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동상이몽 (9/39)

제8장. 동상이몽

황제가 나가고 나서도 아델라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세르비아 제국 철혈군주의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문득 그녀의 뇌리에 한 가닥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레니에 공도 그렇고, 휴고 비서관도 그렇고 다들 미모가….’

황제의 측근들이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남자인 게 그제야 이해되었다.

여자의 몸으로 험난한 바깥 세계를 헤쳐 나가기 힘들 것이라 여겨 남장을 했는데 황제의 주위에선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니. 아델라이드는 앞으로 황제와 한 막사에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는 말자.’

황제의 곁에 있는 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의 성 지향성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도 변태적이거나 가학적인 것이 아니니 자신만 좀 조심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시선을 잡아끌 일도 없을 것이고,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그나마 좀 편해졌다. 그녀는 가뿐하게 일어나서 막사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 * *

베르톨트는 진영을 살펴보기로 했다. 언제 왔는지 그의 옆에는 레니에와 아른프리트, 제2대대의 부대장으로 승진한 루이사가 있었다. 진영을 둘러보면서 네 사람은 모레 출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른프리트 경. 루이사.”

“네, 폐하.”

“이번 전투에서 자비는 없다. 바이온 연합군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파괴할 대상이다. 그러니 세르비아 제국군의 위용을 제대로 보여 줘!”

“존명!”

군명을 내릴 때의 황제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눈초리와 눈동자가 예리하고 깊어 사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압박감을 주었고, 낮고 무거운 음성은 단단하면서도 울림이 있었다.

아른프리트와 루이사가 돌아가자 레니에만이 남았다. 레니에는 평소처럼 냉철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보고했다.

“폐하. 간자에게서 온 정보입니다. 바이온과 연합하려는 세력은 안달루스 제국의 제1귀족, 바오로 공작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네.”

“안달루스 병권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아닌가.”

“지금 안달루스 제국에서는 심약한 제1황자와 권모술수에 능한 황녀, 욕망이 지나친 바오로 공작 간의 황위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바오로 공작은 바이온 왕국과 연합군을 결성해서 우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를 내세워 귀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인 듯합니다. 용병 또한 바오로 공작 쪽에서 포섭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병이 섞여 있는 자신의 군대보다는 전투력이 좋을 테니까요.”

“하지만 용병에겐 신의를 기대할 수 없지.”

“네, 맞습니다. 그 점을 이용하여 그들의 사이를 지금부터 갈라놓아야 합니다. 연합군 결성에 실패하더라도 바오로 공작은 저희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니 세력이 커지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음. 황녀 쪽은 어떤가?”

“안달루스의 황제는 제1황자를 밀고 있으나 신진 귀족들은 황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황녀가 꽤 총명한 듯합니다.”

“그 황녀를 조사해 봐. 그리고 바오로 공작가로 사람을 침투시키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네. 폐하.”

“에드가 말인데…. 그 시종장이라는 인간하고 에드가가 무슨 관계였는지 알아봐.”

“수에비 왕국의 시종장하고 에드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왕국의 시종들이 우리 진영에 있잖아. 그러니 그들에게 좀 알아봐. 시종장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에드가를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등등 말이야.”

베르톨트는 별 시답잖은 일을 시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눈으로는 반드시 알아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네! 빠른 시간 안에….”

황제에게는 어딘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레니에는 명령을 받들면서도 떨떠름한 마음에 예의 그 날카로운 눈초리로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가 시선을 피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베르톨트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장군들을 소집했다. 내일과 모레 전투 훈련을 하겠으니 공격 진법과 수비 진법을 하나씩 구상하여 오늘 밤까지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장군들은 해산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황제의 전투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 할 만큼 격하고 힘에 겹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한 번 훈련을 마치면 장군들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실력까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베르톨트는 단순히 몸만 굴리는 무인이 아니었다. 정쟁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과 전술에도 능한지라 장군들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시키고 병사들은 그 후에 함께하도록 했다.

