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275화. 대륙 대표전 (4)
파앗.
소환 빛과 함께.
두 명의 남자가 무주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오랜만이군.”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종리추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고.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청량한 미청년.
김시혁 역시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소정규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로는 영 매칭이 되질 않던데…….”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종리추.
그러나 차가웠던 그의 인상은 조금 미묘하게.
정확히는 무미건조하던 눈매와 입가가 조금 휘어있었다.
이미 정규 아레나 이전부터.
종리추와 이리저리 부딪쳐온 김시혁은 그가 뭘 말하고 싶은지 눈치챈 상태였기에.
“그러게 말이에요. 뭐, 어쩔 수 없죠. 갤럭시 아레나가 좀 공명정대합니까?”
트레이드마크인 청량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같이 매칭되기엔 아무래도 이제 좀 차이가 나는 거겠죠.”
모르는 척, 혀로 된 검격을 쑤셔 넣었다.
하나.
“하긴.”
종리추 역시 이런 김시혁을 한두 번 겪어본 이가 아니었기에.
“소정규 이전부터 차이가 나긴 했지. 당장 수행하던 특수 아레나의 수부터 달랐으니.”
김시혁의 공격을 반격했으나 그뿐.
“그렇죠. 거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장 버프로 벌어진 격차만 해도 상당하잖아요? 아! 맞다.”
김시혁에겐 하늘 같은 형이 만들어 준 희대의 사기 무기가 있지 않은가?
“대륙성은 현재 서위룡 씨 말곤 현재 성장 버프를 대여하신 분이 없었죠? 이거, 제가 착각했네요.”
그는 세계수의 성장 버프라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특히나 대륙성과의 마찰이 잦았던 그것을 언급하며.
“미안합니다. 요즘 이종족들과 아레나를 하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요.”
싱긋.
트레이드마크인 청량한 미소를 그득 머금었다.
효과가 상당했던 것일까?
“…….”
말없이.
그러나 미약하게 눈매를 꿈틀하는 종리추.
[결승전의 2경기가 시작됩니다.]
[지역은 ‘증명의 결투장’입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메시지가 떠오르며.
사아아.
무주의 공간이 일변했다.
대공원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둥근 결투장.
그 중앙에서.
“……그래. 그 성장 버프의 차이가 얼마나 될지. 아주 기대가 되는군.”
종리추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렸고.
그것을 신호로.
타앙!
총이 격발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범상치 않은 창을 꺼낸 종리추가 일격을 내지른 것이다.
아니.
쏘았다고 해야겠지.
쐐애액!
순식간에 허공을 주파하는 황색의 강기에.
스릉.
자연스레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 김시혁.
발검되는 그 속도는 어린아이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느렸건만.
어째서일까?
우우우…….
수면 위로 돌을 던진 듯.
출렁이는 파동을 휘감으며 날아드는 황색 강기가 무척이나 느리게만 보였다.
이내.
스륵.
바람이 스치듯.
아주 부드럽게 황색의 강기를 스치는 검.
놀랍게도.
서걱.
처음부터 둘이었다는 것처럼.
갈라진 황색의 강기는 정확히 두 개로 나뉘어 김시혁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콰광!
뒤편으로 강렬한 폭음이 들려온다.
하지만 당연한 결과였던 것일까?
그것을 베어 낸 김시혁이나, 그것을 쏘아낸 종리추.
둘 모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폭음이 잦아들자.
“거참.”
검을 회수한 김시혁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시작부터 황룡포라니. 패턴이 많이 변했네요?”
황룡포(黃龍砲).
창왕 종리추의 주력기 중 하나를 거론하자.
“네놈도 제법 늘었구나. 이전보다 그 빌어먹을 영역의 범위가 더 늘어났어.”
종리추 역시 묵묵히 아까 황룡포를 느리게 만들었던 부분을 거론했고.
“하하! 그런가요?”
쾌활하게 웃은 김시혁은.
“여하튼. 란나찰이니 뭐니, 기본기로 상대하겠다는 헛짓거린 안 하시니. 좋긴 하네요.”
검을 고쳐 쥐며 한층 더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대놓고 날아드는 도발에도.
“하. 네놈도 사람 새낀데. 언제까지고 같은 수준으로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종리추.
그는 역으로 멈춰 있던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고.
“아하? 그 말이 부디…….”
말끝을 흐린 김시혁이.
“본인에게도 적용되길 바랄게요.”
말을 끝맺는 찰나.
스륵.
검을 쥔 김시혁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종리추는 다음 광경이 보인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날을 내질렀다.
이내.
쩌엉!
고막이 아릿한 이명과 터져 나온다.
어느새 코앞에서 나타난 김시혁이 검이 종리추의 창날과 맞닥뜨린 것이다.
고수준의 공간계 마법인 블링크와 마찬가지로.
랭커급 전투계들이나 사용할 수 있다는 극한의 이동기.
이형환위(移形換位)였다.
하나.
“흥. 뻔하군.”
그런 고수준의 기술에도.
