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78화. 세계수 심드라실 (5)
태풍이 지나간 후, 남은 산들바람처럼.
“…….”
“…….”
넓은 거실엔 한동안 침묵만이 자리했다.
하나 태풍이 아예 끝난 것도 아니었다.
“말도 안 돼…….”
“허참…….”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플레이어.
김시혁과 이유정, 박진욱은 얼이 빠진 얼굴로 재차 허공에 떠 있는 정보창을 바라봤다.
[세계수의 동반자] - 성장형
세계수의 동반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소속 길드원의 경험치 30% 증가.
-소속 길드원의 스탯 성장률 70% 증가.
시문이 공유한 칭호의 정보창은 그들로서도 상상치 못한 옵션들이 달려 있었으니까.
“하…… 이거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위스키를 연신 들이켜는 박진욱.
그는 어느새 비어 버린 잔을 툭 놓고는 시문을 바라봤다.
“시문 님. 정말 저희 놀라게 하려고 막…… 막 시스템창을 연금술로 만드셔서 보여 주시는 건 아니죠?”
충격이 상당했던 걸까.
앞뒤 없이 말을 내뱉는 박진욱에 시문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세계 최고가 되는 건 금방일 테니까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상태창을 연성할 수 있으면 세계 최강은 그야말로 순식간일 테니까.
“하…… 이건 정말이지…….”
시문의 답에 이마를 툭 짚는 박진욱.
옆에 있던 김시혁은 칭호 ‘세계수의 동반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선배, 최근에 거래된 경험치 증가 아이템이 얼마였죠?”
“어떤 부가 옵션도 없이 경험치 증가 옵션만 15%인 귀걸이가 270억대였다.”
“270억?”
그에 시문의 눈이 조금 커진다.
‘경험치만 15% 증가면 전생엔 100억을 왔다 갔다 했던 거 같은데.’
전생에도 성장 옵션을 지녔다는 아이템들이 꽤 있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 많다고 봐야겠지.
‘정규 아레나부턴 자주 나오는 아이템이었으니까.’
고로 전생과 비교하면, 성장 옵션 하나만 있는데 270억은 무척이나 비싼 가격.
해서.
“꽤 비싸네요.”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꽤 비싸네요가 아닙니다! 시문 님! 당장 암시장에서 나오는 경험치 관련 아이템은 죄다 수백억을 호가하는데!”
박진욱은 극도로 흥분하며 현 상황을 토로했고.
“맞아요, 오라버니. 금액의 문제가 아니에요. 없어서 못 구하는걸요.”
“나도 2개밖에 없어, 형. 그마저도 다른 옵션이 없어서 상황을 봐 가면서 착용하는걸.”
이유정과 김시혁 역시 웬일로 박진욱의 의견에 말을 보태며 열렬한 동의를 보내왔다.
그에 힘을 받은 것일까?
“심지어 이거 성장형 아닙니까? 안 그래도 말이 안 되는 옵션인데, 거기서 더 높아진다 하면…….”
스스로 말을 하고도 어이가 없는 것일까.
“후. 저 한 잔만 더 마시겠습니다.”
“선배, 그거 저쪽 바에 있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박진욱은 벌떡 일어나 위스키를 한 잔 더 채워 왔다.
그러곤 쭉 들이켜는 박진욱.
아무리 아레나 부산물로 만든 술이라도 최상위 플레이어라 쉽게 취하지 않을 텐데.
“장담하건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전 세계가 시문 님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잔을 내려놓은 박진욱은 꼭 취한 사람인 양 벌게진 얼굴에 숨소리도 불규칙했다.
흥분한 건 박진욱만이 아닌 걸까.
꿀꺽.
평소의 교양 있던 모습과 달리.
음료를 원샷한 이유정도 다소 벌게진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길드 마스터 자리에 있으니 탐이 날 만한 옵션이지.’
이유정의 색다른 모습에 피식 웃은 시문은 정보창을 거두곤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요.”
그 말에 김시혁의 눈빛이 한결 진중해졌다.
흥분을 숨기지 못하던 다른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 길드를 만들게?”
“그래.”
동생 김시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골드로 승급도 했겠다, 업적 상점도 열렸으니 길드 만들 자격은 충분하잖아?”
“하긴…… 길드는 업적 상점만 열리면 누구나 만들 수 있으니까. 근데 제대로 키우진 않을 거지?”
형이 귀찮아하는 부분이 뭔지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동생 녀석의 날카로운 지적에 시문은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래. 업적 포인트가 아까워서 딱 길드 생성까지만 해 둘 생각이야.”
“……형답네.”
그걸로 뭘 해도 이득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생 놈의 말에 시문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하여간에, 날 잘 안다니까.’
요 잘난 동생 녀석의 예상대로.
시문은 칭호 ‘세계수의 동반자’로 인한 길드를 따로 키울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길드 창설은 생각도 안 했었으니까.’
