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37화. 고말숙 (4)
공연 피날레에 내리는 꽃가루.
혹은 첫눈의 탈을 쓴 화산재처럼.
스으으으.
잿빛의 가루가 아름다운 들판 위로 흩날린다.
시간이 멈춰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
-?
뜨겁게 달아오르던 채팅창 역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메마른 껍질이 한 방……?
-미쳤다…… ㄹㅇ 개미쳤어!
-거짓말이지? 지금 몰카 찍는 거지?
-템도 없이 주먹 하나로 메마른 껍질을 원킬 낸다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
그런 채팅창이 달아오르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었다.
특히나.
-방금 그거 권기 아니었음?
-이 사람 실버잖아! 권기를 어케 써?
-신규 유입분들 많으시네. 이분 이전에도 권기 썼습니다.
-ㅇㅇ. 실버 때 기의 형상화하는 사람 꽤 있음. 지금 최상위권 플레이어들도 대부분 그랬잖아.
-아니, 아무리 권기라도 보스 원킬은 개에반데? 얜 마법계에다 무기도 없잖아!
-메마른 껍질은 물리 내성이 지X이라 그렇지, 체력 자체는 그리 안 높은 보스예요.
-ㄹㅇ. 플래만 가도 호구 취급당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이분이 마법계라는 거임.
비각성자가 아닌 진짜 각성자들.
그중에서도 현역을 뛰는 플레이어들의 대화는 무척이나 활발했다.
-저 손가락이랑 관련된 특성이 분명함. 끼고 있는 무구도 없잖음.
-아니 ㅅㅂ. 님 특성이 무슨 만능인 줄 아세요? SSS급 들고 있어도 이 구간에서 보스 원킬은 불가능해요.
-ㅈㄹ하네. 님이 SSS급 특성 보유자임? 어케암?
-SS급 보유잔데요? 말투 엿같네. 님 티어가 어디신데요?
-플래 상위권인데? 왜. 함 치시게? 말하는 거 보니까 특성빨로 올라온 거 같은데 자신 있음?
-ㅋㅋㅋㅋㅋㅋㅋ. 나도 플래 상위권인뎈ㅋㅋ. 어이가 없네. 님 어디 사시죠?
-현 화랑 길드 소속 다이아 플레이어입니다. 채팅창 님들만 있는 거 아닌데 적당히 하시죠.
-진심ㅋㅋㅋ. 다이아들이 가만있는데. 플래 새끼들이 왜 이렇게 시끄럽지?
브실골.
흔히 말하는 심해 랭크의 플레이어들은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갤럭시 아레나에서 흔히 상위권으로 분류되는 플래티넘 랭크.
그 이상으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줄줄이 등장한 것이다.
참고로 비각성자면 몰라도.
각성자는 갤럭시 아레나와 연동되는 아레니아에서 개인의 정보를 숨길 수 없었기에.
-ㄷㄷ…… 천상계 형님들 진정하세요.
-심해 방송에 무슨 상위권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많냐 ㅋㅋㅋ.
-뭐가 많음? 꼴랑 10명도 안 되는 거 같은데.
-어휴, 한심한 새끼. 바로 열등감 폭발시키네. 실버 방송에 상위권 10명이 그럼 적냐?
-내말이. 열등감은 진짜 ㅋㅋ 레전드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과 비각성 시청자들은 쉽게 의견을 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체 무슨 마법이지? 강화계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육체 능력은 말이 안 되는데?
-더블 클래스가 아닐까요?
-더블 클래스면 초반은 더 구리죠. 올려야 할 능력치랑 경험치가 거의 두 밴데.
-이분 저번 방송에서 자기가 마법계라고 못 박았어요. 더블 클래스는 아닐 듯.
-그럼 진짜 마법계란 말인데. 아니, 이때까지 움직임만 봐도 플래급 전투계랑 맞먹는데…….
-혼란하다 혼란해.
상위권 플레이어로 보이는 채팅들이 줄줄 올라오니 기가 눌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방송의 주인인 시문은 현 채팅창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단순히 채팅창을 닫아 두어서가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를 일격에 처치하였습니다.]
[업적 ‘원펀맨’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메마른 껍질의 죽음과 함께 업적창이 올라온 것이다.
특히나.
[메마른 껍질이 ‘정화의 샘물’을 마시지 못하고 일격에 쓰러졌습니다.]
[특수 조건 만족으로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가 등장합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창은 시문의 두 눈을 휘둥그러지게 했다.
“히든 보스라고?”
-히든 보스? 여기서 히든 보스가 나와? 실번데?
-플레이어 8년 찬데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만족 못 한 특수 조건을 만족했겠죠. 뭔지는 대충 짐작 갑니다.
-하긴, 실버 랭크대에서 메마른 껍질 원킬 낸 거부터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히든 보스.
종종 해당 랭크대의 수준을 벗어나는 힘을 가진 괴랄한 존재들.
지난 아레나인 [잠식된 고블린 교두보]에서 등장한 홉고블린이 그러한 존재였으나.
