 경호 대상에게 쓰이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다.
“예. 이세훈 생도의 안전과 관련된 물건이니 어딜 가든 꼭 챙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멋쩍게 웃으며 인사한 이세훈은 회의실 밖으로 나오면서 호출장치를 살펴보았다.
‘완전히 과보호구만.’
그래봐야 잠깐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류은하가 저렇게까지 반응하니 뭔가 색다른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다시 안주머니에 호출장치를 챙겨 넣은 이세훈은 곧장 마광수의 강의실로 향했다.
끼익.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는 마광수의 뒷모습을 발견한 이세훈이 곧장 그를 불렀다.
“저 왔습니다, 교수님.”
“……그래.”
의자에서 일어나며 뒤돌아보는 마광수.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양반 꼬라지가 왜…….’
축 늘어진 오른팔을 고정시킨 부목.
거기에 목이나 몸 곳곳에 붕대를 둘러맨 모습이 엿보였는데 평소보다 몸이 축 늘어진 것이 딱 봐도 중상인 상태였다.
“많이 다쳤다더니 멀쩡하구만. 루트비히 그놈이 몸에 좋은 거라도 준 모양이지?”
“예? 아…… 뭐, 그렇죠.”
“흐음…….”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전신을 살펴보는 마광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어쩌시다가…….”
이세훈의 물음에 그제야 마광수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뭐, 별일 아니다. 그냥 오랜만에 도플갱어랑 마주쳐서 한판 붙었을 뿐이야.”
십악 중 한 명이자 마광수의 오랜 원수인 도플갱어. 그와 마주쳤다는 이야기에 이세훈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에는 다 나았을 때만 봐서 몰랐는데…… 매번 이렇게 개박살이 났던 건가.’
이전에는 몰랐던 마광수의 새로운 모습에 이세훈이 부상을 살짝 훑어본 다음 물었다.
“입원은 안 하십니까? 교수님 신체 능력이면 회복도 금방 하실 것 같은데.”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하냐.”
축 늘어진 오른팔을 까딱인 마광수가 훈계하듯 이야기했다.
“중상을 입힐 정도의 공격이라면 상처에도 기술의 흔적이 깊이 묻어나게 마련이지. 일종의 연구 자료 같은 거야.”
“흐음. 그건 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상처를 토대로 적의 기술을 분석한다.
무기의 형태나 대력적인 움직임, 버릇을 분석해 본 적은 있어도 기술 그 자체를 읽어보려고 한 적은 없었다.
‘이건 재능이 좀 뒤받쳐줘야 가능하겠네.’
회귀 전의 자신이라면 힘들겠지만 지금 상태라면 한번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마광수의 상처를 살피던 이세훈이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검 상태는 괜찮으세요?”
부상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도플갱어랑 마주치고 나서 검 상태가 얼마나 개판이 되는지는 회귀 전에 질리도록 봤었다.
마광수가 따로 손질을 하긴 했겠지만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제대로 하는 것보다는 못하리라.
“……그건 왜 물어보냐?”
“뭐, 일단은 저도 제련학부니까 좀 상했다 싶으면 수리를…….”
“됐다. 너 같은 애송이한테 맡길 물건이 아니야.”
가차 없이 말을 끊어내는 마광수. 그 입에서 나온 ‘애송이’라는 단어에 이세훈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회귀 전의 자신과 비교하면 당연히 애송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이 양반 이거…… 설마 검법 훔쳐 갈까 봐 저러는 건가?’
영웅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무구는 동화율로 인해 조금씩 마력회로에 침식당해 일종의 분신 같은 상태로 변한다.
특히 마광수의 검인 ‘야천’은 천충검의 뼈대가 새겨질 만큼 동화가 많이 진행됐었는데 재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면 그것만 잘 살펴봐도 기술을 익힐 수 있을 정도였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자신의 기술을 간파당할까 봐 실력 좋고 재능 뛰어난 유망주를 애송이라고 깎아내리면서 최고참 S급 영웅이라니.
아무리 마광수가 알코올 중독에 도박 중독에 자기보다 한참 어린 후배 영웅들에게 훈수 두기를 좋아하던 나잇값 못하는 노인네라 해도 그렇게 속 좁지는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삐졌냐?”
“아뇨? 교수님이 애송이라고 하시는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이세훈이 곧장 이야기를 이었다.
“그보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빨리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퇴원하고 바로 와서 엄청 피곤하거든요.”
“아니. 그…… 크흠. 알았다.”
당장 기술이 유출되는 건 막았지만 더 큰 기회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마광수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용건을 꺼냈다.
“이전에 중소 공방의 장인들을 지켜달라고 나한테 부탁했던 거 기억하냐?”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도와준 녀석이 있는데 그 대가로 자기 가족이랑 한번 만나줬으면 한다더군.”
마광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장인들을 지켜준 이라면 완등자인 원견사 하백연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건가.’
회귀 전에도 기준이 까다로울 뿐이지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가족이라면…….’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아차린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세도 졌었는데 그 정도야.”
“그럼 소개해 줄 테니까 따라와라.”
대련장 쪽으로 향한 마광수가 왼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검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검푸른 머리칼의 청년, 어제 병동에서 만났던 하선우였다.
“또 뵙는군요. 이세훈 생도.”
“그러게요. 조사관님.”
냅다 천리안으로 자신을 훔쳐보려고 하기에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조사 말고도 용건이 있었을 줄이야.
이세훈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하선우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조사관이라고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원견사…… 하백연의 조카손주로서 온 거니까요.”
하백연의 남동생 쪽의 장손. 따로 자식이 없는 하백연에게는 친손자나 다름없었으며 직접 궁술을 배우거나 도움을 받는 등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것 때문에 말년이 안 좋았었지만…….’
회귀 전에 그의 죽음을 곱씹던 이세훈이 담담하게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절 부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고모할머니께서 당신에게 재능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재능을 상세히 확인해 보기 위해서 제가 온 거죠.”
“흐음…… 어떤 방법으로 확인하죠?”
완등자에게 재능을 인정받았음에도 놀라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되묻는 이세훈. 예상한 것과 조금 많이 다른 그 반응에 하선우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저희 가문에 있는 ‘연날리기’라고 부르는 훈련으로 살펴볼 생각입니다. 기초적인 훈련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하백연의 재능 테스트. 솔직히 그 까다로운 기준을 자신이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손해 볼 건 없었다.
‘실패해도 달라지는 건 없고, 성공하면 완등자 한 명에게 또 호의를 살 수 있을 테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는 상황. 하지만 이세훈은 묘하게 아쉬움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아쉽지?’
뭔가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도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의 시선 끝에 문득 하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앞으로 바르무트 가문뿐만 아니라 여러 조직의 꼬리를 찾아내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공권력을 발휘하는 영웅 협회 쪽의 인맥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어중간한 녀석을 아군으로 삼아봐야 정보만 새어 나갈 터. 그렇기에 영웅 협회 쪽 인물에게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타협을 모를 정도로 융통성이 없을 것. 그리고 남은 두 번째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뒷배가 좋을 것.’
이 세상에 완등자의 혈육만큼 뒷배가 좋은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회귀 전에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족쇄로만 보였지만, 이제 보니 상당히 질 좋은 철로 만들어진 족쇄다.
‘이런 재료가 눈앞에 있었네.’
하선우란 인물을 다시 보게 된 이세훈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저야 영광입니다만…… 조금 심심하지 않을까요?”
“예?”
“좀 더 긴장감이 있어야 본 실력이 제대로 나올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데…….”
말꼬리를 늘어뜨린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저희 가볍게 내기 한판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