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89화. 스쿠아마 원 (3)
누가 그러던가?
태양은 그 불꽃에 그슬리기도 전에.
열기만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고.
실제로 이곳 역시 그러했다.
“으아아아!!”
“뜨, 뜨거워!!”
“보조계들은 뭘 하는 거야! 당장 보호막을 펴!”
“마법계도 얼른 도와! 이러다 전부 타 죽겠어!”
성좌 수르트의 무구인 레바테인.
비록 연성으로 인한 열화 버전이라 해도.
화르르르르!
치이이익.
완성도 30%에 달하는 불꽃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불살라 버리고 있었다.
“으음…….”
레바테인을 휘두른 시문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거 아스트라페랑 느낌이 완전 다른데?’
시문의 시선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신을 향했다.
‘아스트라페보다 컨트롤이 훨씬 어려워.’
뭐랄까.
마치 날뛰는 대형 전기톱을 한 손으로만 쥐고 있는 느낌이랄까?
화르륵.
시동되어 활활 타오르는 레바테인은 그 힘을 컨트롤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심지어.
‘이거 왠지 성장할수록 컨트롤이 어려워질 느낌인데…….’
보통 연성력이 높아지면 연성품들의 안정성 역시 높아지기 마련이다.
컨트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아스트라페 역시 다루기 까다롭기로 소문난 뇌기가 근간임에도.
30%라는 완성도 덕분에 컨트롤은 더욱 쉽고 익숙해지지 않았나?
고로 ‘아 얜 내가 성장할수록 쓰기 편하겠구나’ 싶은 느낌이 팍 들었다.
하나 레바테인은 달랐다.
‘나야 안전하겠지만…… 강해질수록 피아식별이 어렵겠어.’
뇌속성과 쌍두마차로 다루기 까다로운 화속성이라지만.
아스트라페와 달리.
레바테인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데만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한테는 한없이 호의적이다, 정도?’
아무리 강해져도 주인에겐 여전히 봄의 온기처럼 부드럽고 따뜻할 것이라는 것.
-후후, 역시 우리 오빠야. 무구의 차이를 단번에 꿰뚫어 본다니까.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문은 가슴 정중앙을 내려다봤다.
‘현자의 돌.’
-오빠가 정확히 봤어. 애당초 신화급 무구는 성좌의 무구. 주인의 성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녀석은 평소처럼 들뜨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스트라페야 아무리 유명한 난봉꾼이라 해도, 결국 올림포스를 이끄는 지배자의 무구지. 당연히 주인을 닮아 절제되고 섬세해지기 마련이야.
이내.
-하지만 레바테인은 달라.
녀석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성좌 수르트. 그 새끼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애당초 수르트는 아스가……을 위해, 응? 아오! 진짜!
모처럼 진지하게 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현자의 돌.
시문은 녀석이 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눈치챘다.
-이 빌어먹을 아레나 놈들! 뭐 툭하면 검열이야!
검열.
현자의 돌은 중간에 말이 끊어진 것에 열이 받은 것이다.
-어차피 알 놈은 다 알 텐데,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어휴, 됐다. 저 등신들에게 상식을 요구한 내가 미친년이지.
미미하게 양쪽으로 흔들리는 현자의 돌.
그게 고개를 젓는 시늉이라는 것을 잘 아는 시문은 조심히 가슴께를 쓸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하앙~ 존잘의 손길에 가 버려…… 가 아니라!
녀석은 화를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여하튼, 오빠가 생각한 게 전부 맞아. 레바테인은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아주 개X랄을 할 거야. 아군을 엄청 신경 써야 할 정도로.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검이니까?’
-어머? 나 거기까진 이야기 안 했는데?
‘나도 눈치란 게 있잖아.’
-헤헹! 역시 우리 오빠라니까! 이래서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해. 어휴! 저 등신들 때문에 막힌 속이 뻥 뚫리네.
신이 난 현자의 돌에 피식 웃은 시문의 시선은.
‘중간에 말이 잘리긴 했지만, 녀석의 말이 잘린 지점을 유추해 보면 아마…….’
아까 떠올랐던 성좌 오딘의 메시지를 향했다.
‘아스가르드와 관련이 있겠지.’
오딘이 직접적으로 반응을 보내왔으니 당연하겠지.
단지.
‘그 뒤의 이야기는 아예 잘려서 유추조차 불가능해.’
현자의 돌의 말은 ‘아스가’부터 아예 잘려 버린지라.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유추조차 불가능했다.
그래도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뭐,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오딘과 검은 염소의 반응도 그렇고.
결국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시문은 레바테인이 직격한 곳을 바라봤다.
“케구르르륵!”
몸 대각선으로 시커먼 검상을 지닌 채.
“케아아아악!!”
