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53화. 새 집
넓다.
과장 좀 보태면 광활하다.
복층의 구조는 기본이요, 큼직한 다수의 방과 욕실 그리고 루프톱 가든까지.
‘과연 랭크팰리스답네.’
이 럭셔리 펜트하우스는 당장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호화로웠다.
“그러니까.”
더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가 고작 40억이라고?”
이곳이 고작 40억밖에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물론 이건 시문이 알아본 시세가 아니었다.
“응. 정확히는 41억이야.”
“맞아요, 오라버니. 원래 매매할 계획이 없던 곳이라 싸게 나왔대요.”
짜 맞춘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시혁과 이유정.
당장 두 사람의 사이를 따져 보더라도.
이만큼 서로 합이 맞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으나.
“혹시 여기에 방사능 피폭이 이루어졌다거나, 아웃브레이크에서 살아남은 고위 언데드가 숨어 있다거나, 뭐 그런 거야?”
시문에겐 이곳의 시세가 고작 40억.
아니지.
41억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또 마냥 의심할 수도 없는 것이.
“에이, 형. 농담도 잘해.”
“그러게. 후후, 오라버닌 늘 재밌으세요.”
이 시세의 정보는 실제 현 랭커팰리스의 거주자인 두 사람.
그것도 랭커팰리스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호화스러운 층에 사는 거주민들 아닌가?
“하…….”
이마를 짚은 시문은 작게 헛숨을 쉬었다.
‘그럼 진짜 여기가 41억이라고?’
김시혁과 이유정.
두 사람이 지닌 스펙과 배경만 보아도 의심 자체가 불가했거늘.
‘왜 이렇게 믿기가 힘들지?’
시문은 좀처럼 두 동생의 말에 믿음이 가질 않았다.
단순히 그들과 친한 관계여서가 아니었다.
‘전생의 시세긴 하지만, 내가 알기론 랭커팰리스의 시세는 분명 수백억 원대였는데…….’
전생에서 뉴스 기사로나 보았던 랭커팰리스의 시세.
물론 아직 정규 아레나도 아니고, 다이아급 플레이어들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긴 하다지만.
그걸 다 고려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 시세이지 않나?
무엇보다.
‘왜 하필 41억이야?’
시문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곳에 최소한의 가구들을 들여도 연금술 기구들을 들이려면 최소 4억, 5억은 넘어.’
물론 그것도 부족하겠지만 당장은 필요한 것들은 채울 수 있으리라.
한데 묘하지 않은가?
[김시문 : 형 말이 맞지? 덕분에 역배 거하게 땡겨 간다 ㅋㅋ.]
[김시문 : 46억 개꿀! 꺼억~!]
‘왜 하필 내가 시혁이한테 자랑한 문자가 자꾸 떠오르는 걸까?’
집에 41억, 그 외의 내부 살림에 5억.
마치 위의 문자로 때려 맞힌 듯한 이 시세는 대체 뭐란 말인가?
미간에 골까지 파이며 깊이 고민하는 시문.
그 모습이 어딘가 불안했던 것일까.
“저…… 형? 고민되면 아예 내 집에서 지내도 돼. 난 오히려 그편이 좋거든.”
“맞아요. 또 그런 테러가 생기면 안 되잖아요. 이건 거주 이전에 안전의 문제니까 찬찬히 고민해 보세요, 오라버니.”
김시혁과 이유정은 조금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내.
“그래도 결정은 되도록 빨리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런 기회가 두 번 있을 거 같진 않아서…….”
시문의 눈치를 보던 이유정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 말이 결정타가 된 것일까.
“그래. 하자, 계약.”
“정말이지?”
“잘 생각하셨어요. 오라버니!”
시문은 결국 매입을 결정했다.
물론.
“갑자기 41억에 나온 거부터 해서, 하필 이곳의 거주민이 딱! 너희 둘밖에 없는 곳인 것까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의문을 표출하는 건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이만한 집을 41억에 판다는데,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매물은 바로바로 사야지.”
“어…… 맞아! 형, 그렇지!”
“……그, 그쵸! 있을 때 사야죠!”
현 랭커팰리스의 시세는 잘 몰랐지만.
이 랭커팰리스의 값이 수백억 원대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41억에서 수백억 원대로 뛰는 집이 있다?
‘이건 못 참지.’
이걸 누가 참아.
