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222화. 변화 (2)
무저갱.
달리 표현할 말이 또 있을까?
스아아아아아!
별 한 점 없는 밤이 메아리치듯.
사방에서 얽혀오는 어둠은 어떤 형체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만을 선사했다.
그리고 시문은 이 느낌을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타르타로스. 그곳으로 떨어질 때와 똑같은 느낌이야.’
타르타로스.
지난 아레나였던 저승의 강 스틱스의 히든 피스로 입장하게 되었던 곳.
지금의 추락은 타르타로스로 떨어지던 그때와 똑 닮아 있었다.
단지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뚝.
갑작스럽게 추락이 멈춘 이곳은 광활한 우주와 같았던 그곳과 달리.
사아아.
시커먼 어둠 속에 핏물을 뿌려놓은 듯.
붉은 무언가가 어둠 사이를 넘실거린다는 것.
그 모습이 꼭.
‘핏빛 심연과 똑같은 느낌이군.’
아즈쉬타의 심해에서 보았던 핏빛 심연과 비슷했다.
턱.
부유감만 느껴지던 발에 처음으로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곳이 바닥임을 깨달은 시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로지 시커먼 어둠.
단 한 곳인 정면만이.
사아아.
붉은 기운으로 길쭉하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이곳만이 길이라는 듯 말이다.
실제로.
-놀란 기색이 전혀 없네? 히히! 과연 레메게톤을 모을 만하네. 이쪽이야.
아까 들었던 목소리도 들려고 오고 있었다.
그 특유의 능글맞음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러나 대면하지 않고는 알 도리가 없었기에.
시문은 붉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정면으로 나아갔다.
이내.
길보다 더 시뻘건 기운으로 이루어진 문이 보인다.
아니.
하늘하늘거리는 것으로 보아, 문이라기보다는 휘장이나 커튼 같다고 해야겠지.
그것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서자.
‘저건…….’
시문의 미간이 대번에 모여들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감옥?’
쇠창살을 대신하는 시뻘건 기운.
그 속엔 검붉은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작은 머리 하나만 툭 내밀어진 누군가가 보이는 것이다.
시문은 그곳으로 다가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사슬의 색이 검붉은 것이 아니라.
“피잖아?”
전부 구속된 저 터벅머리의 존재에게서 흘러나온 피라는 걸.
동시에.
“왜. 가엽냐?”
터벅머리가 휙 고개를 들었고.
“그럼 이것 좀 풀어줄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부터 들어왔던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하나 시문은 뭐라 답할 틈도 없이.
파앗!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의 붉은 눈동자에서 빛이 쏟아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여긴…….”
살벌했던 검붉은 감옥은 온데간데없었다.
천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푸르고 아름다운 하늘.
그리고 혼돈계를 연상시키듯.
잿빛으로 검게 죽어 버린 광경이 반인 기괴한 세상 속에서.
“히히! 안녕?”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웬 소년 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까 거긴 이야기 나누기가 여러모로 불편해서, 장소 좀 바꿔봤어. 어때? 괜찮지?”
어지간한 풍파를 다 겪은 시문으로서도, 입이 떡 벌어질 미모의 소년.
아마 입고 있는 옷만 아니었다면.
성별조차 추정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 시문의 놀라움을 읽은 것일까?
“왜? 내 성별이 궁금해?”
소년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고.
시문은 바지춤을 붙잡는 의문의 존재에 대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초월적인 아름다운 외형과 달리.
“궁금하면 보여 줄까?”
상당히 미친놈이라는 것을 말이다.
“…….”
삽시간 굳어버리는 시문의 얼굴.
그게 퍽이나 재밌는지.
“푸핫! 속내가 안 읽혀서 어쩌나 했는데. 너 되게 투명한 인간이구나?”
저 혼자 깔깔대는 미소년.
시문은 말없이 배를 부여잡고 웃는 소년을 내려다봤고.
“아! 미안. 모처럼 만난 존재가 너무 재밌어서.”
간신히 웃음을 그친 그는 어느 레스토랑의 웨이터처럼.
“그럼 이쪽으로 앉으시죠?”
자연스럽게 시문을 안내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기괴한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고풍스러운 석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디자인이 꼭.
‘레메게톤의 원본이 놓였던 제단과 똑같군.’
아르스 게티아나 테우르기아가 놓여 있던 제단과 비슷했다.
소년의 안내에 시문은 잠시 이 의문의 소년의 위험성에 대해 고민을 했으나 그뿐.
