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262화. 우호적인 신화 (2)
“봉인?”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그도 그럴 것이 앞선 여러 이야기들로.
목소리의 성좌가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뿐.
“갑자기 냅다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답할 수 있겠냐?”
-그, 그런가?
애당초 성좌 같은 존재를 봉인한 것을, 자신이 어찌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터였다.
‘천마가 세 번씩이나 눈치를 줬던 걸 보면, 내가 어찌 해 줄 수 있는 모양인데…….’
성좌 천마.
신왕급 성좌인 그가 친히 몇 번이고 눈치를 준 상황 아니던가?
고로 저 목소리의 성좌의 봉인에 어찌 손은 댈 수 있을 터였다.
단지.
“최소한의 단서나 상황이라도 설명을 해 줘야지.”
정말 작은 단서.
혹은 상황 정도는 알려 줘야, 판단이라도 내려 볼 것이 아니던가?
시문의 말에.
-아아! 미안미안! 너무 놀란 나머지 앞뒤 없이 말부터 내뱉었네.
저도 뜬금없다 싶었는지.
사과를 건네오는 목소리의 성좌.
이내.
-어디 보자.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잠시 저 혼자 중얼거리던 성좌는.
-내가 좀 비겁한 짓에 당해서, 태초신에게 봉인당했거든? 그래서……. 아! 아니다!
설명하기 버거운 것인지.
갑자기 말을 얼버무리더니.
-그냥 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어.
직접 보라는 말을 남겼고.
그에 호응하듯.
[성좌 ?가 당신을 차원 ‘오행산’으로 소환합니다.]
[주의! 해당 소환은 아레나와 무관한 것으로, 해당 차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눈앞으로 주르륵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문의 시선은 중간의 ‘주의’라고 적힌 메시지를 향했다.
‘주의라……. 이런 건 전생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갤럭시 아레나가 직접적으로 주의를 주는 것은 전생에서도 드물었던 일.
결정적으로.
‘천마를 만날 때는 안 뜨던 경고문이 왜 지금은 뜨는 거지?’
과거 천마를 만날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경고 아니던가?
오히려 그때는 성좌 천마의 위협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지던 태도였는데.
지금은 모든 책임을 당사자에게 넘기는 갤럭시 아레나.
그에.
‘상황을 따져 보면 아마 둘 중 하나겠군.’
시문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지금이 소정규라서거나. 혹은 저 오행산이란 차원이 이 성좌의 영역이 아닌 거겠지.’
시문은 후자의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미후왕이란 놈의 말도 그렇고. 멸망전을 막아 달라는 걸 보면, 본인의 차원은 화과산일 테니까.’
고로 저 성좌는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으로 플레이어를 소환하는 것이니.
갤럭시 아레나도 경고문만 남길 뿐.
정작 모든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일 터.
그렇다면.
“이봐, 내가 원할 땐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
귀환의 여부만 확실히 해 두면 큰 문제는 없을 터.
-물론이지!
목소리의 성좌가 흔쾌히 답하자.
“그럼 뭐.”
시문은 곧바로 ‘예’를 택했고.
파아앗.
대기실과 일대가 삽시간에 갖가지 색으로 소용돌이쳤다.
1초는 지났을까?
졸졸.
저 멀리 시냇물 소리와 함께 화과산과는 또 다른 풍경의 절경이 펼쳐진다.
물론 다른 부분은 있었다.
화과산에선 화재라는 뜬금없는 요소가 있었다면.
이곳 오행산은 이 아름다운 절경을 갖춘 산 한가운데.
“이게…… 봉인이야?”
-맞아! 더럽게 유난스럽지?
어마어마한 크기의 부적이 붙어 있다는 것.
‘산의 꼭대기로 소환되지 않았으면, 부적인지도 몰랐겠어.’
오행산의 꼭대기.
그곳에서 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부적을 보던 시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내.
“이 부적을 없애 달라는 거지?”
-맞기는 한데. 그게……. 자, 자, 잠깐만!
황급히 답하는 성좌.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시문이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너 손가락 튕겨서 그 레바테인을 불러오려는 거지?
정확히는 레바테인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연성하는 거지만.
그 말을 삼킨 시문이 물었다.
“알면서 왜 막는 거야? 봉인 풀어 달라며.”
-풀긴 풀어야 하지만,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써선 안 된다고!
기겁을 하는 목소리의 성좌.
-이거 태초신이 직접 만든 부적이야. 무력으론 절대 못 푼다고! 물론 무스펠헤임의 불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그는.
-아씨! 어쨌든 힘으로 부숴 버리는 건 안 돼! 가능의 여부를 떠나서, 태초신의 심기라도 거스르는 날엔 너도 내 꼴 난다고!
천마, 루시퍼와도 막대하던 목소리의 성좌가 유달리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긴, 태초신이면 그럴 만도 하지.’
상대는 태초신 아니던가?
