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158화
아공간 터미널 로비.
1년 365일 이용객들로 북적이는 장소에서 한곳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저 사람…… 이세훈 맞지?”
“맞는 거 같은데.”
“와. 인상 진짜 더럽…….”
멀찍이서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중 몇 명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다가가려고 했지만 금방 옆자리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지금 말 거는 업체와는 평생 거래 안 함.]
대충 적어놓은 글.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내용에 이세훈에게 제안을 건네려 했던 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만약 저게 진짜라면…….’
‘길드장한테…… 징계가 아니라 아예 잘릴지도 몰라.’
지금은 자신들이 이세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세훈이 자신들에게 기회를 줘야 하는 상황.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혹시라도 이세훈의 기분이 상할까 봐 재빠르게 물러났고, 자연스레 주변을 지나가는 이들도 사라졌다.
그렇게 투명한 우리라도 펼쳐져 있는 것처럼 북적거리는 로비에서 덩그러니 앉아 있게 된 이세훈은 주변을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염진현이라…….’
염륜잔화창이라는 기술을 정립하고 염화문을 세운 초대문주. 그리고 염성하의 사부이자 호적상 양아버지인 인물.
언젠가 한 번은 만날 것이라 생각했던 인물과 갑자기 보게 된 상황에 이세훈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연락이 없었던 게 이상하네.’
자신이야 염성하의 미래, 광견을 보고 왔기 때문에 거침없이 여러 가지를 가르쳤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다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랑 친해지더니 평생 안 쓰던 암속성마력도 쓰고…… 평생 익힌 창술도 쌍창술로 멋대로 개조해 버렸지.’
거기에 그 생도만 믿고 문주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다거나 만마전과 내통한 영웅들과 싸우다가 중환자실에 실려 가는 등 평범한 사람이면 기겁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제 서야 연락했으니 어떻게 보면 조금 무신경하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현역 시절에는 많이 거칠었다던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구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이세훈이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을 때. 불현듯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커다란 청년과 등이 굽은 왜소한 노인. 기다리던 손님의 등장에 이세훈이 좀 더 자세히 보려던 그때.
우웅
주머니에서 울려 퍼지는 진동. 그에 휴대폰을 바라보자 염성하가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
[사부님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인상을 쓰거나 건방지게 말하면 죽는다.]
[나에 관해서 허튼 소리를 해도 죽는다.]
[아무튼 사부님의 기분이 상하면 죽는다.]
…….
연달아 도착하는 메시지에 이세훈이 걸어오는 커다란 청년, 염성하의 손 쪽을 바라보았다.
옆의 일행에게 보이지 않도록 살짝 뒤로 숨긴 채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들기는 손가락.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주 꼴깝을 떠는구만.’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조금 귀찮긴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사전에 잔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부에게 자신이 잘 보였으면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관심이 없었으면 그냥 지켜보다가 마음에 안 들었을 때 바로 후려쳤겠지.’
나름대로 자신을 신경 쓰는 행동에 이세훈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멀리 있는 염성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그 모습에 염성하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집어넣었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앞으로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하네. 일찍 출발했는데도 걸음이 느려서 조금 오래 걸려버렸군.”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노인, 염진현의 모습에 이세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꾸벅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이세훈이라고 합니다.”
“음.”
이세훈의 깍듯한 인사에 염성하가 살짝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염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네. 염진현이라고 하네.”
담백한 자기소개에 이세훈은 처음으로 본 염진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완전히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얼굴에 자글하게 자리 잡은 주름.
펑퍼짐한 도복을 입고 있어 몸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걸음걸이만 봐도 대강 상태가 어떨지 예상이 갔다.
‘쇠락한 영웅인가.’
육체는 세월과 전투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망가졌고, 그 안을 채우던 마력 역시 통제에서 벗어나 근원 자체가 흩어져 버렸다.
‘이 정도면 B급…… 아니, 실질적으로는 C급 이하인가.’
과거에 S급 영웅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쇠약한 육체. 회귀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그 처참한 모습에 이세훈의 눈이 깊어졌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전에 몇 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상태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라면 아마도…….’
염진현의 몸에서 보이는 흔적들에 이세훈의 생각이 깊어지려던 그때.
“크흠!”
염성하가 크게 헛기침하며 눈을 부라렸다.
“아,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식당에 가서 할까요? 괜찮은 정식집을 예약해뒀거든요.”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겠네.”
“그럼 일단 택시 정류장으로 가죠.”
고개를 끄덕인 이세훈이 앞장서며 걸어가려던 그때. 막 걸음을 떼던 염진현이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그 모습에 이세훈이 막 붙잡으려던 그때.
탁
염성하가 재빠르게 염진현의 몸을 부드럽게 받쳤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다. 조금 많이 걸어서 그럴 뿐이야.”
