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6번째 후보 (4)
‘이것들이 감히!’
니엘의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오늘 그녀가 바랐던 것은 두 가지.
딸, 레이의 개화식 무사 완료와 생일 축하.
그리고 테오의 그릇을 가늠하려던 것뿐인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놈팡이들이 축하 자리를 망치려 들고 있었으니.
“수선궁주께는 미안하게 되었소. 하지만 이는 우리로서도 전혀 묵고할 수 없는 일. 그러니 백갑용기대장을 징죄할 때까지 기다려줄…… 크아악!”
원로 중 한명이 니엘에게 퉁명스럽게 말하다 말고 갑자기 오른팔이 허공으로 튀고 말았다.
다른 원로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수선궁주!”
“그대도 백갑용기대장과 한편을 먹고 우리 원로원을 겁박하겠단……!”
“닥쳐!”
하지만 반발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으니.
우르르!
니엘이 터뜨린 일갈에 수선궁과 연회장이 통째로 흔들렸다.
파스스스-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용이 나타나 형상을 그리고, 사방으로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살갗에 성에가 낄 정도로 온도까지 낮아져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더 이상 그 주둥이를 놀리기만 해봐. 그때는 원로고 나발이고 그 모가지부터 잘라버릴 테니까.”
“……!”
“……!”
“……!”
원로들이 주춤 물러섰다.
지금은 아픈 딸을 간호하느라 자중하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에 그녀는 라그나르를 몇 번이나 뒤집었던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니엘의 시선이 율리우스에게도 향했다.
“백갑용기대장…… 아니다. 짜증 나니까 그냥 이름으로 부르지. 율리우스, 너도 마찬가지야. 이 이상 쓸데없는 짓 할 거면 나랑 사생결단 날 줄 알아. 알겠어?”
율리우스는 대답 대신 무심한 눈길로 니엘을 바라볼 뿐이었다.
“술 처먹고 깽판 칠 거면 밖에서 칠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술주정이야 술주정은? 당신들은 상도의도 없나?”
니엘의 차가운 시선이 율리우스와 원로들을 번갈아 보았다.
“당장 칼 챙기고 꺼져. 당장이라도 네놈들 모가지를 죄다 쳐버리고 싶으니까.”
어느새 그들 주변에는 수선궁의 검사들까지 모여 검을 겨누고 있었다.
모두 니엘이 특별히 검을 전수한 최정예들.
그들은 상대가 누구든지 신경 쓰지 않고, 니엘의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하지만,
“싫은데?”
율리우스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니엘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뭐?”
“당신이 이름으로 부르니 나도 그냥 젊었을 때처럼 편하게 평대 하지. 니엘,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 자리 못 떠나. 저 늙은 꼰대들 팔을 하나씩 뽑아가야 하거든?”
“백갑용기대장!”
“네놈이 기어코!”
원로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거나 말거나, 율리우스는 입가에 맺힌 냉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아니더라도 저쪽도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말 한번 잘했구나.”
바로 그때, 모든 지혈을 마친 울프강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섰다.
“그래. 이렇게는 그냥 못 가지. 감히…… 날 이 꼴로 만들고 어딜 끝내려 한단 말이냐……!”
오른팔을 잃었다.
검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오른팔을.
백 년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면서 이런 수모는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바.
울프강은 이 자리에서 율리우스와 사생결단을 내버릴 참이었다.
‘이대로 끝낸다면 나의 정치생명은 모두 끝장나고 만다.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버텼는데! 그딴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이미 에드와의 일로 인해 의심받아 언제 숙청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신세가 아니던가.
하지만 차라리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자신의 입지를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죄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룡에 의해 핍박받는 원로원이라고 프레임을 짤 수 있다면…… 그래서 단결을 이루고 마룡을 꺾어버린다면 흑룡도 더 이상 내게 정치적 압박을 넣지 못할 것이다.’
카일, 흑룡, 율리우스, 매화궁주.
이들 네 사람이 쥐고 있는 가문의 권력에다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장 실패할 것 같지도 않았다.
