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271화. 명분 (2)
한국 각성자 협회.
그 최상층은 오롯이 협회장만이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단순한 VIP를 넘은 방문객들의 공식적.
그리고 비공식적인 방문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응접실 또한 마련되어 있었고.
저벅.
협회의 비공식적인 응접실.
그곳을 향하던 김무열이 옆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아는 사이지?”
나지막한 목소리.
그러나 침묵이 흐르던 복도였기에.
“누구요?”
시문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고.
“지금 만나러 가는 송일천 말이다.”
“아, 대륙성의 전대 길드 마스터요?”
대륙성의 전대 길드 마스터 송일천.
전생에선 정규 아레나 이후.
온건파 숙청의 트리거가 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서위룡이 최상위 랭커까지 성장했는데도, 송일천이 죽자마자 종리추가 숙청에 들어갔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전생엔 지금보다 더 우세를 점하고 있던 종리추였다.
한데 온건파의 숙청은 송일천의 죽음 직후로 이루어질 만큼.
어찌 보면 대륙성 내에서의 입지가 확실한 인물.
하지만.
‘송일천이란 인물에 대한 나도 아는 게 크게 없는데…….’
전생에서도 대륙성의 길드 마스터직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잠정적인 은퇴로 대외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송일천이다.
당연히 시문 역시 그의 후계자인 서위룡이면 몰라도.
송일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그저.
‘파벌 상관없이. 나름 어르신으로 존경받았다는 것 정도만 알지.’
전생의 한국이 멸망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간 후.
종종 대륙성의 길드원들이 ‘어르신이 계셨다면…….’하고 한탄하던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당시 온건파가 숙청당한 이후임을 따져보자면.
반대파벌인 이들에게도 나름의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송일천에 대해선 아는 게 많이 없었기에.
“저도 잘 모릅니다.”
시문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웃기는군.”
대번에 튀어나오는 김무열의 코웃음.
“네가 서위룡과 연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시문과 달리.
송일천을 잘 아는 것일까?
“종리추가 경계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 송일천이다. 그런 노괴가 먼저 연락하고, 이리 찾아오기까지 하는데. 별 사이가 아니라고?”
김무열은 불신의 시선을 던졌으나.
어쩌겠는가?
“정말입니다. 숙부. 전 그 송일천이라는 분과 큰 연이 없어요.”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송일천과의 연이 없는 것을.
그런 시문의 답에.
“하.”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 듯.
김무열은 헛웃음을 흘렸으나 그뿐.
시문의 진심임을 눈치채곤,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비공식 방문이 진행되는 응접실에 도착한 시문.
“문을 열겠습니다.”
한 걸음 앞서 나간 2미터의 사내.
삐빅.
최창욱이 문 옆 보안 기기에 비밀번호 입력을 비롯한 몇 가지 절차를 거치자.
“들어가시죠.”
그그그극.
돌이 갈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를 내며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내부로 들어서자.
“아! 오셨습니까!”
밝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문 님.”
“서위룡 씨. 오랜만이에요.”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대륙성의 유망주, 서위룡이었다.
포권으로 그와 인사를 나눈 시문은.
“어서 오시게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선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허연 수염과 현기가 감도는 눈빛.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의 나이가 70세를 넘어갔음을 알려주었으나.
“한참 위용을 떨치는 영웅을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기쁘군.”
노인 특유의 떨림이 없는 목소리도 그렇고.
다소 작지만.
올곧은 자세를 한 노인은 척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님이 절로 느껴졌다.
주름진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많이 바쁠 텐데, 이 늙은이의 청을 들어주어 고맙네. 송일천이라고 한다네.”
따뜻한.
그러나 분명한 절제가 느껴지는 미소.
그와 함께 내밀어지는 손에.
“저도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김시문입니다.”
시문 역시 비슷한 미소를 머금으며,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이내.
‘음?’
시문의 눈에 작은 의문이 어린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노인과 맞잡은 손.
그곳으로.
스으으.
일련의 기운이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보는 기운이었지만.
‘탐색 능력인가?’
시문은 대번에 기운의 능력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딜 슬그머니 기어들어 와?
시문의 가슴 정중앙.
온갖 기운을 휘하에 두고 계신 우리의 세입자.
-저리 꺼져!
현자의 돌께선 격한 호통을 쳤고.
맞잡은 손을 통해 흘러들던 탐색의 기운은.
스으으!
순식간에 제 주인의 품으로 밀려났다.