“지금이라도 휠체어에 앉아가시는 것이…….”
“걱정 말거라.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
“하지만…….”
염진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걱정스럽게 이야기하는 염성하.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네.’
찌푸리거나 비웃는 것밖에 못 하던 녀석이 저렇게까지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을 할 수 있다니.
염진현이라는 존재가 염성하에게 있어 얼마나 큰지 간접적으로 알게 된 이세훈은 잠시 바라보다가 곁으로 다가갔다.
“어르신.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형태는 아니니까요.”
염진현에게 다가간 이세훈은 곧장 흑무사를 몸에 연결한 다음 간단하게 결계를 구축했다.
스스스
삐걱거리던 염진현의 몸이 조금 정갈하게 바로잡혔고 불안정하던 움직임이 안정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한 자신의 몸에 염진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움직이기 편하시게 몸을 살짝 조정했습니다. 이거면 괜찮으시죠?”
이세훈의 물음에 염진현이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 고맙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염진현의 일을 해결한 이세훈은 다시 앞서 걸어가려다가 문득 염성하의 표정이 보였다.
“음.”
“…….”
아주 흡족하다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그 표정에 이세훈의 눈이 가늘어지다가 금방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염성하가 염진현의 뒤에서 걸음을 맞추며 따라가려던 그때.
우웅
진동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
그에 염성하가 염진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휴대폰을 꺼내 살펴보았고.
[재수 없게 웃지마.]
“…….”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다듬느라 애써야 했다.
* * *
예약해둔 한정식집에 도착한 뒤. 곧장 용건을 꺼내올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별다른 이야기 없이 식사가 시작되었다.
“후유증이 없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앞으로는 부상에 주의하게나.”
“예. 앞으로는 그럴 생각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만마전의 테러나 그때 입었던 부상 등 가벼운 화제만 이야기하며 정갈하게 밥을 먹는 염진현.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본 이세훈은 조금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 밑에서 염성하 같은 놈이 나오다니…… 믿기지가 않네.’
친부모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 자란 게 있을 텐데 어떻게 저런 성격파탄자가 자라난 것일까.
극과 극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해하며 식사를 계속했고, 어느덧 모든 요리가 치워진 뒤 간단한 후식과 차가 놓였다.
“잘 먹었네. 오랜만에 제대로 밥 한 끼 먹은 것 같군.”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렇게 신경 써줬는데 누가 불만을 가지겠는가.”
옅게 미소를 지은 염진현이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더니 다시금 이세훈과 눈을 마주 보았다.
“슬슬 본론을 꺼낼까 하네만…… 괜찮겠나?”
“예. 방음도 확실하니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세훈의 대답에 염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갑자기 만나자고 한 것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일세.”
염성하와 관련된 질문일까.
이세훈이 기다리는 사이 염진현이 조용히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건가?”
“……혹시 염성하랑 뭘 하려는 거냐, 그런 말씀이십니까?”
“성하와는 관련 없네. 그냥 순수하게 자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걸세.”
예상과 다른 질문에 이세훈은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염성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거 아니었나?’
제자가 중환자실에 입원하기도 했으니 당연히 그쪽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잘못 짚었던 모양이다.
이세훈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염진현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네가 육대마경의 탐색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이전에 들었네. 지금 성하를 도와주는 것도 그 거래의 일환이라고 했다지.”
“맞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탐색이 끝난 뒤, 거기서 얻은 재료와 그걸로 만들어낸 무구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냐는 것일세.”
육대마경의 다음. 그동안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화제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만마전. 그리고 만마의 늪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겁니다.”
십악이든 마신이든 결국 만마의 늪이라는 저 암 덩어리를 이 별에서 없애 버리기 위한 관문,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만마전과 만마의 늪을 없애 버린다……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 성하는 어떤 역할인가?”
“제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믿을 수 있는 아군이 될 겁니다. 완등자 이상으로요.”
“…….”
이세훈의 대답에 옆에서 듣고 있던 염성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완등자 이상……?’
설마 자신을 그렇게까지 평가하고 있었던 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고평가에 염성하가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염진현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문제없겠어.”
“문제라고 하신다면?”
이세훈의 물음에 차를 홀짝인 염진현이 담담히 이야기했다.
“자네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성하의 성취도 역시 달라질 테니까. 만약 변변찮은 목적이었다면 관계를 끊게 할 생각이었네.”
방금까지의 좋은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단호한 목소리.
그에 이세훈은 방금 있었던 대화가 무슨 목적인지 이해했다.
‘내가 염성하를 얼마나 키울 생각인지 떠본거구만.’
만약 A급, 혹은 S급 정도로만 대충 키워다가 부려먹을 것처럼 보였다면 염진현은 가차 없이 염성하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마전과 만마의 늪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다는 완등자들도조차 쉽사리 할 수 없는 목적을 언급하니 자신의 제자를 맡길 만하다고,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괴팍한 양반일지도 모르겠어.’