실시간으로 육체를 파먹어 가는 불꽃에 눈을 까뒤집고 게거품을 무는 드라헬.
각성 용족인 드라고닉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비참한 몰골이었다.
쩌적.
그런 드라헬에게서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문이 노린 대로.
아스트라페의 뇌기를 막아 내던 목걸이가 박살 나고 있는 것이다.
‘쩝, 아깝긴 하네. 아스트라페의 뇌기를 막을 정도면 최소 SS급일 텐데.’
물론 드라헬이 저 목걸이를 드롭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괜스레 입맛을 다신 시문은 레바테인을 거두고.
파직.
왼손에 쥐고 있던 하얀 지팡이, 아스트라페를 들어 올렸다.
“미안하다. 원래 이렇게 고통 주면서 처리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적이라지만.
어지간히도 처참한 드라헬의 몰골에, 시문은 다소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스트라페를 겨누었다.
“업적 포인트 2천은 어쩔 수 없잖아. 이해하지?”
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
하나 말을 내뱉을 상황이 아닌 드라헬은 그저.
“케, 케굴!”
제 몸을 좀먹는 불길에 허덕일 뿐이었고.
“그럼 잘 가라.”
시문은 그런 드라헬의 고통을 끝내 주었다.
파자지직!
섬광처럼 쏘아지는 아스트라페의 뇌전.
그것이 드라헬의 타오르는 육신을 집어삼킴과 동시에.
[드라그의 드라고닉인 ‘드라헬’을 단신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 2,000점을 획득합니다.]
[지구인 최초로 스쿠아마 원의 일원을 처치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메시지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이어.
[성좌 제우스가 ‘설마 레바테인을 저렇게 조절까지 할 줄이야…….’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천마가 ‘허허, 제우스. 자네도 연자에게 잘 보여야겠구먼.’ 의미심장하게 웃습니다.]
[성좌 오딘과 검은 염소가 당신의 행동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습니다.]
[성좌들이 업적 포인트 5,000을 후원합니다.]
성좌들의 후원까지 뒤따랐다.
* * *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드라헬.
-……미친.
-이거 맞아? 형들?
-저 질긴 드라그를 한 방 컷 낸다고?
-ㄴㄴ 두 방이지. 뭐, 한 방 같은 두 방이긴 해.
-저거 드라그 중 네임드 몹 같은데, 그냥 뚫어 버리네 ㅋㅋㅋ.
-아무리 드라그가 화속성에 약하다지만 이건 좀…….
레바테인의 압도적인 공격력에 잠시 주춤했던 채팅창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나.
-저런 드라그는 본 적이 없는데?
-그걸 골드가 잡았다는 게 더 안 믿깁니다.
-아마 드라그에 자체적인 너프가 있었겠죠. 상향 매칭이긴 해도 결국 골드 아레나잖아요.
-ㅇㅈ. 거기에다 화속성 공격이 드라그 쥐약이니까, 상성까지 좀 들어간 듯?
-아무리 그래도 저건 말이 안 됩니다. 님들, 드라그 안 잡아 보셨어요?
-너프가 의미 없는 게, 데이나를 쓰러뜨릴 정도면 그냥 진짜 센 거임.
-ㄹㅇ. 데이나 저거 다이아랑 맞다이 치는 앤데 ㅋㅋ.
플래티넘 이상의 상위권으로 보이는 채팅들이 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여기가 골드 랭크의 방송임을 고려해 보면, 상당히 수준 높다고 봐야 했다.
물론.
-ㄷㄷ. 저게 다 뭔 말이래냐…….
-천상계 형님들 다 오셨나 보네.
-형들, 우리도 끼워 줘.
-천상계는 무슨 ㅋㅋㅋ 다 폰 천상계지. 저딴 소린 나도 함.
-ㅇㅈ. 드라그가 뭐라고ㅋㅋ. 나도 때려잡음.
-드라그가 뭐라고는 Xㅋㅋㅋ. 혓바닥 한 방에 골로 갈 놈들이 입을 터네.
-ㄹㅇ ㅋㅋㅋㅋ. 진짜 폰 플래들 다 보인다, 다 보여.
-바로 검거 완료 되어 버렸죠? 검은 염소 님, 폰 플래들 좀 쳐 내 주세요~.
상위권 플레이어들의 채팅에 참여하지 못한 시청자들도 한몫하긴 했다.
어찌 되었건.
-알못들 다 뚜까 맞네 ㅋㅋ. 드라그가 느그 친구로 보이드나!
-근데 이 방에 상위권 유저들이 진짜 많이 보긴 보나 보다. 채팅급이 다르네.
-골드 방송이긴 해도 데뷔전 1위한 사람이잖아. 곧 지들 만날 플레이언데 관심 많겠지.
