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33화
연무장 위로 흐르는 무거운 침묵.
세계가 통째로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했고,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자예드가 황당한 표정으로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
“생각보다 더 심한가 보네. 대련이 아니라 당장 병원…….”
스각─
연무장 위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간발의 차로 아미르의 단검을 피한 자예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미르 너…….”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분명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었을 거야.”
겉보기에는 조금 가벼워 보여도 속은 누구보다도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막연히 대화를 나눌 만큼 여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아미르는 이세훈이 건네준 단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잡았다.
“미안해. 형.”
투웅!
아미르의 몸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며 단검을 휘둘렀고, 그 날카로운 일격에 자예드가 깜짝 놀라면서도 재빠르게 반격했다.
카가가강!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네 자루의 단검.
아미르의 단검은 급소를 향해 망설임 없이 휘둘러졌지만 자예드는 뒤로 물러서며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아미르! 잠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자예드는 어떻게든 대화로 풀어보려고 했지만, 아미르는 그 틈조차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두두두!
빙결연금으로 만들어진 송곳들이 사방을 뒤덮으며 쏟아졌고, 예상을 뛰어넘은 일격에 자예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스륵─
자예드가 휘두른 단검의 경로를 따라 보랏빛 검기가 잔류하더니 단숨에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파카앙!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막힌 일격.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아미르는 계속해서 자신의 기술을 펼쳐 나갔다.
쩌적!
빙결연금으로 검날의 길이를 늘려 사정거리를 속이고, 지면을 얼려 자세를 무너뜨리거나 단숨에 안쪽으로 파고든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음송곳과 사이사이에 소리 없이 섞여서 날아오는 투명한 얼음칼날.
한 호흡에 펼쳐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격에 단원들 사이에서 구경하던 이세훈이 살짝 감탄했다.
‘저 녀석 전보다 많이 늘었네.’
빙결연금은 시험에 봤을 때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단검술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여객선에서 나한테 당한 게 어지간히도 억울했나 보구만.’
빙결연금을 파훼당했을 때 자신의 전투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깨닫고 집중적으로 단련한 것일까.
기습을 전제로 한다면 이제는 A급도 충분히 노려봄직한 수준. 회귀 전의 빙견과 비교해도 엄청난 발전 속도였지만.
키잉─
안타깝게도 눈앞의 상대를 이기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자예드의 검날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방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잔상들이 주변을 뒤덮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아미르의 공세를 단번에 끊어내는 검기의 장막. 그리고 자예드의 단검이 그 틈새를 가볍게 비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카앙!
“큭……!?”
한 번도 방어를 뚫지 못했던 아미르와 다르게 급소를 노리지도 않고 간단히 공세를 뒤집어버리는 자예드.
상성을 떠나서 ‘격’이 다른 그 모습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최강까진 아니어도 S급은 충분히 되겠는데.’
몽환성에 쭉 갇혀 있었음에도 이전보다 강력해진 자예드.
그 사실만 해도 놀라웠지만, 이세훈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지금 펼치는 단검술이었다.
‘도대체 몇 개가 섞인 건지 짐작이 안 가는구만.’
아미르가 가문의 단검술에서 본인만의 변주를 가한 정도라면 자예드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혼탁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술들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결과물.
자신처럼 효율을 추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실패를 전제로 쌓아올린 기술이라…….’
퍼즐 조각에 그려진 그림은 보지 않고 모양만으로 맞추고, 어긋났다고 생각하면 부숴서 처음부터 다시 맞춰간다.
S급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반복한 것 같은 모습. 어딘가 익숙한 구조에 이세훈이 뚫어져라 보고 있던 그때.
서걱!
자예드가 쏘아내 검기가 이세훈의 상반신을 갈라냈다.
“?!”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이세훈의 모습에 아미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맞은편에 선 자예드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역시 저 녀석이 원인이었구나.”
“무슨 짓을…….”