어차피 길드가 없어도 세계수 특성으로 인해 칭호의 효과는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
설령 길드를 만든다 해도 말숙이만 가입시키고 말지.
이렇게 동생을 포함한 다른 이들까지 가입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시혁이는 자신만의 길드를 만드니까.’
물론 정규 아레나가 시작된 이후의 일이긴 하다.
잘난 동생은 자신만의 길드를 만들어.
대한민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제 세력을 굳건히 유지하고 한국의 생존자들을 돌본다.
그게 시문이 겪은 미래였다.
해서.
‘굳이 시혁이의 미래가 변할 만한 변수는 만들고 싶지 않지만…….’
최근의 일들을 겪으며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차피 전생과는 꽤 많이 달라진 상황이야.’
이미 드워프와 엘프, 그리고 치료제 등으로 전생의 지구와는 많이 달라진 상황이다.
전생에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나가 공주 아샤즈 건이 그러했고.
진화종인 드라니스를 만난 건도 그러했다.
이렇듯 앞으로는 전생의 지식에도 없는 일들이 일어날지 몰랐고.
‘그런 변수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도구는 힘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믿을 만한 주변 이들까지 함께 강해지는 것이 다가올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었다.
‘뭐, 정 불안하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될 때쯤 다들 탈퇴시키면 되니까.’
내가 길드를 나가도 되고.
어차피 시혁이가 길드 마스터 자리에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던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하는 시문.
그런 시문의 모습이 다르게 보인 것일까?
“이만한 성장 옵션을 지니고 계시면서, 어떻게 다른 생각을 안 할 수가…….”
“오라버니…….”
박진욱과 이유정은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감명을 두 눈에 한가득 담고 있었다.
굳이 두 사람의 오해를 잡지는 않았으나.
“커험! 그래도 몇 자리 비니까 채우긴 할 거야. 어쨌든, 만들면 가입할 거야?”
더 깊어지는 것도 원치 않은 시문은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김시혁과 박진욱은 흔쾌히.
“물론이지!”
“여기다 대가리 박으면 됩니까?”
아주 꼬리까지 흔들며 받아들였고.
“…….”
이유정만이 흔들리는 눈으로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 뿐이었다.
시문은 그런 이유정을 향해 다가갔다.
“유정아.”
“오라버니, 전…….”
“알아.”
다 안다는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넌 성삼 길드의 길드 마스터잖아.”
“네…… 그렇죠…….”
성삼 길드의 길드 마스터.
그 높았던 자리가 이렇게 족쇄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던가?
이유정은 한결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유정의 속을 잘 아는 시문의 입가가 따스해졌다.
‘녀석, 어지간히도 아쉽나 보네. 하긴, 어릴 적부터 알게 모르게 승부욕이 강했었지.’
겉은 유하고 청아한 이미지지만.
속은 누구보다 지는 걸 싫어하는, 일종의 외유내강의 타입.
당연히 개인 스펙과 직결되는 성장을 쉬이 생각할 리 없었다.
그런 이유정의 마음을 잘 알기에.
“그렇다고 유정아, 길드 가입을 못 할 것도 없잖아?”
시문은 동생을 다독이며 대안을 내주었다.
“예?”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길마 자리를 잠시 내려놔도 되지 않아?”
“안 돼요!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아!”
시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깨달은 것일까.
이유정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에 시문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엄마가 있었지!”
“그래, 이모님이 돌아오셨잖아. 지금쯤이면 재활하시겠다고 한창 뛰어다니실 거 같은데.”
“맞아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재활 끝내고, 육체 단련에 들어가셨거든요.”
도후 이영희.
그녀라면 성삼의 길드 마스터 자리에 적격이었다.
아니.
‘엄마한테 길마를 다시 주면 되는 건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본래 성삼의 길드 마스터는 도후 이영희의 자리였다.
단지 병으로 쓰러져, 딸인 이유정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웠을 뿐.
‘할아버지 상대도 엄마가 훨씬 더 잘할 텐데!’
그뿐인가?
자신과 맞지 않는 지긋지긋한 길드 마스터의 업무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저 당장 엄마한테 전화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벌떡 일어나는 이유정.
시문은 서둘러 폰을 꺼내는 이유정의 손을 붙잡으며 진정시켰다.
“자자, 진정하고. 길드 가입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잖아. 너 길드 마스터야. 이런 건 만나서 차분히 정리해야지.”
“아…… 그래야겠죠.”
“그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유정이가 이대로 전화해서 ‘엄마, 나 딴 길드 가야 해서 길마 양도할게!’
라고 했다간 ‘뭐? 이년이 미쳤구나!’ 하며 격노한 이모님을 맞이하겠지.
‘구 협회장이었던 아버지조차 성난 이모님을 막지 못하는데.’
유정이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당장의 길드 가입은 자제시켜야 했다.
시문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삼이면 작은 길드도 아니잖아. 이모님도 몇 년 만에 깨어나신 거니까, 네가 인수인계 잘 해 드려야지.”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네요.”
스스로를 자책하는 동생과.
