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186화. 소정규 (3)
“레오니 볼프? 당신이 왜 여기에?”
의문이 가득한 시문의 얼굴.
당연했다.
레오니 볼프.
전생의 오딘의 후원자이자, 독일의 하이랭커였던 파비앙 볼프의 여동생.
동시에 그녀 역시 하이랭커에 오르는 실력자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레오니가 용맹하긴 해도, 이렇게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터프하고 용맹한 전투 방식과 달리.
레오니 볼프는 매사에 신중한 인물이었다.
오딘의 선택을 받았던 파비앙이 매번 그녀에게 공대장 자리를 넘길 정도로 말이다.
그런 시문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내가 여기 있는 게 놀랍나 보군.”
레오니 볼프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문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신중한 사람이 이런 곳에 있으니까.”
“신중함이라?”
그녀의 한쪽 눈썹이 입꼬리를 따라 올라간다.
레오니는 무척이나 묘한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자주 듣는 소리긴 하지만…… 우린 딱 한 번 만난 사이 아니었나?”
국가대항전 플래티넘 부.
한국의 마지막 상대였던 독일의 1위로 만났던 레오니.
그 후로는 아레나에서조차 같이 매칭된 적이 없거늘.
“어째 날 잘 아는 눈치로군.”
레오니의 의문에 시문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각국의 유망주쯤은 다들 환히 꿰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이것 참, 워낙 비참하게 패배해서 안중에도 없을 줄 알았더니.”
시문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든 것인지.
“다행히 그 정도까진 아니었나 보군.”
레오니의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네 말대로다. 김시문. 난 원래 뒤가 없는 싸움은 하지 않지.”
“그런데 소정규는 왜 돌린 거지? 당신은 발텐베르크 소속 아닌가?”
발텐베르크.
독일의 명문 가문이자, 독일의 현 최강 길드인 곳.
고로.
‘내가 암시장에 푼 정보는 접촉했을 텐데?’
자신이 중개인인 린을 통해 풀었던 ‘일주일 후, 업적 상점에 면사부’가 등장한다는 정보.
이는 발텐베르크 길드를 통해 알고 있을 터였다.
한데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신중한 그녀가 면사부도 없이 소정규에 뛰어들다니?
“나도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년인 줄은 몰랐다만…….”
짙었던 그녀의 미소에 한줄기에 씁쓸함이 맴돈다.
이내.
“일단은 김시문, 너 때문이라고 해두지.”
“나?”
뜬금없는 말에 잠시 얼이 빠지는 시문.
이내.
“아.”
작은 탄식을 흘렸다.
‘저번 국가대항전에서의 패배 때문인가?’
레오니 볼프.
앞서 말한 대로 용맹함을 지닌 플레이어였고.
그에 더해진 신중함 덕분에 발할라의 선봉장, 성좌 브륀힐드의 선택까지 받은 인물이다.
하나.
‘하긴, 전생에서도 승부욕이 어마어마한 여자였지.’
전투계 특유의 호전성 때문일까?
그녀의 용맹함엔 승부욕이 크게 뒷받침되어 있었다.
실제로 전생의 정규 아레나에서도.
‘소속국인 독일의 순위가 내려가면, 그날로 발텐베르크 길드는 비상이 걸렸었으니까.’
방송까지 전면 금지시키며, 모든 정보 유출 요소들을 차단하고.
다음 이벤트전의 승리까지 전 길드원을 지옥 훈련으로 인도했다.
당연히 하이랭커이자, 그녀의 오빠인 파비앙 볼프도 예외는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그래. 네 생각대로다. 김시문. 국가대항전에서 네게 패배한 이후로, 잠도 제대로 오지 않더군.”
성좌의 힘까지 사용했는데도, 무참하게 패배해 버렸으니.
어찌 평소의 신중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설령 제대로 된 전투로 패배한 것도 아니었지.”
지금 떠올려도 치욕스러운지.
“갑자기 잠이 들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얼굴까지 붉어지며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지는 레오니.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시문을 노려봤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성좌의 힘까지 얻은 날 수면에 빠뜨린 것이냐.”
레오니의 서슬에.
“어음…….”
시문은 슬쩍 볼을 긁었다.
“사실 나도 잘은 몰라.”
“뭐?”
예상치도 못한 대답인지.
일순 멍해지는 레오니.
그러나 어쩌겠는가.
