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이상한 관계 (8/39)

제7장. 이상한 관계

레니에의 막사 안은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카롤링거 3세, 레니에, 레니에의 비서관인 휴고, 제1대대 대대장 클리터스, 그의 부관인 파올로, 제2대대 대대장인 아른프리트, 그의 부관인 루이사, 제2대대 중대장 유니스.

모두 여덟 명이 원형 탁자를 빙 둘러앉아 있었다.

“레니에 공. 시작하게.”

레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1대대에서 바이온 진영으로 침투한 간자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하루 만에 핵심 인력에게 접근하기는 힘든지라 추후 보내오는 소식을 통해 더 명확하게 파악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바이온의 수뇌부가 무언가 꾸미고 있는 듯합니다. 전령과 외부인의 접촉이 많고 수뇌부 간 회동이 잦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보아 외부와 연합을 하든 용병을 활용하든 갑작스럽게 전력 증강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용병?”

“네. 용병을 모집했다고 합니다.”

“어디 출신 용병인지는 알아냈나?”

“그건 아직입니다.”

“음.”

황제는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온 왕국은 본래 군사력보다는 문화와 예술이 강성한 왕국이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속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용병에다가 연합군이라니. 군사력이 강한 수에비 왕국은 국왕의 실정으로 뜻하지 않게 쉽게 정복할 수 있었는데, 의외로 바이온이 애를 먹이고 있었다.

“이번 제2대대의 출정 목적은 바이온의 연합군 형성을 막는 것입니다. 바이온과 연합 세력이 다음 달 3일 만고평야에서 집결한다면 제2대대는 그 전에 바이온의 군대를 격파해야 합니다.”

“세력이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이거군.”

황제의 중저음 목소리가 레니에의 말끝에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왜 제가 가야 하는 겁니까?”

루이사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성질 급한 루이사의 물음에 레니에가 빙긋이 웃었다.

“루이사 부관은 아니, 승진하셨으니 루이사 부대장이군요. 루이사 부대장은 바이온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역할입니다.”

황제와 휴고를 제외한 다섯 명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레니에가 말을 이어 갔다.

“바이온 왕국의 건국 신화를 아실 겁니다. 카프카 국왕의 이야기를. 카프카 국왕의 어머니는 잔인하고도 용맹한 전쟁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죠. 그리고 불타는 붉은 머리를 휘날렸던 것으로도요. 그래서 그 당시 바이온에서는 전쟁에서 붉은 머리의 여자가 나타나면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바이온에서 붉은 머리는 매우 희귀하기 때문에 더욱더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는데, 그 붉은 머리의 여성이 우리 쪽 군인이라는 것은 바이온이 상상도 못 할 겁니다.”

“그럼… 저의 외모를 이용하여 바이온의 사기를 저하시키겠다는 건가요?”

“바이온의 연합군이 3만이라면 제2대대가 출정하여 싸워야 하는 바이온만의 군사는 2만 정도일 것입니다. 지금 저희 진영이 5만이니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안달루스 제국의 동쪽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저희 군대가 당분간은 꼼짝 못 하고 이곳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인력으로 빠르게 치고 다시 복귀하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매복과 심리전을 이용할 수밖에요.”

“루이사 부대장님은 우리 철갑 기마대와 함께 최대한 화려하고 강렬하게 등장하셔야 합니다. 마치 그들의 건국 신화 속 전쟁의 여신처럼 말이죠.”

휴고가 레니에의 말을 받아 뒤이어 말했다.

“우리 철갑 기마대는 대륙에서 최고 중의 최고다. 그러니 기마대를 이끌고 바이온의 전력을 최하로 감소시켜야 해. 그 뒤 아른프리트 대대장과 합류하여 나머지 군대를 함께 격파한다. 이 모든 것은 반나절 안에 끝내야 해. 최대한 신속하게!”

황제의 얼음장처럼 시리고 깊은 눈빛이 루이사와 아른프리트를 향했다. 단호한 의지가 깃든 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이번 작전에 실패는 없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복안을 세울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말기 바란다. 아른프리트와 루이사가 실패한다면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황제의 살벌하고도 강력한 말에 막사 안에 있는 이들이 결연하게 외쳤다.