“몽환마가 보낸 녀석 같은데…… 정말 지긋지긋하네.”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쉰 자예드가 안타까운 눈으로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미르. 넌 지금 몽환마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정말 여기가 꿈이라고 생각해?”
자예드의 되물음에 아미르의 두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모든 것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세계.
머릿속에 그것들을 부정하는 기억들이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몽환마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생한 꿈을 안겨줄 수 있으니까.
“나는…….”
“혼란스럽겠지.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라면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리면서 허점을 보완했을 테니까. 하지만 봐.”
스각!
자예드가 자신의 팔뚝을 단검으로 가볍게 그었고, 상처로 피가 몽글몽글 맺히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형……!”
“네 말대로 여기가 정말 내 꿈속이라면, 방금 통증으로 무언가 변화라도 있어야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팔뚝을 타고 흐르는 피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그런 자신들을 바라보며 웅성거리는 단원들. 그 모습을 본 아미르의 두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곳은 분명히 꿈인데,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어버린다.
‘여기가 현실이면 안 되는 건가……?’
모두가 죽어버린 현실과 모두가 살아 있는 꿈.
모두가 죽어버린 꿈과 모두가 살아 있는 현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카앙─
아미르의 손에 쥐어져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본 자예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르.”
“……형.”
“그래. 이제 괜찮아. 우선 다른 이상이 없는지 검사부터…….”
쩌적!
텅 빈 오른손에 생겨나는 얼음단검.
빙결연금으로 다시 단검을 만들어낸 아미르의 모습에 막 다가가려던 자예드가 걸음을 멈췄다.
“너 또…….”
“몽환마가 가문을 습격한 그날. 아버지는 수백 마리의 나비가 되어 죽었어.”
자신이 기억하는 현실을 중얼거리며 아미르가 자예드를 바라보았다.
“장로들은 모두 백치가 되어버렸고 단원들은 세뇌당해 하인들을 학살했었지. 형도 알고 있을 거야.”
“…….”
“내가 몽환마한테 홀려 멍청하게 환각이나 보고 있던 그때…… 날 데리고 도망치던 게 형이었으니까.”
몽환마에 의해 저택에 있는 모두가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때. 오직 자예드 한 사람만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친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러오는 단원들을 죽이고, 몸을 내던지며 앞을 가로막는 하인들마저 죽인 채 계속해서 달렸던 것이다.
“끔찍했겠지. 나였다면 차라리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포기해 버렸을지도 몰라. 그날 이후로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
“…….”
“하지만 그날…… 형은 나를 안고 계속해서 달렸어.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아미르가 천천히 오른손의 단검을 들어 올렸고, 그대로 자신의 목덜미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경악하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예드를 바라보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꿈속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던 거지.”
푸확!
연무장의 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피 냄새에 자예드가 아래에 깔린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짓눌린 오른손과 살짝 스치기만 한 목덜미.
주르륵
그리고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왼손의 얼음단검.
이를 악물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미르의 모습에 자예드가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무하네 정말.”
한순간에 주변이 조용하게 변했고, 현실처럼 생생하던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 변했다.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놓은 거대한 무대를 보는 듯한 감각.
그 이질감에 아미르가 놀라는 사이 자예드가 옆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윽…….”
배에 박힌 단검을 감싸쥐며 눈매를 일그러뜨리는 자예드. 그 모습에 아미르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형! 괜찮아?”
“네가 찔러놓고 그런 소리 하는 거냐……?”
원망스러운 시선에 아미르가 흠칫 떨자 자예드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찌를 때는 신나게 찔러놓고 이제 와서 미안한 척 하기는…….”
“그렇지는…….”
“됐다 됐어. 그보다…….”
배경처럼 서 있는 단원들, 그리고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이세훈을 바라본 자예드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슬슬 일어나지 그래? 이제 다 끝난 거 같은데.”
벌떡!