‘당장 닉스를 만났던 제우스만 해도…….’
지난 타르타로스에서 만났던 밤의 여신 닉스.
올림푸스의 왕인 제우스가 쩔쩔매다 못해, 그 거칠 것 없던 검은 염소마저 당황시키던 존재.
물론 어떤 무력적인 작용이 아닌, 순수 개인적인 관계로 인했던 모습들이긴 했으나.
‘일신의 힘 자체도 상당하겠지. 당장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에 압살당하는 느낌이었으니까.’
태초신인 만큼 그 무력은 상상을 초월할 터.
당장 악명이 무성한 루시퍼나 이 목소리의 성좌만 해도.
태초신에게 된통 당해, 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알았으니 진정하고. 그 절차라는 게 뭔데?”
연성하려던 손을 내린 시문은 차분히 물었다.
-간단해. 불경의 3요소인 삼장을 통달하고 있으면 돼.
“통달?”
-엉. 말이 통달이지. 각각 경장, 율장, 논장으로 아마 지니고만 있어도 될걸?
성좌의 답에 잠시 턱을 괴는 시문.
이유는 간단했다.
‘이야기만 들어도 신화급 아이템 같은데…….’
거기다 자신이 연성하는 무구는 본질적으로 모조품.
보통 봉인과 같은 형식들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음을 고려해 보면.
진품이 아닌 모조품으론 해결이 힘들지도 몰랐다.
‘만약 내 연성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업적 포인트 낭비밖에 되지 않겠는데?’
그건 좀…….
시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진다.
그 속이 보이는 것일까?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는 건 아니지……?
성좌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실렸다.
-마, 맞아, 보상! 나 봉인에서 풀려나면, 보상의 질도 지금보다 훠어어얼씬! 좋아진다고!
어떻게든 시문을 붙잡으려는 성좌.
피식 웃은 시문은 말했다.
“걱정 마. 이대로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것도 온 거지만.
‘천마가 직접 눈치를 줄 정도면, 내 연성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애당초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성좌 천마 때문이지 않은가?
안심이 된 것일까?
-저, 정말이지?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목소리의 성좌.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물었다.
“그래. 그러니 그 삼장에 대한 정보 좀 줘 봐. 디테일할수록 좋아.”
연성 대상이 디테일할수록.
연성 난이도나 등가 교환 등, 여러모로 이득이었으니 말이다.
-좋았어! 안 그래도 내가 선계의 소속일 때 한번 읽은 적이 있긴 하거든? 근데 워낙 초입부라……. 잠시 기다려 봐.
신이 난 성좌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고.
-아아! 그래. 이 방식 좋겠다!
곧 답을 내어왔다.
-아예 지식 전수로 넘겨줄게. 딱 기다려.
그렇게 말을 끝내는 성좌.
이어.
“아.”
시문의 짧은 탄성과 함께.
스으으.
시문의 머리 주변으로 청명한 빛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어때? 이 몸의 지식 전수 능력이?
“……정말 대단한데?”
-크핫! 그렇지? 비록 투선 출신에다, 이런 꼴이 되긴 했어도. 온갖 도술이랑 요술에 통달했단 말씀이야!
시문의 감탄이 그리 만족스러운지.
대소를 터뜨리는 성좌.
하나.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시문의 감탄은 지식 전수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삼장의 표지 빼고. 첫 페이지도 다 안 읽은 게 대단하다고.”
그것도.
“경장, 율장, 논장. 세 개 전부 딱 첫 줄씩만 읽은 건……. 명색이 성좐데. 좀 심하지 않냐?”
‘첫 페이지’의 ‘첫 줄’만 말이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 못 한 것인지.
-그, 그, 그게……!
연신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성좌.
그냥 들려오는 목소리로 추정컨대.
‘얼굴이 아주 시뻘게져 있겠군.’
쪽팔림으로 아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를 증명하듯.
[성좌 천마가 ‘허허! 역시 연자로군. 그놈이 돌대가리인 걸 이리 점잖게 언급하다니.’ 감탄을 흘립니다.]
성좌 천마의 반응이 떠올랐다.
이내.
-다, 닥쳐! 이 망할 변태 영감탱이가!
버럭 소리를 지른 그는.
-어, 어쨌든 형태만 제공하면 되는 거잖아!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줬다고! 이제 네 차례야!
곧바로 시문을 재촉했다.
얼른 작금의 상황을 넘어가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으나.
“그러지.”
처음에도 느꼈지만.
어딘가 떼쓰는 동생, 혹은 아이의 모습에 피식 웃은 시문은 손가락을 들었다.
이어.
‘어디 보자. 삼장의 구성이…….’
성좌가 전수해 준 삼장의 형태를 구현화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 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3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익숙한 등가 교환창이 떠올랐다.
이를 본 시문의 눈에 작은 이채가 어렸다.
‘오호? 이거 생각보다 싸네?’
