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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251화 (251/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51화

순례자 칼 안데르센.

겉보기에는 30대 중반 정도지만 실제연령은 56세.

S급까지만 해도 치료마법이 특기인 평범한 영웅이었으나 완등자가 된 이후 신성력이라는 새로운 힘을 발표하면서 순례교를 설립.

기존의 종교 단체들을 흡수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렸고,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는 위르겐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위적인 인물이었으나.

“으으음…….”

지금은 바닥에 주저앉아 주변을 쓰다듬고 있는 괴팍한 사이비 교주에 불과했다.

“흐음…… 으음…….”

진중한 표정을 지으면서 순례길의 곳곳을 쓰다듬는 칼.

얼굴만 보고 있으면 뭔가 엄청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막상 바닥을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으니 그 모양새가 뭔가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교인들이 보면 환상이 깨지…… 진 않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회귀 전에 만났었던 대주교들도 모두 칼을 설명할 때 신성하지만 소탈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모습을 보니 말 그대로 격식 같은 것도 따지지 않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뭐, 좀 이상하게 보여도 완등자라는 건 변함없지.’

겉보기에 편안해 보인다고 해서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순례교의 문헌에서 봤었던 ‘이단’에 관한 자료들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주의해야 하리라.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이세훈이 칼의 조사가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때.

“…….”

바로 옆에서 반짝이는 금발의 여인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왜 쳐다보십니까.”

무시해도 고개를 돌릴 기미가 없었기에 이세훈이 하는 수 없이 물었고, 그에 아리아가 담담히 대답했다.

“언제까지 무시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끈질기시네요.”

이세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리아가 피식 웃었다.

“조금 그런 면도 있기는 하지. 그보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순례자님한테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선배는…….”

“신성마법에 대해 수업을 듣고 있었어.”

완등자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체험권.

1학기 학년수석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아리아는 순례자를 선택해서 함께 순례길을 다니며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 류은하랑 같이 괴검이랑 싸웠다고 했었던가.’

뉴스로 보았던 소식을 떠올린 이세훈은 살짝 의외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회귀 전의 아리아는 누군가에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무심하게 검을 휘두르던 완등자이자 마신.

그게 바로 아리아 마이어스였던 것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이전에 인연이 성립했었지.’

그래 봐야 레벨1이니까 별다른 영향은 없겠지만, 그로 인한 나비효과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세훈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자 아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수업을 듣고 있는 게 그렇게 의외야?”

“아. 뭐…… 종교에는 관심이 없으실 것 같았거든요.”

“흐음. 뭐, 솔직히 말하면 그렇긴 해. 신성력에 관해서도 흥미가 없고.”

“그러면 왜 굳이……?”

완등자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도움도 안 되는 것을 들어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런 이세훈의 물음에 아리아가 담담히 대답했다.

“완등자가 되는 법을 알고 싶었거든.”

“…….”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거절당하긴 했지만…….”

이세훈을 바라본 아리아가 슬쩍 웃었다.

“옆에서 보고 있다 보니 조금 알게 됐어.”

완등자가 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새로운 전력이 될 테니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리아는 완등자가 될 경우 지금보다 더욱더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멸광의 마신이 될 가능성이 생기니까.’

물론 멸검의 마신이 먼저 나타나야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만, 이번에 멸각의 마신이 나타난 것도 그렇고 회귀 전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이세훈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을 때. 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아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내가 완등자가 되는 게 싫은 모양이네.”

이쪽의 생각을 엿보려는 듯 빤히 쳐다보는 아리아의 모습에 이세훈이 불편해하면서도 대답했다.

“완등자가 되면 요구조건을 맞추기가 더 까다로워 질 테니까요. 거절하기도 힘들어지고.”

“흐응…….”

이세훈의 대답에 아리아가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스윽

그 사이로 염성하가 끼어들었다.

“……뭐니?”

“그만 달라붙고 꺼져라.”

염성하의 까칠한 이야기에 아리아가 입꼬리를 비튼 채 눈을 마주보았다.

주변의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

현 바벨의 최강자답게 흘러나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염성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마주보았다.

“흐응…….”

그 반응에 아리아의 눈썹이 까딱였고 이내 염성하의 뒤편에 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 네 작품이야?”

“사람이 어떻게 작품이 됩니까.”

“이 정도로 변했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염성하를 다시 바라본 아리아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제이크한테도 가능할지 궁금한 걸.”

어디까지 꿰뚫어 본 것인지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리아. 그 시선에 염성하가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싫다면?”