“존명!”

장군들은 회의가 끝난 뒤 모두 자신들의 막사로 돌아갔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방울은 어느덧 약해져 가늘고 힘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병사들은 저녁 식사 후 각기 수련을 하기도 하고, 장비를 정비하기도 하고, 막사 주위 물길을 살펴보기도 했다.

아델라이드는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에 막사 밖으로 나왔다가 우연찮게 일손을 보태게 되었다. 그녀의 성격상 많은 병사들과 노예들이 바삐 움직이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취사 막사 밖에서 남은 음식물과 식기를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이 그릇들은 씻어 와야 하는 건가요?”

아델라이드가 부지런히 식기를 옮기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처럼 행동거지를 조심스러워 하는 모양이었다.

괜한 동료 의식이 생겨나 아델라이드의 말투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고 다정해졌다.

“저…, 죄송한데 어디에서 씻어야 하나요?”

“저 초록색 막사 옆으로 백 걸음 정도 가면 시내가 있어요. 거기서 씻으면 돼요.”

“네에. 그럼 이 그릇들은 제가 씻어 올게요.”

아델라이드를 슬쩍 본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는 커다란 식기들이 담긴 커다란 양동이를 간이 수레에 싣고 손잡이를 잡았다. 간이 수레에 실어도 꽤 무게가 나가서 자신도 모르게 끄응 하며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너무 쉽게 보고 덤빈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하겠다고 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시냇물에 간 김에 목욕까진 아니더라도 좀 씻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막사에서 나온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를 발견했다. 제 몸보다 훨씬 큰 수레를 힘겹게 끄는 모습에 클리터스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아델라이드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뒤이어 밖으로 나온 베르톨트가 그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드가!”

아델라이드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클리터스 대대장을 보자마자 허리를 굽혀 예를 취했다.

“어디 가는 거지?”

“이 그릇들을 씻으러 갑니다.”

병사들 개개인의 그릇이 아니고 대량의 음식을 담는 그릇이기에 크기가 꽤 컸다. 클리터스는 저렇게 큰 그릇들을 에드가가 어찌 씻을지 걱정이 되었다.

“가자.”

“네?”

“같이 가자고.”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의 손에서 수레의 손잡이를 빼앗아 잡았다.

“대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자처한 것이니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도와준다는 것이다.”

“정말 괜찮습니다. 대대장님이 이런 일을 하시다뇨.”

“여긴 전장이다. 계급이 높다고 일을 떠맡기면 안 되지.”

아델라이드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클리터스가 수레를 끌며 앞서 나갔다. 두 손이 허전해진 아델라이드는 황급히 뒤를 따랐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베르톨트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돌려 취사 막사로 갔다. 황제가 취사 막사에 나타나자 일동은 일제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됐다.”

병사들은 곧바로 허리를 폈고 노예들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지금 나의 시중 노예에게 일을 시킨 자가 누구냐?”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때 갈색 머리의 여자 노예가 앞으로 살며시 나왔다.

“그, 그게 그 사람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그, 그릇을 갖고 갔습니다.”

“어디로?”

“근처 시내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으니 아마 거기서 그릇들을 씻고 올 겁니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 노예를 바라보았다.

“알겠다. 하던 일 마저 하도록.”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클리터스가 함께 갔으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

무언가 아쉬웠지만 에드가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 클리터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클리터스는 막사를 나와 에드가를 발견하자마자 에드가에게 황급히 갔었다.

‘둘이 무슨 관계…인가?’

순간 클리터스가 에드가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가가 한 막사에서 지내는 자신보다 클리터스와 더 친한 거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에드가가 다시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이 이상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 *

아델라이드와 클리터스는 아무 대화 없이 묵묵히 그릇을 닦기만 했다. 클리터스는 비교적 큰 것을, 아델라이드는 비교적 작은 것을 골랐다.

아니, 사실은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를 위해 애초에 작은 그릇들만 그녀의 앞에 놓은 것이었다. 그의 배려를 알면서도 그녀는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이 열심히 그릇만 닦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저…, 대대장님.”

아델라이드가 목소리를 조심스레 냈다.

클리터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만 봤을 때 왠지 민망해하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조금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응?”