* * *
이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이사란 말도 웃겼다.
‘전부 다 박살이 났는데 이사는 무슨.’
제이스 클라크의 화려한 폭발쇼.
덕분에 없는 생활에 힘들게 모았던 생필품부터 옷, 가구까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지 않았나?
그래도 새집 살림을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형! 입주 선물이야!”
“왠지 오라버니라면 매입하실 거 같아서 미리 준비했어요. 아! 괜찮으시면 가구 배치는 제가 해도 될까요?”
김시혁과 이유정.
두 동생 녀석들은 매입이 끝나자마자 가구들을 들여온 것이다.
가구뿐이던가?
“형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옷은 디자인별로 다 준비해 봤어. 나랑 사이즈가 비슷하잖아.”
“잔은 이쪽, 냉장 보관이 필요 없는 식재료는 이쪽에 있어요. 여기 바는 와인이랑 양주나 수제 맥주를 가득 채워…….”
“컴퓨터랑 트레이닝실은 다 최신식으로 세팅해 놨어.”
“오라버니는 약건성이시니까 샤워할 때 이거, 끝나면 이거 바르세요. 그리고 얼굴은 스킨부터 앰플, 에센스에 바로 크림으로 넘어…….”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쓰는 것, 씻는 것, 바르는 것까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살림을 죄다 들여다 놓았다.
‘너무 한순간의 일이라 깜짝 놀랐었지.’
단 두 시간.
이 넓은 펜트하우스를 채우는 데 드는 시간이었다.
당연했다.
수십 명의 인부들이 우르르 몰려와, 마치 시뮬레이션이라도 돌려 본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가구와 살림을 세팅하고 가지 않았나?
특히나 먹는 것들을 아예 냉장고에 채워서 통째로 가져왔을 땐 조금 경악까지 했었다.
어쨌든 간에.
“캬하! 맛 죽이네. 비싸서 그런가?”
이사 당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렇게 시원한 수제 맥주를 깔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한 잔 더 마실까.”
시문이 어느새 밑바닥을 보이는 잔을 보며 바 쪽으로 움직이려던 그때.
-오빠, 그쯤만 마셔. 아까 애들이랑 혼자 술은 많이 안 마시기로 했잖아.
명랑한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울려 왔다.
현자의 돌이었다.
“내, 내가 그랬나?”
-응, 완전 그랬어. 나 다 들었거든?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오빠!
“알았다, 욘석아.”
현자의 돌의 제지에 시문은 체념하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어지간히도 아쉬워 보이는 그 몸짓에 가슴속 현자의 돌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마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처럼 말이다.
-으이구! 그럴 거면 아까 애들이 집들이하자 할 때 하지 그랬어? 자기들이 요리도 해 주겠다던데.
“그건 안 돼. 받은 게 얼만데. 제대로 대접해야지.”
그에 시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현자의 돌은 말을 이었다.
-헤에, 역시 모른 척해 준 거였구나?
“모를 수가 있겠냐.”
피식 웃은 시문은 주변을 돌아봤다.
비록 집은 자신의 돈으로 사긴 했으나,
‘정황을 보면 두 녀석들이 시세에 손을 썼을 게 분명하겠지.’
거기에다 이 펜트하우스에 걸맞은 살림까지.
“이만큼 해 줬는데 또 요리까지 시키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지.”
-근데 걔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오히려 오빠가 이렇게 생각하는 걸 섭섭해할 거 같은데.
“그렇겠지. 워낙 착한 녀석들이니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두 사람보다 연장자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가족, 그에 준하는 사이라도 이만한 호의를 받고 대충 넘어가는 건 시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나중에 제대로 대접해야지.”
-흐음. 오빠, 뭔가 단순히 식사만을 놓고 말하는 느낌은 아니다?
“역시 우리 복덩이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헤헤! 내 눈치가 좀 쩔긴 해!
기분 좋게 웃는 현자의 돌.
-근데 뭘 해주게? 그 두 사람 보니까 그리 부족한 것도 없어 보이던데.
“잘 물어봤다. 네 말대로 우리 동생들이 워낙 잘나서 부족한 게 없긴 해. 근데…….”
현자의 돌의 물음에 시문은 씨익 웃으며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원하는 게 없는 건 또 아니거든.”
이미 시혁이나 말숙이와 같은 하이랭커들과 부대끼며 살아 본 경험이 있기에.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는 시문이었다.