그렇기에 장군들의 가상 전투 스토리가 황제에게 먼저 통과되어야 다음 단계로 훈련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가상 전투 스토리에는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담겨 있어야 했다.

사실 이렇게 전투 훈련을 하겠다고 한 것은 순전히 베르톨트의 사심 때문이었다. 어지러워진 자신의 정신 상태를 다잡기 위함이 8할이었고, 2할은 제국군을 다시 잘 벼려진 검과 같이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수에비 왕국을 너무 손쉽게 손에 넣어선지 내가 너무 나태해졌어. 그러니 이렇게라도 마음을 다잡아야지.’

되도록이면 에드가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녀석의 뽀얗고 은은한 진줏빛 피부도, 아침 이슬에 젖은 것 같은 그 붉고 촉촉한 입술도, 둥글고 서글서글하지만 단단한 의지를 담고 있는 그 눈매도.

저렇게 병사들 틈에 끼어 있지 않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돌아다니지 좀 않으면 좋으련만.

베르톨트는 병사들 틈에 끼어 있는 에드가를 향해 걸어갔다. 무엇에 홀린 듯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병사님. 이건 그 약초가 아닙니다.”

“하지만 잎에 이렇게 돌기가 있는 것이….”

“돌기가 있는 등 모양이 비슷하지만 이건 라술러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냐?”

어느새 아델라이드 곁에 황제가 다가와 섰다. 아델라이드와 대화를 하고 있던 병사는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경례를 취했다.

“제2대대 중관 알랭 드 보통이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손을 올려 경례를 받았다. 중관이면 장교보다 한 단계 아래였다.

“무슨 일이지?”

“제가 수에비 왕국에만 있다는 해독 약초 라술러를 발견한 것 같아 폐하의 노예에게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해독 약초 라술러?”

“네. 동물의 체액으로 만든 독화살이나 독침을 맞았을 때 라슬러의 진액을 내어 상처에 붙이면 독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게 그 라술러인가?”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생긴 것이 비슷하지만 라술러는 아닙니다.”

“어떻게 알지?”

“어렸을 때 자란 곳에선 이 야생초인 라술러가 흔하디흔한 것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약초는 왜 찾으려 하는 것이냐?”

황제가 이번엔 알랭을 보며 물었다.

“낼 모레 출정할 때 가지고 가려 합니다. 혹시 필요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병사님. 그렇다면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델라이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턱대고 자신을 붙잡고 이게 라술러라는 약초인지 봐 달라고 할 때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나 싶어 의심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약초를 가지고 출정하려 한다면 좋은 의도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 라술러를 좀 찾아 줄 수 있겠어?”

어느새 가까워졌는지 알랭이 녀석에게 다정히 물었다. 베르톨트는 알랭을 찬찬히 뜯어봤다. 가만 보니 알랭은 무척 선하고 귀여운 인상이라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아. 저, 그러면, 폐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베르톨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오전에는 레니에 님이 주신 것을 해석하고, 오후엔 특별히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이분과 라술러를 찾았으면 합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시면요.”

‘이 녀석 봐라. 나를 어떻게 보고.’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내일 출정하는 자신의 병사가 혹시 모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약초를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도와주지 말라고 할 만큼 베르톨트는 속 좁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만 보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 라술러라는 것이 이 근처에 있느냐?”

“찾아봐야겠지만 수에비에서는 흔한 것이라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와! 그럼 많이 가져가면 좋겠어.”

알랭이라는 병사가 아델라이드를 향해 순수하게 웃었다. 푸근한 웃음에 아델라이드도 빙그레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바라보는 베르톨트만 심사가 뒤틀렸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인데 죽이 아주 잘 맞아 황제인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흠! 알았다. 오후에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알겠습니다. 폐하!”

알랭은 베르톨트에게 다시 경례를 붙이며 감사의 예를 취했다. 반면 아델라이드는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없었다.

‘무심한 녀석.’

“에드가, 이제 들어와서 레니에가 준 일을 하거라.”

