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178화. 예상 밖 (3)
어느 연예계, 혹은 정치계의 기자회견을 연상시키듯.
찰칵찰칵.
카메라의 플래시가 쉬지 않고 터져 나온다.
단지 그것들과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성녀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제 가족을 죽일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룹 내부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이곳은 기자회견을 목적으로 마련된 곳이 아닌.
범죄자 이송을 준비하고 있는 강남의 경찰서라는 것.
“하…… 내 이럴 줄 알았다.”
경찰서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중년의 남자는 짜증스럽게 앞머릴 쓸었다.
“이송 끝나면 애들 다 집합시켜. 어떤 새끼가 흘렸는지 오늘 잡아내고 만다.”
“예. 강 형사님. 그런데…… 기자들은 어쩌죠?”
“어쩌긴 어째. 뚫어야지.”
“하, 하지만!”
다소 젊어 보이는 남성이 울상으로 입술을 깨문다.
강 형사라 불린 중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다 인마. 뭐 좀만 세게 밀어도 과잉 진압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를 치겠지.”
품속을 뒤적거려 담배를 한 대 무는 강 형사.
“근데 뭐 어쩔 수 있냐? 이번에 우리가 이송하는 분이, 그니까 범죄자 분이, 아이 씨!”
이송한 사람을 지칭할 호칭 때문인지.
아니면 불이 붙지 않는 라이터 때문인지.
말을 되풀이하며 인상을 팍 찌푸리는 강 형사.
이내.
화륵.
“우왓!”
담배 끝으로 피어오르는 백색의 불.
갑작스러운 불꽃에 화들짝 놀라던 강 형사는 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그의 시선은 유치장의 쇠창살 너머로 향했고.
그 안엔 어지간한 배우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청아한 미녀가.
“라이터가 고장 난 거 같아서요. 아! 그리고 편하게 부르세요. 전 범죄자일 뿐인데.”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강 형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얼른 눈을 돌렸다.
옆에서.
따악.
“아얏!”
멍하니 그런 이유정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부하의 뒤통수를 갈기며 말이다.
젊은 부하는 왜 때리냐고 항의하려고 했으나.
“정신 차려. 새끼야. 누군지 몰라?”
당장 목이라도 비틀 듯.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강 형사의 눈빛에 슬쩍 고개를 숙였다.
강 형사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하…… X발. 점심때 들어온 사건 B반에 넘기지 말걸!’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엔 자신이 아닌, 다른 형사가 맡았을 텐데.
‘그놈의 맛집이 뭐라고!’
그동안 기다린 웨이팅이 아깝다고.
다른 팀에 넘겨버린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후욱.
자욱한 담배 연기가 쭉 뱉어지는 그때.
덜컥.
“가, 강 형사님! 도착했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부하 하나가 들이닥쳤다.
이어.
“실례하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범상치 않은 기세의 무리들이 주르륵 난입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저벅.
2미터의 거구에 맞게.
묵직한 발소리로 걸어들어오는 각진 남성.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는 강 형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손을 내밀었다.
“각성자 협회의 최창욱이라고 합니다. 강형욱 형사님 맞으신지요?”
“예예! 반갑습니다. 강력계 A반 반장, 강형욱입니다.”
얼른 고개를 숙이며 최창욱의 손을 마주 잡는 강형욱.
그 덩치만큼이나 큰 최창욱의 손은.
나름 체급이 있는 강 형사임에도 어른과 아이의 악수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강형욱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당연했다.
각성자 협회 소속이라고만 밝혔지만.
‘하필 와도 협회의 비서장이 직접 오냐!’
대한민국에서 저 2미터의 사내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강형욱은 혹여나 책이라도 잡힐까.
“지, 지금 바로 이송하시겠습니까? 저희 쪽 차량을…….”
연신 노심초사했으나 그뿐.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여기서부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막내야! 얼른 열어드려!”
“네, 넵!”
정작 당사자는 어떤 관심도 없는지.
곧바로 유치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내.
“이, 이게 왜 이렇게 안 열리지?”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막내로 불린 이는 연신 손이 미끄러지며 유치장의 문을 열지 못했고.
“제가 열겠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창욱은 그의 어깨를 잡고 슥 옆으로 치웠다.
유치장 속 여성이 그런 최창욱을 바라본다.
“최 비서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협회장님의 명령인가요?”
“예, 제가 직접 이송하는 것을 명령한 분은 협회장님이 맞긴 합니다.”
“맞긴 하다고요?”