“정말이야. 그냥 기술을 쓰니까. 그쪽이 잠들더라고.”
사실인 것을.
‘오딘이나 다른 성좌들이 뭔가 아는 눈치긴 했지만. 난 전혀 모르는걸.’
물론 레오니가 잠든 이후.
성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뭔가 내막이 있어 보였지만 그뿐.
시문으로선 진심으로 모르는 일이었다.
“뭐, 어찌 됐건 상관없다. 이번 아레나에서 다시 겨뤄보면 될 일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레오니에 시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여기서 레오니가 죽어버리면 곤란한데…….’
국가대항전보다 훨씬 높아진 스펙을 떠나서.
레오니 볼프는 유럽이 멸망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도.
끝까지 유럽 플레이어들을 이끌던 하이랭커 중 하나다.
또 마왕 파우스트와 다르게.
사리 분별과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리는 인물.
또한 힘에 취한 파우스트의 미친 짓을 매번 막아내던 모습까지 떠올려보면.
‘레오니는 살아 있어야 돼.’
레오니 볼프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레오니를 케어해 주면서 진행해도, 서바이벌이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데…….’
종목 서바이벌.
100인 중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죽어야 하는 종목인 만큼.
레오니를 아무리 살려놔도 결국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성좌 오딘이 ‘저기. 얘들아? 나 부탁 좀 하자.’ 다른 성좌들을 향합니다.]
[네 명의 성좌가 오딘을 보며 고개를 갸웃합니다.]
시문의 앞으로 오딘의 반응이 떠올랐다.
이어.
[성좌 오딘이 ‘그…… 브륀힐드가 쟤 좀 살려달라는데. 좀 도와줄래?’ 난처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지X하네. 천지 모르고 날뛰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신랄하게 쏘아붙입니다.]
[성좌 천마가 ‘힘없는 패기는 만용에 불과한 것을.’ 비소를 짓습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고개를 끄덕입니다.]
주르륵 떠오르는 성좌들의 반응.
하지만.
[성좌 오딘이 ‘아씨! 브륀힐드는 발할라의 선봉장인 거 알잖아! 내 체면 좀 살려 줘!’ 떼를 씁니다.]
[성좌 제우스가 ‘신왕에게 체면은 중요하지. 나야 찬성하겠다만…….’ 안타깝게 수염을 쓸어내립니다.]
오딘에 호응하는 성좌는 제우스 하나.
다른 성좌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에.
‘뭐야? 레오니를 살릴 방법이 있는 거야?’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시문.
이내.
‘맞아! 룰 개입! 여긴 비정규 아레나가 아니니까 룰 개입이 가능하잖아?’
눈을 반짝인 시문은 성좌들의 반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도 브륀힐드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브륀힐드님이 왜?”
곁에 있던 레오니가 물어왔으나.
시문은 그녀의 물음을 깔끔히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방법이 있다면, 부디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다행히 먹혀든 것일까?
[성좌 오딘과 제우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세 명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잠시 침묵합니다.]
오딘과 제우스를 제외한 세 명의 성좌들은 잠시간 침묵에 빠졌고.
[성좌 검은 염소가 ‘흐음…… 정작 당사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우리 아가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맞나?’ 못마땅한 눈치를 줍니다.]
검은 염소가 짧은 침묵을 깨뜨렸다.
그러자.
[성좌 브륀힐드가 ‘위대하신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할라의 브륀힐드라고 하옵니다.’ 급히 다가와 예를 표합니다.]
성좌 브륀힐드가 기다렸다는 듯 등장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어쩜 예가 이따위야? 부탁이 있으면 네가 직접 기어 와야지. 우리 아가랑 저 꼬맹일 시켜?’ 브륀힐드를 내려봅니다.]
[성좌 천마가 ‘허허! 그러니 후원하는 이도 저리 경거망동한 것 아니겠나.’ 비소를 짓습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제히 브륀힐드를 비난하는 성좌들.
그에.
[성좌 브륀힐드가 ‘미천한 것이 감히 위대하신 분들께 범접하는 건, 무례라 생각했나이다.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깊은 예를 차립니다.]
브륀힐드는 더욱 머리를 숙이며 사죄를 고했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성좌 검은 염소가 ‘하여간에. 아테네도 그렇고, 요즘 것들이 눈치는 빠르다니까.’ 입술을 삐쭉입니다.]