황제는 뾰로통하게 말하고 이내 몸을 휙 돌렸다. 아델라이드는 알랭에게 급히 인사를 하고는 막사로 향하는 베르톨트의 뒤를 총총 따랐다.

사실 아델라이드는 종일 황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이렇게 반나절 동안이라도 황제를 피할 일이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리고 아침에 했던 그 짧은 키스가 자꾸만 생각나 더더욱 거북했다. 얼굴을 들면 자꾸 황제의 입술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황제는 게이야. 그런데도 이 사람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드는 난 제정신이 아니야.’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이 게이라는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 잠시 이런 기분이 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침의 그 탄탄한 벗은 몸과 붉은 입술이 자꾸 떠오를 리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생각에 잠긴 채 땅만 보며 열심히 걸었다. 황제가 뒤를 돌아 그녀가 제대로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아침에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앞으로 걷다가 거대한 무언가와 부딪혔다.

“앗!”

야무지게 다물려 있던 아델라이드의 진분홍색 입술이 아, 하는 조그만 소리를 내며 살짝 벌어졌다. 아델라이드가 부딪힌 것은 황제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가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는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먼저 움직였다. 그와 함께 막사로 돌아온 아델라이드는 곧장 레니에가 준 숙제에 돌입했다.

책자에 나와 있는 지도를 해석하고 있는 중간중간에도 아까와 같은 황제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감히 얼굴을 들어 왜 그러시냐고,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지 않았다. 혹여 또 당황스런 말을 꺼낼까 봐 황제가 무언가를 묻거나 시키기 전까지는 먼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갑자기 황제가 은근한 목소리로 아델라이드를 불러 왔다.

“에드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네. 하명하십시오.”

“수에비 왕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시종이나 시녀는 없었느냐?”

“없, 없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요?”

“다른 노예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지 못해서 물어봤다.”

“…한 명 있사옵니다.”

“한 명? 누구?”

“소니아라는 시녀입니다.”

“시녀라….”

“네.”

“깊은 사이였더냐?”

아델라이드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굵은 눈썹이 움찔거린 때에야 말뜻을 알아차리고 기겁했다.

“그게 무슨…!”

“너도 성인이니 사귀었던 사람이 하나쯤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아닙니다. 소니아는 그저 친한 친우입니다.”

“하긴 너처럼 연약해 보이는 남자를 어디 여자들이 좋아하겠느냐.”

베르톨트는 피식 웃었다.

‘여자보다 더 곱상하게 생겼으니 여자들이 옆에 두려 하지 않겠지.’

녀석에게 여자 애인이 없었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저런 외모에 저런 분위기이니 남자들의 진득한 시선을 가득 받았으리라.

베르톨트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의 시선은 다시 책자를 향해 있었다. 왠지 녀석은 자신과 말을 길게 섞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 뒤 한참을 몰두하던 아델라이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이었다. 어서 황제의 점심 식사 시중을 들고 알랭과 함께 라술러를 찾으러 가야 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녀석은 수선스럽지 않으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먹색 두건을 뒤집어써 그 아래 곧게 뻗은 콧대와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지만 그보다도 녀석의 미끄러지듯 유연한 동작이 더 눈에 띄었다.

시간만 나면 자꾸 눈으로 녀석을 좇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보지 않으려 해도 정신을 차리면 어느샌가 녀석을 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 * *

황제의 점심 시중을 마치자마자 아델라이드는 아침에 알랭을 봤던 그 막사로 가서 그를 찾았다. 알랭 또한 막 점심을 마친 뒤였다.

막사 밖으로 나오는 알랭의 가슴에 가죽 가방이 둘러져 있었다. 약초를 캐어 그 가방 안에 넣으려는 심산 같았다.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건넸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응. 너도 했니?”

“네. 했습니다.”

“그래. 그럼 가 볼까?”