“며칠 만이라, 씻고 싶습니다.”

순간 클리터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먼저 가셔도 됩니다. 전 팔다리만이라도 씻고 가겠습니다.”

아델라이드는 갑자기 굳어 버린 클리터스의 표정을 보고 무리한 부탁을 한 걸까 싶었다. 그래서 다급히 먼저 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다. 씻어라. 난 좀 쉬고 있을 테니. 어둑해지는데 수상한 자라도 접근하면 안 되지 않느냐.”

수상한 자가 접근할 리도 없었거니와 지금 자신의 모습은 사내였다. 아델라이드는 이상하거나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다른 이의 생각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소맷자락과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시냇물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시원한 물을 팔다리에 끼얹자 청량한 느낌에 웃음이 절로 났다.

옷을 더 짧게 걷고 싶었지만 클리터스가 함께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 대신 다음에는 혼자 와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아델라이드는 얼굴에도 물을 끼얹었다. 아예 두건을 벗어 웃옷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 목덜미까지 물을 끼얹으며 꼼꼼히 씻었다.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에 잠긴 녀석의 하얀 종아리와 옷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은 여성의 그것처럼 선이 고왔다.

녀석은 팔다리를 씻더니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허리를 펴며 작게 웃었다. 클리터스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두건을 벗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녀석의 가려져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동그란 뒤통수가 두드러졌다. 귀에서 목까지 유려하게 이어지는 실루엣이 옅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클리터스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저 모습에 왜 이리 자신의 심장이 미쳐 날뛰는 걸까.

혹시 위험할지도 몰라서 기다려 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이 순간, 저 녀석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인 것 같았다.

‘내가 미쳐 가는 건가. 어째서 이리도 시선이 가는 것이냐.’

시냇가에서 막사로 돌아오는 내내 클리터스는 말이 없었다. 그의 굳은 얼굴에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명색이 대대장인데 기다리게 해서 화가 난 걸까.’

이유를 정확히 모르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우스워 보일 것 같아 아델라이드는 그저 앞만 보며 걸었다.

이윽고 취사 막사에 도착해 씻은 그릇들을 취사병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와 헤어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굳은 얼굴을 펴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아델라이드는 다음부터는 클리터스가 괜찮다고 하여도 대대장을 대하는 예를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황제의 막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들어가기 전 아델라이드는 잠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시냇가에서 씻느라 옷이 풀어 헤쳐진 모습으로 황제 앞에 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흐트러진 것은 없었지만 황제를 대할 때만큼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황제는 탁자 앞에 서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기척에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씻었느냐?”

갑자기 황제가 큰 소리를 내자 아델라이드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네. 시냇가에서 씻었습니다.”

아델라이드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베르톨트는 세면대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그곳에 걸려 있는 수건을 그녀에게 던지듯 건넸다. 미처 잡지 못한 수건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생각이 있는 거야?”

베르톨트는 막사 안으로 들어온 녀석을 보았을 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씻었는지 두건이 벗겨져 있어서 젖은 머리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젖은 얼굴은 말갛게 윤이 나고 있었다.

그나마 두건을 쓰고 있었을 때는 이렇게 반짝거리지 않았는데.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해 얼른 수건을 녀석에게 줬다.

‘너는 정말 생각이 있긴 한 거냐?’

한숨이 절로 났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 주어야 녀석이 알아먹을지 답답했다.

“어서 닦아라.”

녀석은 주저주저하면서 머리에 얹어진 수건을 잡았다. 얼굴과 머리카락을 닦으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몰라 큰 눈망울을 또록또록 굴려 댔다.

“그렇게 젖어서 다니지 마라.”

“네?”

목덜미를 닦던 손이 멈췄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어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젖어서 다니면 네가 얼마나….”

“…….”

“후우. 됐다.”

답답하긴 아델라이드도 마찬가지였다. 클리터스 대대장도 그렇고, 이제는 황제까지 무슨 말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아델라이드가 보기에는 자기들끼리 혼자 화내고 혼자 노여워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 주면 그녀는 기꺼이 고칠 터였다. 그런데 왜 이리 말을 아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폐하.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녀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베르톨트는 무어라 말할지 몰랐다. 자신이 왜 이리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네 행동이 문제다.”

