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296화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세워진 새하얀 도시.
어딘가 음산하고 현대식 건물로 가득 찬 게헨나와 다르게 이쪽은 고풍스러운 건물 양식이 많았는데 마치 유럽의 오래된 거리와 비슷했다.
개학식 이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순례교의 특별지구.
바로 아래쪽에 펼쳐진 ‘파라데이’의 광경에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보았다.
‘이런 구조인가.’
신도시처럼 모든 구획을 완벽하게 짜놨던 게헨나와 다르게 파라데이는 모든 구역이 느슨하게 지어졌다.
기본적인 인프라는 갖췄지만 그 이상은 갖추지 않은 지역. 볼거리도 적은지 방문객도 게헨나보다 훨씬 적어 보였는데 나름의 장점은 있었다.
‘시골 같은 느낌이구만.’
게헨나가 언데드들에 의해 돌아가는 공장 같았다면 파라데이는 시골의 한적한 마을 같은 느낌이 있다.
아마 거주지로서는 이쪽도 꽤 수요가 있지 않을까. 이세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우웁…… 윽…….”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앓는 소리.
그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거대한 까마귀의 발에 붙잡혀 있는 제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보면 납치라도 당하는 것 같은 그 처량한 모습에 이세훈이 앞쪽에 앉아 있는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제이크도 올려주면 안 돼?”
“응. 안 돼.”
뒤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에리카. 그 모습에 이세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이 올라탄 거대한 까마귀를 내려다보았다.
후웅!
바벨의 상공을 날고 있는 6m 크기의 까마귀.
멀리서 보면 진짜 까마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에 선들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 정체는 바로 에리카의 주술인 ‘봉신오封神烏’ 였다.
스륵
기존의 까마귀에 봉신우의를 덧씌우는 주술.
크기만 키우는 게 아니라 힘도 증폭시켰는데, 간단히 비유하자면 창작물에 자주 나오는 거대 로봇 같은 느낌이었다.
“까악!”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갑주와 힘이 마음에 드는지 안쪽에서 힘차게 우는 까마귀.
그에 맞춰서 봉신우의가 마력을 내뿜으며 거대한 진동을 사방에 토해냈는데 그 피해를 받는 것은 제이크였다.
“우욱…… 그만…….”
계속 흔들리는 상황에 진동까지 직격타로 맞으면서 괴로워하는 제이크.
분명히 출발할 때는 경전철보다 빠르고 편하다고 해서 받아들였는데 막상 그 혜택을 보는 것은 등에 올라탄 자신과 에리카밖에 없는 것이다.
“자리도 남는데 그냥 올려줘.”
“자리 없어.”
“까악!”
여전히 단호한 에리카와 그에 맞장구치듯이 우는 까마귀.
아무리 봐도 자리는 차고 넘쳤지만 올려줄 생각도 안 했고, 아래쪽에 매달린 제이크 역시 항복하지 않았다.
“괘, 괜찮아.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
“……그러냐.”
처음에 발로 붙잡고 간다고 했을 때 조금 늦어도 따라오지 왜 굳이 고생을 자처하는가.
자기 딴에는 에리카와 단둘이 있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그리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바벨 안이기도 하고 말이지.’
다음에 제이크를 따로 불러서 안심시켜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속 좁은 짓 해봐야 본인만 손…….”
“난기류.”
“까아악!”
아무 일 없이 평화롭던 상공에서 갑자기 위아래로 몸을 마구 흔들어대는 봉신오.
등에 탄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지만 발에 붙잡혀 있는 제이크는 거의 내동댕이쳐질 기세로 흔들렸다.
“으가아가각.”
혀를 씹었는지 정체 모를 괴성을 내지르는 제이크. 그 모습에 이세훈이 한숨을 내쉬며 에리카에게 이야기했다.
“자꾸 그러면 나 내린다?”
1학기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 정도 높이에선 뛰어내려도 문제없다.
“…….”
이세훈의 경고에 에리카가 말없이 까마귀를 진정시켰고, 아래쪽에서 제이크의 편안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들 싸움도 아니고 나참…….’
그 뒤로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비행이 이어졌고, 금방 파라데이의 한적한 길목에 도착했다.
스르륵
“까악!”
까마귀를 둘러싼 봉신우의가 재빠르게 풀리며 에리카의 옷에 스며들었고, 까마귀 역시 한 차례 울면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전이랑은 확실히 다르네.’