[성좌 천마와 바알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반대하던 세 성좌의 반응은 다소 누그러졌다.
[성좌 검은 염소가 ‘근데…… 맨입으로?’ 고개를 까딱입니다.]
[성좌 브륀힐드가 ‘물론 아니옵니다! 여기 모든 분들께 성의를…….’ 얼른 답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하! 야, 네까짓 게 보이는 성의가 우리한테 의미 있겠니?’ 당신을 대놓고 힐끔거립니다.]
‘에? 갑자기 난 왜?’
갑작스러운 검은 염소의 주시에 눈을 끔뻑이는 시문.
[성좌 브륀힐드가 ‘미천한 것이 부족하여 깊은 뜻은 몰라뵈었나이다!’ 얼른 고개를 숙입니다.]
물론 곧바로 이어지는 메시지창으로.
[성좌 브륀힐드가 미션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문은 미션을 확인했다.
[미션]
-성좌 브륀힐드는 자신이 후원하는 ‘레오니 볼프’가 살아남기를 원합니다.
이번 아레나에서 ‘레오니 볼프’를 생존시키십시오.
보상 : 브륀힐드의 갑주 (1회성)
그러곤.
“미친!”
절로 튀어나오는 경악.
그도 그럴 것이.
‘브륀힐드의 갑주면 용제를 상대로 탱킹하게 해주었던 그 갑옷이잖아?!’
브륀힐드의 갑주.
일명 발키리 슈트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유럽의 용제 강림 당시.
오빠 파비앙 볼프가 용제를 공략하기까지.
레오니 볼프가 용제를 상대로 버티게 해주었던 갑옷이었다.
시문은 1회성이란 문구를 보며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1회성이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용제 강림 때 사용했던 갑옷이 확실해.’
유럽이 멸망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간 이후.
‘용제 강림 이후론, 그만한 탱킹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실제로 미국으로 망명간 후.
‘그때의 탱킹 능력은 일시적이었다.’ 라고 인터뷰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마 후원이나 퀘스트 등으로 저 브륀힐드의 갑주를 얻어 용제를 상대로 썼을 터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시문은 얼른 미션을 수락했다.
그러자.
[성좌 천마가 ‘허허. 성의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군.’ 수염을 쓸며 웃습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저걸 빌려줄 정도면, 제 나름대로 크게 쓴 거니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습니다.]
일제히 떠오르는 세 성좌의 반응.
[성좌 오딘이 ‘헤헤! 그럼 다들 찬성한 거지?’ 신이 나 들썩입니다.]
[성좌 제우스가 당신을 향해,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어 찬성하던 두 성좌의 반응도 떠올랐다.
잠시 후.
[조건 ‘협력’이 추가됩니다.]
[참가자 모두 2인으로 팀이 맺어집니다.]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떠올랐다.
* * *
“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협력이라니?”
어둑한 모래사장 위로 줄줄이 경악이 쏟아진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거 서바이벌 아니었어?”
“이봐! 서바이벌에 협력이 웬 말이냐고!”
서바이벌에 갑작스레 협력 조건이 추가되었으니까.
매칭된 수십의 이종족들은 해괴한 얼굴로 허공에 떠오른 공지를 바라봤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거 설마…… 성좌가 룰 개입을 한 거 아냐?”
그것을 시작으로.
“뭐? 룰 개입?”
“어떤 미친 성좌가 고작 플래티넘 아레나에 룰 개입을 해!”
“맞아. 무슨 반신 종족이라도 있냐?”
“그럴 만한 종족은 없어 보이는데?”
순식간에 이종족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웅성거림.
그리고 이종족들의 웅성임을 듣고 있던 금발의 여성.
‘서바이벌에서 협력이라니? 어이가 없군.’
레오니 볼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내.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 김시문이 브륀힐드님을 언급했잖아?’
흘렸던 헛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거기다 방금도 받아들인다고 답했던 거 같은데. 설마!’
레오니는 고개는 절로 시문을 향해 홱 돌아갔고.
“이봐. 김…….”
그녀가 시문을 부르려던 찰나.
[참가인원이 모두 매칭되었습니다.]
[플레이어 김시문과 한팀이 됩니다.]
[지역은 차원 두아트의 ‘저울 위 사막’입니다.]
일련의 메시지들이 떠오르며.
스으으.
일대의 모래들이 서늘한 무채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