“어떤 행동 말입니까?”

“좀 더 단정해야 한다. 황제의 시중 노예라면! 그렇게 아무 때나 시냇가에서 씻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떨구었다. 침울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경솔했던 건가.’

황제의 측근이라고 하기엔 신분이 너무 낮았지만 그래도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역할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볼 수도 있는 곳에서 옷매무새를 흐트러뜨리며 씻거나, 혹은 아무렇게나 풀어진 상태로 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행동은 경거망동하게 보일 만했다.

“죄송합니다.”

아델라이드는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걸어가 수건을 제자리에 걸었다. 그러고는 새롭게 생긴 자신의 작은 탁자 앞에 앉아 레니에가 준 책자를 폈다. 이제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황제는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애초부터 선을 긋긴 했으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황제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으니 우울했다. 그렇게까지 혼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불쑥 고개를 내밀어,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노예는 이렇게 서글픈 거구나.’

다음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노예들을 만나면 더 친절하게, 더 진심으로 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리에 앉은 아델라이드는 두 시간째 책자와 사전을 들여다봤다.

얼마나 해석에 열중하는지 이 공간에 황제가 없는 것처럼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대놓고 관찰할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한 올 한 올 팔랑거리며 춤을 추는 듯했다. 촉촉이 젖은 장미 꽃잎 같은 입술 끝이 중간중간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종이에 사각거리며 무언가를 적는 손은 나비처럼 분주했다. 때때로 사전을 넘기는 하얀 손끝이 지극히 조심스러워 보이면서도 맞닿으면 새삼 다정할 것 같았다.

‘아깐 기분이 상한 듯하더니 이젠 아주 신경도 안 쓰는군.’

베르톨트는 실소가 났다. 그래도 자신은 황제고 녀석은 노옌데 이건 뭐 입장이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한 학자인 듯 책에 열중하는 저 녀석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괘씸해.’

베르톨트의 멋들어진 입술이 한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자신이 마치 나 좀 봐 달라고 낑낑대는 강아지 같았다. 어린 노예 녀석 하나가 뭔데 감히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한단 말인가.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저 녀석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 혼자 기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달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가 일순간 흔들렸다.

베르톨트가 낮고 굵은 음성으로 내뱉은 혼잣말은 집중하고 있던 아델라이드의 귓가를 거칠게 흔들었다. 놀란 아델라이드는 퍼뜩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돌연 그가 벌떡 일어나 검을 허리에 찼다. 그리고 망토를 휘날리며 그 넓은 어깨에 둘렀다.

마지막으로 아델라이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하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먼저 자라.”

아델라이드가 일어나서 예를 취할 새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황제의 눈썹 언저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나가 버린 입구 쪽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 * *

황제의 눈빛은 검푸른 광채로 번뜩였다. 그의 검 날은 어둠 속에서도 예리하게 허공을 갈랐다.

황제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주위에 몇몇 병사가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클리터스 부니에도 끼어 있었다.

세르비아 제국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자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언제나 위압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황제의 몸놀림은 흑표범과 같이 조용하고 민첩했으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그 속도와 힘 때문에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웠다.

황제의 성검이 허공을 잘게 조각내듯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는 크게 허공을 갈랐다. 공기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내내 미동도 하지 못하고 뚫어져라 황제를 보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두르던 황제가 동작을 멈추자, 이내 슬금슬금 뒤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존경하고 경외해마지 않는 황제이지만 이럴 때에는 너무 가까이 있으면 안 되었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던 황제가 병사들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대련할 자가 있느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이런 미친 능력의 소유자와 누가 대련하겠다고 나서겠는가. 병사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황제의 입술 끝이 일그러졌다.

“자원하는 자가 없다 이거지. 그렇다면… 클리터스 경! 나오게!”

병사들은 일제히 클리터스 부니에를 쳐다봤다.

클리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다가 마지못해 발을 움직였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황제 앞으로 나아가는 그 움직임이 평소보다 유독 느릿느릿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잠시 나의 상대가 되어 주게.”