당시의 홉고블린과 지금의 히든 보스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땐 억지로 히든 보스를 집어넣은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
그 증거가 바로 ‘이름’이다.
히든 보스라면 독자적인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 보스 몬스터 중에서 네임드 몬스터라는 뜻이기에, 그 강력함은 설명할 필요도 없지.
그렇기에 저번 아레나에서 등장한 홉고블린은 제대로 된 히든 보스라 부르기 힘든 거였다.
‘스펙 너프를 따지기 이전에 이름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라.’
지금 나타나는 히든 보스는 뮤리에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시문은 조금이지만 긴장을 담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촤르르르.
맑고 푸른 물웅덩이가 용오름 치며 솟아오른다.
이내.
“꺄하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그러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함과 음산함이 뒤섞인 웃음소리가 아름다운 들판 위로 퍼진다.
“키쟁이 아저씨 죽었구나! 드디어 죽어 버렸어!”
솟아오르던 물속에서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은 이름 그대로 초목지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지 앞서 등장한 초목지기들과 달리.
작고 귀엽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좋겠다! 너무 부러워!”
한껏 달아오른 금속처럼 시뻘건 피부.
그 위로 우수수 돋아난 것은 다름 아닌.
“비늘?”
비늘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정의 그것을 연상시키던 날개는 낡고 헤진 피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날카롭게 찢어진 입과 눈매 위로는 쑤셔 넣은 듯한 뿔이 어색하게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용족 같잖아?’
시문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일까?
[성좌 제우스가 불쾌감을 토합니다.]
[성좌 천마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살기 어린 미소를 짓습니다.]
아레나 내내 잠자코 있던 성좌들이 일제히 불쾌감을 토했다.
‘그러고 보니 성좌들은 용족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
적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세 성좌는 그러했다.
‘그럼 저 히든 보스도 용족과 연관이 있는 걸까?’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일단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저 모습부터가 너무 적나라하지 않은가?
“나 다 봤어! 너너너! 키다리 아저씨를 한 방에 편하게 해 준 녀석!”
뮤리에의 시선이 시문을 향한다.
이내.
“너무 고마워! 답례로 너도 편하게 해 줄게! 키히힛!”
뮤리에의 날카로운 눈에 붉은 기가 일렁인다.
메마른 껍질의 그것과 비슷한 색의 안광이었다.
동시에.
슈아악!
왼쪽 귓가로 파고드는 파공음.
시문은 얼굴 옆을 스친 날카로운 뿌리를 흘낏했다.
뮤리에의 자연 마법이었다.
‘위험할 뻔했군.’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 전신에 연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면.
반응도 할 수 없는 공격이었으리라.
“어라라? 너 좀 빠르네?”
고개를 갸웃하는 뮤리에.
‘마법형 히든 보스라…… 이거 전투가 길어지면 성가시겠는데.’
타앗.
시문은 곧장 바닥을 박차며 곧장 뮤리에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키히힛!”
뮤리에의 죽 찢어지는 눈매와 입가.
동시에 녀석의 주변으론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대로 뚫어 줄게!”
이어 득달같이 마주 달려오는 뮤리에.
그 속도는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따악.
시문의 손가락이 튕겨짐과 동시에.
드드득.
뮤리에의 밑에서 날카로운 흙가시가 솟아올랐다.
“어라라?”
잔상이 남을 정도로 엄청났던 속도가 무색하게.
스윽.
무척이나 여유롭게 흙가시를 피해내는 뮤리에.
녀석의 날카로운 눈가는 일순 둥글게 변했다.
“너 자연 마법도 쓰는구나? 너도 우리 친구였어?”
‘친구?’
무슨 말일까?
물론 시문이 되묻는 상황은 나오지 못했다.
“키힛. 그럼 더더욱 죽여 줘야겠네!”
성난 벌처럼.
뮤리에는 피막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시문의 앞으로 날아들었으니까.
스아악!
붉은 잔상이 살벌한 속도로 시문의 목을 스친다.
녀석의 비늘 덮인 팔이 횡으로 그어진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히히! 뮤리에는 착하니까!”
녀석은 히든 보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친구를 꼭 편하게 해 줄 거야! 나처럼 되지 않게!”
슈아악!
비행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사방팔방에서 살벌한 공격을 가했다.
시문 역시 인체 연성으로 얻은 우월한 신체 능력과 천마신공의 묘리를 담은 권각으로 반격을 가했지만.
‘너무 빨라.’
뮤리에의 속도는 그것만으로 따라잡기는 조금 버거웠다.
특히 돌진 공격 사이사이에.
“얘들아! 우리 친구를 죽여줘!”
츄아아악!
쐐애액.
풀과 꽃들.
심지어 바람조차 날카로운 날붙이가 되어 날아드는데, 이게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역시 마법형이라 까다롭군.’
내디딘 발밑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풀잎.
인체 연성한 팔로 그것을 쳐 낸 시문은 곧장 뒤로 물러났다.
‘내가 마법계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끝난 싸움이겠어.’