눈을 둥글게 휘며 웃은 알랭은 아델라이드에게 먼저 가라는 듯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아델라이드는 두어 걸음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진영을 조금 벗어나 동쪽으로 움직였다. 진영에서 꽤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알랭과 아델라이드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병사와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딱히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알랭은 그런 아델라이드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말도 없이 묵묵히 따라왔다. 가끔씩 뒤돌아보는 아델라이드를 향해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알랭은 사람을 편하게 해 줄 줄 아는 자였다. 남자로서는 조금 작은 키에 얼굴도 그리 잘생기지 않아서 절로 시선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상이 좋았다.

그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이미지가 아델라이드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요새 너무 잘난 사람들만 가까이 했음이리라.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발목까지 오는 야생초들이 낮게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향긋한 풀 내음에 아델라이드는 숨을 들이마셨다.

‘역시 나오니 좋구나.’

기분이 좋아진 아델라이드는 뒤를 돌아보며 알랭에게 말을 걸었다.

“병사님. 여기서부터 다양한 야생초들이 서식하고 있네요. 지금부터 조금 천천히 가면서 살펴봐요. 반드시 라술러가 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어.”

알랭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런데, 에드가.”

“네. 병사님.”

“알랭이라고 불러 줘.”

알랭의 목소리가 은은했다.

“그냥 이름을 불러 줘. 병사님은 좀 거북하네. 난 전문 군사가 아니거든.”

“전문 군사가 아니에요?”

“응. 난 가수야. 전쟁이 나서 자원했지. 우리 악단 사람들 모두.”

알랭은 또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래서 병사님이라고 부르는 건 듣기 불편해. 알았지?”

“네. 그럼 알랭님이라고 할게요.”

“그래. 넌 수에비 왕국의 시종이었어? 여길 잘 아네.”

“…네. 전 수에비 왕국 사람이에요.”

“수에비 왕국은 아름답지? 우리 세르비아 제국도 아름답지만 수에비는 평야가 많아서 살기 참 좋은 것 같아.”

“네. 그렇죠….”

아델라이드는 수에비 왕국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정보를 노출하는 것 같아 꺼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넉넉하고도 뭔지 모를 은은한 느낌의 알랭이라는 자는, 살포시 웃으면서 아델라이드를 무장 해제시켰다.

“고향에 못 간 지 2년 되었어.”

“그리우시겠네요.”

“후후, 그립지. 이렇게 고향과 비슷한 느낌의 지역에 오면 더더욱.”

“…….”

“나 노래 한 곡 불러도 될까? 진영에서는 부를 일이 없어. 지금 분위기도 한적하고 들을 사람도 없으니 한번 불러 보고 싶은데.”

“네. 전 괜찮아요.”

알랭은 분위기에 취했다. 살랑거리는 바람, 희미하게 올라오는 풀 내음,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정적, 저 앞에 있는 단정한 녀석까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알랭은 다른 이들보다 감성이 풍부했다. 그는 무언가 아련한 것이 가슴속에 꽉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런 분위기의, 이런 장소에서라면 한 곡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알랭은 잠시 눈을 감고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이윽고 마치 공기 중의 무언가를 느끼듯 두 팔을 벌렸다. 얼굴 위로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마침내 입술이 열리고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나왔다.

“너의 흐르는 붉은 머리 뒤로, 너와 나의 집이 있었네. 너의 따뜻한 눈빛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었네. 너의 사랑스런 입술 위에, 우리의 온기가 있었네.

넓은 보리수를 건너, 너에게 가는 길. 높은 산을 넘어, 너의 품 안에 가는 길. 그런 날이 올까. 그러나 지금, 난 네 앞에 있네.”

읊조리듯 시작했으나 알랭의 목소리는 중간부터 서서히 올라가더니 어느 순간 폭발했다. 그리고 노래 말미에서는 다시 작게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더니 흐느끼듯 노래를 끝냈다.

아델라이드는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에 가슴이 저며 와 숨을 쉴 수 없었다. 귀족일 때 악단을 부를 기회가 있어서 가수의 노래를 몇 번 들었지만 이런 느낌을 받진 못했었다.