‘날 해할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무슨 짓이든 했겠지.’
아르스 테우르기아를 흡수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위해를 가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터.
‘혹시 모르니까. 최소한의 긴장만 유지하자.’
시문은 잔뜩 세웠던 날을 조금 풀곤.
소년의 안내에 따라 고풍스러운 석재 의자에 앉았다.
먼저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소년의 입가가 슥 올라간다.
“과연 판단도 훌륭하네. 신왕들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질 만해.”
“날 잘 아나 봐?”
“모를 수 없지.”
시문의 물음에 소년은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비록 이런 신세라 해도, 이리저리 들어오는 소식이 많거든. 특히…… 갤럭시 아레나에 관해선 더더욱.”
싱긋 웃는 소년.
그를 물끄러미 보던 시문은 물었다.
“넌 정체가 뭐지?”
“글쎄…… 부모에게 버림받고, 엿같은 이간질로 둘도 없을 친우까지 잃은 불쌍한 아이? 어때. 불쌍하지 않냐?”
능글맞은 소년의 대답에.
“…….”
시문의 얼굴은 급속도로 싸늘해졌고.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핫!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난 너랑 아주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제 소개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행동을 보면 전혀 아닌데 말이지.”
“큭! 그렇긴 하네. 근데 이건 정말이야. 너와 친해질 마음이 없었다면…… 난 진즉 내 이름부터 소개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친해지고 싶어서 오히려 이름도 말하지 않는 거다?”
“바로 그거야!”
손뼉을 딱 치며 답하는 소년.
이 해괴한 소리를 진심으로 하는 건지.
소년의 붉은 눈동자는 한창때의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그제야 시문은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오드 아이잖아?’
피처럼 시뻘건 붉은 색과 달리.
소년의 오른쪽 눈동자는 창공을 연상시킬 만큼 푸른색이었다.
그걸 인지하고 나자.
‘청안과 홍안의 오드 아이라…….’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묘한 감각이 머릿속을 슬금슬금 건드렸다.
이내.
“아.”
짧은 탄식을 내뱉은 시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오드 아이의 존재! 거기에 이름을 언급하면 안 되는 것까지!’
전생의 끔찍했던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친 것이다.
‘언급 불가의 악몽…….’
중동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이름을 들어서도 말해서도 안 되는 존재.
“루시퍼…….”
시문은 나지막이 그 이름을 읊었고.
지금까지 능글거리던 소년은 처음으로.
“……너. 어떻게 안 거지?”
아예 다른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 * *
언급 불가의 악몽.
말 그대로 언급해서도 안 되고. 해당 단어를 들어서도 안 되는 원인 모를 저주로.
이스라엘을 시작으로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
유럽과 함께 탄탄한 각성자 전력을 자랑했던 중동을 단번에 멸망시켜버린 지구 최악의 재앙 중 하나였다.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일반인부터 랭커까지. 저놈의 꿈을 꿨다 하면 예외 없이 죽어 나갔었지.’
정규 아레나의 즉사 판정처럼.
관련된 어떤 사소한 부분만 언급해도, 즉시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는 저주라는 것.
더 악랄한 것은.
‘운 좋게 살아남아도, 곧이어 악몽에 나타나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해버린다고 했었지.’
고로 한 번이라도 언급 불가의 악몽과 접촉한 이들은 제 입으로 언급해서 죽거나.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악몽을 벌벌 떨며, 기다리다 죽어야 한다는 것.
어느 쪽이건 결국 죽음이라는 결말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일부의 용기 있는 희생자들과 죽음을 잠시 유예시킬 수 있는 고수준의 네크로맨서들로 인해,
악몽의 원인은 ‘오드 아이의 존재다.’라는 단서가 세상에 알려졌고.
차후 성좌 라파엘의 계약자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플레이어.
성녀 안젤리카 그레지오를 위시로 한 유럽과 미국의 랭커 연합으로 ‘루시퍼’라는 이름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안젤리카의 배후성인 라파엘의 가호로 언급 불가의 저주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이미 언급 불가의 저주로 멸망해 버린 중동은 아레나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당연히 중동 전역으론 아레나 실패의 반작용인 아웃브레이크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
루시퍼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의 존재는.
“왜 답이 없어? 날 어떻게 알았냐고 묻잖아.”
시리다 못해 베일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시문을 노려봤다.
하나.
“글쎄…… 인생 2회차라도 돼서 그런 거 아닐까?”