율리우스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백갑용기대가 이 자리에 없는 이상, 당장 여기선 원로원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여차하면 니엘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울프강은 모든 정치적 계산을 마치고 나선 것인데,
‘웃어?’
정작 율리우스는 이쪽을 보면서 더 짙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순간, 등골을 타고 불안감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래. 끝까지 해보자는 거지?”
스스스스-
반면에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여긴 니엘은 눈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좋아. 해보자. 그 주둥이들을 모두 찢어버리면 내 딸의 생일잔치를 망칠 놈도 더 없겠지.”
니엘이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눈보라가 빠르게 그곳으로 압축되면서 거대한 빛살을 구성했다.
그것을 아래로 내려치려는 순간,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제 의견을 한번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멈칫.
니엘의 귓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니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테오가 토르켈과 나반을 데리고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테오 라그나르?
-뭐야? 갑자기 수선궁주께서 왜 공격을 멈추신 거지?
-테오 라그나르가 뭔가를 말한 것 같은데……?
-그런데 흑색철기대장과 왜 함께 있는 거야?
-남은 한 사람, 바커스의 사생아 아냐? 이번에 새롭게 가주직에 앉을 거라던?
전혀 어울리지 않은 조합에 사람들이 웅성대는 동안.
「백갑용기대의 대원으로서가 아닌, 이 생일잔치가 망가지기를 바라지 않는 레이의 남매이자 친구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니엘은 테오의 말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딸의 친구.
평생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단어가 그녀를 움직였다.
“……그래. 어디 한번 지껄여보아라. 단, 쓸데없는 말로 내 시간을 끌려던 거였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테오는 어느새 살기를 푼 율리우스와 이블린 쪽으로 괜찮다며 살짝 목례를 취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울프강의 시선은 그냥 무시했다.
“이번 갈등을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여흥으로 삼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흥?”
니엘은 전혀 내용이 짐작 가지 않아 눈살을 좁혔다.
군중도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원래 북방의 고대 전통에서 연회의 끝은 항상 참가자들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힘겨루기 시합으로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라그나르의 전통에도 그런 경우가 많은 편이었구요.”
환경이 척박한 북방은 오래전부터 강자에 대한 숭상 기질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것은 곧 라그나르에도 고스란히 남아 강자존의 법칙으로 화려하게 꽃피웠으니.
니엘도 그제야 테오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갈등도 여흥으로 끝내게 하자?”
“예. 그렇습니다. 백갑용기대와 원로원, 각 측에서 3대3, 혹은 5대5 정도로 인원을 뽑아 겨루게 해서 승자를 가리는 겁니다.”
“상품은 승자가 원하는 것으로. 승자독식이겠군.”
“그것이야말로 라그나르의 법칙이니까요.”
피식!
니엘은 가볍게 웃었다.
눈 가리고 아웅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이것처럼 자신과 딸의 자존심도 챙기면서, 저 꼴도 보기 싫은 두 세력의 갈등을 봉합시킬 방법은 보이지 않았으니.
‘레이가 홀라당 넘어갈 만한 이유가 저것이었군.’
때마침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레이가 2층 테라스에서 테오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테오도 덤덤하게 인사했다.
이렇게 많은 시선이 몰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닮았어.’
마치 젊은 시절의 누군가와.
“여전히 생일 축하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집중되는 게 전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이겠군.”
니엘은 짧은 감흥을 뒤로하고, 다시 사나운 눈빛으로 율리우스와 울프강을 번갈아 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가 다다. 싫다면 당장 말해. 그 주둥이에다 검을 쑤셔 넣어 줄 테니까.”
율리우스가 고개를 으쓱거렸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내 새끼가 내건 제안인데.”
“우리도 좋소.”
울프강과 원로들은 저쪽에 원하는 대로 판세가 끌려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엘이 도로 검을 검집으로 수납하면서 외쳤다.
철컥!
