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77화. 세계수 심드라실 (4)
씁쓸하게 퍼지는 약 향.
호화스러운 방을 가득 채운 그 향 사이로.
-딱히 부상이랄 건 없어. 무리하게 마기를 운용한 반작용이 온 거뿐이야.
명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다행이네.”
-그러게 살살 좀 하지 그랬어? 오빠 마기량이 워낙 압도적이라, 충격이 배가 된 것도 있어.
“나도 살살 하려고 했는데, 해 보니까 쉽지 않더라고.”
-하긴, 나도 보고 깜짝 놀랐었지. 저게 말이 돼?
시문의 답에 현자의 돌은 어이없음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천마를 만난 주제에 천마군림보라니.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러게나 말이다.”
고말숙이 보여 준 실력이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탓이었다.
‘주력 스탯이 35나 증가하지 않았으면, 나도 결국 천마신공의 초식을 써야 했겠지.’
시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대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고말숙을 바라봤다.
‘섬멸포는 그렇다 쳐도, 설마 천마군림보까지 사용할 줄이야.’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천마신공의 보법으로 신공에 걸맞은 기본적인 움직임은 물론.
마기를 담아 여러 능력을 선보이는 희대의 보법.
고말숙이 사용한 것은 그중 가장 주력이 되는 억제력을 담은 군림보였다.
그리고 천마군림보를 사용한다는 것은.
‘천마신공을 3성까지 익혔다는 말이 되지.’
천마를 만나 이제 막 천마신공을 전수받은 이가.
단숨에 3성까지 달성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완벽한 천마군림보는 아니었어.’
말숙이가 실버 수준의 스펙을 지녀서가 아니다.
물론 강기공의 일종인 천마신공이니, 막대한 마기 스탯을 필요로는 하겠지만.
‘억제력을 사용했을 뿐, 기본적인 움직임은 여전히 직선적이었어.’
말숙이 특유의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움직임은 여전했다.
만약 말숙이가 천마군림보를 제대로 익혔다면.
그 정직한 움직임부터 달라졌겠지.
고로.
‘2성의 끝, 3성의 초입을 바라보고 있는 건가?’
뭐,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긴 하다.
-오빠, 이제 어쩔 거야?
상념을 뚫고 들려오는 명랑한 목소리.
정신을 차린 시문은 물었다.
“뭘?”
-뭐긴, 길드지. 세계수 씨앗 조각으로 칭호 성장시키고 나서 길드 창설하기로 맘 정했잖아.
“맞아, 그랬지.”
연구실에 틀어박히기 전.
갤럭시 아레나의 사과 보상으로 얻었던 세계수의 씨앗 조각.
그걸 사용한 결과.
‘경험치 증가는 30%, 스탯 성장률은 70%로 증가했었지.’
본래 경험치 20% 증가, 스탯 성장률 50%의 옵션이었음을 따져 보면.
세계수의 씨앗 조각을 한 번 연성할 때마다 각각 10%, 20%씩 증가한다는 말이 된다.
기본적으로 업적 포인트가 1만 점이나 소모되긴 해도.
이는 결코 적은 성장 수치가 아니었다.
해서 길드를 따로 창설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고말숙 쟤, 가입시킬 거지?
“본인만 원한다면.”
시문은 잠든 고말숙을 바라봤다.
“너도 봤잖아. 고작 성좌 한 번 만나고 저만큼이나 성장했어.”
-대단하긴 해. 근데 지금까지 억눌렸던 천살성이랑 재능이 한 번에 터져서 그렇지, 이제부턴 얼마나 성장할지는 모르는 거잖아.
“아마 막혀도 플래티넘 중위권부터일 거야. 그 전까진 프리패스고.”
허초를 비롯해 흘리기까지.
직접 손을 섞어 본 시문은 현 고말숙의 재능이 최소 플래티넘 중위권이라고 확신했다.
“거기에다 내가 만든 영약으로 스탯까지 꾸준히 챙겨 주면, 다이아 랭크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걸?”
-그 정도로 지원해 주는데 못 가면 등신이지. 근데 오빠, 쟤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가 있어?
의문을 표하는 현자의 돌.
그에.
“있어.”
시문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말숙이가 없었으면 엘릭서가 내 손에 들어올 일도 없었어.”
아마 전생의 시혁이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 테지.
그럼 현자의 돌을 연성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테고.
당연히 회귀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내겐 믿을 만한 동료가 필요해.”
앞으로의 싸움.
특히나 용족이라는 강력한 종족과 용제라는 막강한 존재들은 아무리 시문이라도.
홀로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차 하이랭커가 될 고말숙은 전생에나 지금이나.
뛰어난 실력과 믿음을 겸비한 최고의 동료 중 하나였다.
-흐응. 뭐, 저 애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좋아! 길드 가입, 내가 허락한다.
“……네 허락이 있어야 하냐?”
-당연하지! 오빠가 나고, 내가 오빠잖아. 거기에다 세계수의 영체를 품은 건 나다? 부길마나 마찬가지라고.
시문은 현자의 돌의 너스레에 피식 웃으며 가슴께를 쓸어 주었다.
