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민
어젯밤의 일로 황제와 노예 사이의 공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제외하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닫아 버렸다.
베르톨트는 어제 일이 뇌리에 깊이 박혀 에드가가 모셨다는 그 시종장이 누군지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아델라이드는 결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밀을 내보인 것 같아 두려웠다.
오늘도 비가 질척질척 내렸다. 아델라이드는 밖에 나가지 않고 막사 안에서 황제의 갑옷을 손보고 있었다. 베르톨트 역시 오늘은 막사에 들어앉아, 오전에 레니에가 갖다준 한 무더기의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고요한 평화가 흐르는 것 같았다.
“폐하. 아른프리트입니다.”
“들어오게.”
제2대대 대대장 아른프리트와 붉은 머리가 눈에 확 띄는 키가 큰 여자가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베르톨트에게 절도 있게 경례를 올리며 예를 취했다.
아델라이드는 제국에 여성 군인이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차림새나 행동거지로 보아 꽤 높은 위치의 군인이라는 것이 짐작되어 또 한 번 놀랐다.
“어서 와, 루이사.”
“아른프리트 대대장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저를 부대장으로 승진시키고 만고평야로 출정하라고 하셨다고요.”
“그래. 루이사 자네는 제국의 기마단을 맡아 아른프리트를 보좌해. 더 자세한 것은 저녁 회의에서 얘기하고. 작전은 지금 레니에와 휴고가 마무리하고 있을 거야.”
“폐하. 어째서 부상당한 저를 보내십니까. 지금 대대장에게 필요한 사람은 유니스입니다.”
“그게 궁금해서 회의 시간까지 참지 못하고 온 건가?”
“네, 궁금합니다. 왜 굳이 부상 때문에 활과 검도 잡지 못하는 저를 보내려 하시는 건지.”
“이번 작전에서 자네의 존재는 좀 남달라. 유니스는 별 쓸모가 없어.”
“그게 무슨…?”
“일단 가서 그 붕대 감은 팔이나 한 번 더 소독하고 살펴보는 게 낫겠어. 그리고 이따가 회의 때 보자고. 내가 지금 이 서류들 검토를 끝내고 제국으로 보내야 우리 고상한 재무대신께서 예산을 집행하신다고.”
루이사는 눈동자에 의아함과 궁금증을 한가득 안고서는 아른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아른프리트는 무어라 말 좀 해 보라는 루이사의 눈빛에도 그냥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루이사는 그런 아른프리트를 쏘아보며 작게 중얼거렸고, 아른프리트는 거기에 또 움찔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구석에서 갑옷을 닦고 있던 아델라이드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가벼운 부부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둘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에서는 친숙하고 정겨운 느낌이 풍겼다.
“더 할 말이 있는 겐가?”
서류에 눈을 떼지 않고 사인을 해 가며 베르톨트가 물었다. 황제가 이렇게 되물을 때는 어서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루이사는 ‘열중쉬어’ 자세를 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제야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은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른프리트는 황제의 이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어서 루이사를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폐하, 나가 보겠습니다. 이따가 회의 때 뵙겠습니다.”
아른프리트는 나가지 않으려는 루이사의 팔을 잡아끌어 막사를 나갔다. 아델라이드가 보기에는 아까부터 참 묘한 모습이었다.
둘이 무슨 관계인지 호기심이 일었으나 황제에게 물어보는 건 불편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 처지에 제국의 사람들을 굳이 알 필요가 없기도 했다.
결국 아델라이드는 잠깐 일었던 호기심을 꾸욱 눌러 내렸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갑옷을 반드르르 윤이 나게 닦았다.
“아, 진짜 왜 그러십니까? 폐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루이사. 폐하의 표정 보지 못했느냐?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전 모르겠습니다.”
아른프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당한 이후부터 루이사는 자신에게 분풀이를 하기라도 하듯 말을 듣지 않았다. 예전에도 종종 그랬지만 가벼운 애교 수준이었는데 요 며칠간은 아예 대놓고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출정 문제는 이따 회의 때 좀 더 알아보고 이야기하자.”
“흠. 아! 그런데 구석에 있던 녀석은 황제 폐하의 시중 노예입니까? 요새 말이 많던데.”
