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325화. 나도 있다 (2)
정적.
그것도 끝없은 무저갱인 이 흑암지옥을 똑 닮은 정적이.
[…….]
시왕궁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온갖 은하를 축소시켜 둔 듯한 머리칼.
“그 많은 저승 중에서도 하필이면 가장 깊은 곳만 매번 찾아오시다니…….”
형용할 수 없는 그것을 지닌 여성은.
“설마 위험한 죽음에 맛을 들였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유일하게 이 무저갱과 같은 침묵을 깨었고.
“뭐,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런 그녀의 눈에서 장난기를 읽어 낸 시문은.
“이렇게 또 뵙게 되니, 이제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녀와 비슷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해 주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을까?
“오호호!”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웃음을 터뜨리는 여성.
상당히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그녀는.
“후후. 정말이지…… 시문 님은 볼 때마다 절 즐겁게 해주시네요.”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
“그래도 맛 들이면 안 돼요? 여긴 죽음의 성좌들도 꺼릴 만큼, 산 자에겐 정말 안 좋거든요.”
잠시 진지해진 얼굴로 조언해 주었고.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마찬가지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여성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
“오랜만입니다. 닉스. 잘 지내셨죠?”
미소로 인사를 건네었고.
당연히.
“후후. 시문 님이 다녀간 뒤로는 뭐, 쭉 그대로였죠.”
닉스는 그런 시문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었다.
그리고.
‘아…….’
그런 두 사람을 보던 거대한 존재.
‘제발 아니길 바랐거늘…….’
오도전륜대왕은 그토록 착각이길 빌었던 마지막 희망까지 부서지자.
거대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다른 죽음의 성좌도 아니고, 밤의 여신 닉스라니……!’
밤의 여신 닉스.
명부시왕, 혹은 지옥의 대왕이라 불리는 이명에 비하면.
어떤 위압감이나 위협감도 느껴지지 않는 별칭의 이름이었으나.
그 실상은 전혀 달랐다.
‘어찌 태초신과 한낱 필멸자가 연이 있단 말인가!’
태초신.
말 그대로 태초부터 존재해왔으며, 같은 성좌로서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
아니.
애당초 같은 성좌라는 언급 자체가 어불성설인 존재라고 해야겠지.
갤럭시 아레나에 존재하는 여러 신계의 주인인 신왕급 성좌들.
성좌 중에서도 왕이라 칭해지는 그들보다도 위에 있는 존재가 태초신이었으니까.
한데 어찌 한낱 필멸자.
그것도 이제 갓 마스터 랭크에 오른 플레이어와 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고.
명부시왕 정도 되는 성좌가 이런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없었기에.
[10대 지옥 중 흑암지옥을 담당하는 이 오도전륜이…….]
오도전륜대왕은 거대 요새와도 같은 거구를 움직여.
[위대하신 밤의 여신께 예를 표합니다.]
쿠그그그그.
정중하면서도 깊은 예를 표했다.
“아, 반가워요. 오도전륜대왕.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고아한 미소를 걸치며, 그의 예를 받아주는 닉스.
이내.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한데…….”
말끝을 흐린 그녀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호, 혹여 불편하신…….]
한껏 긴장한 오도전륜대왕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당신은 늘 거대하네요. 하긴, 거신인 염제신농과도 먼 친척 사이이니. 이상할 것도 없네요.”
먼저 말을 이어나가는 닉스.
그녀는.
“하지만, 너무 커요.”
조금 난감한 미소를 머금고는.
“제 목이 다 아플 정도로 말이죠.”
슥.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스스슥.
순식간에 그 크기가 줄어드는 오도전륜대왕.
그는 뒤편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18미터의 거인.
벨야치보다도 작아졌고.
근 5미터에 달하는 크기가 되고 나서야, 줄어드는 것이 멈추었다.
“이제야 좀 보기 편하네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는 닉스.
하나.
[…….]
5미터로 줄어든 오도전륜대왕은 소리 없는 경악을 표할 뿐.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고 해야겠지.
무리도 아니었다.
‘어, 언제 나의 진신을…….’
애당초 닉스가 자신의 진신을 축소시켰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조차 못했으니까.
어디 그뿐이던가?
‘방금 목이 아팠다는 말…….’
거대한 자신을 진신을 보기엔 목이 너무 아프다는 말.