자예드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는 이세훈.
상반신이 대각선으로 어긋난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그 모습에 아미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여기도 몽환성 안이잖아. 이 정도야 간단하지”
어깨와 허리를 잡고 어긋난 몸을 제대로 맞춘 이세훈은 허리를 가볍게 돌린 다음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흐음. 갑자기 왜 버리나 했더니 그새 다 파악한 거였구만.”
자예드의 복부에 박힌 얼음단검.
겉보기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자신이 건네준 단검에 담긴 힘, 깨어나는 꿈이 어느 정도 재현되어 있었다.
아마 동천안과 빙결연금을 응용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낸 것이리라.
“상태는 좀 어때?”
“아프고 춥네. 다시 자고 싶어도 못 잘 것 같아.”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죽였어야 하니까.”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자예드가 흠칫 떨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 같은데…… 설명 좀 해줄 수 있겠어?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거든.”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듯한 자예드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유부터 설명하자면…… 몽환마는 당신을 이용해 더 강력한 존재가 되는 법을 연구하고 싶었던 걸 거야.”
“더 강력한 존재……?”
“그래.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무작정 목표만 정해두고 끝없이 학습을 반복시켰던 거지.”
이세훈의 설명에 자예드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해?”
“쉽지는 않지.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이세훈은 이미 회귀 전에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마신에 도달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멸각의 마신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거겠지.’
수많은 영웅의 심상을 흡수하여 마신에 도달한 도플갱어.
물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거의 똑같아 보였다.
“믿기지가 않네…….”
“당장 당신만 해도 이 안에서 S급까지 성장했잖아.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본 셈이지.”
“그건…… 그러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자예드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의 기억으로는 순수하게 수련과 깨달음을 통해 강해진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될 때까지 끝없이 학습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물론 빈말로도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할 수 없어. 간단히 비유하자면 수십 개의 퍼즐을 뒤섞어놓은 상태에서 모양만 대충 맞춘 느낌이니까.”
퍼즐의 형태만 놓고 보면 완전히 맞춰져 있지만, 그 위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구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 경지가 과연 정상적일 수 있을까. 이세훈의 설명에 아미르와 자예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정신 나간…….”
“이것 참…… 기억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가 있었던 것일까. 만약에라도 그 기억이 남아 있었다면, 떠올리는 즉시 자아가 붕괴될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이 공간은 몽환성을 토대로 환락가와 악몽의 도시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서 유지되고 있어.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아마 그 덕분일 거야.”
“나는 그런 장소에서 팔자 좋게 자고 있었던 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자예드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책할 필요는 없어. 나도 잠깐 속을 만큼 완벽한 곳이었으니까.”
처음에나 잠이 덜 깬 것처럼 약간 이질감이 느껴지지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이 현실이라고 믿게끔 이유를 만들어내게 유도한다.
만약 자신에게 아침마다 현실을 확인하는 버릇이 없었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곧장 휩쓸렸으리라.
‘그리고 깨어나는 꿈이 발동되면서 몽환마를 불러들였겠지.’
전체적으로 아슬아슬했던 상황.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알아낸 것도 있었다.
“상황 설명은 이 정도면 됐고…… 지금부터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잘 풀린다면 몽환마를 단숨에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거야.”
이세훈의 이야기에 아미르와 자예드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몽환마를 폐인으로 만들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세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앞에 말했지만 이곳은 몽환마가 만들어낸 장소야. 하지만 꿈의 중심은 자예드 싱, 바로 당신이지.”
“내가 중심이라고?”
“그래. 아마도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 구심점으로 써먹으려고 한 거겠지. 간단히 말하자면 집주인과 입주민 같은 느낌?”
이 장소를 만들어낸 것은 몽환마가 맞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예드였다.
“즉, 마음만 먹으면 이곳, 몽환성을 통째로 뒤집어버릴 수 있다는 거지.”
