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254화. 전말 (2)
아날로그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TV.
그 속에선.
[나, 나는 데스페라도의 창립 멤버인 마담 다이애나.]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적이게도.
[이, 이번 아메리칸 드림의 한국 지부 테러는 우리 데스페라도만이 연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데스페라도의 창립 멤버라 소개한 그녀는 그 악명에 맞지 않게.
난자당한 드레스와 상흔들이 가득했고.
그 목소리마저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하나 마담 다이애나의 처량한 행색은 보는 이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아메리칸 드림의 길드 마스터인 데릭. 그의 도움으로 이번 테러를 저질렀다.]
다이애나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으니까.
[그는 윈터 퀸의 구속과 신병 양도를 조건으로 우리의 테러 행위를 도왔으며…….]
세계 최고 길드의 마스터이기 이전에.
미국의 슈퍼 히어로로 인정받는 데릭.
그가 세계 최악의 범죄 조직인 데스페라도와 손을 잡아 이번 테러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지 않나?
심지어.
[아메리칸 드림의 집행부원으로 변장시켜, 그곳의 집행위원으로 있는 우리의 스파이, 레이나와 연계하여…….]
아메리칸 드림 내부에 데스페라도의 스파이가 있다는 것까지.
그녀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믿고 싶어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리고.
“키햐!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오래된 TV와 어울리는 올드한 바.
“중간 보스. 참 대단하지 않아?”
그곳에 팔을 건 채.
“그 앙칼진 마담이 저 꼴이 된 것도 믿기가 힘든데. 자백 영상이라니?”
화면 속 다이애나의 자백을 보던 동양계 남자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 무리 좀 했어도, 검성의 손아귀에서 살아남길 잘했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니까!”
그에.
“보스 대행이다. 하루토.”
맞은편에서 중후하면서도 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루토는.
“에이! 지금 저걸 보고도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나와? 감상 좀 읊어보라고.”
기이하게도 암전되어 있는 자리.
전체적인 윤곽이나 잔을 집은 손 정도만 보이는 어둑한 자리를 바라봤고.
“……놀랍긴 하군.”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는 목소리만큼이나 굵직한 손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하루토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슥 빼며 눈을 반짝였다.
“그치 그치? 정확히 어떤 부분이 놀라워? 마담이 걸레짝이 된 거? 아니면 저 어설픈 자백?”
“둘 다. 넌 이 건을 어떻게 생각하나. 하루토.”
남자의 되물음에.
“나야 뭐, 죽이는 포르노라도 한 편 본 기분이지! 진짜 이런 일은 상상도…….”
하루토는 곧바로 주절주절대었으나 그뿐.
“하루토. 장난할 기분 아니다.”
나지막이.
그러나 낮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어이쿠! 무서워라~ 너무 무섭게 말하지 말라고. 어차피 창립 멤버 중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잖아?”
하루토는 유들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일단 영상만 놓고 보자면, 조작의 가능성은 없다고 봐.”
입가의 미소는 여전하나.
하루토의 장난스러웠던 눈가는 삽시간 가라앉았다.
“이유는?”
“저기가 어딘지 중간 보스도 잘 알잖아?”
“알지. 모서리 아닌가?”
“정확히는 모서리 전의 경계선이지. 모서리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까지 연관되어 있거든.”
그렇게 말한 하루토는 비어 버린 남자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어쨌거나, 저긴 내 배후성인 모서리의 짐승이 알려 준 길. 고로 나와 내 주변인들을 제외하곤 드나들 수 없는 곳이지.”
“말이 안 맞는군.”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는 잔을 받으며 답했다.
“네 말대로라면 오히려 조작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하지 않나? 저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어디서 꺼낸 것인지.
어느새 낡은 리모컨을 꺼낸 하루토가 버튼 몇 가지를 누르자.
[아메리…… 마담…… 전…….]
아까 재생되었던 영상.
마담 다이애나의 자백 영상이 빠른 속도로 되감겼다.
하루토는 영상의 가장 첫 부분에 도달하고 나서야 화면을 정지시켰다.
“자. 봐 봐.”
만신창이.
그리고 어딘가 겁을 집어먹은 듯한 마담 다이애나의 첫 장면이 보인다.
“마담이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잖아?”
“하루토. 내가 말했을 텐데. 장난은…….”
곧바로 이어지는 남자의 으르렁거림.
하나.
“아니 아니. 중간보스. 마담이 왜 겁을 먹었는지 자세히 좀 보라고.”
하루토는 검지를 까딱거리더니, TV 화면을 가리켰다.