알랭의 노래는 아델라이드에게 충격이었다. 슬프고 아릿했지만 그러면서도 행복한 느낌이었다.

알랭은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눈앞의 녀석은 감정이 북받쳤던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았어?”

알랭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괜, 괜찮았냐고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너무 좋았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간만에 불러서 좀 어색해.”

“너무 아름다운 노래예요.”

“전쟁에 나간 병사가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는 노래야. 몸이 가지는 못해도 마음은 그녀에게 있다는.”

“아! 그런 의미였군요.”

“에드가, 넌 좋은 청중이구나.”

아델라이드는 여전히 감동한 표정으로 알랭을 경외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알랭은 그런 아델라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겠지만 알랭은 달랐다. 알랭의 친절하고도 배려 넘치는 태도는 그저 편안하게 느껴질 뿐이어서 그의 손짓에 그저 얼굴을 살짝 붉힐 뿐 몸을 빼지는 않았다.

“알랭 님. 혹시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들려주세요.”

“후훗, 그러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알랭은 아델라이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제 라술러를 캐러 가자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그는 아델라이드와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 주었다. 아델라이드도 마주 웃었다. 그녀는 무척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얼마 안 가 라술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라술러를 캐어 배낭에 넣었다.

약초를 캐고 돌아오는 길도 갈 때만큼 즐거웠다. 두 사람은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서로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이야기를 들어 주는 편이라 서로라 해도 주로 알랭에 대한 것이었지만.

알랭은 악단과 함께 군에 자원했고 현재 2년째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다른 단원들은 아쉽게도 알랭과 다른 대대에 배치되었지만 오가며 서로 안부를 묻고 안위를 확인한다고 했다. 세르비아 제국에서는 자원해서 입대한 경우 최대 3년까지 전장에 있으므로 1년 후엔 전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전역 후엔 악단 전원이 세르비아와 세르비아의 속국이 된 곳들을 돌아다니며 유랑단 생활을 할 계획이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대륙 곳곳을 누비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하며 진영 가까이 왔을 때 마치 자신들을 마중이라도 나온 듯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십여 명의 병사들과 레니에, 클리터스, 휴고 그리고 황제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다, 다녀왔습니다.”

알랭과 아델라이드는 병사들의 가운데로 가 황제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왠지 위압적인 분위기에 기가 죽어 아델라이드는 말을 더듬었다.

냉기 가득한 황제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아델라이드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렇잖아도 자신보다 큰 황제인데 지금은 말 위에 앉아 있으니 고개가 꺾일 듯 젖혀졌다.

“폐하, 다녀왔습니다.”

“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 줄 아느냐?”

“세 시간 조금 넘게 다녀온 것으로 압니다만….”

베르톨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조금? 다섯 시간이 훨씬 지났다. 산에 있는 라술러를 다 캐 올 작정이었던 거냐?”

아델라이드는 미처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그런 틈도 내어 주지 않고 말머리를 빠르게 돌려 진영 쪽으로 가 버린 탓이었다.

레니에와 휴고, 병사들도 황제를 따라 말을 돌렸다. 다만 클리터스만이 아델라이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었으니 됐다.”

그러고 나서 클리터스도 진영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들이 사라진 곳엔 침묵만이 남았다.

아델라이드와 알랭은 자신들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아델라이드는 간만에 행복했던 기분이 황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적처럼 싹 사라졌다. 급격히 우울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래도 그렇지.’

절로 한숨이 났지만, 그녀는 알랭을 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에드가. 너 괜찮겠어? 폐하께서….”

“괜찮아요. 저렇게 말씀하셔도, 뒤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잘해 주신답니다.”

“그, 그래. 폐하는 원래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우시니까.”

알랭의 마지막 말에는 맞장구칠 수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아직 황제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렵기만 했다.

*

에드가가 라술러를 캔다며 나간 지 세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베르톨트는 호위를 붙여 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피어올랐다.

