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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302화 (302/309)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02화

오행무구五行武具.

다섯 속성에 각각 특화되어 있는 이 무구들은 다른 전설 등급의 무구들과 다르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았다.

누가 만든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처음 발견된 장소도 던전이나 폐가, 골동품점 등 제각각 달랐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개별적인 무구로 여겨졌었는데 이게 오행무구라고 묶이게 된 것은 한 마인 때문이었다.

“이 무구들은 한 미치광이가 만들어낸 물건이다.”

음지의 성화공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제련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S급 마인 ‘이드라블’.

그가 각지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오행무구를 전부 강탈하여 연구하던 도중 다섯 개 모두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다섯 개의 무구는 오행무구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드라블이 제자들에게 살해당한 이후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행방이 묘연했던 오행무구 중 하나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에 나타난 오행무구는 7년 전에 사라진 ‘목련장창木蓮 長槍’입니다.”

학과장실에서 류은하가 건네준 서류를 받은 이세훈은 그 안에 있는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창날과 창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초록색 창. 목련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진 것을 제외하면 수수하게 생겼지만 실제 능력은 그렇지 않았다.

“대표적인 능력은 재생과 성장. 재생은 몸의 절반이 날아가도 곧장 회복이 가능하며 머리와 팔만 남은 상태에서 생존한 기록도 있습니다.”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살아 있는 이전 소유자의 사진들.

S급 스킬에 버금가는 효과에 이세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음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성장은 소유자의 육체를 점진적으로 성장시키고 보유한 능력을 보조하는 식으로 발동됩니다. 유동적인 능력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목련장창을 얻은 이후 키와 근육이 커진 이전 소유자들. 그리고 그들이 전투 중에 만들어낸 흔적들이 남아있었는데 하나같이 규모가 상당했다.

‘규모만 보면 S급이지만…… 대부분 A급이네.’

소유자의 능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켜주는 목련장창.

전설 등급 무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능력인 데다 영웅이든 마인이든 욕심을 낼 만한 효과였기에 오행무구 중에서도 소유자가 가장 많이 바뀐 물건이었다.

“7년 전에 누가 마지막으로 얻었는지는 알려진 게 없네요.”

“예. 그 이후로 행방도 묘연해져서 특정 집단이 손에 얻은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습니다.”

“흐음…….”

류은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서류의 마지막, 새로운 소유자에 대한 정보를 읽어보았다.

A급 마인 드리아스.

겉보기에는 초록색 머리칼의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다섯 명의 영웅을 찢어 죽인 흉악범이었는데 그 정보를 읽던 이세훈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녀석…… 벨로즈 소속이네.’

과거 환락가에서 활동했던 마인조직 ‘벨로즈’.

이세훈과는 악연이라면 악연인 곳이었는데 부모님을 죽인 마인, 불가살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몽환마 토벌 때 죽으면 어쩌나 했는데…… 살아 있었나.’

물론 드리아스만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만나서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목련장창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어본 이세훈이 탁상에 내려놓으며 류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

이세훈의 물음에 류은하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일단 부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뭔가 내키지 않는 듯한 반응. 이 와중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세훈은 금방 알아차렸다.

“중요한 시기에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그런 걱정하시는 거죠?”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본 이세훈의 모습에 류은하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작게 대답했다.

“……예.”

“마음은 알겠지만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협력관계에서 제일 위험한 게 서로 딴 생각을 하는 거니까요.”

사소한 일들이야 굳이 다 공유할 필요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곧장 공유해야 한다.

당장 회귀 전만 해도 이 간단한 수칙을 안 지켜 초기에 해결할 수 있었던 사건을 대형 참사로 키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도 이제 제 앞가림 정돈 할 수 있으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아시겠죠?”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래서 세라핌 길드가 뭐래요? 목련장창 들고 오면 스폰서 계약 해지해 준대요?”

“예. 그리고 전투 중에 신형무구의 실험도……?”

자연스레 대답하던 류은하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학과장님 골치 아프게 만드는 녀석들이면 그놈들 밖에 없죠. 오행무구로 무슨 일을 시킬지도 훤하고요.”

“음. 그건 그렇군요.”

“그리고…….”

탁상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 본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그놈들이 노리는 게 뭔지도 알 것 같네요.”

이번처럼 오행무구가 모습을 드러내면 양지든 음지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의뢰가 생겨난다.

그렇게 보면 세라핌 길드가 류은하에게 조건을 내건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그들, 그리고 이번에 나타난 드리아스라는 마인의 배후였다.

‘세라핌은 길드장이 『계승』의 간부. 드리아스가 속한 벨로즈는 미래에 『공양』에 흡수되는 조직. 이건 뭐 함정이라고 광고하는 수준이구만.’