유리로 이루어진 통로를 지나 여러 개의 방 중 하나의 문을 여는 시문.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다른 방들과 달리, 이 방은 그저 널찍한 평수를 자랑할 뿐.
어떤 가구나 인테리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 안을 본 현자의 돌이 말했다.
-여긴 연구실 만들기로 한 방이잖아?
“맞아.”
다행히 재료의 대부분은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어 손실이 없었지만.
나머지 연금술 도구들은 폭발 테러로 싹 날아가 버렸다.
특히나.
‘영약 숙성기를 잃은 건 좀 아까웠지.’
업적 포인트가 들어간 영약 숙성기의 소실은 상당히 뼈아팠다.
그래도 새집도 샀겠다, 새로 출발하는 느낌으로 이 방은 연구실로 만들기 위해 비워 둔 것이다.
-아아, 이제 알겠다. 오빠, 그 애들한테 영약을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구나?
“그래.”
강자들이 원하는 게 뭘까?
이미 지난 생을 하이랭커들과 부대껴 온 시문은 잘 알고 있었다.
‘힘이지.’
하이랭커들과 수많은 국가들이 그토록 원했던 건 다 힘이었고.
창왕 종리추 역시 힘을 갈구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 터.
그리고 그들이 힘을 계속 추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경지가 높을수록 작은 성장으로도 엄청나게 강해지지만…… 그 작은 성장을 이루기가 무척이나 힘드니까.’
레벨업 자체가 더뎌지고.
깨달음까지 요구하는 게 최상위권의 현실.
결국 다른 이들과 격차를 내기 위해선 아이템이나 영약 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고등급의 귀한 영약들은 돈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지.’
고레벨이 될수록 영약 역시 그에 준하는 등급으로 먹어 줘야 한다.
당연히 시중에 풀리는 고등급 영약은 제작보단 아레나 보상이 주류.
말 그대로 없어서 못 먹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하지만.
‘난 아냐.’
전생에서도 레벨만 1일 뿐.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인 엘릭서까지 연성했던 자신이다.
그때도 많은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이 고등급의 영약 의뢰를 해왔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영약 레시피들을 난 다 알고 있으니까.’
물론 진귀한 재료들로 제작에 다소 어려움은 있겠으나, 적당한 수준의 영약은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약도 영약인데, 연구실이 완성되면 유정이한테 알려 줄 게 있거든.”
-알려 줄 거?
시문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님, 그러니까 유정이 어머님이 많이 아프셔. 나처럼 아레나 질병 환자시거든.”
-아!
현자의 돌의 탄식이 이어진다.
시문의 생각을 눈치챈 것이다.
-아레나 질병 치료제를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구나?
“어. 당장은 힘들겠지만, 때가 되면 내가 아레나 질병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알려 주려고.”
-좋네. 그러면 치료제에 들어갈 재료들도 쉽게 모을 수 있겠다. 유정이 걔 랭커잖아.
“그런 것도 있지.”
일단 이모님의 병명부터 알아야겠지만.
‘그 강하신 이모님이 혼수상태가 될 정도의 병이면, 지금의 내 수준으로 치료제를 만드는 건 무리야.’
아마 상위 플레이어로 나뉘는 플래티넘까지는 도달해야 가능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단 온 김에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은 미리 만들자.”
-응~! 전체적인 설계는 내가 할래! 완전 효율적인 동선으로 짜 줄게!
연구실을 만든다는 사실에 신이 난 현자의 돌.
“녀석.”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이 목재를 비롯한 연성 재료들을 꺼내려던 찰나.
“아.”
시문의 시선이 인벤토리 한 곳에 고정되었다.
‘이걸 깜빡하고 있었네.’
머리를 긁적인 시문은 곧장 그것을 꺼냈다.
정체는 다름 아닌 저번에 마르넬과 만났던 아레나의 보상이었다.
[변질된 혈청]
등급 : F
억겁의 세월로 변해 버린 혈청.
파충류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유리병에 담긴 액체.
시문이 그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성좌 제우스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성좌 검은 염소의 눈이 번들거립니다.]
[성좌 천마의 눈이 부릅떠집니다.]
[성좌 오딘의 천진난만하던 얼굴이 무섭도록 굳습니다.]
예기치 못한 메시지들이 우르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