“그렇다면 실력행사로 갈 뿐이지.”

마력도 얼마 없을 텐데 기세를 드러내는 염성하의 모습에 아리아가 이세훈을 힐끗 보았다.

“강해진 건 좋은데 버르장머리가 없어졌네. 조금 신경 쓰지 그랬어.”

“뭐…… 가르친다고 듣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가로막아주는 게 편해서 놔두는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염성하의 까칠한 태도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이 정도로 싫어하진 않았을 텐데.’

아리아한테 대련으로 400번 정도 지긴 했었지만 염성하의 성격상 싸움에서 졌다고 이렇게 적의를 드러내진 않는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이세훈이 의아해하다가 금방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것도 광견의 심상 때문인가?’

광견도 멸광의 마신 토벌전에 참전했었으니 아리아를 보고 적의를 드러내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순례길을 부쉈을 때도 그렇고 생각보다 문제가 많은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부분은 손보긴 해야겠네.’

아미르가 멀쩡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빙견이 삼견 중에서 비교적 얌전한 편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삼견의 심상을 어떤 식으로 제어하면 좋을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이세훈 님.”

순례길의 확인을 끝낸 칼이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깐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 예. 괜찮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칼이 다시 앞쪽으로 향했고, 이세훈이 뒤따라가려다가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너무 까불지 마. 지금은 못 이기니까.”

이세훈의 이야기에 염성하가 눈매를 찌푸렸고, 아리아 역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이라.’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이세훈이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었고, 칼이 그대로 몸을 돌려 마주보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후웅!

허공에 나타난 황금빛 장막이 주변을 둘러쌌고, 파도소리를 비롯한 다른 소리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리아 님이 귀가 밝으신 편이라 잠시 소리나 시선을 막아뒀습니다. 그 이외에는 어떤 기능도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편안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칼의 물음에 이세훈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고, 특히 순례길의 파괴와 관련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요구하시는 자격이 뭐일까 고민해보니 순례길의 보수로 고생하신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거기에 유용할 것 같은 기술을 보여드리고 위해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순례길을 파괴했던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 미친 개새끼가 멋대로 저질렀습니다, 라고 하고 싶었지만 염진현의 치료를 부탁해야 하니 밉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순례길을 파괴한건 같이 계시던 염성하 님이십니까?”

“예. 제가 시켰습니다.”

“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대단하시군요.”

별다른 의심 없이 감탄하는 칼의 모습에 이세훈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관심은 없나 보네.’

아무래도 본인이 만들어낸 순례길이 아니다보니 파괴당한 것 자체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이것 참…… 신성력을 얼마나 다루실 수 있을 지만 볼 생각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무리한 시험을 내건 것처럼 되어버렸군요.”

“다른 완등자분들을 보고 제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아. 아무래도 다른 분들이 조금 엄격하긴 하시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칼이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신성력 변환 장치를 만들 수 있는 겁니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성과가 있다니 진행하겠다.

염성하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욱 의욕을 드러내는 칼의 모습에 이세훈이 적당히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방향성만 잡힌 거라 실제로 물건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신앙’이라는 게 저한테는 어려운지라…….”

“흐음. 확실히 그렇겠군요. 아무래도 어려운 영역이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칼의 모습에 이세훈이 눈을 반짝였다.

‘이미 신앙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건가?’

회귀 전에는 대주교들도 ‘신앙’이라는 기운에 대해서 모르는 눈치였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이세훈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칼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 이야기는 차후 다시 나누는 것으로 하고…… 순례길의 복원 과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칼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살짝 긴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성마법의 창시자인 칼이 몇 분이고 순례길을 조사한 거라면 뭔가 이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질문이 올지 이세훈이 대비하고 있을 때. 칼이 이야기를 이었다.

“이세훈 님은 자신이 순례길을 어떤 식으로 복원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순례길을 정확히 어떻게 복원했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그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에 받은 순례자의 향로를 이용해서 펼친 거라 저도 자세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상황이 워낙 급했다 보니 그냥 순례길을 복원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지…….”

칼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정리가 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세훈님은 방금 시간을 거스르셨습니다.”

“……예?”

“시간을 거스른 것처럼 완벽했다든가 그런 은유적인 표현법이 아닙니다.”

파괴된 흔적이 없는 순례길을 힐끗 본 칼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순례길을 파괴되기 이전으로 만드신 거죠.”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뇨.”

고개를 가로저은 칼이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저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

칼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역행하는 효과에 신성마법을 창시한 칼도 펼칠 수 없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한 가지 짐작 가는 점이 있었다.