“좋다. 여흥은 앞으로 30분 뒤, 바로 이 자리에서 마저 잇겠다. 백갑용기대와 원로원은 그 안에 각자 3명씩 검사를 골라 놓도록.”
* * *
‘후우! 다행히 먹혔어.’
테오가 겨우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큰 대형 분쟁이 터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옆에서 테오를 계속 지켜보았던 나반과 토르켈은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역시 입을 터는 솜씨 하나는 대단하군. 검보다 혀가 훨씬 더 날카로워.’
‘나반이 이 아이에게 주군 운운했던 게 농담이 아니었어.’
토르켈은 테오에 대한 평가를 실시간으로 재조정하고 있었다.
위험인물로.
배짱이면 배짱, 언변이면 언변, 재능이면 재능.
이 아이가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게 되면 어떤 모습이 될까?
“테오!”
그때, 수선궁의 2층 테라스에서 무언가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이쪽으로 다급하게 뛰어왔다.
“레이. 오랜만이야.”
“다친 데는?”
레이는 테오에게 달라붙어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살폈다.
“괜찮아. 안 다쳤어.”
“엄마 미워.”
“왜?”
“테오한테 화냈잖아.”
“수선궁주 님은 하실 일을 하셨을 뿐이야. 오히려 레이를 지키려고 그러신 건데?”
“그래도 너무해.”
테오는 툴툴대는 레이를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아이도 평범한 모녀 관계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레이, 이게 얼마 만이야? 폐관수련 잘 끝났다는 말은 들었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운데?”
도중에 토르켈이 반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지만, 레이는 그를 보면서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가 다시 테오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원로원장, 무서워.”
졸지에 깔끔하게 무시당한(?) 토르켈은 어벙한 얼굴이 되고 말았고, 나반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천하의 토르켈도 무시당할 때가 있군.”
“……하, 하하. 우리 레이가 사실 부끄러움이 좀 많거든.”
“그런가? 성격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긴 해도 내성적이진 않은 것 같은데.”
“하하하하. 내가 그래도 레이의 오빠인데 그런 걸 모르려고.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이얀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만나서 반가웠어, 나반. 다음에는 술 한잔 같이하자.”
나반은 떠나는 토르켈을 보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녀석도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러는 사이.
테오와 레이의 옆으로 율리우스와 이블린, 세실리아와 웰링턴, 에리카 남매가 다가왔다.
이블린은 여전히 자신 때문에 일이 커졌다는 생각에 불편한 얼굴이었다.
“대장님, 테오.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지 않으셔도……!”
“이건 단순히 너와 저 영감탱이의 일이 아니야. 나와 백갑용기대의 일이지. 우리를 무시한 게 아니면 이딴 짓을 또 할 생각을 했겠어?”
“저도 대장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조장님께선 죄가 없으십니다. 이건 저희가 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율리우스의 시선이 테오에게로 향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대련하자고 제안한 걸 봐서는 무슨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맞지?”
“예. 우선 저들이 머릿수로 저흴 몰아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제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왜? 쪽수로 밀리면 내가 안 될 것 같았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축하받아야 할 친구의 생일에 피를 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율리우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최대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상대를 잘 배려해서 말한다 싶었다.
사실 율리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원로원과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자신도 아주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이기나 지나, 결국 그 뒤에 불어닥칠 정치적 후폭풍은 훨씬 거셀 테지.
테오는 단 몇 마디 말로 그것을 모두 방지한 셈이었다.
‘못난 대장 때문에 수하가 고생이군.’
테오에게는 내심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어떻게 상황을 타개할지,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지 궁금했다.
테오는 항상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그럼 대진은 어떻게 짤 생각이지?”
“저쪽에서 맨 마지막은 분명히 원로원장이 나올 겁니다.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해야 할 테니까요.”
“명예란 게 있기는 하나?”
“없는 명예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니까요.”
“그도 그렇군. 그럼, 거기엔 내가 나서면 될 것 같고. 앞선 두 자리는?”
“제가 서겠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
율리우스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테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두 자리 모두요.”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