어딘가 묘한 말투.
그에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가던 이유정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오라버니군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고.
“예.”
우그극.
무슨 박스라도 뜯어내듯.
유치장의 창살을 뜯어냈다.
“후우.”
이곳으로 유치되고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는 이유정.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만나게 되네요. 가요.”
그녀는 무슨 싸구려 팔찌라도 풀 듯.
마법진이 새겨진 수갑을 손쉽게 끊어내며 최창욱의 뒤를 따랐고.
그렇게 바닥을 나뒹구는 대각성자용 수갑과 창살의 잔재에.
“…….”
“…….”
강 형사와 막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 했다.
* * *
“한 말씀만 해 주십쇼!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왜 이 회장을 살해하신 겁니까? 동기가 뭡니까?”
“범행의 전말로 볼 때 계획된 살인이라는데. 맞습니까?”
“부회장이신 도후도 이 일을 알고 있나요? 서로 합작한 범행입니까?!”
“도후와는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겁니까!”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기자들의 함성이 쏟아진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여느 때와 같이 취재를 위해 들이댄다거나, 밀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물러나십쇼.”
“각성 범죄자를 이송 중입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무리.
협회의 인사들은 강성의 기자들도 감히 덤벼들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이유야 간단했다.
“한 걸음만 더 들어오면, 각성자법에 따라 무력 진압을 실시하겠습니다.”
“경고는 한 번뿐입니다.”
각성 범죄자를 이송할 땐.
일반인에게도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는 법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자들은.
“저, 전 선 안 넘었습니다!”
“여기서 그냥 찍기만 할게요! 허용 거리잖아요!”
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화제의 중심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고.
화제의 중심인 이유정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각성자 협회의 차량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를 끝으로.
[다음 뉴스입니다. 이번 사건을 세계 각성자 연맹에서도 주시하고…….]
화면은 아나운서의 보도로 이어졌고.
삑.
TV를 끈 날카로운 분위기의 중년인.
“아주 X랄이 났군.”
김무열은 코웃음을 치며.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닫고 있을 셈이지?”
TV 속에서 쉬지 않고 등장했던 인물.
이유정을 노려봤다.
“이유정. 널 빌런용 감옥에 처넣지 않은 이유가, 그렇게 닥치고 있길 바라서인 줄 아나?”
“…….”
서슬 퍼런 김무열의 일갈에도.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이유정.
“좋다.”
김무열의 시선이 가만 앉아있는 이유정의 뒤편을 향했다.
그곳엔.
“너희가 지껄여 봐라.”
청량한 미청년과 험상궂은 남자가 서 있었다.
“왜 이딴 멍청한 짓거릴 도운 거냐? 아니지. 건물 밖에서 나란히 대기하고 있었으니, 같이 모의한 것일 터.”
고개를 슬쩍 저은 김무열은 날카로운 비소를 걸친 채.
“대체 왜 이런 개짓거리를 벌인 것이냐?”
두 사람을 노려보았고.
“…….”
“…….”
이유정과 마찬가지로.
김시혁과 박진욱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
“이것들이…….”
김무열의 관자놀이로 핏줄이 솟아난다.
“닥치고 있겠다면 여기 있을 이유도 없지. 최창욱! 당장 이 머저리들을 감옥에!”
곧장 세 명의 남녀를 감옥으로 보내버리려던 찰나.
“진정하세요. 숙부.”
뚜렷한 미성이 그의 언성을 잠재운다.
김무열은 성이 난 그대로 미성이 들려온 곳을 홱 돌아봤다.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니잖아요.”
“혼을 내? 지금 이게 애새끼들 훈육이라도 하는 것 같나?”
언성이 더 높아지는 김무열.
“살인 사건이다.”
그는 손을 들어 침묵하는 세 명의 남녀를 가리켰다.
“무려 각성자가 비각성자를 살해한 사건이란 말이다! 그것도 제 할아비를!”
“숙부.”
“김시문. 대체 네놈은 왜 그렇게 차분한 거지?”
김무열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시문을 쏘아봤다.
“네가 내게 했던 제안을 그새 잊었나?”
“그걸 어떻게 잊어요.”
“한데 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거냐? 따지고 보면 저것들이 네놈의 계획을 모두 망친 거나…….”
김무열의 말끝이 흐려진다.
그의 눈매는 의심이란 감정으로 가늘어졌다.
“설마. 네놈이 시킨 짓이더냐?”
그 말에.
“오라버니는 아니에요.”