그에.
‘호오?’
악수를 나누던 송일천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이제 갓 다이아 랭크라 들었는데…….’
기의 차단쯤이야 다이아 랭크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지만.
‘아무리 마법계라지만, 본인의 기파를 이리도 빨리 눈치챈단 말인가?’
세밀한 기운의 침범은 예민한 마법계라도 잡아내기 어려웠거늘.
심지어 탐색을 위해 흘렸던 기파가 내부로 들어가지조차 못하지 않았나?
이는 즉.
‘방송으로 본 모습도 그렇고……. 역시 진짜배기로군.’
1세대로서 지금껏 활동해온 그의 기준에서 ‘진짜배기’의 플레이어라는 뜻이었고.
달리 말해.
‘랭커는 금방이겠어.’
현재 플레이어로서 최고의 경지.
랭커까진 확정적으로 성장할 재목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허허! 이거 미안하이.”
시문에 대한 판단을 몸소 되새긴 송일천은.
“나이가 들다 보니 화면으로 보는 것보단, 이리 직접 눈으로 보는 걸 선호해서 말일세.”
아까와 같은 따뜻하면서도 절제된 미소가 걸쳐졌고.
“괜찮습니다.”
시문 역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이내.
“한데…….”
미소를 걸친 송일천이 말했다.
“방금 그건 단순히 자네의 수준을 판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네.”
이미 김시문이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을뿐더러.
어느 길드나 그렇겠지만.
대륙성 역시 시문에 대한 정보를 상시 수집하는 상태.
아무리 전대 길마였다 한들.
송일천이 시문의 수준을 모를 리 없을 터.
이는 시문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 이번 만남과 연관이 있는 내용일지요?”
연장자에 대한 공손을 내비치면서도.
이번 만남의 정확한 핵심을 짚어냈고.
“허허! 참으로 예리하구먼! 하나 그걸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그에 탄성을 흘림도 잠시.
“자네. 용족과 어떤 관계인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웃음과 미소를 지우며 물어오는 송일천.
예상 밖의 질문이었기에.
“용족이요?”
시문은 조금 놀란 눈으로 되물었고.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대륙성은 자네에 대한 정보를 최우선으로 다룬다네.”
송일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혹여나 기분 나쁘다면 미리 사과하겠으나, 길드로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걸 말해두겠네.”
“아닙니다. 어느 길드건 다 똑같을 텐데요 뭐.”
잘 나가는 유망주.
당연히 어느 길드에서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길드로 영입되리란 보장이 없으니.
당연히 그에 대비한 여러 정보를 규합해두기 마련이었다.
의외의 반응이었던 것일까?
“과연, 젊은데도 시야가 넓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송일천은 말을 이었다.
“자네 말대로 어느 길드 건, 실력자는 주시하기 마련이지. 그리고 자네는 좀 독특한 부분이 있더군.”
“독특한 부분이라면…….”
“그래, 아까 말한 용족일세.”
주름진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그 위로 턱을 얹은 송일천.
“자네가 현재 최고의 유망주임은 알고 있다네. 하나 유독, 용족에게 강한 면모를 보이더군.”
그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노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예리한 눈빛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한데 신기하게도, 자네의 신체 강화 능력으로 보이는 변신 역시, 용족의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하면 필시 용족의 기운인 용력도 다룰 터.”
“…….”
흡사 숙부 김무열이 떠오르는 그 시선을 마주 보던 것도 잠시.
“그 능력을 어떻게 얻었는지가 궁금하신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닐세.”
나지막이 이어지는 시문의 말에 고개를 저은 송일천은.
턱을 괴고 있던 손 한쪽을 내밀었다.
“자네가 다루는 용족의 힘. 용력을 다루는 법을 알고 싶은 것이라네. 정확히는…….”
놀랍게도.
주름진 그의 손 위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일세.”
스으으.
검붉은색의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이 떠올랐고.
“용력?!”
그를 본 시문의 눈이 부릅뜨였다.
* * *
창밖의 해가 저물고, 어둑한 밤이 찾아온다.
이를 알리듯.
응접실 내부엔 몇 가지 조명이 더 켜졌고.
“그러니 자네의 말을 정리하자면…….”
몇 시간이 흘렀음에도.
허연 수염과 자글한 주름의 노인.
“내게 존재하는 용력을 제거할 수 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송일천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예.”
시문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미 용력의 위험성과 그로 인한 종리추의 수작은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거늘…….”