-ㅇㅇ. 김시문이 플래 가는 건 진짜 시간문제긴 함.
-22. 상향 매칭만 봐도 답 나오잖아. 갤럭시 아레나에선 이미 플래로 보고 있는 듯.
시청자들의 수준이 여타 골드들의 방송보다 높다는 것과.
시문이 플래티넘급의 플레이어라는 것엔 이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어떤가? 앤드류.”
이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중년의 흑인 남성이 화면에서 눈을 떼며 물었다.
그에.
“으음.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요.”
앤드류라 불린 남자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검성 김시혁도 골드 데뷔전에서 1위를 했었죠?”
“그래. 저 아시안도 마찬가지지.”
묘하게 악센트가 들어간 아시안이라는 단어.
“그놈의 아시안은. 이봐요, 콜린. 지금은 90년대가 아니라고요.”
그에 앤드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제발 위치에 대한 자각 좀 해요. 아메리칸드림의 부길마가 그런 발언을 하다간 언론에서 난리가 난다고요.”
“뭐 어떤가? 그들을 부르는 단어인데.”
“단어가 아니라 당신의 악센트가……! 후, 콜린. 제가 인종 차별로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의 슈퍼 ‘화이트’ 루키께서 하시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얌전히 받아들여야지.”
“하.”
헛웃음을 터뜨리는 앤드류.
그러나 콜린이라 불린 중년의 흑인은 그저 능글맞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말을 말죠. 어쨌거나.”
고개를 슬쩍 저은 앤드류는 방 한쪽에 걸린 거대한 화면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골드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어쩌면 검성 김시혁보다 강할지도 몰라요.”
“앤드류, 검성 김시혁은 랭커야. 저런 골드가 아니라고.”
“전 골드 시절 김시혁을 기준으로 말하는 거예요, 콜린.”
“아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콜린은 말했다.
“그럼 그 성장 버프에 대한 소문은 확실하겠군.”
“밤사냥꾼이 흘린 길드 성장 버프 말이군요?”
“그래. 그리고 밤사냥꾼과 검성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검성 역시 그 길드에 소속되어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아시아에서 검성 같은 괴물이 튀어나올 수 없지 않겠나?”
“콜린, 제발 아시아를 보는 그 시선 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는 앤드류.
‘빌어먹을 꼰대. 말해 봐야 나만 입 아프지.’
불만을 속으로 애써 집어삼킨 앤드류는 말했다.
“어쨌거나, 저 김시문이라는 플레이어만 봐도 확실하네요. 그 성장 길드, 저도 가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데릭이 연락이 왔었네. 자넬 그 길드로 보내라고 말이야.”
“길마가요? 의외네요.”
눈이 동그래지는 앤드류.
그에 콜린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이게 다 자네를 아끼는 길마의 뜻 아니겠나? 아쉽게도 티오가 하나뿐인지라 론은 떨어졌다네. 뭐, 우리 흑인들에겐 늘 있는 일이지.”
“콜린, 그건 제 아레나 성적이 더…….”
“아아, 괜찮네. 이런 건 익숙하니까. 대신 자네가 길드를 비운 동안, 자네 몫의 지원까지 론에게 줄 예정이네만.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겠지?”
분명 중년 특유의 느긋하고 능글맞은 미소이건만.
날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그럴 리가.’
앤드류는 짜증이 났지만 짜증 대신.
“물론이죠. 론에게는 미안하네요. 이런 기회를 제가 얻게 되어서.”
콜린이 가장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아메리칸드림의 부길마니까.
“하하! 역시 젊으니 진보적이군. 자네의 그런 마음만으로 충분하네. 그렇게 하나둘씩 바뀌는 것 아니겠나? 케케묵은 것들은 말이지.”
앤드류의 예상대로 날 서 있던 콜린의 미소는 금세 누그러졌다.
“여하튼 그렇게 알고 있게. 어차피 길드 가입만 하고 다시 올 테니, 아시아에 남겨질 걱정은 말고. 아!”
콜린은 화면을 끄며 말을 이었다.
“가면 그 길드 버프의 요인이 무엇인지 좀 알아보게나.”
“가능할까요? 그쪽에서 엄청 숨기려 들 텐데.”
“꼭 알아낼 필요는 없네만, 자네의 특성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콜린의 말대로.
‘내 특성이면 혹시 모르긴 하겠지.’
그 믿기 힘든 길드 성장 버프의 요인을 알아낼 확률이 높을 수도 있었다.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노력해 보죠.”
“좋네. 그 버프를 얻으면 우린 아시아 국가와 2강으로 묶이는 치욕을 벗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길드가 될 거라네.”
“……그렇겠죠.”
앤드류는 애써 대답을 내뱉고는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