“형은 관련 없습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이유정과 김시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에 김무열이 두 남녀를 홱 돌아봤으나 그뿐.
“숙부. 진짜 진정 좀 하셔야겠습니다.”
이어지는 시문의 말에.
“죽일 거였으면 제 손으로 죽였지. 절대 애들 안 시킵니다. 아시잖아요?”
“쯧.”
짧게 혀를 차곤 품속에서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칙.
석상같이 서 있던 최창욱이 불을 붙여온다.
김무열은 더 보기도 싫다는 듯.
창가로 아예 몸을 돌려버렸고.
숙부를 보던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세 남녀를 향했다.
흠칫.
협회장의 서슬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세 사람이 어깨를 움츠린다.
특히나 이유정과 김시혁은 랭커라는 위치가 어울리지 않게.
연신 입술이나 손 따위를 꼼지락거렸다.
그런 동생들의 위로.
‘참. 이런 걸 보면 몸만 훌쩍 컸지, 어릴 때랑 똑같단 말이지.’
두 녀석의 어렸을 때가 오버랩된다.
시문이 무언가 잘못을 나무라면.
두 동생은 꼭 저렇게 손가락이나 입술을 달싹였었지.
특히나.
‘입술까지 달싹일 때는…….’
잠시 눈을 감아 과거를 곱씹던 시문은 물었다.
“유정아.”
“……네. 오라버니.”
“이순철 회장, 네가 죽인 게 맞니?”
잠시 침묵하는 이유정.
이내.
“맞아요. 제가 죽였어요.”
이유정은 범죄를 시인했고.
“하! 잘나셨군.”
뒤편에선 김무열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시문을 그것을 무시한 채.
“유정아.”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다시 물을게. 이순철 회장, 정말 네가 죽인 게 맞아?”
현실도피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함께 자라온 동생들이다.
누구보다 두 동생을 잘 안다고.
심지어 부모들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유정아.”
두 동생이 저렇게 입술을 달싹거릴 때는.
“솔직하게 말해 봐. 정말 네가 죽였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오라버니…….”
고개를 드는 이유정.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다.
이내.
“제가 죽이지 않았다고 하면…… 그걸 믿으시게요?”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이유정.
그에 화답하듯.
“듣자 듣자 하니까 아주 가관이군.”
뒤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죽이지 않았다고? 이유정, 랭커가 되더니 세상이 다 쉬워 보이더냐?”
한걸음에 다가온 김무열은 테이블 위로 담배를 짓이겼다.
“이 회장이 죽기 전, 네가 회장실로 갔다는 목격자만 수십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별 개소리를 다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입구에서부터 회장실을 향하기까지. 모든 행적이 담긴 CCTV가 있는데 네가 죽인 게 아니라고? 차라리 그 화면 속의 인물이 변신 특성을 지닌 놈이라고 하지 그러나?”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유정.
가만 이야기를 듣던 시문은 물었다.
“숙부. CCTV를 다 확인해보셨어요?”
“당연한 걸 묻는군. 당시 회장실을 제외하곤 모든 CCTV가 가동 중이었다. 안할 이유가 없지.”
“회장실은 왜 제외되었는데요?”
“모를 일이지. 네 멍청한 무리가 작당을 해서 껐거나…….”
“저흰 CCTV를 건드린 적이 없습니다.”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굵직한 목소리.
밤사냥꾼 박진욱이었다.
그를 흘낏한 김무열은 말을 이었다.
“그 늙은이가 또 인체 실험과 같은 음흉한 짓을 저지르려고, 스스로 잠시 껐겠지.”
“회장실의 CCTV는 얼마나 꺼져있었습니까?”
“1분. 이유정이 입장하기 직전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까지다.”
“사인은요?”
“참수.”
시문이 가만히 턱을 쓴다.
‘유정이의 입장 전까지 살아있던 이 회장, 그리고 1분간 CCTV의 단절과 참수라?’
냄새가 났다.
아주 진한 냄새가.
시문의 눈은 한층 깊어졌다.
‘유정이가 회장실로 들어서기 직전에, CCTV가 꺼지면서 이순철 회장의 목이 베였다는 건데…….’
참으로 절묘하게 짜인 타이밍 아닌가?
마치.
‘이 회장을 암살하고 유정이에게 덮어씌우려는 수작 같은데.’
하나 궁금한 것은 이딴 음모 따위가 아니었다.
‘어떻게 유정이의 감각을 속였냐인데.’
검성인 동생 녀석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랭커가 유정이다.
