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150화. 여론이란 (2)
8월의 한여름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대한민국.
“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그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청아한 미녀는 눈을 반짝였다.
“어제 기사가 나가고 고작 하루 사이에, 국민 청원이 100만이 넘었어요.”
그에.
“100만이라고?”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사이다를 마시던 남자.
시문은 꽤 놀란 얼굴로 이유정을 바라봤다.
“네! 이만하면 정부에서도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겠는데요?”
“100만이면 그렇겠네.”
국민 청원 자체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100만이라는 숫자가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여론이 어떤지를 보여 주는 거니까.’
제법 굵직한 사건들도 수십만에서 그치는데 100만을 넘어간다?
‘국가도 국가지만, 어지간한 길드들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겠지.’
심지어 단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 올라갈 숫자를 고려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여론이 돌아섰다는 게 중요하지.’
국대에서 퇴출당한 길드들이 펼친 언플.
여론이 이쪽으로 기운 만큼, 더 이상 그들의 기사는 먹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언플을 펼치면 펼칠수록, 역으로 더 욕을 먹을 테니까.’
악순환을 불러 제 목을 조르게 될 터.
시문은 휴대폰을 꺼내 기사를 주륵 훑었다.
그리곤.
“참…… 숙부도 대단하다니까?”
검은 양복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중년인의 사진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끝난 판인데. 저렇게 고개까지 숙이다니.”
“저도 그거 보고 좀 놀랐어요. 협회장님이 어지간히 이를 갈고 계시나 봐요.”
“아마 즐기고 있을걸? 이 표정 좀 봐.”
칼날이라는 단어가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내.
그런 사내가 기사의 사진 속에선, 유난히도 핼쑥하고 누그러져 보였다.
“배우로 데뷔했어도 잘 먹고 사셨겠어.”
“후후. 철목왕이 배우로? 엄청 기대되네요.”
“크핫! 소설도 있겠는데요? ‘각성자 협회장인 내가, 평행 세계에선 배우?’ 같은 거로 말입니다.”
웃음을 터뜨리는 이유정과 박진욱.
시문은 그런 박진욱에게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보니 인사를 못 드렸네요. 진욱 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슬쩍 고개를 숙이는 시문.
“아이고! 무슨 소리십니까! 오히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제가 다 감사하지요!”
그에 박진욱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레나에서 저 새끼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거든요. 그깟 인터뷰쯤이야, 백번도 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오라버니, 덕분에 시혁이도 지금 엄청 즐기고 있어요”
“유정이 말이 맞습니다. 그놈 요새 아주 신이 났다니까요?”
국가대항전이 끝났음에도 자리에 없는 김시혁.
그도 그럴 것이.
“그건 저도 봤어요. 아레나도 안 뛰고 인터뷰만 엄청 많이 하던데.”
인터뷰란 인터뷰를 죄다 받아주고 있지 않던가?
“어휴! 말도 마십쇼. 평소엔 쳐다도 안 보던 언론사까지 싹 다 해주고 있습니다.”
“최근 국대에서까지 당했으니, 독이 바짝 올랐나 봐요. 근데…… 오라버니?”
박진욱의 말을 거들던 이유정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한 손 보태고 싶어요.”
“응? 유정이 너도?”
의외의 요청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보태고 싶은 거 맞아? 너도 같이 패고 싶은 거 아니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고.
“후후. 오라버니는 못 속이겠네요. 맞아요. 저도 그쪽 길드들에…… 당한 게 제법 많거든요.”
이유정 역시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맞받았다.
시문은 잠시 턱을 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미 끝난 느낌이긴 하지만, 네가 도와서 나쁠 건 없으니까.”
“감사해요. 기사는 제 마음대로 써도 되죠?”
“물론이지. 편하게 해.”
“네!”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들뜬 얼굴로 곧장 휴대폰을 두드리는 이유정에 시문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곤.
“아참, 진욱 씨.”
박진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 시문 님.”
“부탁할 게 있는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뭐든 말씀만 하십쇼! 원하시면 김종준 놈의 목이라도 따드리겠습니다!”
다부진 주먹을 불끈 쥐는 박진욱.
내심 살기까지 흘리는 그의 기세에.
“하하! 그건 마음만 받을게요.”
김종준도 같은 다이아급 암살계.
아무리 밤사냥꾼이라도 암살을 해내기엔 어려운 상대였다.
시문은 너털웃음으로 거절하며 본론을 말했다.
“그보다, 저랑 대련 좀 해주시겠어요?”
* * *
와장창!
유리를 비롯해 갖가지 가구들이 박살 난다.
이 파괴행위의 주범.
“이런 X발!”
거친 숨을 내쉬는 마른 인상의 중년인은 좀처럼 화를 죽이지 못하고.