시문은 아까 능글맞게 답하던 루시퍼의 대사를 똑같이 읊어 줄 뿐이었고.
“너!”
얼음장 같았던 루시퍼의 얼굴은 삽시간 일그러졌다.
그에 호응하듯.
쿠르르르르!
붉은 눈동자 쪽인 잿빛의 혼돈계가 거세게 진동했으나 거기까지.
“푸, 푸하하하핫!”
곧 터져 나온 루시퍼의 광소에 진동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뭐가 그리 웃긴 것인지.
“아하! 아하핫!”
바닥까지 나뒹굴며 자지러지는 루시퍼.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아! 그래. 그래야지. 이 정도는 되어야 신왕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거겠지.”
눈에 맺힌 눈물까지 닦아낸 루시퍼는 다시 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니 바알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렇게 레메게톤을 모으는 거 아니겠어? 놈이 내 이름에 건 저주도 쌩까고 말이야.”
“저주?”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는 시문.
그에.
“음? 뭐야. 너 내 이름에 저주가 걸린 거 몰랐어?”
루시퍼의 고개가 갸웃했고.
“알고는 있었다만. 그게 바알의 저주인 건 몰랐는데?”
시문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급 불가의 악몽을 알면서도 루시퍼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단 하나.
‘어차피 저주가 발동해도. 내 성좌들이 알아서 막아 줄 테니까.’
바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성좌들 때문이었다.
성좌 라파엘 역시 상위서열의 성좌였으나.
자신의 성좌들은 신왕급이니까.
한데.
‘바알이 건 저주였을 줄이야.’
지금까지 언급 불가의 악몽은 루시퍼의 소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다.
뭐 어느 쪽이든 간에.
‘결국 내게 언급 불가의 저주는 통하지 않았겠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그런 시문을 보던 루시퍼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제 알겠네. 너에게 관심을 주는 신왕들 중에 바알 놈도 있구나?”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거늘.
대번에 시문의 상황을 간파하는 루시퍼.
“놈이 너에게 레메게톤을 허락한 거야. 그러니 이렇게 원본을 모을 수 있는 거겠지.”
아니면 진즉 그 고약한 놈에게 죽었을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루시퍼는 잠시 유려한 제 턱을 쓸었다.
“이거 안 그래도 유일한 접촉자라 선택지가 없었는데…….”
루시퍼의 눈과 입이 점점 올라간다.
“이러면 더 놓칠 수가 없잖아!”
그는 반짝이다 못해, 광선을 발사할 정도의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있지. 내 부탁 2개만 들어줄래?”
“거절할게.”
칼같이 답하는 시문.
그러나 루시퍼는 실망스러운 기색 없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하나만! 응? 어차피 너도 레메게톤을 완성해야 하잖아. 아르스 테우르기아는 내가 완벽히 잠식한 상태라서, 내 협력이 필요할걸?”
“즉 네 도움이 없으면 레메게톤을 완성할 수 없다?”
“정확해!”
“음…….”
잠시 고민하는 시문.
사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바알이나 다른 성좌들의 도움으로 축출해 버려야겠네.’
보아하니 바알로 인해 저 꼴이 된 거 같은데.
그냥 바알에게 말해서 루시퍼를 축출해 버리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 시문의 속내를 읽은 것일까.
“바, 반대로 내 도움이 있으면 아르스 테우르기아를 더 제대로 쓸 수 있어!”
루시퍼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부탁도 그리 어려운 거 아니야! 물론 방금 뺀 하나는 꽤 어려운 거긴 한데…… 그건 빼버린 거니까 상관없잖아?”
어떻게 보면 절실함을 넘어, 애절하기까지 한 루시퍼.
전생의 중동을 돌이켜보면 당장 쳐내도 모자라지만.
‘언급 불가가 바알의 저주 때문이라면. 근본적으로 루시퍼의 잘못이 아니긴 하니까.’
거기다.
‘이대로 쫓아내면 전생처럼 멋대로 나타나서 난동을 피울 수도 있어.’
아무리 빠르게 대처한다 한들.
결국 피해자는 생길 것이고, 그 피해 규모는 어떨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참고로 바알놈한테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걸 루시퍼 본인도 아는 것인지.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언급의 저주는 못 풀어줄 거고. 날 여기서 쫓아내 봐야, 어차피 내 본신은 다른 곳에 있어서 큰 의미도 없거든.”
나름 위협적으로 말하는 루시퍼.