“마담의 손을 봐. 내가 준 인도 아티팩트가 없잖아?”
“……그렇군.”
“거참. 중간보스도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봐? 하핫!”
낄낄대는 하루토.
그러나 남자는 화면을 가만 바라볼 뿐이었고.
이내.
“하루토.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준 인도 아티팩트를 영상을 찍은 놈에게 빼앗겼다?”
“그래!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질 일. 산 채로 공허 속에서 뒤틀려 버리는 일을 당하지 않고자, 저런 자백을 한 거지.”
“으음.”
“확실하다니까. 공허 속에서 산 채로 뒤틀리는 거, 진짜 끔찍할 정도로 아프거든.”
내가 또 오지게 잘 알지.
어깨를 으쓱하며 깔끔하게 말을 마무리하는 하루토.
남자는 턱을 괴었다.
“일리가 있군. 아니, 네 생각이 확실할 거다. 하나 한 가지 의문점이 있어.”
“뭔지 알아. 저 영상을 찍은 놈은 어떻게 저곳에 있냐는 거지?”
“그렇다.”
턱을 괸 남자의 손에 들린 술잔이 찰랑인다.
“저곳은 공허로 공간이 뒤틀린 곳이다. 네 배후성과 같은 성좌의 힘이 아니라면, 버틸 수도 없는 곳이지. 한데…….”
“어떻게 인도 아티팩트도 없이 저곳까지 갔냐?”
“그렇다. 마담이 처음부터 아티팩트를 빼앗겼다면, 애당초 저 공간엔 들어설 수도 없지 않나?”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토.
이내.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마 공허와 관련된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싶어.”
“공허 관련 능력자? 그럼 우리가 모를 수…….”
남자의 말끝이 흐려진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것일까?
탁.
제법 강하게 테이블 위로 놓이는 술잔.
그러곤.
“다니엘.”
이미 죽어 버린 핵심 멤버.
공허 방랑자 다니엘을 입에 담는 남자.
그 말에.
“어어? 그러고 보니 다니엘이 죽은 곳도 한국이었지?”
하루토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순철 회장을 암살하고 귀환하던 와중 죽임을 당했었다. 그리고…….”
차원 능력자인 하루토.
마법계로 능력을 발현하는 그와 달리.
공허 방랑자 다니엘은 암살계로서 능력을 발휘했지만.
“다니엘 역시 너와 같은 성좌 모서리의 짐승을 배후성으로 두고 있었지.”
차원을 다루는 특성 때문인지.
기본적으로 같은 배후성을 두고 있던 다니엘과 하루토.
이로 미루어 볼 때.
“영상을 찍은 자가 공허 관련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확실하겠군.”
“그것도 우리 배후성의 권능과도 맞먹을 정도의 수준으로 말이지?”
“그리고 다니엘이 사망한 때와 공통점을 보자면…….”
“또 연관되는 인간은 김시문이네? 히야~! 나 점점 무서워지는데?”
하루토의 확신에 남자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톡. 톡.
술잔 옆에 놓인 남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낡은 스탠드를 두드렸다.
이내.
“이거 아무래도, 평범하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군.”
드륵.
의자를 끌고 일어나는 남자.
“난 보스에게 보고하겠다. 넌 데릭에게 가서, 상황의 수습을 도와라. 벌써 퇴장해선 안 될 놈이니.”
“하아~. 또 심부름이야?”
남자의 명령에 하루토는 작게 토를 달았으나 그뿐.
“저 꼴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나.”
낡은 TV 속 화면을 턱짓하는 남자에.
“무섭기는! 예이 예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저었다.
그러자.
스륵.
스탠드에 있던 두 사람이 귀신같이 사라졌다.
* * *
미국을 넘어 세계의 수도라 불리는 뉴욕.
그 중앙의 거대한 공원인 센트럴 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천루.
그곳의 최상층에선.
콰앙!
강렬한 폭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레나산 자재로 지어졌을뿐더러.
세계 최고의 길드 중 하나인 아메리칸 드림의 길드 하우스인 만큼.
이 폭음은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지만.
“제, 제발! 진정해! 데릭!”
딱 한 명만은 아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중년의 흑인.
아메리칸 드림의 부길마인 콜린에겐 말이다.
“어차피 저 미친 영상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미국의 전 국민이 널 지지한다고!”
푸른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 내며 말하는 콜린.
그에.
우수수.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근육질의 주먹.
그것을 벽에서 뽑아낸 각진 턱의 남성은 천천히 콜린을 바라봤다.