종리추는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고.
“뻔한 거 맞아요?”
김시혁은 영문 모를 미소로 턱을 까딱였다.
그에.
“무슨…….”
종리추의 고개를 갸웃함도 잠시.
주륵.
볼에서 느껴지는 뜨뜻미지근한 액체의 흐름에.
“…….”
종리추는 말없이 얼어붙었다.
“안 본 사이에 제 오러가 어떤 종류인지 잊었나 봐요?”
무척이나 다정하게 들리지만.
“이상하다. 나름 많이 맞아봐서…… 기억이 안 날 정도는 아닐 텐데.”
노골적인 빈정거림임을 모르지 않는 종리추는.
“……망할!”
기어코 노성을 터뜨렸다.
그와 함께.
파아아앙!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온다.
보법을 밟으며 가볍게 물러나는 김시혁.
그런 김시혁의 눈앞으로.
“네깟 게 감히!”
순식간에 나타나는 종리추.
일전의 김시혁처럼.
똑같이 이형환위를 통해 거리를 좁힌 그는.
“적혈연환격!”
황색의 강기를 감은 창을 잇달아 내질렀다.
어찌나 빠른 속도던지.
두두두두두!
흡사 난사하는 기관총처럼 내질러지는 연격.
하나.
“급해요~.”
능글맞게 답하는 김시혁은 그 말투와 달리.
채채채챙!
종리추의 연격과 똑같이, 잔상조차 남지 않는 속도로 모조리 쳐냈다.
물론 창과 검.
두 병장기의 태생적인 길이가 있음에 따라.
파파팍!
선공을 점한 종리추가 김시혁을 밀어내는 양상 있었으나 그뿐.
계속 뒤로 밀려나는 김시혁보다.
‘망할 놈!’
정작 몰아붙이고 있는 종리추의 얼굴이 더 어두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적혈연환격이 내 초식에 속하지 못한다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이 막아내?’
적혈연환격.
무시무시한 찌르기로 상대를 난자하는 기술이었으나.
정작 종리추의 창술 중엔 초식에도 들지 못하는 일반적인 창술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타 랭커들의 주력기에 가까운 수준이었거늘.
눈앞에 이 새파랗게 어린놈은 마지막으로 맞붙었을 때와 다르게.
일반적인 기술조차 사용하지 않고 막아 내다니?
이는 달리 말해.
‘정녕 나의 스펙을 앞질렀단 말인가?’
김시혁의 성장이 자신을 앞질렀다는 말이 된다.
이내.
한 가지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전대 노괴를 처리할 때도 그리 힘들지 않았던 자신이.
최근 유일하게 골머리를 썩였던 건수.
‘성장 버프…… 역시 그 망할 것 때문이겠지.’
심드라실 길드의 성장 버프.
지금껏 막상막하였던 자신과 김시혁 사이에서 차이점이라면.
그 빌어먹고도 괴랄한 성장 버프이지 않은가?
짜증이 절로 솟구쳤지만.
‘후. 상관없지.’
종리추는 빠르게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 역시 모든 패를 꺼낸 것은 아니니.’
김시혁이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 역시 초식을 비롯해, 최근에 얻은 ‘그 힘’을 일절 꺼내지 않은 상태 아니던가?
‘대충 얼마나 성장했는지 좀 재어볼 계산도 했었지만…… 더는 필요 없다.’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스탯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앞질렀다는 것은 잘 알겠다.
하나.
‘이 수준 대에서 스펙은 단순히 레벨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랭커의 수준 대에선 얼마나 레벨과 스탯이 높냐는 것보단.
‘어떤 힘’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에겐 그만한 힘이 있지 않은가?
두두두!
연격을 내지르면서도.
‘내 선계의 신장(神將)께 합당한 대가를 바치노니…….’
왼 손목에 달린 비늘조각의 팔찌에 오러를 흘려 넣는 종리추.
이내.
“나타여. 그대의 창을 내려주시오.”
읊조린 말을 끝으로.
콰르르륵!
보이지 않는 공방을 나누던 둘 사이로 무언가가 내리꽂힌다.
“무슨……!”
김시혁이 그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김시혁. 네놈과 이 몸의 진정한 격차를 보여 주마.”
종리추가 갑작스레 내리꽂힌 그것을 손에 쥔 순간.
화라라라락!
일대가 타올랐다.
* * *
[아아! 사방이 타오릅니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아요!]
[엄청난 열기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경기들을 지켜봐 왔지만, 이런 화염 공격은 난생처음 봅니다!]
경악을 토하는 국아의 두 진행자, 최강엽과 송재경.
둘만이 아니었다.
-와…… ㅅㅂ 갑자기 뭐임?
-무슨 마법이냐? 종리추 순수 전투계 아니었음?
-원래 저 정도 수준 가면 평타도 마법으로 보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건 진짜 마법 같잖아.
아시아의 대표를 뽑는 결승전.
그것을 지켜보던 시청자들 역시.
화라라라락!
결승전 무대인 증명의 결투장을 불살라 버리는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염이 사그라드는 순간.