루이사는 심술을 부리다가 갑자기 황제의 노예에 관해 물었다.
“그래. 말이 많다는 건 또 무슨 얘기지?”
“아, 그게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폐하의 시중 노예 녀석이 꽤 곱상하다는. 그리고 폐하께서 꽤 아끼신다는.”
“아껴?”
“네. 폐하께서 그 노예 녀석을 취하려 하는 장교에게 대놓고 협박하셨다는데요?”
“협박?”
“네, 협박이요. 그것도 병사들이 모두 있는 곳에서. 좀 전에 잠깐 보니 미모가 그 정도인 줄은 모르겠지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녀도 구석에 있던 노예 녀석이 꽤 흥미로웠다.
남자치고는 너무 곱상한 외모였다. 게다가 막사 안으로 들어갔을 때 황제와의 분위기가 요상하기 그지없었다.
아른프리트보다는 못하지만 루이사도 제국의 제2대대 부관답게 실전에서 갈고닦은 날카로운 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황제가 그 노예를 꽤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갑옷을 다 닦은 아델라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다가갔다. 탁자 앞에 멈춰 선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폐하. 휴고 비서관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왜?”
베르톨트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몇 가지 해석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 시간에 와 달라 하셨습니다.”
황제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서류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아델라이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녀와라.”
황제의 굵은 눈썹과 눈썹 사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에드가가 나간 후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베르톨트는 에드가와 둘만 있을 때의 긴장되고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하나, 누군가 둘의 공간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평화로운 시간을 깬 루이사가 달갑지 않았다.
언제나 활달하고 열정적인 기사 루이사는 자신이 인정하는 몇 되지 않는 군인이었다. 매사 툴툴대는 듯하나 자신이 맡은 일은 깔끔하게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격의를 지키는 것을 싫어해 때로는 황제인 자신에게 되지도 않는 고집이나 애교를 부릴 때도 있지만 그건 그만큼 막역한 사이이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아른프리트와 루이사, 베르톨트는 꽤 오랜 시간 함께 수련했고 전장을 누볐다. 지금은 무조건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지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대답을 듣겠다며 막사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을 땐 순간적으로 노여움이 일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나간 에드가를 떠올렸다. 어제오늘, 일부러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문득 정신을 차리면 그 녀석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이리 신경이 쓰일까.’
녀석의 목소리, 몸짓, 그리고 잠깐 마주쳤던 그 시선.
녀석은 곁에 있는데도 아련했다. 마치 가볍고 보드레한 깃털과도 같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어느 여신의 눈물과도 같았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느낌들이 가슴속에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이 감정을 베르톨트는 애틋함이라고 정의 내렸다. 자신은 에드가 그 녀석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그렇기에 형으로서 녀석이 겪었을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아! 말도 안 되지.’
베르톨트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되뇌었다.
‘그래. 동생처럼. 그 녀석을 동생처럼.’
스물일곱 해를 살아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아직 결혼을 안 한 것이 성정체성 때문은 아니었다.
제국에서 보통 남자는 스물다섯 살 이전에, 귀족이나 황실 남자들은 스무 살에 결혼을 한다. 베르톨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기도 했지만 계속 전장만 누비는 통에 결혼할 여력이 없었다.
‘너무 오래 혼자여서 그런 것일까?’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 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여자는 언제든지 안을 수 있었다. 제국의 황제이기도 하고 제국 최고의 미남인 그를 마다할 여자는 없었다. 아니, 마다하기는커녕 명망 높은 귀족가의 여식들이 아버지의 눈을 피해 스스로 몸을 던져 오기도 했었다. 또 가끔은 레니에가 여자를 침소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러나 베르톨트는 전쟁에서 쌓인 스트레스나 직무로 고된 심신을 여자로 풀지 않았다. 자신을 잘 제어하고 통제했기 때문에 여자를 들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즉, 이렇게 남자를 보고 혼란스러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에드가는 너무나 생소했다.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는 이것의 정체를 베르톨트는 알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녀석이 자신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 말간 얼굴을 보는 것도, 흐르는 물과 같은 몸짓을 보는 것도.