“어쩌겠어. 오우거들이 다 그런걸.”
그런 자책에 무게를 더하는 동생.
“너 오라버니 앞이라고 자꾸 까부는데, 진짜 죽을래?”
“얼씨구. 할 수는 있고?”
두 동생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이 붙었다.
“김시혁. 머리가 나빠서 잊었나 본데, 내가 너보다 레벨 높거든?”
“이제 역전당할 텐데 뭐. 네가 이모님한테 길마를 양도하는 사이에 말이지.”
“…….”
“아아~ 이제 렙차 난다고 떠드는 모습은 안 봐도 되겠네. 아니지, 이젠 내가 역공할 차롄가?”
남녀 할 것 없이 설레게 만들던 청량한 미소가 저렇게 얄미울 수가 있는 걸까?
“이게 진짜!”
김시혁의 놀림에 이유정이 인벤토리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아, X나게 시끄럽네.”
한 여성의 목소리가 뜨거워지는 거실을 식혔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돌아갔고.
“야, 김시문. 옷 더 작은 거 없냐? 네 거 왜 이렇게 커.”
시문의 셔츠만 달랑 걸친 여성이 터덜터덜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시문은 황급히 여성을 향해 다가갔다.
“야! 내 셔츠를 네가 왜 입어? 바지는 또 어쩌고!”
“뭐래. 네가 전부 찢어 버렸잖아. 야박한 새끼, 옷이라도 연성해 주든가.”
“그렇다고 셔츠만 딸랑 걸치고…… 후, 아니다. 일단 짧게라도 만들자.”
손가락을 튕겨 허벅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셔츠를 바지 형태로 연성시키는 시문.
“…….”
“…….”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자연스레 침묵에 빠졌고.
“……이 두 괴물 녀석들이 꼼짝도 못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시문 님은 대단한 상남자셨군요.”
“형…… 역시 대단해.”
두 남자의 입이 가장 먼저 열렸다.
이내.
화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기세가 거실 전체로 뻗어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라버니, 친구분이 계셨으면 소개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이 살벌한 기세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해맑았다.
* * *
강남의 고층 빌딩.
어둑한 밤에 빌딩의 옥상엔 올라올 사람이 없을 텐데.
일련의 무리가 빌딩의 옥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쯧. 오늘도 허탕이야?”
깡마른 여성의 짜증 섞인 음성이 터져 나온다.
하나 여성의 신경질에도 무리 중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때.
띠리리.
여성의 곁에 있던 남성의 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성은 폰의 화면을 두드리곤 말했다.
“타깃이 밖으로 나왔다는군.”
“호오? 드디어?”
남성의 말에 화색이 확 도는 여성.
주변에 석상처럼 서 있던 무리들 역시 남성의 말에 하나둘씩 몸을 움직였다.
“며칠이고 저 으리으리한 집에만 처박혀 있던 분이, 오밤중에 향하는 곳이 어디래?”
“인근의 백화점이라는군.”
“뭐?”
화색이 돌던 여성이 깡마른 고개를 갸웃했다.
“백화점? 이 시간에?”
“그래.”
“미친. 한국 놈들은 당최 이해가 안 간다니까.”
여성이 어이없는 목소리를 내자, 폰을 보던 남성은 말했다.
“일행과 같이 나왔다는군.”
“일행? 혹시 여자야?”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여간에, 여기나 저기나 남자 새끼들은 어쩜 다 똑같대니?”
여성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며칠이나 여자랑 펜트하우스에 처박혀 있었으면 뻔하네. 그렇다고 이 시간에 백화점을 가다니. 그년도 참 독하다 독해.”
“일반인이 아니다. 플레이어라는군.”
“플레이어? 유명한 애래?”
“길드에서 받은 리스트에는 없는 자다.”
“그럼 브실골에서 기는 심해년이라는 거잖아? 하. 저러고 다닐 만하네.”
깡마른 여성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공걸륜? 일행이 플레이어면 말 좀 나오지 않겠어? 김무열도 발을 뺐잖아.”
“그렇기에 오히려 더 말이 나오지 않을 거다. 하지만.”
말을 잠시 멈춘 공걸륜은 드디어 폰에서 눈을 떼고, 여성을 바라봤다.
“싱. 할 수 있다면 네가 타깃 하나만 가두는 게 좋겠지.”
“흐응~ 그냥 저년도 같이 싸잡아 처리하는 걸로 하자고.”
컨트롤하기 귀찮으니까~.
엄연한 살인임에도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귀찮음을 먼저 표하는 싱.
그녀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럼 바로 움직이지.”
공걸륜은 대답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옥상 난간에서 열심히 기계를 만지고 있는 하얀 가운에 안경을 낀 남성을 바라봤다.
“임위정. 뮤턴트들은 잘 배치해 뒀겠지?”
공걸륜의 물음에 안경의 남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좋아. 그럼 시작하자.”
공걸륜이 아래로 몸을 던지자.
스륵.
옥상에 있던 무리들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