황제의 입술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으나 그 눈만은 서슬 퍼런 냉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그의 주군이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주군의 눈빛이 이리 심술궂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클리터스와 황제가 대련한 적은 꽤 많았어도 클리터스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체만 따졌을 때 클리터스가 황제보다 키와 몸집이 더 커서 유리해 보였지만 피가 달랐다.

세르비아 황실은 드래곤의 후예로서, 대대로 신체 능력과 무예가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니 아무리 클리터스가 뛰어난 무인이라도 황제에 비하면 보통 사람이니 애초에 그 출발선이 달랐다. 클리터스가 세르비아 황실의 검이라면, 황제는 세르비아의 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클리터스는 황제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검을 잡았다. 왠지 제대로 한번 붙어 보고 싶었다.

계급뿐만 아니라 기본 실력이 상당히 차이 났으므로 평상시에는 황제를 이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저 가르침을 받으려 했을 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황제가 아닌 한 명의 남자로 베르톨트를 대할 것이었다.

“오늘은 계급장 떼겠습니다.”

황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입술 끝이 멋들어지게 올라갔다.

“호오, 그거 좋군. 기대하지!”

클리터스와 황제는 미동도 않고 정지 상태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순식간에 서로의 검을 부딪쳤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불꽃 튀는 대련이 시작되었다.

검끼리 마주치는 소리는 병사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고, 세기의 기사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몸놀림은 병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두 사람은 춤을 추는 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 군더더기 없는 몸짓에 모여 있는 누구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병사들은 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얼핏 보면 주거니 받거니 팽팽하게 합을 이루는 것 같았지만,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그 위력에 클리터스가 뒤로 밀리고 있었다.

황제의 검을 받아 내는 클리터스의 검에 불꽃이 일었다. 조금씩 밀리면서도 매번 아슬아슬하게 대처하는 클리터스에게 병사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병사들은 이 무시무시한 검의 신을 인간이 어떻게 막아 내는지 놀라워했다. 어느덧 그들은 같은 인간인 클리터스에게 감정을 이입해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대련이 끝난 순간은, 황제의 검이 클리터스의 옆구리에 닿았을 때였다. 클리터스의 거친 숨이 순간 정지했다.

“졌습니다. 폐하!”

클리터스의 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실전이었다면 황제의 검이 클리터스의 옆구리를 관통했을 것이었다.

“오늘 왜 이리 열심이었지?”

“폐하도 만만치 않으셨습니다.”

승부가 결정 나서야 황제의 얼굴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 다 미련하기 그지없군.”

“네?”

베르톨트가 클리터스의 한쪽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고 지나갔다. 최선을 다해 싸운 상대에게 보내는 살가운 표현이자 고마움의 표시였다.

황제가 떠나자 병사들이 클리터스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모두들 굉장한 대련이었다며 클리터스 부니에를 치켜세우며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클리터스는 황제와의 대련에서 가장 오래 버틴 오늘, 자신이 좀 괜찮은 사내가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황제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을 곱씹었다.

둘 다 미련하다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일까. 한동안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베르톨트는 이겼지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냇가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밤이 되자 더욱 기온이 내려간 시냇물은 몸의 열기를 식히기에 알맞았다. 보통 사람보다 열이 많은 그는 시냇물의 냉기가 오히려 반가웠다.

“쉐도우. 나와.”

무겁게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에 검은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소리도 없이 땅으로 떨어진 이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존명!”

“조사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수에비 왕국 시종장이었던 자는 세르비아 군이 입성하고 나서 바로 죽었습니다. 그는 당시 40대 중반이었고 여자와 남자 모두를 좋아하는 양성애자였습니다. 시종장이 특별히 총애한 자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미소녀보다는 미소년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검은 그림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는 물속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눈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살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 외 특별한 성적 취향은 없었느냐?”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알겠다.”

“존명!”

검은 그림자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베르톨트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심호흡을 했다.

에드가가 그 시종장에게 유린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주먹 쥔 손 마디마디에는 힘줄이 불끈 올라왔다.

꿈에서 그만하라고 했다. 아프다고, 제발 그만하라고.

“빌어먹을!”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했다. 숨을 쉬기 힘들고 눈앞이 순간순간 까맣게 변했다.