녀석이 눈앞에 없으면 아쉬웠다. 무엇을 하는지도 궁금하고, 무엇보다… 보고 싶었다.
베르톨트는 역시 그 녀석을 동생처럼 아끼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 * *
아델라이드는 남은 자신의 인생에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있는 대로 상처받았다. 어린 소녀였을 때 기대했던 장밋빛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건 인생을 전혀 모르는 순진하고 바보 같은 여자아이의 망상일 뿐이었다.
앞으로 여자로서의 삶은 살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햇살처럼 바라보았던 다정한 오라버니를 만나서 위로받고 또 위로해 주고 싶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에드가는 추방되었지만, 어딘가에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녀는 이리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확신, 이 생각은 어릴 때부터 강한 끈으로 묶여 있던 남매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델라이드의 마음속에 에드가 외에 다른 사람의 자리가 생겼다. 그녀는 자꾸만 시선이 마주치는 황제가 신경 쓰였다.
황제의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다. 에드가도 알아주는 미모였지만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외모인 반면, 황제는 야성적이었다.
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 해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남자라고 외치는 그의 모든 것에 숨이 막혀 왔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탄탄한 근육으로 휘감긴 육감적인 몸을 홀린 듯이 보게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비를 입고 있었지만 하늘을 향한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눈을 감고, 얼굴을 때리는 그 촉촉한 감촉을 느껴 보았다. 왠지 조금 감미로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클리터스 부니에였다.
부관인 파올로에게 가려고 막사를 막 나온 참에 에드가가 보였다. 녀석은 나무같이 한곳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롯이 비를 맞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과 몸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투명한 막처럼 녀석을 감싸며 반짝반짝 빛났다.
클리터스는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에드가가 고개를 내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에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급히 걸어가 에드가의 팔을 잡았다.
“에드가.”
에드가가 한쪽 팔을 잡힌 채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의 커다란 눈망울에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다.
“네. 클리터스 대대장님.”
그가 클리터스를 향해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보였다. 클리터스의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따뜻한 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어, 어디 가는 거지?”
“레니에 공작님의 막사에 갑니다. 휴고 비서관님을 뵈러요.”
“그, 그래. 그럼 같이 가지.”
“대대장님도 휴고 비서관님께 볼일이 있으십니까?”
클리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멀지 않은 막사까지 비를 맞으며 나란히 걸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레니에와 휴고가 동시에 아델라이드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아니, 실은 아델라이드가 아니라 그 뒤에 우뚝 솟아 있는 클리터스를 본 것이었다. 클리터스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회의까지는 아직 세 시간 정도 남았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휴고가 정색하며 물었다. 그의 물음 끝엔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파올로 부관에게 갖다 줄 바이온의 지도 한 점만 내어 주게.”
클리터스는 막사로 오면서 머릿속으로 여기까지 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느라 매우 분주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지도였다.
“바이온 지도는 벌써 파올로 부관에게 넘겨주었….”
“클리터스 대장, 여기 있네. 이것 가져가게.”
휴고의 말을 끊은 레니에는 지도를 찾아 클리터스에게 내어 주었다. 지도를 받아 든 클리터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돌려 막사 밖으로 나갔다.
휴고는 클리터스의 뒷모습을 어딘지 미심쩍은 기색으로 집요하게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며 아델라이드에게 손짓했다.
“에드가. 이리 오세요.”
아델라이드가 휴고의 옆으로 다가오자 레니에도 곁에 다가와 섰다.
휴고는 왜 왔냐는 듯 의아한 눈초리로 레니에에게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레니에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델라이드는 두 사람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가 우스워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어 버렸다.
“웃을 줄도 아는군요.”
의외라는 듯 휴고의 눈이 커졌다. 아델라이드는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이것 좀 해석 부탁드립니다.”
휴고가 얇은 책자를 내밀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를 리가 없다. 이것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수에비 왕국의 수도, 수안의 비밀 지하 통로 지도였다.