[아앗!]
[이, 이런!]
최강엽과 송재경의 탄식이 흘러나온다.
무리도 아니었다.
열기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듯.
연신 일렁이는 화면 너머로.
“쿠, 쿨럭!”
이글거리는 창에 가슴이 꿰뚫린 김시혁과.
“이제 알겠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는 종리추가 보이는 것이다.
“이게 너와 나의 격차임을 말이다.”
“성…… 좌…….”
힘겹게 말을 내뱉는 김시혁.
하나 잘도 알아들은 종리추는.
“성좌 또한 실력이지. 랭커인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플레이어에겐 레벨만이 전부가 아니다. 뼈에 새겨두도록.”
그 말과 함께.
화르륵!
창에 꿰뚫린 김시혁의 전신이 화염에 휘감긴다.
그런 두 남자의 머리 위로.
[결승전의 랭커 경기가 종료됩니다.]
[승자는 중국입니다.]
경기의 끝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아아…… 이렇게 2경기가 끝이 납니다!]
[오랜 라이벌 구도에서 이번 전투는 종리추가 승리를 가져가게 되네요!]
두 진행자의 안타까움은 물론.
-미친! 김시혁이 진다고?
-이게 말이 돼?
-안 될 건 뭐 있음? 원래 둘이 라이벌 사이였는데.
-김시혁은 성장 버프 받고 엄청 성장했잖아.
-ㄹㅇ 소정규에서도 저만한 퍼포먼스 보여 주는 랭커 없었음.
-ㅇㅇ 타종족들도 감탄하던 강자였는데…….
채팅창 역시 난리가 났다.
-그래봐야 무기 빨이지. 그전엔 김시혁이 압살이었음.
-22 기술도 없이 적혈연환격 다 막았잖아.
-애당초 창왕 님의 적혈연환격은 기본 초식에도 못 끼는 기술인데?
-무기는 실력 아닙니까? 왜케 인정들을 못 하세요?
-위에 두 놈은 어그로냐? 아님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가면 놀이겠지. 보면 모름?
패배라는 결과 때문인지.
순식간에 혼란으로 번져가는 채팅창.
그런 채팅창을 의식한 걸까?
[그, 그래도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앞서 우리 대한민국이 1승을 먼저 거두었기 때문에, 현재 스코어는 1대 1. 즉 동점이죠!]
[이러면 다음 경기가 무척이나 중요해지는데요!]
[부디 꼭 이겼으면 하는…….]
최강엽과 송재경은 다소 높고 빠른 톤으로 다음 경기를 거론하며 주제를 돌렸고.
방송에서 연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
시문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중계 화면을 바라봤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나타의 화첨창이라니…….’
밀리던 양상을 단번에 뒤집어버린 종리추의 화염창.
그것은 다름 아닌 선계의 성좌 나타의 신화급 무구였을뿐더러.
‘저건 전생의 종리추가 사용하던 무기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전생의 종리추가 사용하던 신화급 무구가 아니었으니까.
화면을 바라보던 시문의 눈이 한층 깊어진다.
“보아하니 아까 그 팔찌가 원인인 거 같은데…….”
동생 김시혁이 유리했던 양상이 뒤집히기 직전.
분명 종리추의 팔에서 미묘한 기운이 보였었다.
그 후로 하늘에서 나타의 화첨창이 떨어졌었지.
그리고.
‘분명 용력이었어.’
비록 화면으로만 보긴 했으나.
팔찌에 어렸던 기운이 용력임을 확신하는 시문.
워낙 찰나인지라 아마 시청자 중에서도 랭커급.
혹은 자신처럼 용력이나 기운에 민감한 이들만 눈치를 챘을 터.
‘기본적으로 신화급 무구는 해당 배후성과 상당히 깊은 관계여야 쓸 수 있는데…….’
혹은 그에 준하는 대가를 바치거나 말이다.
이를 비추어 볼 때.
‘배후성을 둔 것이 아니라, 그 용력이 담긴 팔찌로 화첨창을 받아냈나 보군.’
나타의 화첨창을 사용한 것은 명백한 후자의 경우일 터.
이유는 간단했다.
‘종리추 같은 인간이라면, 나타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상위서열 성좌이자 선계에서도 나름 수위권의 무력을 지닌 나타지만.
종리추의 성격과 전생에서 그의 배후성을 고려해 본다면.
결코 나타라는 성좌로는 만족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자.
“후. 뭐 일단 화면만으론 다 확인할 순 없고.”
호흡을 길게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시문.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상대도 아무 준비 없이 나오진 않을 테니. 직접 겪어보면 알겠지.”
그의 눈은 평소와 같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다 끝나고 나면. 시혁이도 좀 골려주고.”
약간의 장난기도 함께 말이다.
그런 시문의 눈앞으로.
[마지막 경기는 ‘다이아 랭크’로 매칭되었습니다.]
[각 국가의 랭커 대표가 소환됩니다.]
일련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파앗.
소환 빛이 시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