일반적으로 마법계는 통상적으로 다른 계통의 플레이어들보다 이능적인 감각이 뛰어나다.
덕분에 저 어마어마한 속도의 돌진과 괴랄한 자연 마법의 연계를 버텨 내는 것이다.
그 양상은 자그마치 5분이나 넘게 이어졌다.
-움직임 실환가?
-마법계라도 마법 눈치 까고 피하는 건 어려운데. 저 속도의 돌진을 피하는 게 더 레전드네.
-ㅋㅋㅋ. 이젠 그냥 웃음밖에 안 나옴.
-저 플래티넘 승급 앞두고 있는데. 이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이쯤 되면 진짜 이 사람 상태창이 너무 궁금해지는데.
히든 보스를 상대로 일대일을 넘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뮤리에의 공격을 피하는 시문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지만.
시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내 스펙으론 저 반격은 무리야.’
사방에서 날아드는 자연 마법이야 마법계 특유의 기감으로 피하고.
“키힛! 우리 친구, 잘 피하네!”
저 잔상이 남을 정도의 돌진은 인체 연성으로 받아 낸다지만 그뿐.
“키히히! 안 맞았지롱~ 친구야, 너 너무 느려!”
반격까진 해내지 못하는 시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히든 보스의 스펙으로 돌진과 자연 마법을 뒤섞는 뮤리에는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으니까.
‘이대로 가면 내가 먼저 지친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이어 가면 결국 공격을 받아 내기만 하는 쪽이 불리해지기 마련.
그러니.
‘그 전에 승부를 내야 해.’
어떻게?
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전생에서 수많은 강자들의 방송과 전투를 보고 겪어 온 시문이기에.
‘저 속도로도 아예 피할 수 없게, 광범위로 터뜨려 버리면 돼.’
속도가 빠른 이들을 상대로 보편적으로 어떤 대처법들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현자의 돌.’
-히힝! 이미 준비하고 있었지롱~. 오빠 맘은 내가 다~ 안다구?
전투 중임을 잊게 만드는 녀석의 밝고 들뜬 목소리.
무언가를 연성한다는 게 즐거운 것이리라.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팝업 되는 시스템창에 시문은 곧장 ‘예’를 선택했고.
소모된 업적 포인트가 부족한 인과를 충당하며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다.
그대로 손가락을 튕기자.
콰르릉.
이 아름다운 들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짜작!
한줄기의 섬광이 시문의 앞으로 내리꽂혔고.
“꺄앗!”
시문의 정면으로 돌진하던 뮤리에를 후려갈겼다.
정확히는.
“이걸 피할 줄은 몰랐는데.”
녀석의 날개 끝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타격이 꽤 큰 것일까?
“키, 키힛!”
뮤리에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녀석은 다소 힘겨운 날갯짓을 하며, 시문의 앞으로 내리꽂힌 섬광의 정체를 확인했다.
“짜릿짜릿해. 번개야?”
“맞아.”
긍정을 표하는 시문.
그와 함께 떠오른 하얀 막대.
흡사 독이 오른 뱀처럼.
하얀 막대는 쉬지 않고 스파크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우리 친구면 번개는 다룰 수 없을 텐데.”
“그것도 맞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그러면서 하얀 막대를 쥐는 시문의 모습에 뮤리에의 눈가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알았다! 키히히! 날 속였구나! 날 속인 거야! 너! 죽여 버릴…….”
이어 살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완전하게 끝맺지는 못했다.
어느새 하얀 막대를 쥔 시문이 힘껏 몸을 비틀며, 그것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그 모양새가 꼭.
‘아까 키다리 아저씨한테 했던 거랑 비슷한데?’
뮤리에가 그 자세를 인지하는 순간.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 아스트라페.
차마 들을 수 없는 굉음과 눈도 뜨기 힘든 섬광이 뮤리에를 덮쳤다.
* * *
[히든 업적 ‘히든 보스 잡기 (2/?)’를 달성하셨습니다.]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를 단신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를 총 1,000점을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들이 히든 보스 뮤리에의 죽음을 알려 온다.
그러나 시문은.
아니.
-…….
“…….”
시문을 비롯해 지금 이 ‘상록숲의 중심부’를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당연했다.
방금 일어난 재앙의 여파를 증명하듯.
파츠측.
치직!
새까맣게 타 버린 들판 위로는 하얗고 푸른 전류들이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대충 봐도 반경 30미터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본래 이곳의 보스인 메마른 껍질만 한 크기란 말이다.
‘너, 너무 셌나……?’
밀려오는 탈진감 이전에.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위력인지,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시문.
이 압도적인 침묵 속에서.
[성좌 제우스가 ‘나의 벼락으로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입을 떡 벌립니다.]
[성좌 천마가 ‘허허…… 이런 걸 지구 말론 콜라보라고 하던가? 졸지에 자네와 손을 잡았군.’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알록달록하니 짜증 났는데 시원하네! 아가야? 몇 번 더 갈겨!’ 걸쭉하게 외칩니다.]
오로지 시문을 지켜보던 성좌들만이 떠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