다만 노선이 선으로만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다. 책장 하단에 그 선들이 무엇인지, 꺾이고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기호가 섞인 주역이 달려 있었지만, 그것은 아슬란어와 고대 라스문어로 쓰여 있어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에드가. 내가 보기엔 이건 무슨 지도 같아. 수에비의 전 국왕 카이스턴의 침실에서 발견했으니 너희 수에비 왕국의 어떤 지도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 중간중간 나타낸 기호와 표식에 대해서 이렇게 부연 설명하고 있어. 이 부분이 중요한데 여기가 해석이 안 되니 네 능력을 다시 보여 줘야겠구나.”
레니에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이곳저곳 가리키며 설명했다. 아델라이드는 레니에를 만나고 나서부터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그는 처음 보았다. 의외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아델라이드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무언가 아는 걸까?’
“한번 해 보겠느냐?”
그 대단한 황제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 공작의 명이다. 어찌 안 된다 할 수 있겠는가.
아델라이드는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또 한 번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대신 갖고 계신 고대 라스문어 사전이 있으면 빌려주십시오.”
“오, 사전!”
레니에는 근처에 놓여 있는 서류들을 들추었다. 그 속에 파묻혀 있던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자, 가져가거라.”
“소중히 다루겠습니다.”
노예인 자신에게 이 소중한 고대 라스문어 사전을 선뜻 내주는 레니에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델라이드는 조용히 사전을 받아 들고는 공손히 인사했다. 그런 그녀를 본 레니에는 피식 웃음을 날렸다.
아델라이드는 책과 사전이 비에 젖을까 봐 방수 천으로 곱게 쌌다. 우비 안으로 집어넣어 품에 꼬옥 안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휴고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휴고.”
“네.”
“너 설마 저 녀석에게 흥미가 있는 것이냐?”
휴고는 눈을 크게 뜨며 레니에에게 미친 듯이 손사래를 쳤다.
“흐, 흥미라뇨? 저런 녀석을요?”
“저 녀석이 어떤데?”
“너, 너무 가냘프고 너무… 너무 희멀겋게 생겼잖아요.”
“그래도 다른 녀석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기품이 있잖아. 또 넌 가냘프고 희멀겋다고 표현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름다운데.”
휴고는 자신의 사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황제의 오른팔이자 세르비아 최고의 재상인 사르 공작, 바로 자신의 사촌인 레니에는 온갖 수식어로 칭송해도 모자랄 만큼 겉으로는 아름다웠지만 실상은 황제 못지않게 냉혈한이었다.
그런 남자가 다른 남자를 보고 기품 있고 아름답다고 하다니, 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레니에가 한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래. 넌 저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겠지. 만에 하나라도, 그러지 마라.”
“무, 무엇을요?”
“저 사람은… 네 상대가 아닌 것 같다.”
‘당연히 아니지. 난 게이가 아니라고!’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휴고는 레니에가 말한 것이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의중이 궁금했지만, 날카롭게 변한 레니에의 눈매를 보고는 물을 생각이 쏙 들어갔다.
황제의 막사로 돌아온 아델라이드는 내문을 열기 전 우비를 벗어 물기를 털어 냈다. 우비는 바닥에 내려놓은 대신 품 안에 고이 품은 책은 그대로 안아 들고 막사에 들어섰다.
아델라이드가 안으로 들어오자 황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소중히 들고 있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
“아! 이건 레니에 님이 주신 책입니다. 해석을 부탁하셨어요.”
“할 수 있겠느냐?”
“고대어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탁자가 하나 더 필요하겠구나.”
“아닙니다, 폐하. 전 그냥 바닥에 앉아서 하면 됩니다.”
황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대답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탁자와 막사 한쪽의 빈 공간을 번갈아 보는 것이, 어림짐작으로 크기를 맞춰 보는 듯했다.
“큰 건 공간이 안 되니, 이것보다 조금 작은 것으로 하나 더 가져다 놓아야겠다.”
“네….”
“이따 레니에 막사에 다녀올 때 가져올 테니 그때까지만 좀 참거라.”
“황송하옵니다.”
아델라이드는 허리를 굽혀 절했다. 황제의 호의에 대한 당연한 답례였다.
그러나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동생 같은 그에게 편의를 좀 봐주려는 것뿐인데 이렇게 격을 지켜 선을 그을 게 뭐란 말인가.
마음이 조금 답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