‘설마 회귀 때문인가……?’

신성마법이란 결국 신성력을 지닌 이가 자신이 바라는 기적을 마음 깊이 바라는 것.

하지만 다른 기술들도 그렇듯이 무작정 바란다고 그것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 기적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강한 믿음과 의지, 즉 ‘심상’이 받쳐줘야 하는 것이다.

‘원래라면 그런 정신 나간 심상을 갖춘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직접 경험해 봤으면 다르겠지.’

회귀를 겪으면서 몽환의 마력에 재능이 생겼던 것과 비슷하게 시간을 역행시키는 효과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상상치도 못 한 상황에 이세훈은 칼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고민했다.

‘납치…… 는 안하겠지. 그럴 사람이 아니니.’

탐구자라면 몰라도 칼은 회귀 전의 행적들만 봐도 그렇게 움직일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시간을 다룬다고 해서 무작정 회귀와 연관 짓지는 않을 터. 일단 당당하게 나가기로 한 이세훈은 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합격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합격……?”

“놀랍긴 하지만 지금 저한테 필요한 건 순례자님의 인정과 도움이라서요.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그 부분부터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이세훈의 모습에 칼이 조금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인데 놀랍지 않으십니까?”

“놀랍긴 하지만 유용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것도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이세훈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답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넘쳐서요. 이런 일도 자주 있다 보니 그렇구나 하고 넘기게 됐습니다.”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이세훈의 이야기에 칼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이내 무언가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실 만도 하군요.”

제련분야의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신성마법은 물론 다른 완등자들의 권능까지 능숙하게 다룬다.

거기에 위르겐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몽환마와 마신까지 쓰러뜨렸으니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을 가지더라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정말 대단하신 재능입니다. 인류의 보물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크흠! 너무 칭찬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신께서 내려주신 이 눈부신 재능을 두고 어찌 불합격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정도면 자격은 충분히 만족하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세훈이 눈가를 씰룩이며 감사를 표하자 칼이 궁금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라는 게?”

“아. 그게…….”

이세훈이 염진현의 상태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설명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칼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요. 일단 염성하님도 들으셔야 할 테니 같이 이야기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이세훈이 장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염성하를 불렀고, 두 사람이 나란히 칼과 마주보았다.

“우선 염진현 님을 치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자세한 건 봐야 알겠지만 제 생각에 최소 10년 이상은 더 사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칼의 이야기에 염성하의 두 눈이 커졌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부에서 10년 이상을 살 수 있다니.

그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염성하가 곧장 부탁하려던 그때.

“다만 치료를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을 바라본 칼이 담담히 이야기를 이었다.

“첫 번째는 본인의 승낙입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지만 그분이 거절하신다면 저도 치료할 생각은 없습니다. 직접 죽음을 선택하신 거니까요.”

염진현의 선택을 존중한다. 지금으로서는 긍정적이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염성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저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염성하는 염진현을 반드시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고통스럽게 살 것인가 편안하게 죽을 것인가라는 선택지 사이에 편안하게 산다는 선택지를 주고 싶었을 뿐.

‘사부님께서 정말로 죽음을 바라신다면…… 그 역시 받아들여야겠지.’

거기에서도 자기의 이기심을 강요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염성하의 대답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뭡니까?”

만약 비용이나 순례교에 협력을 요구한다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도와줄 생각도 있다.

그런 이세훈의 물음에 칼이 담담히 대답했다.

“신께서 그것을 허락하셔야 합니다.”

“……?”

칼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의 허락이 필요하다.

뭔가 종교인다운 말이었지만, 문제는 순례교 내에 그런 식으로 신탁을 듣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잠깐만.’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이고 떠오른 이세훈이 칼을 보았다.

“설마 신탁의 카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1학기 시험기간 때 몽환마의 계획을 미리 알려줬었던 예지마법.

나름대로 유용하긴 했었지만, 그걸로 사람을 살릴지 말지 판단하겠다니?

‘회귀 전에 본인이 죽는 것도 못 막은 양반이 무슨…….’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칼은 담담하게 염성하에게 물었다.

“그 결과도 받아들이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신이라는 정체 모를 존재가 사부님의 목숨을 판가름한다는 것이 불쾌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그런 염성하의 대답에 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럼 가보도록 하죠.”

신의 뜻에 따라 살릴지 죽일지 결정하겠다.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는 듯한 칼의 모습에 이세훈은 다시금 깨달았다.

‘역시 사이비구만.’

완등자 중에 정상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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