전생의 지식으로도 삼장에 대해선 알지 못했으나.
당장 지식 전수로 받은 내용엔.
‘아무리 모조품이라지만, 태초신이 직접 쓴 경전이라는데. 고작 3만 점이라니?’
태초신이 직접 창조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이내.
‘그렇군.’
시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성좌가 읽은 삼장의 내용이 각각 한 줄씩이어서인가?’
경장, 율장, 논장.
성좌가 건네준 삼장의 내용은 가장 첫 문단인 단 한 줄밖에 없었으니까.
합쳐서 총 3줄이고, 태초신의 창조물임을 고려해 보면.
3만 점이라는 등가 교환비는 충분히 납득되었다.
‘참 나. 이런 게 또 이렇게 도움이 되네.’
헛웃음을 머금은 시문.
이내 ‘예’를 택하곤.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샤르릉.
맑고 부드러운 이명이 시문의 손가락 위를 맴돈다.
단 한 장으로 이루어져 있던 천마신공만큼은 아니었으나.
사락.
그만큼 가는 형태의 불경 3부가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에 반응하듯.
우우우웅.
오행산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부적이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공명음을 흘러냈다.
-오오오! 느낌이 와! 느낌이 온다고!!
머릿속에 울리는 성좌의 목소리 역시 환희를 내비쳤다.
그에.
‘다행히 업적 포인트를 낭비할 일은 없겠네.’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 시문.
“그럼 봉인 해제한다?”
전달받은 지식에 따라.
세 개의 불경을 띄운 시문이 바로 앞에 있는 부적을 향해 손을 뻗는 찰나.
“감히!!”
쿠우우웅!
어마어마한 무형지기가 오행산 전체를 짓눌렀다.
우드득.
곧장 드래고노이드를 활성시켰다곤 하나.
“윽!”
작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휘청이는 시문.
그의 위로.
“감히 선계의 대역죄인을 멋대로 풀어 주려 하다니!”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이 내리꽂힌다.
고개를 들자.
“하계의 인간이 이 무슨 불경이란 말이더냐!”
화려한 갑옷을 걸친 강인한 인상의 한 장수가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그에.
-이, 이랑진군?! 저 자식이 왜 여길!
깜짝 놀라는 목소리의 성좌.
‘이랑진군이라고?’
성좌의 말에 시문의 눈 역시 살짝 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랑진군이면 대륙성의 랭커를 후원하는 배후성 중 하나잖아?’
성좌 이랑진군은 전생에서 대륙성의 랭커를 후원하던 성좌 중 하나였으니까.
하나 이랑진군은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고, 대륙성을 후원하던 성좌가 되었던 것이니.
‘이 당시엔 오행산의 봉인을 지키고 있었나 보군.’
그런 시문의 머릿속으로.
-이봐! 김시문! 당장 튀어! 얼른 너희 세계로 돌아가라고!
성좌의 목소리가 왕왕 울린다.
여태 들려온 목소리 중 가장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당연했다.
시문이 아무리 강하다곤 하지만.
이는 결국 다이아 랭크대의 한해서일 뿐.
무려 성좌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하나 곱게 보내 줄 마음이 없는 것일까?
“그건…… 삼장? 아니. 지나치게 얇아. 그래. 가짜로군.”
시문의 주위에 떠 있던 세 불경을 본 이랑진군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내.
“놈! 감히 신성한 삼장을 어떤 사술로 베낀 것인진 모르겠으나, 그 벌은 달게 받을 것이다!”
쥐고 있던 범상치 않은 삼첨창으로 시문을 가리켰고.
‘쯧. 귀찮게 됐네.’
시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아하니 케찰코아틀 때처럼 분신 같기는 한데…….’
하지만 그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그때와 달리.
이랑진군의 힘에 완전히 저항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고로.
‘최대한 아끼려고 했는데. 여기서 써야겠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야 했다.
‘귀환이든 전투든, 지금 내 힘만으론 무리니까.’
어느새 인벤토리로 들어가는 시문의 손.
그것이 인벤토리 속의 물건을 꺼내려던 찰나.
샤르릉.
삼장을 연성했을 때의 그 맑은 이명이 오행산 전체로 울려 퍼진다.
그에.
“이 기운은?!”
성을 토하던 이랑진군은 물론.
-서, 설마!!
도망을 권하던 목소리의 성좌까지 경악을 표했고.
[성좌 천마가 ‘허허…….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말일세.’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다소 놀란 눈길을 보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정 안 되면 인과 좀 써서 나서려고 했더니……. 쯧.’ 못마땅한 듯 혀를 찹니다.]
[성좌 제우스와 오딘, 라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냅니다.]
왕들의 픽에 속하는 성좌들마저 줄줄이 놀라운 반응을 표했다.
그리고 차원 오행산의 전체.
즉 천지(天地)에서.
[멈추거라.]
형용할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말은 곧 법칙이 되어.
뚝.
세상을 멈춰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