여기에 얼마 전에 『여명』을 통해서 들어왔던 제안까지 생각해보면 자신과 류은하와의 관계를 노리고 미끼를 던진 것이 분명하리라.

‘주시자에 잠입한 보람이 있네.’

회귀 전이었다면 찝찝해하면서도 오행무구라는 이야기에 냅다 찾아가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이세훈은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 류은하를 바라보았다.

‘슬슬 말해야 되나?’

그동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주시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자신의 선에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류은하를 확실히 끌어들이기로 한 이세훈은  경계의 권능으로 주변을 차단한 다음 입을 열었다.

“학과장님. 사실은…….”

이세훈은 주시자의 존재, 그리고 그동안 숨겨온 일들에 대해서 회귀만 제외하고 모두 설명했다.

“…….”

설명을 듣는 내내 류은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위험했던 순간이나 세라핌 길드에 관해 설명할 때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모든 설명이 끝난 뒤. 말 한마디 없이 듣고 있던 류은하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깊은 한숨.

그렇게 모든 것을 내뱉은 류은하가 다시금 눈을 뜨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그들의 실험체였을 가능성도 있을까요?”

“그건…….”

류은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놈들은 그런 녀석이니까요.”

세라핌 길드, 그리고 그 전신인 에덴을 운영할 때부터 류은하의 성장에 직접 간섭해 온 유리얼 오펜하이머.

그녀의 정체가 『계승』의 간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류은하에게도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실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

류은하 역시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눈동자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고, 머리카락 끝이 주홍빛으로 타오르며 얼굴이 더욱 무감정하게 변했다.

마치 분노라는 감정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 같은 심상치 않은 모습. 그 반응에 이세훈이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빠르게 마력을 담아 외쳤다.

“학과장님!”

그 강한 부름에 류은하의 몸이 흠칫 떨렸고, 머리카락의 불꽃이 가라앉으며 흉흉하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흐트러졌군요.”

“아니에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어찌됐든 ‘과열’ 상태만 되지 않으면 문제없다.

그 뒤로 이세훈은 류은하가 완전히 진정되기를 기다렸고,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의 상태로 돌아왔다.

“이제 괜찮아졌으니 계속 말씀하셔도 됩니다.”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정된 것 같았기에 이세훈이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앞에 말씀드렸지만 이번 의뢰는 저, 아니면 학과장님을 노린 함정일 겁니다. 저희 둘이서 움직인다면 적도 십악 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병력을 배치하겠죠.”

배교자는 거의 확정이고 『공양』과 『계승』, 그리고 그 이외에 다른 십악과 주시자도 힘을 보탰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에라도 십악이 셋 이상 몰려온다면 상황이 난감해지겠지만, 이세훈에게는 그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놈들도 따로 노는 건 완등자들 못지않으니까.’

주시자와 십악 모두 자신들만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 협력하지 않는다.

거기에 이쪽으로 병력이 과도하게 몰리게 되면 완등자들에게도 만마전을 공격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섣불리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진 않으리라.

“그럼 이번 의뢰는 핑계를 대서 거절하는 쪽으로…….”

“아뇨. 받아들일 겁니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조금 놀란 눈으로 보았다.

십악 두 명에 준하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그곳으로 직접 가겠다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함정이라는 걸 몰랐을 때보단 안전하잖아요. 그게 저희들한테 기회가 될 거고요.”

십악 둘에 준하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한 병력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는데 그냥 보낼 순 없지.’

기회가 올 때마다 십악과 주시자의 병력을 확실하게 깎아낸다. 그런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래도 저희 둘만으로는…….”

“아.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예?”

의아하게 바라보는 류은하의 모습에 이세훈이 씩 웃었다.

“적당한 일꾼이 한 명 있거든요.”

* * *

아리비아 반도의 남쪽.

과거에는 광활한 사막이 펼쳐진 장소였지만 지금은 그 풍경이 사뭇 달랐다.

새하얀 장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열대우림.

겉보기에는 생명력이 넘쳐나는 장소였지만 그 실상은 달랐다.

콰르륵

열대우림 곳곳에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

물이 아니라 마치 석유가 흐르는 듯한 검은 탁류의 모습에 이세훈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직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강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인류의 영역 안에서 순례길의 바깥, 만마의 늪에 오염된 대지와 맞먹는 환경을 갖춘 장소 중 하나.

눈앞에 펼쳐진 S급 위험지역 ‘이디그나 열대우림’을 바라본 이세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지같은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회귀 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구만.’

그때는 지금보다 오염이 더 진행된 상태였기에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기 중의 마기가 짙은 상태였다.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던 열대우림의 모습을 떠올리던 이세훈이 기억을 털어내며 자신이 서 있는 새하얀 장벽을 내려다보았다.

‘순례길보다는 조금 못한 수준인가.’