“그래. 너 부길마 해라.”
* * *
뚜벅.
랭크팰리스의 입구.
그곳으로 큰 체구에 각진 인상의 남성이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딱 봐도 랭크팰리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라, 입구에서 제재를 걸 법도 했지만.
입구를 지키던 경비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어? 못 보던 얼굴이시네?”
“기존에 하던 분이 그만두게 되셔서 이번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아아.”
밤사냥꾼 박진욱.
랭커팰리스에 거주하고 있지 않다 뿐이지.
건물주인 검성 김시혁과 절친한 사이라는 건 이곳의 고용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앙큼한 놈. 어떻게 쳐 냈대?”
“예?”
“아닙니다. 그럼 고생하십쇼.”
대충 손을 흔든 박진욱은 건들건들 랭커팰리스의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의 구조를 통째로 외우기라도 했는지.
엘리베이터로 들어선 그는 보지도 않고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고층에 도달하자.
“왔어요?”
짜증 날 정도로 잘생긴 청량한 미남이 손짓했다.
본래라면 가볍게 시비 정도 털어 주어야 했지만.
궁금함이 앞선 박진욱은 시비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짜식. 협회의 개X끼를 용케도 쳐 냈네?”
“아. 봤어요?”
“여기가 어딘데, 경비가 출입자 확인도 안 하겠냐? 그나저나 어떻게 한 거야?”
심드렁한 목소리면서도 박진욱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 경비, 협회장이 직접 꽂은 사람이라며?”
“그냥 형 덕에 치웠다고 생각하면 돼요.”
“시문 님 덕에?”
“네. 전 경비가 형을 찾아온 손님한테 무례를 범했거든요.”
“캬! 어지간한 무례론 쳐 내지 못할 텐데. 건수 제대로 잡았나 보네.”
앓던 이를 뽑은 것처럼.
아주 시원해하는 박진욱에 피식 웃은 김시혁은 물었다.
“그나저나 왜 온 거예요? 오늘 아레나 쉬기로 했잖아요.”
“너 보러 온 거 아냐, 인마. 우리 VVIP님 뵈러 온 거지.”
“형을?”
고개를 갸웃하는 김시혁.
이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치료제 판매 때문에 왔군요.”
“그래. 이번에 새 제품을 준다고 하셨거든.”
“역시 형이네. 그사이에 새 치료제도 만들고.”
“거기에다 유정이가 같이 보자고 연락도 왔고.”
“이유정? 걔가 왜요?”
유정이란 이름에 미간이 슬쩍 찌푸려지는 김시혁.
“모르지. 이번 치료제 건으로 함께 논의 나눌 게 있다더라고.”
“그래요?”
“엉.”
그렇게 답하곤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박진욱.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넌 또 왜 따라와? 관련도 없잖아.”
“왜 관련이 없어요. 전 형의 가족인데.”
“아니, 그런 말이…… 에효, 됐다.”
겉모습만 보드랍지.
요 망할 후배 놈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는 익히 알고 있지 않나?
박진욱은 쫄래쫄래 따라오는 후배를 달고, 시문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선배님, 오셨네요.”
문 앞엔 이미 청아한 미녀.
이유정이 도착해 있었다.
“오! 이유정. 일찍 왔네?”
“아뇨,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근데…… 웬 짐을 달고 오셨네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김시혁을 힐끔하는 이유정.
“이거나 드셔.”
당연히 김시혁은 중지를 올려 화답했고.
“어쩜 졸업할 때가 다 됐는데도 저리 천박한지.”
“꼬우면 너도 쓰던가.”
“난 그깟 손가락보다 주먹을 더 잘 쓰는데?”
“알아. 너 오우거잖아.”
“……이게 진짜.”
두 괴물이 불붙기 전에.
띵동.
박진욱은 서둘러 벨을 눌렀다.
“시, 시문 님, 접니다!”
다행히도.
-일찍 오셨네요. 들어오세요.
신은 그의 기도에 일찍 답해 주었다.
딸깍.
문이 열리자 얼른 안으로 들어서는 박진욱.
이어.
“오라버니, 저 왔어요.”
“형, 나 왔어~.”
스멀스멀 기운을 뿜어내던 두 괴물 후배 녀석들은 살기를 깔끔히 갈무리하고.
트레이드마크인 청량하고 청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들어섰다.
“그래, 앉아라.”
세 사람을 자리로 안내한 시문이 간단히 마실 것을 가져왔다.
그 와중에.
“오오! 시문 님. 이거 스카치블루 아레나산 아닙니까?”
박진욱의 잔은 일반 음료가 아닌 위스키였다.
“맞습니다. 시혁이가 바에 넣어 둔 건데, 진욱 씨가 좋아하실 거 같아서 꺼내 봤어요.”
“크하핫! 역시 시문 님뿐입니다! 제가 또 애주가 아닙니까?”
“애주가는 무슨, 주정뱅이지.”
형 마시라고 사 둔 귀한 술이 선배에게 가는 것이 불편한 것일까.
김시혁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렸고.
“야, 인마! 넌 이런 거 한 병이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해. 새끼, 하늘 같은 선배가 애주가인 거 뻔히 알면서 맨날 맨손으로 찾아오고!”