“성삼은! 또! 왜! 끼어들어서! 지X이야!!”
매 음절에 맞춰.
쾅! 쾅!
박살 난 가구들을 더욱 두들겼다.
그의 폭력적인 행동을 멈춘 건.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근육질의 덩치도.
중년인의 주먹에 박혀, 피를 줄줄 흐르게 만드는 가구의 파편도 아닌.
띠리리.
휴대폰 벨소리였다.
“……하아.”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일까?
아니면 발신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내키지 않는 눈으로 모질게 울리는 휴대폰을 노려봤고.
“……예, 형님.”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예상대로.
-야 이 개자식아!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야아아악!!
휴대폰 너머에서 어마어마한 노성이 터져 나온다.
잠시 귀에서 휴대폰을 뗀 김종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답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설마 김무열이가 그렇게 움직일 줄은…….”
자존심 하난 더럽게 높기로 유명한 철목왕.
그 김무열이 설마 머리까지 숙여 가며, 이딴 쇼맨십을 펼칠 줄이야.
하나 휴대폰 너머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이 멍청한 새끼가 진짜! 지금 김무열이가 문제 같아?!
더욱 열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엉?! 그놈이 이 판에서 한 게 뭐가 있다고 김무열 같은 소리를 해!
“……죄송합니다.”
김종준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때로 일그러져있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X발! 김무열이 아니면 대체 뭔데?’
전갈 길드의 마스터이자, 휴대폰 너머의 주인공.
강덕만이 왜 저리 거품을 무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김종준을 꿰뚫어 보고 있는 걸까?
-X신 같은 새끼. 말하는 꼬락서닐 보니 아예 감도 잡지 못하고 있구만.
강덕만은 대차게 김종준을 까댔다.
-잘 들어라. 이 일은 김무열이 짠 게 아니라, 아메리칸드림에서 손을 쓴 거다.
“아메리칸드림?”
잠시 눈을 깜빡이는 김종준.
이내.
“아…….”
그의 입에선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된 건가? 어쩐지 미국 이민설은 지시한 적이 없었는데!’
흠집 내기부터 비리 논란과 유착으로 엮기까지.
언플의 핵심 요소를 타 길드의 수뇌부와 함께 짰지만.
미국 이민설은 전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지 않았나?
그래도 이 여론에서 김시문이 미국 가 버리면.
현시점에서 김무열은 말 그대로 끝장날 수도 있었기에.
타 길드 중 머리 좋은 누군가가 추가로 작업한 것이라고만 생각했거늘.
‘애당초 저쪽에서 다 계획을 한 거였어! 그러니 저 김무열이가 대가리까지 박아가며, 그 지X을 했던 거야!’
머리에 퍼즐이 빠르게 맞춰진다.
그의 탄식 소리를 강덕만도 들었는지.
-하! 내가 이런 X신을 왜 부길마로 앉혀서는.
아까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종준아. 넌 명색의 1세대 출신인데, 아직도 대가리를 그렇게 못 굴리냐? 내가 말했지? 옛날처럼 주먹만 써선 살아남지 못한다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은 애초에 하지를 말았어야지! 이게 지금 대가리만 처박는다고 될 일이냐?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방법을 강구해서…….”
-강구는 지X! 그 대가리로 또 뭘 강구하겠다는 거야!!
누그러졌던 언성이 다시 높아진다.
강덕만의 서슬에 김종준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다물었고.
-후우…… 종준아.
“예, 형님.”
-내 말 잘 들어라.
강덕만은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너도 방금 기사 봤겠지만, 이젠 성삼까지 끼어든 상황이다.
그에.
“형님,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하지만, 그 부분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김종준은 불호령을 감내하고 물었다.
“대체 성삼은 왜 이번 일에 끼어든단 말입니까? 애당초 이번 일의 뒤를 봐준 건 성삼이지 않습니까?”
다행히 나쁜 시도는 아니었던 걸까?
-새끼. 이제야 제법 대가리를 굴리는구나.
예상했던 불호령이 아닌,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왕 쓰는 거 더 굴려봐라. 성삼이 왜 나섰겠냐?
“그건…….”
잠시 침묵하는 김종준.
이내.
“잠깐, 설마 도후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김종준.
정답인 것인지.
-그래. 이영희, 그 빌어먹을 년이 수를 쓴 거겠지.
강덕만은 처음으로 긍정을 표했다.
“하지만 형님, 성삼의 회장은 이순철이지 않습니까? 이빨이 다 빠진 도후 하나 못 막는단 말입니까?”
-그년이 이빨 있을 땐 이순철이 회장 아니었냐? 그때도 성삼을 주도한 건 누구였지?