물론 그 외형에 빗대면 어린 소년이 으름장 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전생의 루시퍼로 인한 재앙을 잘 아는 시문으로선.
‘일단은 내 수중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하긴 하겠네.’
놈을 이대로 축출하는 선택지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그에.
“잘 생각했어!”
루시퍼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으나 그뿐.
“단, 네 부탁은 뭐든 안 들어줘.”
“왜애애!”
이어지는 시문의 거절에 대번에 울상이 되었다.
“진짜 쉬운 부탁이라니까? 그냥 아레나 진행하다 얻은 솔로몬 그 X새끼의 정보를 알려주기만 하면 돼!”
“쉽든 뭐든. 무슨 퀘스트도 아니고. 나한테 득될 게 없는데 뭐하러 들어줘?”
“퀘스트…… 맞아. 너 플레이어였지? 이 꼴이 된 지 억겁이 넘어서 깜빡했네.”
시문의 말에 제 머리를 콕 쥐어박는 루시퍼.
“그래.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지. 나도 그런 관계가 좋아. 그저 맹목적인 충성과 믿음은 늘…….”
조울증이라도 있는 것일까?
밝았던 루시퍼의 안색이 삽시간 어두워졌다.
“좋아!”
하나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시퍼는.
“꼴이 이러니 퀘스트는 주지 못하지만, 대신 부탁도 하지 않을게.”
저 혼자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서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긴 하거든. 여기가 원신을 회복하기 최적…….”
그때.
쿠그그그그그!
아까와 달리.
이 반반 뒤섞인 공간 전체가 뒤흔들린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렬한 진동이었으나.
“쯧. 알아차렸나? 하긴.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
태평하게 하늘을 힐끔거린 루시퍼는 시문을 바라보았고.
“그럼 김시문. 우정도 다지고 월세도 낼 겸, 내가 선물 하나 보낼게. 그러니 앞으로 나 좀 좋게 봐줘야 해?”
과장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는 그를 마지막으로.
파앗.
세상이 점멸했다.
* * *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성좌 라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역시나네! 역시나야!)’ 고개를 절레 졌습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으음이 이 멍청한 자식! 그 망할 꼬마놈이 저기 숨어 있는 것도 몰랐냐?’ 으르렁거립니다.]
[성좌 천마가 ‘허허…… 너무 성내지 말게나. 그때 이후로 억겁이 넘었거늘.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오딘이 ‘그래. 공허 할매도 몰랐잖아. 바알을 탓하면 안 되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제우스가 ‘애당초 야훼조차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잖나.’ 오딘의 말에 동의합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성좌들의 반응이었다.
‘역시 성좌들도 루시퍼가 숨어 있는지는 몰랐나 보군.’
나름 예상했던 반응.
몸을 일으킨 시문의 눈으로 익숙한 소파가 들어온다.
그 옆으로.
-깼어?
어느새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이 다가왔다.
-갑자기 쓰러지길래 깜짝 놀랐어.
“내가 쓰러졌었어?”
-응. 정확히는 가수면 상태라고 해야겠지. 몸은 멀쩡하길래, 아르스 테우르기아가 적응할 시간인가 싶어서 소파로 옮겨뒀어.
“잘했다. 고마워.”
시문은 녀석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고는 바닥을 딛고 완전히 일어섰다.
그런 시문의 앞으로.
[성좌 바알이 ‘으음.’ 우려의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 바알의 반응이 떠올랐고.
시문은 바알의 우려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전 괜찮아요. 나름 귀엽기도 하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성좌 제우스가 ‘귀……엽?’ 눈을 끔뻑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귀엽다고? 태초신을 상대로 덤빈 그 또라이가?’ 어이없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천마가 ‘귀엽다라…… 어느 성좌가 들어도 자지러질 평가로군.’ 기가 찬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라와 오딘이 입을 슬쩍 벌립니다.]
어딘가 해괴한 성좌들의 반응이 줄줄이 떠올랐다.
하지만 거기까지.
[성좌 바알이 ‘으음.’ 묵묵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알의 긍정과 함께 성좌들의 반응은 뚝 끊어졌고.
더 이상 성좌들의 반응이 올라오지 않자.
‘그나저나. 루시퍼의 선물이라는 게…… 이건가?’
시문은 가슴 정중앙.
현자의 돌에 응축된 마기의 묘한 변화를 잡아냈다.
그에 반응하듯.
-응? 이건 또 뭐야? 언제 내 안에…….
의문 어린 현자의 돌의 목소리를 끝으로.
콰아아아앙!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