“……날 지지한다?”
“무, 물론이지! 저 멍청한 영상을 믿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직접 보라고!”
길드 마스터 데릭의 물음에 곧바로 핸드폰을 내미는 콜린.
그 속엔.
[세계의 슈퍼 히어로가 빌런과 손을 잡아?]
[얼토당토않은 빌런의 자백 영상, 그 출처는?]
[아메리칸 드림, 영웅 흠집 내기는 결코 용서치 않아!]
각종 뉴스들부터.
-마담이 한 말이 진짜야?
-미친 소릴ㅋㅋㅋㅋ 데릭이 어떤 사람인데.
-이번엔 또 어떤 미친 짓을 벌이나 했더니…… 역시 데스페라도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데릭이 진짜 그럴 의도였으면 길드 하우스를 테러했겠지.
-맞아. 영양가도 없는 한국의 지부를 테러하겠어?
-윈터 퀸부터가 말이 안 돼. 두 히어로가 얼마나 절친한지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안다고!
커뮤니티의 이용자들까지.
해당 영상을 본 이들의 하나같이 부정적인 여론을 내어놓았고.
“이것 봐!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그것이 담긴 휴대폰 화면을 들이미는 콜린은 연신 언성을 높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 그렇지? 응?”
야수에게 먹이를 내미는 것마냥.
한껏 어깨를 움츠렸지만 말이다.
“…….”
콜린이 내민 화면을 말없이 바라보는 데릭.
이내.
“하.”
코웃음을 친 그는 진정이 된 것인지.
또다시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고.
‘휴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콜린은 벌써 20번이 넘게 뚫린 벽면의 구멍들을 바라봤다.
‘두어 번 더 두드렸으면 위험했겠어…….’
아무리 온갖 아레나산 재료와 기술로 만든 길드 하우스라 해도.
미국 최상위 랭커의 일격을 수십 번 넘게 받아 낼 수는 없는 노릇.
망가진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쩍쩍 갈라진 최상층 내부를 슥 훑은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곤.
“너도 봐서 알겠지만, 저 영상을 믿는 머저리는 아무도 없어. 오히려 환영 마법이나 조작 여부를…….”
줄줄이 안심을 위한 말들을 내뱉던 순간.
우웅.
내밀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콜린은 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하필 이 타이밍에 너희가 왜!’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서도 얼른 그것을 받았고.
“바빠 죽겠는데 무슨…… 뭐, 뭐?! 그게 정말이야?!”
곧바로 경악을 토하는 콜린.
그러곤.
“브로. 무슨 일이지?”
당장 눈앞에 누굴 두고 있는지 깨달은 콜린의 얼굴이 삽시간에 사색으로 물들었다.
하나.
“왜 긴급대응팀에서 연락이 온 거냐?”
데릭은 이미 내밀었던 폰 화면의 글자를 봐버린 상황.
그에.
“그, 그게…….”
입술을 몇 차례 달싹이는 콜린은.
“집행부에 남아 있던 데스페라도 측의 스파이가 잡혔데. 다, 다른 부서에서도…….”
결국 긴급대응팀에게 받은 소식을 힘겹게 내뱉었다.
* * *
[충격! 아메리칸 드림의 그림자?]
[그동안 우린 빌런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데스페라도의 조직원, 아메리칸 드림 내에서 속속들이 발견!]
[집행부, 행정부와 다이아 플레이어진까지. 다수 포진된 빌런들!]
[미 대통령의 일갈! 아메리칸 드림의 전수 조사 지시!]
화면 위로 우르르 쏟아지는 자극적인 헤드라인들.
그것을 보던 금발의 여성.
“하…….”
올리비아 덴슨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정말이었다니…….’
아메리칸 드림.
그녀에게 새 삶을 주는 것을 넘어, 작금의 그녀를 있게 한 단체.
늘 정의의 편에서 영웅의 행보를 걷던 그 길드에.
‘빌런들이 이리도 많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각성 범죄자인 빌런들이 저토록 많이 숨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보도되는 인원은 앤드류에게 넘긴 명단 중 반밖에 되지 않잖아?’
이는 그녀가 아메리칸 드림의 유망주인 앤드류에게 보냈던 명단 중.
단 절반밖에 안 되는 인원 아닌가?
아직 언론에선 언급조차 안 된 부서들이 꽤 있는 상황이었다.
“대체…….”
그런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저희 길드에 저렇게 많은 빌런이 숨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계셨던 겁니까?”
자신에게 해당 명단을 넘겨 주었던 시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