1학기 때와 달라진 에리카의 주술에 이세훈이 흥미롭게 보고 있을 때. 심호흡으로 멀미를 가라앉힌 제이크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부터 갈 거야? 대성당?”
“수도원부터 가는 게 좋아.”
제이크의 이야기에 곧장 끼어드는 에리카.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다시 신경전을 벌였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민에 잠겼다.
‘대성당과 수도원이라…….’
파라데이라는 지역까지는 같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기를 제안한 사람들은 각자 달랐다.
제이크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익숙한 대성당의 선교사들에게 조언을, 에리카는 성법기를 만드는 수도원의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제안했다.
두 가지 모두 나쁜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세훈이 좀 더 끌리는 것은 에리카가 제안한 후자였다.
‘선교사는 회귀 전에 지겹도록 봤지.’
회귀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기보다는 수도원의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심상을 분석하는 걸 연습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그렇게 이세훈의 점차 수도원 쪽으로 기울어져가던 그때.
“음? 아. 오셨군요.”
옆쪽에서 들리는 느긋한 목소리.
그에 시선을 돌리자 대문 앞에 놓인 의자에서 낮잠을 자던 사람이 얼굴을 가린 모자를 치웠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갈색 피부의 노인.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말 샤르마?’
회귀 전에는 순례교의 총대주교였으며 지금은 파라데이의 총괄 책임자가 된 대주교.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이세훈이 묘한 눈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어떻게…….”
“오늘 이곳에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카말.
제이크와 에리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세훈은 얼추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신탁의 카드인가.’
신성력을 통해 미래를 예지하는 기술.
대주교쯤 되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었으니 그걸 통해서 자신들이 이곳에 오리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리라.
조금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봐야 할 얼굴이었기에 이세훈이 금방 생각을 정리한 뒤 물었다.
“그럼 이제 뭘 하실 생각입니까?”
신탁이 손님의 방문만 알려줬다면 구체적으로 뭘 해야겠다고 정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세훈의 예상대로 카말이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대답했다.
“이세훈 생도님만 괜찮으시다면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파라데이를 안내해드리고 싶군요. 어떠십니까?”
“음. 그것도 괜찮네요.”
총괄 책임자와 함께 다니면 어딜 가든 출입이 막히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카말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곧장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대로 자신들을 버리느냐는 배신감이 느껴지는 시선.
이럴 때만 죽이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세훈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이 둘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오늘 같이 구경하기로 했었거든요.”
“물론이지요. 두 분까지 포함해서 중요한 손님이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카말은 두 사람의 동행을 흔쾌히 허락했고, 자연스럽게 본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럼 어디부터 가나요?”
대성당을 먼저 갈 것이냐 수도원을 먼저 갈 것이냐.
이세훈이 카말에게 선택권을 넘겼고 제이크와 에리카도 그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본다.
“으음…….”
갑작스러운 세 사람의 시선에 카말이 고민하던 그때.
꼬르륵
길가에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게 자신의 배에서 난 소리임을 깨달은 카말이 곧장 결정을 내렸다.
“우선 점심부터 드시지요.”
어찌 보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 * *
파라데이의 남쪽에 위치한 해안가.
북태평양 한가운데에 지어진 바벨은 본래 바다에 들어서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심이 깊어졌지만 이곳은 달랐다.
쏴아아
낮게 밀려오는 파도와 모래사장.
어느 정도 소문이 퍼졌는지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생도들과 주민들의 수가 적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이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순례교에서 해수욕장을 만들 줄은 몰랐네요.”
기본적으로 순례교는 전투, 선교, 의료봉사에만 집중하지 그 이외에 다른 사업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던 순례교와 다른 모습에 이세훈이 신기하게 보자 네 그릇째 음식을 비운 카말이 대답했다.
“제인 성도님께서 추천하셨습니다.”
“……제인 대주교님이요?”
카말의 대답에 이세훈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난 반년 동안 순례교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같이 움직였던 바벨의 선배이자 최연소 대주교인 제인.
그런 그녀가 이런 계획을 추진했을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편안한 장소로 기억되어야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바벨에 다니고 계시니 저희보다는 잘 알 것 같아 조언을 적극 수용했습니다.”
카말의 대답에 이세훈이 다시금 식당 바깥으로 보이는 해안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머무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주는 장소.