대부분의 위험지역은 영웅협회가 개발한 장벽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S급부터는 조금 달라진다.

일반적인 시설로는 마기에 침식되어 금방 망가지기 때문에 순례교에서 만들어낸 신성장벽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뭐, 말이 관리지 사실상 봉인이지만.’

다른 위험지역과 다르게 출입구도 없으며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협회와 순례교로부터 입장 절차를 밟아야한다.

거기에 내부의 환경과 몬스터들도 위험해 대대적인 토벌을 제외하면 영웅들의 방문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 글쎄 저희 서른 명이면 S급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저희들 모르세요? 예?”

“저쪽은 들어가도 되고 우리들은 왜 안 되는데!”

장벽의 바깥쪽, 협회의 직원과 순례교의 관리자들이 상주하는 관리소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

목련장창을 차지하겠다고 찾아온 영웅들이 입장불가 통보를 받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쯧쯧…….”

장벽 위쪽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본 이세훈이 혀를 찼다.

S급을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그런 놈들이 곳곳에서 어슬렁거리는 위험구역을 돌아다니는 것이 어디 같은가.

거기에 A급 몬스터들은 더더욱 득실거리는 장소였기에 이런 곳은 강한 집단보다는 압도적인 개인, S급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몰래 들어간 녀석들은 그런 것도 없겠지만.’

신성장벽은 물리적인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기보단 오염을 막는 데 특화되었기에 작정하고 들어가려면 의외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마인들은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목련장창이 탐나는 녀석들이라면 치료약 같은 걸 한가득 챙겨서 어딘가에서 몸을 내던지고 있으리라.

“흐음…….”

이세훈이 새하얀 장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옆쪽에서 인기척이 다가왔다.

“이쪽이 제 일행인 스미스 씨입니다.”

바로 옆으로 다가온 류은하의 소개에 이세훈이 변장한 얼굴로 옆쪽을 바라보았다.

휘황찬란한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15명. 그중에서 맨 앞에 선 붉은 머리의 사내는 특히나 무장이 요란했는데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은…….’

어디서 본 적 있는 머리카락과 분위기.

그것만 해도 눈에 밟혔지만 다짜고짜 이쪽을 적대하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세훈이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다가 사내를 가리키며 류은하에게 물었다.

“저 새끼는 뭐지?”

그 직설적인 물음에 상대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류은하만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했다

“세라핌 길드의 부길드장인 루파엘 오펜하이머입니다.”

“아아. 그 개망나니?”

유리얼 오펜하이머의 장남이자 류은하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접근했던 얼간이.

회귀 전에 턱뼈를 가루로 만들어줬다는 류은하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세훈이 신기하게 보고 있을 때. 그 반응을 본 루파엘의 눈이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갑자기 저 새끼라고 하더니 개망나니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루파엘이 곧장 항의하려고 했지만 이세훈은 거기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괜한 헛소리 말고 물건이나 넘기지.”

“뭐…….”

“여기서 늦장부리다가 다른 녀석들한테 목련장창이 가면 곤란한 건 그쪽 아닌가? 계속 방해할 거면 그냥 때려치우고 가버릴 수도 있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마다 가차 없이 끊어버리는 이세훈. 그 모습에 루파엘의 눈매가 더더욱 일그러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겉모습은 30대 정도로 보이지만 어머니로부터 상황을 전달받은 루파엘은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의 류은하 곁에 붙어 바깥으로 빼내려는 건방진 애송이. 변장한 이세훈을 본 루파엘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 그딴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주제도 모르고 이곳까지 굴러들어왔으니 놈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마음을 가라앉힌 루파엘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가져다 줘.”

“예.”

부하 한 명이 두 사람을 향해 가더니 아공간 포켓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주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은 케이스. 류은하가 그것을 건네받자 루파엘이 이야기했다.

“이전처럼 전투 중에 일어난 현상을 모두 기록해서 가져다주면 돼. 차후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다음은 없을 겁니다.”

케이스를 챙기며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류은하.

자신을 향한 차가운 눈빛에 루파엘이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우리 길드에서 만드는 무구만큼 너한테 잘 맞는 게 없잖아?”

“…….”

“우리도 안에 들어가니까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그 안에 호출장치도 있으니까. 그리고…….”

옆에 선 변장한 이세훈을 본 루파엘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오래 살고 싶으면 그 말버릇은 고쳐야…….”

“거기.”

“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그에 루파엘이 의아해하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알아서 피하세요.”

황금빛 섬광이 장벽 위에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아아악!”

“도련님!”

제때 피하지 못한 루파엘의 몸이 신성장벽 안쪽으로 튕겨졌고,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깜짝 놀라며 뒤따라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깔끔해진 장벽 위. 그리고 방금까지 루파엘이 서있던 곳에 착지한 금발의 여인, 아리아가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 늦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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