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추운 겨울 (2)
-한시라도 연애를 하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율리우스가 젊은 시절에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꽃미남이었던 젊은 시절에 한시도 쉬지 않고 연애를 즐겼다.
수많은 귀부인과 염문을 뿌리고, 영애들이 그를 두고 다투는 것을 보고 내심 즐거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던가.
율리우스는 그런 연애가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연애할 시간은 비워놓던 그였지만.
갑자기 전부 재미가 없어졌다.
밤마다 긁적이던 연애편지를 전부 태우고, 밀회를 즐기던 귀부인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그때는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깨닫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백갑용기대로 발령받은 신입 이블린 네레빌이라고 합니다!
이블린을 처음 보게 되었을 무렵.
딱 그때부터였다.
* * *
“너!”
율리우스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던 울프강은 마지막 대련자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마룡이 올라오는 거 아녔어?
군중도 수군대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율리우스가 아니라, 이번 일의 발단인 이블린 네레빌이 마지막 대련자였기 때문이었다.
“조장님?”
테오 역시 돌아가는 길에 이블린을 보고 놀라고 말았고,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하지만 이 일은 원래 내 일이니까, 내가 마무리할게.”
이블린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테오의 어깨를 두들겨 주곤 지나쳐 대련장에 섰다.
테오는 황급히 뒤돌아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다짐한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잘 벼린 한 자루의 검을 보는 것 같았다.
“나와 장난이라도 치자는 거냐?”
울프강의 지독한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블린은 덤덤하게 단도를 하나 꺼내 치렁치렁한 드레스 밑단을 쭉 찢었다.
그러자 길게 쭉 뻗은 각선미를 자랑하는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뒷머리를 드레스 조각으로 묶어 올렸다.
“후! 이제야 좀 편하네.”
이블린의 두 눈은 생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치켜드는 검.
“정말 네년이 마지막 대련자라는 거냐?”
“왜요? 제가 여기 서니까 두려우신가 보죠, 아버지?”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
하지만 그 뒤 파장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
-뭐? 원로원장 님이 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좀 닮은 것 같기도……?
-아니, 그보다 원로원장 님 나이가 몇인데 저만한 딸이 있다는 거야?
울프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과거사가 만인 앞에서 들키게 생겼으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가 언제 너 같은 딸을 낳아!”
“사생아 주제에 얼굴 하나는 반반하다면서 억지로 싫다는 혼인을 강제하고, 그걸 거절하다가 이렇게 한쪽 팔까지 잃어버렸는데. 그새 잊으셨나 봐요. 잊기 쉽진 않으셨을 텐데.”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없는 말을 지껄이……!”
“아, 그나마 있던 상품 가치까지 사라졌으니 천한 건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었죠? 죄송하군요. 이렇게 천한 게 귀하신 분 앞에 서게 되어서요.”
“네 이년! 닥치지 못할까!!”
콰아아앙!
울프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면을 거세게 박찼다.
아직 니엘이 대련의 시작을 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블린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생아라고?
-지금 원로원장 님 연세가 백 세에 가까우니까, 최소한 칠십 대에…….
-미친 거 아냐?
-아니, 그게 제대로 서긴 서나?
그러는 사이에도 논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이블린의 팔이……!’
테오도 전혀 몰랐던 사실에 놀라면서도, 이제 그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벗어던지는 이블린의 모습에 감탄하는 동안.
차아아앙!
이블린은 침착하게 검을 뽑아 올리면서 울프강의 공세를 거칠게 튕겨내고 있었다.
<마룡육예 – 검막>
<비검행 – 진천>
율리우스의 검술이 풍존의 비전과 만나면서 일어난 변화는 군중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바람……?
-마룡육예랑은 다른데? 뭐지?
-풍존! 풍존의 검이다!
-뭐? 풍존의 진전을 이었다고? 저 사람이?
한때 카일이 권좌를 차지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라 불리던 절대자의 후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원룡의 일격을 튕겨냈다고! 그것도 일개 상급검사가!
-아무리 원로원장 님이 다치셨다지만……. 그럼 최소한 용문검사 급이라는 거잖아?
-한쪽 팔을 잃으면서 기량이 줄어든 줄 알았는데.
-역시 풍존의 전인은 다르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이미 과거에 보였던 이블린의 기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실력에 감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테오 라그나르나 랑케 남매가 신입으로 들어간 것도 놀랐었는데, 이제는 조장이 풍존의 전인이라니. 앞으로 4대 부대 사이에도 전력 차가 커지겠는걸?
저런 인재들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에 백갑용기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험험!”
율리우스는 반사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하다가, 슬쩍 테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블린이 풍존 비급 얻은 것, 자네는 알고 있었나?」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따로 보고가 없었어?」
「조장님께서 직접 보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장님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다고.」
「…….」
율리우스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요즘 숙소에서 몰래 와인 몇 개 챙겨간 거 때문에 그러…… 나?’
그래도 저런 사안을 상관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는다는 게 내심 괘씸했다.
……뭐, 좀 비싼 것들만 쏙쏙 골라가긴 했었지만.
율리우스는 한참 동안 이블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등 뒤로 화려하게 날아오르기 위해 퍼덕이는 나비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마?’
테오는 어쩐지 이블린을 바라보는 율리우스의 시선이 심상찮다고 느끼고 슬쩍 권한을 발동했다.
[‘율리우스 라그나르’를 관찰합니다.]