처음에는 게헨나와 반대되는 컨셉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다르게 느껴졌다.
‘순례교에 대한 거부감 자체를 낮추는 건가.’
신성력이라는 기적이 생겨나긴 했지만 종교 그 자체를 껄끄럽게 여기는 이들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렇기에 순례교 역시 과거의 종교처럼 나름의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제인은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
좋은 장소, 그리고 좋은 기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너무 미적지근한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세훈은 충분히 가능성이 느껴졌다.
‘원래 심상이라는 건 확 꺾이기보단 천천히 스며들면서 영향을 받게 되니까 말이지.’
당장은 괜찮은 휴양지 정도로 느끼겠지만 이후에 살아가면서 순례교에게 도움을 받고, 또 그 기적을 느끼게 되면 믿음과 함께 신성력을 각성할지도 모른다.
“좋은 생각이네요.”
어째서 회귀 전에 순례교는 이런 방법을 시도하지 않은 걸까. 그 의문을 읽어낸 것처럼 다섯 그릇을 비운 카말이 대답했다.
“제인 성도님이 다른 분들에 비해서 사고방식이 유연하신 편이지요. 가끔씩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저를 포함하여 모두가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합니다.”
“아아…….”
약간 고지식한 부분이 있는 순례교에서 홀로 융통성을 지니고 있는 제인.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 달리 이런 식의 접근법을 떠올리며 추진시킬 수 있었고, 회귀 전에는 그녀가 바벨의 재학 중에 살해당하면서 변화가 멈춰 버린 것이다.
‘세상 일이 어떻게 꼬일지 알 수가 없구만.’
대외적으로는 그저 최연소 대주교의 사망이었지만, 실제로는 순례교의 변화가 완전히 막혀 버린 최악의 사건이었다.
물론 그 변화의 결과가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경직된 순례교가 맞이한 최후를 생각한다면 이쪽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라.
‘변화라…….’
제인이 순례교 전체 방식을 바꾸려는 것처럼 자신도 리 켄세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그에 대해서 고민하던 이세훈은 금방 답을 떠올렸다.
‘안 되겠지.’
완등에 도달한 이를 바꾼다는 것은 순례교와 같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꾸는 것과 비교해야 한다.
수많은 인종과 문화, 역사를 지닌 이들이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가. 이세훈은 그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결국 중간 지점인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자신의 기준에서도 납득은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합격점.
이세훈이 찾아내야 할 것은 그 지점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너무 막연하구만.’
리 켄세는 어째서 리 페이를 산으로 데려갔을까.
성화공은 어째서 마신이 다가오는데도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 대장장이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쏴아아─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이세훈이 그 끝없는 상념을 이어가던 그때.
“이세훈 생도님.”
귓가에 들리는 나지막한 카말의 부름.
그에 이세훈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고, 자신들이 있던 2층 테라스가 뭔가 어수선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음?”
주변을 둘러싼 황금빛의 장막.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고, 거기에는 같이 앉아 있던 제이크와 에리카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세훈은 이 어수선한 분위기의 원인을 알아냈다.
화르륵!
어느새 투명한 불꽃으로 변해 있는 몸.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성화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이세훈의 전신을 불꽃으로 만든 것이다.
‘이 새끼들이…….’
권능에 영향을 받으면서 리 켄세의 성질머리도 영향을 받은 걸까.
이전에 신성력처럼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는 성화의 모습에 이세훈의 눈매를 찌푸리던 그때.
“가라앉히실 수 있겠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는 카말.
깜짝 놀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편안해 보이는 그 노인의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암속성마력인 야계암을 움직였다.
스스슥
바깥에서 날뛰던 성화가 안쪽으로 하나둘씩 끌려 들어갔고, 전신에 붙은 불꽃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 모습을 카말이 주변에 펼쳐놓았던 황금빛 장막, 신성마법을 해제했다.
후웅!
그을린 곳 하나 없이 깔끔한 테이블과 의자.
갑자기 불꽃이 솟구쳤을 텐데도 멀쩡한 것을 보면 온도는 반사적으로 조절했었던 모양이다.
‘내가 이런 실수를…….’
만약에라도 삼견이 봤다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밀려오는 자괴감과 성화를 향한 분노에 이세훈이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이세훈 생도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섯 번째 그릇을 비운 카말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함께 성법기를 만들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