무려 태초신이나 되는 존재가 목이 아플 리가 없을뿐더러.
애당초 눈이라는 개념에 얽매여, 세상을 보는 존재가 아니지 않던가?
고로 저 목이 아프다는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고.
그 진짜 속뜻은.
‘감히 자신이 올려다보게 하지 말라…… 는 뜻이겠지.’
감히 일개 성좌 따위에게 태초신인 자신이 올려다보게 하지 말라는 광오한 뜻일 터.
그러한 의미를 빗대어 봤을 때.
닉스가 그의 진신을 멋대로 축소시켜 버린 것은.
‘이건 명백한 경고다!’
명백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현재 닉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읽어낸 오도전륜대왕은.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하게 위대하신 분을 맞이한 터라, 꿈에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저 자세로 임했다.
이는 단순히 닉스가 태초신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위대하신 분들 덕에 이리 흑암지옥을 유지할 수 있거늘…… 먼저 찾아뵙지는 못할망정, 이리 우를 범하는군요.]
명부시왕이 담당하는 10대 지옥 중 가장 최악으로 손꼽히는 흑암지옥.
달리 ‘타르타로스’라 불리는 이 끝없는 무저갱의 주인 중 한 명이 닉스 아니던가?
타로타로스는 죽음의 성좌조차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이었기에.
당연히 그런 흑암지옥의 시왕인 오도전륜대왕의 입장에선.
[부디 이 무지한 이를 벌하여 주시지요.]
닉스와 같은 타르타로스 태초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오도전륜대왕의 과도한 저 자세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일까?
“호호! 오도전륜대왕께선 여전히 고매하고 격식이 있으시네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닉스.
하나 얄궂게도.
그녀는 오도전륜대왕의 느슨해지는 긴장을.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제가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또 한 번 옥죄였고.
[그, 그것이……!]
오도전륜대왕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불안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오도전륜대왕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것은 제가 직접 내린 타르타로스의 조각입니다.”
닉스는 그런 그를 향해 감미롭다 못해.
“한데 그것을 지닌 이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죽음의 성좌께서 이런 처우를 하실 줄은 몰랐네요?”
오도전륜대왕조차 잠이 솔솔 올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위, 위험하다!’
그녀의 목소리로 인해 다가오는 졸음이 얼마나 위험한 적신호인지.
밤의 여신 닉스를 아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 없었기에.
꽈악!
오도전륜대왕은 야차와 같은 눈에 힘껏 힘을 주며.
[오, 오해이십니다!]
안간힘을 다해 입술을 움직였고.
다행히도 그런 그의 정성이 통한 건지.
“어머나, 오해요?”
이어지는 닉스의 목소리가 성좌조차 엄습하던 졸음을 일깨웠고.
[예! 전부, 전부 오해입니다!]
오도전륜대왕은 얼른 내려온 동아줄을 힘껏 붙잡았다.
[전 시왕으로서 산 자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한 진상을 알고자 했을 뿐! 그 어떤 무례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흐응…….”
잠시 침음성을 흘리는 닉스.
그녀는.
“시문 님? 정말일까요?”
곧바로 시문을 돌아보았고.
오도전륜대왕의 시선 역시 시문을 향해 틀어박혔다.
두 성좌의 시선.
특히나.
[…….]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침묵 어린 간절함을 보내오는 오도전륜대왕의 시선에.
“그럼요. 그냥 제가 흑암지옥에 들어선 경의를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시문은 작은 미소로 그 손을 잡아주었고.
“후후. 하긴, 다른 시왕분들도 아니고, 이곳 흑암지옥의 시왕이신데…….”
닉스는 빙긋 웃으며.
“설마 저를 무시하시는 행사를 하셨을 리 없지요.”
다시 오도전륜대왕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무, 물론이지요!]
오도전륜대왕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얼른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뒤편에 있는 시문을 연신 흘낏한 그는.
[오도전륜대왕이 당신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합니다.]
[업적 포인트 500,000점을 획득합니다.]
[십대지옥의 ‘면죄부’를 획득합니다.]
시문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오도전륜대왕은 갤럭시 아레나에 참가하지 않은 성좌입니다.]
[허용 인과치로 조율하여 업적 포인트 50,000점을 획득합니다.]
[허용 인과치로 조율하여, ‘아이템’이 아닌 ‘칭호’로 지급됩니다.]