+
율리우스 라그나르 (41세/남)
· 칭호: 마룡(魔龍)
· 재능: 리더십. 검술 천재. 인재 수집욕. 지고지순한 사랑.
· 상태: ‘이블린 네레빌’에 대한 마음을 뒤늦게 깨닫고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비집고 튀어나올 뻔한 웃음을 억지로 삭여야 했다.
‘설마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재능이 이블린을 향한 거였어? 어쩐지 유독 괴롭힌다 싶으시더니.’
심지어 그 부분만 진하게 처리된 것이 제일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였다.
상태 설명은 말할 것도 없었고.
차차차창!
그러는 와중에도 이블린과 울프강의 충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죽여버리겠다아아아!”
울프강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오러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눈가에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의 시작이었다.
이블린도 울프강의 변화를 깨닫고 침착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대항하고자 했다.
번- 쩍!
콰르르릉-
이윽고 울프강의 검이 이블린의 목덜미를 내리꽂히려는 순간,
「거기까지.」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이블린과 울프강 사이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콰아아앙!
쿠르르-
이블린과 울프강은 그것에 담긴 마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강렬한 의념이 하늘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육합전성.
일정 범위에 걸쳐 목소리를 메아리치게 만든다는 초고수의 기예.
“가주! 이게 무슨 짓이오-!”
울프강은 의념의 주인이 반검묘에 있을 카일이라는 것을 알고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의 공세를 막은 검도 반검묘에 꽂혀 있던 검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덤덤하게 자기 말만 이을 뿐이었다.
「9룡은 모두 산장으로 모이도록.」
그러고는 의념을 거두고 사라졌다.
“가주우우우!”
울프강은 울분을 터뜨렸다.
가주의 명령은 다른 무엇에 비해 항상 앞선다.
그러니 대련도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너희들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하지만 울프강은 도저히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테오와 이블린, 율리우스에 의해 그의 명예란 명예는 모두 똥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대로면 원로원도 백갑용기대에 눌린 꼴로 끝나는 것이 되었다.
그럼 그 뒤에는?
없었다.
아무것도.
츠츠츠츠-
결국 울프강의 두 눈이 광기로 가득 찼다.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수선궁을 물들였다.
“추해도 너무 추하네, 원로원장.”
쯧.
니엘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혀를 차면서 검을 뽑았다.
율리우스와 매화궁주, 흑룡도 차례로 검을 들었다.
만약 울프강이 카일의 명에 따르지 않고 이블린을 해하려 든다면 즉결 처분을 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쩌어어어엉!
바닥에 꽂혀 있던 카일의 반검이 검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어난 거센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삽시간에 연회장과 수선궁을 통째로 뒤덮었다.
“……!”
“……!”
“……!”
파동은 모든 마력과 살기를 강제로 해제시켰다.
니엘, 율리우스, 매화궁주, 흑룡의 살기는 물론, 울프강의 광기마저도.
군중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반검으로 향했다. 울프강도 정신이 번쩍 들어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반검을 바라봤다.
「모이도록.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명백한 마지막 경고.
울프강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이블린을 노려보다가 곧 반검묘 쪽으로 몸을 던져 사라졌다.
다른 9룡도 똑같이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조금 전까지 연회장을 가득 물들이던 살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하……!”
테오는 그제야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자각할 수 있었다.
카일이 딛은 경지는 절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 * *
울프강은 가슴 속에 겹겹이 쌓인 분노를 털어놓을 때가 없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곳은 반검묘.
카일이 있는 성역 중의 성역이었으니.
‘언젠가는……!’
울프강이 율리우스와 흑룡, 니엘의 옆모습을 노려보는 동안,
처처척!
반검묘에는 어느새 8명의 인사들이 모였다.
저마다 성별도, 나이대도, 풍기는 기품도 다 다른 이들.
에드 트로이반을 제외한 모든 9룡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다만, 그 자리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카일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 그가 아끼던 애검 한 자루만 꽂힌 채로 울어대고 있을 뿐.
지잉, 지이이잉-!
「‘그’가 돌아왔다.」
카일의 기척은 반검묘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부재중이라는 뜻.
하지만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그의 의념은 이렇게 어느 곳에서도 전달할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
전설 속 신들만이 디딜 수 있다는 위치에 그가 서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가 던진 한마디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9룡을 격동케 했다.
이 순간에는 울프강도 이블린에 관한 생각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가주! ‘그’라니요!”
흑룡이 대표로 나서서 소리쳤다.
하지만 검명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말한 그대로다. ‘그’가 돌아왔다. 천기가 변하고 있다. 그래서 급하게 나도 이동하는 중이고.」
“……!”
“……!”
“말도 안 되는……!”
“분명히 그때 그자는!”
9룡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명이 이어졌다.
「그러니 다들 단단히 각오하도록. 이번 전쟁은 분명히 쉽게 끝나지 않을 테니.」
9룡들은 침음을 흘렸다.
율리우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니엘은 혀를 찼다.
매화궁주는 이를 꽉 깨물었으며, 흑룡은 하늘을 보며 울분을 터뜨렸다.
울프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등룡과 다른 두 용들도 한숨을 내쉬거나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이번 북방의 겨울은 몹시 춥겠군…….」
때마침 겨울바람을 맞은 카일의 반검이 잘게 떨렸다.
마치 추위를 타는 것처럼.
우웅, 우우우웅-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