제자가 무리하다가 중환자실까지 실려 갔는데 걱정하기는커녕 얼마나 더 성장시켜줄 수 있을지만 알아보다니.
이세훈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차를 모두 마신 염진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뭘 할 생각인가?”
“으음. 그게…….”
“아,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네.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게 싶어서 물어본 것뿐이니.”
앞의 질문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상당히 협조적으로 나오는 염진현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한 가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황혼주괴에 대해서 아십니까?”
몽환규도에서 본 폭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전에 염화문을 관리했던 염진현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세훈의 물음에 염진현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혼주괴 자체는 잘 모르지만……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군.”
“그게 뭔가요?”
“내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심상 투영기’ 라고 심상을 단련하는 데 쓰였던 도구가 있었네. 그걸 제작하는데 황혼주괴가 들어간다고 했었지.”
“심상 투영기…….”
회귀 전을 포함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도구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염진현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마 자네도 들어 본 적은 없을 걸세. 나 같은 고위 영웅들을 상대로만 제안했었고, 나중에는 결함이 발견되어서 아예 제작이 중단됐거든. 과도기에 만들어진 물건인 셈이지.”
“혹시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게 아마…….”
이세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염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막스 바르무트. 그자였던 것 같군.”
* * *
염화문의 신 본관 최상층에 마련된 회의장.
문주인 이원룡이 상석, 그를 보필하는 여덟 명의 사범들이 왼쪽에 앉았고 그 맞은편인 오른쪽에는 딱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새치가 섞인 금발 머리에 술에 취한 듯 경박하게 풀어져 있는 사내. 펠릭스 바르무트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것 참 아깝네요.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세라핌 길드가 아니라 저희랑 무구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텐데 말입니다.”
“…….”
“혹시 지금이라도 그쪽이랑 계약을 끊고 저희랑 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지금이면 약간의 할인도…….”
“그만.”
펠릭스의 말을 끊어낸 이원룡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다. 물건부터 꺼내라.”
“거참 빡빡하기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펠릭스가 옆에 가볍게 손짓했고, 뒤쪽에 서 있던 경호원 중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와 회색 철제가방을 건넸다.
그것을 받은 펠릭스는 곧장 회의실의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음 잠금장치를 풀고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이원룡과 사범들에게 보이게끔 보여주었다.
우우웅
주황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채 몽환적인 빛을 발하는 구슬. 그 물건을 본 사범들의 눈이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오…… 오오…….”
“저건…….”
구슬의 모습은 처음과 변함없었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사범들의 눈동자에는 저마다 다른 풍경이 비쳤다.
지금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오른 자신의 움직임.
그것이 구슬 안쪽에서 흐릿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저것을 이용하면 오랫동안 정체되어온 이 경지를 뚫을 수 있다. 그런 확신과 함께 사범들이 더더욱 구슬에 빠져들려던 그때.
탁!
철제가방이 잽싸게 닫혔다.
“맛보기는 여기까지. 이다음부터는 유료입니다 고객님들.”
능글맞은 펠릭스의 이야기에 사범들의 눈매가 일그러졌지만 이내 누가 아쉬운 입장인지 깨닫고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상석에 앉은 채 아무런 말 없이 닫힌 철제가방을 바라보는 이원룡.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뭘 원하지?”
여전히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그 모습에 펠릭스가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여유롭게 이야기했다.
“돈은 필요 없고 사람 한 명만 처리하는 것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말해라.”
“이세훈. 그 녀석을 죽일 겁니다.”
펠릭스의 이야기에 회의실이 조용해지더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범들이 다급히 외쳤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지금 그 녀석을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말하는 건가!”
승천제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알려진 유망주. 거기에 양산형 검기 기술을 개발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유명인이 바로 이세훈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암살한다?
성공할 가능성은 둘째치고 염화문이 멸문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떠안게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인으로서 다음 경지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해도 불구덩이에 스스로 걸어갈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다.
그에 사범들이 모두 반대하려던 그때.
“우리보고 전부 해결하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원룡의 한마디에 사범들의 얼굴이 굳어졌고, 펠릭스가 씩 웃어 보였다.
“그야 물론이죠. 여러분들은 딱 두 가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말해라.”
“첫 번째는 염성하인지 뭔지 하는 친구를 이용해서 이세훈을 바벨 밖으로 끄집어낼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이원룡과 사범들을 바라본 펠릭스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못 본척할 것. 그게 전부입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못 본척하라.
그 간단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에 사범들이 얼굴이 더욱 굳어졌고, 이내 자연스럽게 이원룡에게 시선들이 향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상황에 이원룡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담담히 중얼거렸다.
“염진현. 그 늙은이를 이용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