[칭호 ‘십대지옥의 면죄부’를 획득합니다.]
온전한 보상은 아니었다.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들을 읽어내는 시문.
메시지의 내용대로.
‘아레나 참가 성좌가 아니라 그런지, 주어지는 제재가 상당하네.’
염라대왕과 함께 오도전륜대왕 역시 갤럭시 아레나에 참가하는 성좌가 아니었기에.
그가 지급한 업적 포인트는 무려 1/10로 줄어들었고.
면죄부라는 아이템 역시 비실물체인 칭호로 지급되었지만.
‘뭐, 일단 보상을 받기도 했고…….’
일단 보상 자체는 지급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간에 시스템이 인과치에 맞춰 조율했을 뿐.
오도전륜대왕의 입장에선 무려 50만이라는 업적 포인트와 면죄부를 지급한 상황 아니던가?
특히나 지옥의 시왕으로서.
면죄부라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녔을 게 뻔했기에.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시문은 오도전륜대왕이 보여 준 진심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흐응…….”
갤럭시 아레나의 시스템 자체에 개입하던 닉스가 이를 모를 리 없었으나.
“오도전륜대왕 님? 제가 괜한 오해를 했네요. 혹여나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닉스는 모른 척.
옷자락을 잡으며, 무릎을 살짝 굽혀 주었고.
[다, 당치도 않습니다!! 충분히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인 것을요!]
오도전륜대왕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마음이 좀 놓인 것일까?
[한데…….]
오도전륜대왕은 드디어 굽혔던 몸을 제대로 펴며, 옆의 허공을 바라봤다.
그곳엔.
[갤럭시 아레나에서 상당히 불만이 많은 모양입니다.]
닉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편에 쌓아두었던 아레나 측의 메시지창이 그득한 모양.
이는.
“그러게요.”
닉스 역시 마찬가지인지.
“아주 지X이 났네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닉스.
그에.
[……예? 방금 뭐라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오도전륜대왕이 되물으려 했으나 거기까지.
방금의 욕지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어머나? 아주 재밌는 말을 하시네요. 개입이라니?”
그녀는 평소와 같은 우아한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말하더니.
“난 이곳으로 이동한 것 외에는 어떤 힘도 쓰지 않았는데 말이죠.”
메시지 내용 중 무언가 거슬린 것일까?
“아아, 그러네요.”
목소리 톤과 함께 눈매가 슬쩍 올라간 닉스는.
“그 잘난 아레나에 10대 지옥이 무대로 쓰이는 건 사실이니, 명분이 그쪽에 있기는 하네요.”
따악.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우우웅.
시왕궁 일대가 거세게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온갖 별과 행성들로 이루어진 우주로 변했고.
오도전륜대왕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보란 듯이.
“자, 그럼 제 영역으로 왔으니…….”
감히 광활하다는 말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우주를 슥 훑고는.
“이제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당신들에겐 어떤 명분도 없겠죠?”
허공을 향해, 아주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고.
그것을 신호로.
까득!
섬뜩한 파육음이 울렸다.
* * *
우드득.
까각.
몇 조각으로.
아니, 단위로 나뉘고 있는 것일까?
제 몸이 감히 상상치도 못할 형태로 분해되고 있는데도.
“…….”
어떤 고통이나 감각,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10대 지옥 중 가장 무시무시하다는 흑암지옥.
그래.
꼭 그곳의 죄인으로 던져져, 모든 것이 망각되어 가는 기분.
흔한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저건…….’
벨야치가 느낄 수 있는 건 단 하나.
‘신농…… 성물…… 내 임무…….’
어느새 분해되어 버린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불씨 모양의 조각.
그가 모셨던 거신 염제신농의 성물에 대한 집착뿐이었고.
그마저도 흐릿해지는 순간.
[마스터 랭크 데뷔전을 즉시 종료합니다.]
[모든 플레이어를 강제로 역소환합니다.]
두 개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거기까지.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
김시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간 닉스는.
“흥, 내 영역에서 어딜 감히…….”
흡사 머리채라도 잡아채듯.
쭈우욱!
두 개의 시스템창을 한 손으로 잡아챘고.
“시문 님? 이거 받으셔요.”
다른 한 손으로 염제신농의 성물을 내미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뚝.
벨야치는 다시는 깨지 못할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