알랭이라는 병사가 같이 갔어도 그의 전투력이 어떤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점점 에드가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베르톨트는 장군들이 올린 훈련안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황제가 일을 할 때는 워낙 엄중하고 완벽을 기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1차로 올라온 훈련안들이라 하더라도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퇴짜를 맞을 시 황제의 서슬 퍼런 눈총으로 비루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도 장군들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직접 내린 황명에 한해서는 목숨을 걸고 임해야 했다.

‘나쁘지 않군.’

베르톨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전쟁 초기엔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고 경험이 없다고 얕보더니 이젠 그들의 눈에 존경과 경외가 가득한 것을 그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기에 황제는 더더욱 수련하고 연마해야 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잠시 근처를 돌아볼 요량이었다.

인정하진 않았지만 내심 에드가가 보이길 바랐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녀석의 두건 쓴 그 작은 머리통은 눈에 콕 들어올 것 같았다.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그때, 저 멀리 진영 주위를 지키는 근위병들이 뛰어왔다. 그들은 곧바로 제1대대 대대장인 클리터스의 막사로 들어갔다.

베르톨트는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클리터스의 막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가 막사의 휘장을 거칠게 젖혔을 때 클리터스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막사 안에 있던 클리터스와 근위병 두 명은 베르톨트를 보자 곧바로 경례를 붙였다. 황제는 재빨리 경례를 받고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고하라!”

“폐하. 진영 근처를 순시하던 도중 남동쪽에 세르비아 제국군 한 명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떨어져 있었느냐?”

“진영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그 제국군의 표패를 확인하니 제1대대 소관이었습니다. 결정적 사인은 폐를 찔린 것으로 보이는데 최후까지 극렬히 싸웠던 듯 검의 흔적이 많았습니다. 시신은 제1대대로 복귀시켰습니다.”

“1킬로미터라…. 클리터스 대대장!”

“네. 폐하!”

“지금부터 진영 근방의 순시를 배로 강화하고 그 범위를 반경 2킬로미터로 넓히도록!”

“네. 알겠습니다.”

황명을 말하고 돌아선 베르톨트가 이내 우뚝 멈추었다. 황제의 입에서 깊은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클리터스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에드가가…, 에드가가 진영 밖으로 나갔다.”

“에드가요? 폐하의 시중 노예 말입니까?”

“그래. 그 녀석이 알랭이라는 군사와 약초를 캐러 갔어. 빌어먹을!”

클리터스의 입에서도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근방에서 제국군을 살해하는 무리가 있다면 지금 진영 밖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들의 표적이 되고자 자처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베르톨트와 클리터스는 동시에 막사 밖으로 나갔다. 클리터스는 자신의 부관인 파올로를 불러 황명을 전하고, 황제의 뒤를 쫓았다.

“말을 가져 오너라!”

베르톨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병사가 뛰어갔다. 밖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레니에와 휴고가 밖으로 나와 상황을 파악했다. 곧 레니에와 휴고도 말을 가져왔다.

이윽고 베르톨트 주위로 기마대 소속의 병사 예닐곱 명과 레니에, 클리터스, 휴고가 모였다. 황제의 기세가 살기등등하여 모여 있는 모두 숨죽였다.

“우리 제국군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범인이 개인인지 세력인지는 모르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부터 반경 2킬로미터까지 수색을 시작한다. 기마단은 두 명씩 갈라져 각각 레니에, 휴고, 클리터스와 함께 동행하라. 나는 쉐도우와 함께 행동하겠다! 현재 내가 알기론 근방에 돌아다니고 있는 우리 제국군이 두 명 있다. 이들을 찾는 데 주력해라!”

“그 두 명이 누구입니까?”

휴고가 물었다. 베르톨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의 시중 노예 에드가와 제2대대 중관 알랭이라는 병사다. 그 직급의 고위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은 모두 소중한 우리 제국군이니 수색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존명!”