베르톨트는 그렇게 이유 모를 아픔과 분을 삭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의 막사 앞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던 베르톨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깊은 밤인지라 에드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웬만한 노예는 모시는 주인이 오기 전까지 깨어 있곤 하는데, 녀석은 먼저 자라는 자신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씩씩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톨트는 자고 있는 에드가 옆 침대, 그러니까 자신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녀석의 이마 위로 떨어진 몇 가닥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거기에 손을 갖다 대었다. 머리카락만 만졌는데도 그 느낌이 너무 부드러워 흠칫 놀랄 정도였다.

녀석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자 움찔거리며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었다. 긴장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쌕쌕 숨을 내쉬었다. 베르톨트는 자고 있는 그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넌 아주 골치 아파. 냇가에 내놓은 아이…. 그래, 동생 같아.’

베르톨트는 물에 젖은 바지와 웃옷을 훌렁 벗었다. 몸에 다시 열기가 피어올랐다. 자신 혼자 기거하면 아마 알몸으로 잠들었을 것이나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속옷은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어나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몸의 열기 때문에 침의는 걸치지도 않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맨몸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좀 전에 녀석의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와 같았다.

‘미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자조적인 침음을 삼킨 그는 에드가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그렇게 잠이 들 무렵, 공기 중에 습하고 더운 기운이 흘렀다.

베르톨트는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의 호흡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공기를 짓이기고 있었다.

순간 벌떡 일어나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침대 한쪽 구석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는 벌벌 떨고 있었다. 녀석의 입에서는 차마 터지지 못하는 비명이 가느다란 신음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참으려 해도 나오는 듯한 소리는 흡사 어린 짐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베르톨트는 에드가에게 살며시 다가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맨어깨에 작은 머리가 기대어 왔다. 눈가에는 축축한 물기가 흥건했다.

“에드가. 참지 말고 소리 내어 울어.”

베르톨트의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델라이드의 귀에 들어왔다. 자신의 어깨를 안고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이 정다웠다.

그 아프고 혹독한 밤에 소리도 내지 않고 짐승의 폭력과 폭언을 고스란히 받았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서 빨리 정신을 잃기를 바랐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던 밤이었다.

이 다정한 목소리가 아프다.

그래서였을까. 짓이겨진 흐느낌이 입 밖으로 툭 터져 나왔다.

“흑, 흑…!”

“에드가. 더 소리 내.”

소리 낸다는 것이 겨우 이 정도였다. 이 안쓰럽고 애처로운 몸을 베르톨트는 가슴에 꼬옥 안았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떨고 있는 아델라이드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해. 다정해. 오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피붙이가 한없이 그리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자신 때문에 망가지고 부서져도 한없이 다정했고, 오히려 그녀를 위로해 주던 오라비였다. 그 오라비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이 사람은 누구지?’

고통과 아픔을 견디려 이를 악물고 버텼더니 이제 몸에 힘이 없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과 이 너른 품은 세상 어디보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오빠보다 더 넓은데…. 누구?’

거친 세상에서 반드시 보호해 주겠다는 듯이 자신을 가둔 팔은 단단하고 힘이 넘쳤다. 벗은 가슴도 거부감이 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이 그저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겨드랑이와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그러곤 자신의 침대로 걸어와 그 위에 녀석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 눈은 그저 베르톨트를 몽롱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몸의 떨림은 잦아들었고 연신 흐르던 눈물은 멈추었다. 녀석의 옆에 누운 베르톨트는 녀석을 끌어당겨 다시 품에 안았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망울이 아이 같았다. 베르톨트는 녀석의 등을 다시 토닥토닥하며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에드가. 괜찮아.”

아델라이드는 다시 황제의 품을 파고들며 생각했다.

‘꿈인가? 폐…하?’

꿈이라면 깨지 않길.

이 크고 단단하고 다정한 손이 계속 자신을 안아 주길.

* * *

아델라이드는 막사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얼굴이 간지러워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근육으로 꽉 짜인 가슴과 배였다. 그것도 건장한 남자의.

아델라이드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베르톨트가 잠에서 깨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뭐지?”