말끝을 흐린 송일천은 현기가 그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간단합니다. 그래야 종리추가 방심을 할 테니까요.”
“방심?”
허연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간다.
하나.
“그렇군. 방심이라…….”
갤럭시 아레나 등장 이전부터 기득권으로 살아왔던 송일천이다.
그간의 세월까지 놓고 본다면.
시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지.
“그 방심을 위해, 이 노부에게 시한폭탄을 지니고 있으라?”
그것의 전제가 되는 요구가 어이가 없을 뿐.
하나.
“폭탄이긴 해도, 결국 ‘시한’이 있잖아요?”
시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설령 터져도, 제가 수습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습니다. 단지 그동안 당사자께서 좀…… 힘드실 뿐.”
“허어!”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
그러나 그런 한숨과 달리.
“이거 못 당하겠구먼. 혹을 떼러 왔다가, 도리어 다른 쪽으로 붙여버렸어.”
송일천의 입가는 흥미로운 미소로 가득했다.
시문 역시 비슷한 미소로 말했다.
“정 불안하시면, 지금 바로 제거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허허! 젊어서 그런지 가차 없구먼.”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사래를 치는 송일천.
“되었네, 종리추 고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무기를 겁난다고 제거해서야, 어디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시문이 싱긋 웃고는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이내.
“그럼 중요한 것은 다 정리된 것 같으니,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핸드폰을 확인하곤 찻잔을 내려놓는 시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제 곧 정규 아레나가 열려서요.”
대륙성의 전대 길드 마스터.
그 이전에 연장자라는 입장만 놓고 봐도 다소 무례하다 느낄 수 있는 태도.
하지만.
“허허! 능력 있는 젊은이는 바쁜 법이지. 이 늙은이가 귀한 시간을 빼앗았구먼, 미안하이.”
위치나 나이 따위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닌 것일까?
송일천은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에 맞춰 시문 역시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저 역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종리추가 어떻게 길마 자리를 얻었고, 전대 길마를 처리했는지 알게 됐으니까.’
숙부 김무열과 같이 드래곤 세럼.
통칭 DS를 마셔, 종리추의 손아귀로 떨어진 송일천.
아마 전생에서의 사망도 그 때문이 분명할 터.
이는 전생의 대륙성을 돌이켜보면 꽤나 큰 지점이었기에.
‘잘만 이용하면 큰 무기가 될 거야.’
종리추를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놈은 전대 길마란 노괴에게 족쇄를 채웠다고 안심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리고 송 어르신껜 미안하지만…….’
이는 현 상황에 주의 역시 놓치지 않은 조치이기도 했다.
훌륭한 무기들이 으레 그렇듯.
‘아직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까.’
적에게 효율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나.
반대로 나를 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숙부와 달리, 근본적으로 우린 남이니.’
뭐, 사실 숙부 김무열과의 관계도 그리 좋다고 볼 수 없었으나.
혈연에다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하나 송일천은 다르다.
‘겉모습만 저렇지. 속내는 종리추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사람이야.’
괜히 종리추가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지금까지 말을 섞어보고 몸소 깨달은 부분이었기에.
‘나 역시 만약을 대비한 장치를 해둘 수밖에.’
그리고 그것이 바로 눈앞의 노인에게 깃들어 있는 용력.
시문의 눈이 서늘해진다.
하나 그것은 아주 작은 찰나.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것을 능숙하게 감춘 시문은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고.
“물론일세. 오늘 참으로 고마웠네.”
정갈한 포권으로 답한 송일천은.
“조심해서 들어가게나. 위룡아? 뫼시거라.”
“예, 시문 님. 가시지요.”
서위룡을 붙여 작별을 고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응접실을 나서자.
드르르륵.
응접실의 문이 닫힌다.
이미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도.
“…….”
닫혀버린 문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는 송일천.
이내.
“거참…….”
뒷짐을 진 그가 천천히 휑해진 테이블로 몸을 돌린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어찌 저런 후기지수들이 매 세대에 걸쳐 나오는지 원…….”
그곳엔 칼날같이 차가운 인상의 사내.
“아주 잘 키웠구먼. 무열이.”
김무열이 앉아 있었고.
감정 한 점 비치지 않는 그의 눈이 송일천을 향한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허허! 이 사람이 참, 이제 둘밖에 없는데 뭘 그리 모르는 척하나.”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는 송일천.
“방금 나간 저 김시문이란 아이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