철벽의 성녀라 불리는 그녀가 할아버지의 목이 날아가는 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도 고작 문 한 짝을 남겨둔 거리에서?
‘지금 시점에서 그만한 암살계가 딱 한 명 있기는 하지.’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고.
당장 짐작 가는 인물도 있었기에.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는군.’
시문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곤 답했다.
“숙부.”
“뭐냐.”
“유정이는 범인이 아닙니다.”
“……뭐?”
해괴한 소리를 들은 듯.
일그러지는 김무열의 얼굴.
“네놈! 이 와중에도 동생이라고…….”
“아뇨. 유정이는 이순철 회장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담긴 시문의 태도에.
“……근거는?”
잠시 숨을 고른 그는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물었다.
“일단 유정이가 이순철 회장을 죽였다면. 목을 베진 않았을 거예요.”
해머와 같은 둔기류로 박살을 냈겠지.
이는 단순히 이유정의 직업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전생의 유정이가 이 회장을 죽였을 때, 전투용 해머로 머리를 박살 냈었으니까.’
전 세계로 송출되었던 결코 잊을 수 없던 장면.
그때를 떠올린 시문은 이유정을 바라봤다.
“아마 둔기로 죽였겠죠. 특히 해머 같은 걸로. 유정아, 내 말이 틀리니?”
속마음이 들킨 아이처럼.
“……마, 맞아요.”
이유정은 토끼 같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답했다.
이내.
“할아버지를 해머로 죽이려고 한 건 사실이에요. 그럴 마음으로 회장실을 향한 것도 맞고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이유정.
“하지만 회장실에 들어섰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죽어 계셨어요.”
“그럼 왜 바로 신고하지 않은 거지? 왜 네가 죽였다고 시인한 거냐?”
곧장 치고 들어오는 김무열.
그에.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요.”
이유정은 서글픈 미소로 답했고.
“전 할아버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실행에 옮겼어요. 단지 누가 먼저 선수를 쳤을 뿐,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하!”
김무열은 거칠게 이마를 쓸어올렸다.
“살다 살다 별 개같은 일을 다 보겠군.”
이유정의 말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시문의 말을 믿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서, 이제 어쩔 거지?”
그는 짜증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정이 정말 죽이지 않았더라도, 무죄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더군다나 친절하게도 스스로 죽였다고 시인까지 해버린 상황이지.”
김무열의 말대로.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시문은 차분하게 답했다.
“정리하면 되죠.”
“정리? 방금 뉴스 못 봤나? 이 사건은 세계 각성자 연맹마저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알아요. 그 부분은 방법이 있으니, 숙부는 국내만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시잖아요?”
“너!”
“그전에.”
폭발하려는 김무열의 말을 잘라내는 시문.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유정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이유정을 바라봤다.
그리곤 물었다.
“넌 어쩌고 싶어?”
“저…… 요?”
시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전생과 내용이 달라졌다 해도. 유정이가 제 할아버질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그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아마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실제로 살해 의도를 품고 간 거니까.’
이는 자포자기.
혹은 모든 것을 떠안고 사라지려는 마음가짐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생의 그때처럼 말이다.
그러니.
“넌 이대로 모든 걸 떠안고 싶은 거야? 아니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어떤 사실보다도 이유정 본인의 뜻이 가장 중요했다.
시문이 묵묵히 바라보자.
“전…….”
이유정의 눈에 점차 눈물이 고인다.
그게 어떤 눈물인지는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것.
“할아버지를 제 손으로 처단했다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솔직히 내키지 않아요. 설령 벌을 받더라도, 그 내막은 알고 싶어요.”
“그래. 알았어.”
시문에겐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전생에서 널 보살피지 못했지만, 이젠 아니니까.’
제 할아버지를 죽이고 종적을 감췄던 이유정.
지금은 보이는 정황만 그러할 뿐.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전생과 아예 다른 방향이었고.
‘바꿀 수 있어.’
이젠 충분히 그 비극을 바꿔내어, 동생을 지킬 수 있었다.
“연맹 측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숙부는 국내만 신경 써 주세요.”
“개소리 마라! 세계 각성자 연맹을 네가 무슨 수로 처리한단…….”
시문은 김무열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진욱 씨.”
“예?”
“성장 버프를 대여했던 길드들. 전부 연락 좀 돌리세요.”
“가, 갑자기요? 아! 옙! 알겠습니다!”
박진욱에게 지시를 내리곤, 곧장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예. 올리비아. 접니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