몽환성이 몽환마의 심상 그 자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일격.
거기에 몽환의 마력이 지닌 특성을 생각한다면 그 즉시 육체가 붕괴될지도 모르리라.
“…….”
“…….”
이세훈의 설명에 두 사람이 가능성을 느꼈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이내 자예드가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간단해. 지금처럼 어중간한 상태가 아니라 확실하게 깨우는 거지.”
아미르가 떨어뜨린 새하얀 단검을 주워든 이세훈이 자예드를 바라보았다.
“대신 환락가로 나갔을 때 당신이 어떻게 됐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꿈에서 깨어난 여파가 어떻게 작용될지 모르니까.”
아미르는 자신이 보호해 줄 수 있지만 자예드는 깨어나는 역할이기에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자신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운의 영역인 것이다.
“운인가…….”
담담히 중얼거린 자예드는 문득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미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그 성숙해진 모습에 자예드가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아미르의 어깨를 툭 쳤다.
“고맙다. 잘 커줘서.”
자예드의 이야기에 아미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에는 힘들었기에 아미르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눌러 담아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고마웠어.”
그날 자예드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그 감사인사에 자예드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가급적 안 아프게 부탁해.”
“노력은 해볼게.”
각오가 느껴지는 자예드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앉아있는 아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미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미르가 이세훈의 옆에 붙었고, 자예드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럼 둘 다 나가서 보자고.”
준비가 끝난 자예드의 모습에 이세훈이 단검을 겨눴고, 그 안쪽에 깨어나는 꿈의 힘을 최대한 실어냈다.
그리고 자예드에게서 자신을 투영하며 심장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고.
파캉!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깨져 나갔다.
자예드의 꿈이자 몽환마의 꿈인 몽환성.
그 겹겹이 둘러싸인 꿈들이 무너지고, 이어서 바깥의 풍경이 세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휘우웅─
하늘을 뒤덮은 검은 하늘과 황폐화된 대지. 그리고 그 위에 솟아 있는 보라색의 기괴한 건축물들.
일순간 숨을 못 쉴 만큼 마기로 가득한 마경, 악몽의 도시를 본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무슨…….’
분명히 환락가로 나왔어야 했는데 어째서 악몽의 도시로 단번에 나왔단 말인가.
몽환마에게 당한 건가 싶어 주변을 살피던 그때. 이세훈의 눈에 다른 것들이 보였다.
“수, 숨이…….”
“여긴 또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아악! 싫어! 들어가고 싶지 않아!!”
목을 움켜쥔 사람과 주변을 보며 괴성을 지리는 사람.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잡힌 채 건물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인까지.
마경의 환경에 휩쓸린 채 비명을 내지르는 수십만의 인파에 이세훈이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환락가를 없애 버렸다고……?’
몽환성이 해제되어서 그렇게 됐다고 보기에는 이미 몇 분이 지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이세훈이 동요하던 그때.
아아…….
세 사람의 뒤에서 기괴하게 비틀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믿고 있었어요. 당신이라면 반드시 그를 깨울 거라고…….
전신이 안개처럼 변해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몽환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빈사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 대신 환희가 가득했다.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저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저는 꿈을 꾸는 것밖에 못하고, 당신은 깨어나는 것밖에 못하니까요…….
현실을 꿈이라고 믿으며 꿈을 현실이라고 부정하는 모순.
이 거대한 꿈을, 세계 전체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마음 속 깊이 그 모순을 경험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미 심상이 완성되어버린 자신들은 그 모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 그렇기에 몽환마는 이세훈에 의해 환락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계획을 변경했다.
자신들로 안 된다면─
“……어?”
─자격을 갖춘 이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
자예드의 가슴 위에 내려앉은 보라색 나비.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이세훈이 곧장 달려들었고.
자…… 깨어나도록 하죠…….
보라색 나비, 마신을 탄생시키는 근원의 파편이 자예드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