평소답지 않게 박진욱은 곧장 후배 녀석을 들이박았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예상대로.
“…….”
괴물 같은 후배의 눈에 잠시 살기가 아른거렸지만 그뿐.
김시혁은 제 형을 힐끔하고는 조용히 음료를 마실 따름이었다.
그에 승자의 미소가 절로 나온 박진욱은 스카치블루 아레나산을 한 모금 들이켜곤.
“시문 님의 신규 치료제야 내가 확인만 하면 된다지만.”
맞은편에 앉은 이유정을 바라봤다.
“유정아, 나와 시문 님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고?”
자연스럽게 시문과 김시혁의 시선 역시 이유정을 향했다.
“네. 두 분께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어서요.”
그녀는 품에서 서류를 꺼내 시문과 박진욱에게 건넸다.
묵묵히 서류를 읽어 나가는 두 사람.
이내 전부 읽었는지.
“유, 유정아. 이거 진짜냐?”
박진욱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선배님.”
그에 이유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진욱은 입을 가리곤 헛숨을 흘렸다.
“성삼 바이오에서 치료제 판매를 돕겠다고?”
“어디까지나 거래 루트를 공유해 드리는 것뿐이에요. 저희 성삼의 이름을 달면 합법적 절차에 정산은 물론, 신뢰까지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준비한 대사처럼 막힘없이 말하는 이유정.
혹여나 오해가 생길까.
“오라버니도 아시겠지만, 암시장은 길게 거래할 곳이 아니에요.”
그녀는 수시로 시문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돈만 된다면 판매자의 정보도 팔아 버리는 곳이거든요.”
“크흠. 그쪽에서 비밀 보장을 약속했어도 믿을 게 못 되긴 하지. 그래서 내가 대리인으로 암시장에 파는 거긴 한데…….”
박진욱은 이유정의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도 말끝을 흐렸다.
애당초 시문이 그를 판매 대리인으로 내세운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런 위험한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최상위 암살계 플레이어인 밤사냥꾼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물론 그런 걸 다 고려하더라도.
‘이 조건이 확실히 안정적이긴 해.’
성삼이 직접적으로 뒤를 봐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긴 했다.
그때.
“유정아.”
조용히 서류를 읽던 시문이 입을 열었다.
“수수료가 없는 것부터 해서, 이 계약에서 성삼 바이오가 이득 보는 조항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내가 맞게 읽은 거야?”
“네, 오라버니. 정확히 보셨어요.”
이유정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 조건은 결코 저희 쪽에서 어떤 이윤이나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조건이 아니에요.”
“크흠! 유정아? 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다만…… 기업이 이윤이나 목적을 가지지 않고 움직인다는 게 말이 되냐?”
멋쩍은 듯하면서도 숨기지 않고 의문을 표하는 박진욱.
물론 그의 의문엔 타당한 근거가 있었기에.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선배님, 아시잖아요. 오라버니가 저희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이유정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고.
“잘 알지.”
왜 성삼 같은 대기업이 이런 조건을 내밀었는지 깨달은 박진욱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잠자코 있던 시문이 말했다.
“유정아, 난 대가를 바라고 이모님을 치료한 게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오라버니께선 누구도 해내지 못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셨어요. 그것도 다시 플레이어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요.”
본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도 많다.
이영희가 성삼의 딸로서 가진 것들을 논하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랭커 ‘도후’로서 이룩한 것들은 환산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시문은 그것들을 지켜 주다 못해, 되살릴 기회까지 주었다.
“순수하게 어머니를 위해 준 오라버니 마음에 값을 매기자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두 모녀의 입장에서.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우리 가까운 사이임을 떠나서,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에서 드리는 제안이에요.”
이렇게라도 갚고 싶었다.
본디 거대한 기업에 소속된 이일수록.
사람들은 그 진심을 진심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지레 의심부터 해 버리기 일쑤니까.
이미 수차례 그러한 일들을 겪었기에.
“부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오라버니.”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내리깔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내.
“유정아. 이렇게 고마운 제안을 내민 건 넌데, 왜 그렇게 움츠러들었어?”
역시 부모님 말씀은 틀린 게 없는 걸까?
“제안은 감사하게 받을게. 대신,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크고 따뜻한 손이 이유정의 머리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기껏 세팅한 머리가 조금씩 망가지고 있음에도.
“오라버니…….”
10년 전 그때의 향수를 고스란히 느낀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치는 걸 느꼈다.
“음. 근데 이렇게 좋은 제안을 받고, 너만 빠뜨리는 거 같아서 좀 미안한데.”
“네?”
슬쩍 볼을 긁은 시문은 허공을 몇 번 터치했다.
이내.
“사실 나도 제안할 게 있어서 다들 부르려고 했거든. 물론 유정이 너한테도 물어는 보려고 했고.”
“그게 뭔데요, 오라버니?”
“이거야.”
시문이 허공에 한 정보창을 띄워 공유했고.
“세상에……!”
“혀, 형? 이게 무슨!”
“시문 님! 이거 진짭니까?”
경악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