베르톨트는 한쪽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이마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무심히 올렸다. 표정에 나른함과 약간의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이불이 젖혀지자 그의 단단한 가슴부터 탄탄한 허리까지, 근육으로 덮인 단련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의 벗은 몸을 이리 가까이에서 접하니 아델라이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놀란 나머지 시선이 황제의 가슴에 머문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려 꼼짝할 수 없었다.

황제의 검푸른 눈동자가 아델라이드의 갈색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에드가.”

아델라이드의 낯빛이 점점 어둡게 변해 갔다. 황제의 벗은 몸과 가벼운 침의만 입은 자신을 봤을 때 어젯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드가!”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점점 변하는 낯빛과 표정을 보니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베르톨트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네가 악몽을 꾸기에….”

“아, 악몽이요?”

어젯밤 그것이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혹독한 채찍질에 구석으로 몰리고 몰려 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어루만져 주었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해서 무작정 매달렸었다. 세상의 온갖 고통과 슬픔에서 철저히 막아 주는 든든한 벽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황제의 품이었다니.

아델라이드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제야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제가 모자라서….”

아무리 따뜻해도 그렇지 어쩌자고 황제의 침대 위에서, 그것도 그의 품 안에서 잠들었단 말인가.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무디고 무딘 신경을 저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말 마라. 곁에서 지독한 악몽을 꾸는 자가 있다면 네가 아니어도 위로해 주었을 거야. 그러니 입술 좀 그만 깨물어.”

“네?”

“피 나잖아.”

아델라이드는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베르톨트를 바라봤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녀석의 하얗고 말간 턱을 쥔 채 피가 배어 나오는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녀석의 모든 것은 쓸데없이 부드러웠다.

녀석이 움찔거렸다. 햇볕을 등지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고이 올려놓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녀석이 예뻤다. 얇은 침의 아래 드러난 뽀얀 팔다리가 콱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베르톨트는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눈에 이 아름다운 녀석이 가득 찼다.

아델라이드는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황제의 잘생긴 얼굴이 자신에게 점점 더 다가왔다.

떨렸다. 너무 수려해서인지, 너무 위압적이어선지, 너무 관능적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올가미에 걸린 작고 어린 짐승처럼 가늘게 떨리는 자신의 몸만 자각되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황제가 무엇을 할지 알면서도 몰랐고.

모르면서도 알았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아델라이드의 입술에 닿았다. 그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저 꾸욱 누르며 어설픈 첫 접촉을 시도해 왔다.

그렇게 그는 잠시 그대로 아델라이드와 맞닿아 있었다.

이윽고 입술을 떼었다. 아직도 놀라 눈만 껌뻑이고 있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다정하게 들여다보았다.

“한 번 더.”

그렇게 말한 황제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갖다 대더니 그녀의 입술 위 피가 맺힌 곳을 혀로 핥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델라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그의 혀가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베르톨트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틀어졌다.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혀를 끌어안고 강하게 흡입했다.

그러고 나서 떨어졌다.

아델라이드는 짧고도 강렬한 키스가 끝난 뒤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베르톨트는 조금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소리 내어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내려 그의 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벌이야. 감히 황제를…. 너를 안고 밤새 위로해 줬는데도 그 친절함과 황송함을 모르고 변태 치한으로 몬 죄.”

“죄,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이걸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

아델라이드는 또 한 번 놀라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그는 어느새 바지를 다 입고 셔츠의 단추를 끼우고 있었다. 혼자 침대에 있기 민망해진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정돈했다.

자신이 밤새 그의 품 안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고, 황제가 한 말도 놀라웠다.

그리고 방금 전 그 짧고 뜨거웠던 키스도 놀라웠다.

아델라이드는 키스를 할 줄 몰랐다. 남자와 한 번도 정상적으로 키스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황제가 제게 한 것이 그저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 순간 그가 얼마나 관능적이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좀 전까지 닿아 있던 그의 뜨거운 입술과 혀가 생각나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델라이드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다음 조심스럽게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세면대 앞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였다. 젖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의 선명한 이미지 위에 섹시함이 덧입혀졌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면도를 했다. 거울에 비친 아델라이드와 황제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보는 황제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갑자기 큰 깨달음이 왔다.

황제가 게이라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