“그건…….”
따로 답하지는 않았으나.
강덕만이나 김종준 둘 모두 답을 알고 있었다.
“이영희였지요.”
-종준아. 너도 다이아까지 달았으면 알 거 아니냐? 무력으로나 권력으로나, 이순철은 제 딸을 못 이겨.
김종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빨이 빠졌어도 호랑이는 호랑이, 아마 성삼 내에서의 위치는 여전하겠죠.”
-거기다 이영희가 움직이는 순간 판단이 섰겠지. 이 판은 이미 무너졌다고 말이다.
여전히 음흉한 노인네라니까.
그렇게 읊조린 강덕만은 명령했다.
-종준아. 내가 봐도 짱구 굴려서 수습할 시기는 넘어갔다.
“그 말씀은…….”
-너 암살계 다이아 아니냐? 폭력은 이럴 때 쓰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갑자기 타이르는 어조가 된 강덕만.
그게 버리기 직전.
마지막 기회를 줄 때의 말투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형님,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김종준은 최대한 힘껏 답했다.
-그래. 갈 때 중국 놈들이 준 그 약도 한 사발하고. 그 덕에 국대 선발에서 검성 그 애새끼한테 칼침도 박았잖냐.
“예, 형님.”
-일 다 처리하면 바로 연락해라. 수습해 줄 테니까.
“예.”
끊어지는 통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보던 김종준은 창문 너머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두식아.”
“예, 형님.”
“내 쪽 애들 전부 집합시켜.”
서늘한 살기로 가득했다.
* * *
랭커팰리스의 훈련장.
무지막지하게 넓은 이곳은 마련된 대련장엔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중 여성은.
“야! 진짜 이럴 거냐?”
도끼눈을 뜬 채,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을 노려봤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날 두고 왜 저런 근돼 아재랑 붙는 건데?”
대련 상대가 그녀가 아닌, 근육질의 남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근육질의 남성은 조폭을 연성시키는 외형과 달리.
“그, 근돼 아재…….”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랑 붙어! 나 요즘 X나 세.”
여성은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만 노려볼 뿐이었다.
하나.
“그럼 진욱 씨. 시작하죠. 세팅은 제가 할게요.”
시문은 그런 고말숙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박진욱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야이 씨! 대놓고 씹냐! 나도 세다니까!”
고말숙의 눈엔 불똥이 튀었다.
시문은 그런 고말숙을 힐끔하곤 말했다.
“말숙아.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건 너로는 테스트가 제대로 안 돼서 그러는 거야.”
나름 달랜다고 한 것인데.
“이씨! 그게 무시하는 거잖아!!”
통하지 않았는지.
고말숙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이내.
“후. 좋아.”
앞머리를 슥 쓸어올린 그녀는 한결 차분한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내가 뭣 하러 아레나까지 취소하고 여길 왔는데. 온 게 아까워서라도 보고는 가야겠다. 대체 그 실험해 본다는 게 뭔지.”
“말숙아. 저쪽에 아레나 접속기기 널렸다.”
“아 시끄러! 대련 다 보고 갈 거야! 별것도 아니면 나 바로 덤빌 거니까 그리 알아!”
시연이도 저렇게 떼쓰진 않을 텐데.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려, 입술을 삐쭉 내미는 고말숙에.
“그래. 마음대로 해.”
피식 웃음을 흘린 시문은 고개를 저으며 대련장을 가동시켰다.
물론.
“근데 어지간하면 입술은 집어넣어라. 패황쇄 마려우니까.”
“……X새끼.”
깨알 같은 팩트 체크는 참지 않고 쑤셔 넣었다.
시문은 으르렁거리는 고말숙을 뒤로한 채.
“그럼 진욱 씨, 시작할게요.”
“예, 시문 님.”
대련장의 시스템을 가동했다.
우웅.
옅은 마력 파장이 대련장을 휩쓴다.
그것을 신호로.
“최대한 급소는 피할 테지만, 그래도 조심하십쇼.”
스륵.
박진욱은 나지막한 경고와 함께 검은 어둠에 휩싸여 사라졌다.
반대로.
키잉.
시문의 왼쪽 눈은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금색 빛으로 깨어났고.
웅!
대련장만 덩그러니 담겨 있던 시야에, 간결하고 날카로운 잔상을 남겼다.
방향은 왼쪽 어깨.
시문이 곧장 어깨를 틀어, 그 시커먼 잔상을 피해 내자.
스걱.
어느새 나타난 단검 하나가 자로 잰 듯.
시커먼 잔상을 따라 허공을 베었다.
이어.
단검을 따라 은신이 해제되는 박진욱.
그의 험상궂은 얼굴은.
“어, 어떻게?”
놀라움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