베르톨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

베르톨트는 동쪽으로 움직였다. 약초를 캐러 간다고 했으니 산이 있는 방향인 동쪽으로 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말을 타고 가는 내내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캐고 올 것이지, 도대체 네 녀석은 얼마나 나를 조마조마하게 할 심산이냐.’

녀석의 뽀얗고 매끄러운 얼굴, 무언가를 초탈한 듯한 표정, 차돌같이 야문 입매가 떠올랐다. 여린 것 같아도 야무지니 별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한편 클리터스 일행은 남쪽을 수색했다.

불온한 세력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보다는 에드가가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것이 클리터스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면서 클리터스는 황제의 행동이 왠지 조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군인들에게 영웅이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 신속하며 정확했다. 그리고 관대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황제의 행동은 보통 사람인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오롯이 경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황제가, 에드가 그 녀석에게 꽤 신경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황제는 자신의 노예까지도 그처럼 아끼는 것인가!’

자신보다 나이는 어린 황제이지만 어느 면으로 보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무슨 약초를 캐러 간다는 거야? 알랭이라는 녀석은 뭐고!’

불안했다.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에드가에게 자꾸 사내 녀석들이 치근덕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녀석의 주위에 있는 것도 편치 않았다.

에드가를 보며 육체적인 욕망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 욕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녀석을 보면 안쓰럽고 신경 쓰이고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이지 않아도 생각났고, 보이면 같이 있고 싶었다.

클리터스는 10대 후반에 어느 백작가의 영애를 보며 두근거렸던 그 마음을 떠올렸다. 그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사랑이라든지 좋아한다든지, 이런 것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녀석이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들어왔다고 확신했다.

상대가 남자라고 해서 당황스럽거나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들게 한 녀석이 하나의 선물 같았다.

그런 녀석이, 쓰다듬어 주기만도 모자란 녀석이 누군가의 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클리터스는 다급하게 말을 더 재촉했다.

그사이 베르톨트는 동쪽 수색을 마쳤으나 에드가와 알랭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를 가서 이리 오지를 않는지 가슴 한편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 왔다.

그는 동쪽 조금 높은 언덕 위에 말을 멈추고 탁 트인 평야를 바라보았다.

범위가 넓어 직접 수색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산이 시작되는 곳까지는 평야이니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꼼꼼히 훑으면 에드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드마스터는 모든 감각이 발달했으므로 시력이 좋았고 시야 또한 보통 사람보다 넓었다.

흩어졌던 레니에, 휴고, 클리터스 일행이 황제의 주위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두 언덕 위에 올라 평야로 시선을 두었다.

그때, 저 멀리 두 개의 점이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그 두 점은 에드가와 알랭이었다. 둘은 여유롭게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고, 알랭이 간혹 에드가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베르톨트는 멀리서도 그들의 표정이 보였다.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켜 놓고 넌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이냐!’

부아가 치밀었다.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 심장이 널뛰기를 하였다.

혹 부상이라도 당했을까, 설마 나쁜 짓은 당하지 않았겠지. 그렇게 걱정하며 자신의 애마를 그리 몰아붙였는데 녀석은 자신과는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는 세상에 있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게 느껴져 순간 헛웃음이 났다. 그저 행복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지 모를 비뚤어진 것이 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노기를 가득 담은 그의 눈빛이 에드가와 알랭을 꿰뚫었다.

때마침 베르톨트 일행을 멀리서 본 에드가가 당황해하며 뛰어왔다. 곧 녀석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다, 다녀왔습니다.”

‘하아. 고작 하는 말이 그것이냐?’

베르톨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에드가는 어리둥절해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다시 한 번 베르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다녀왔습니다.”

“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 줄 아느냐?”

“세 시간 조금 넘게 다녀온 것으로 압니다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엎어 놓고 볼기짝이라도 흠씬 두들기고 싶었다.

“조금? 다섯 시간이 훨씬 지났다. 산에 있는 라술러를 다 캐 올 작정이었던 거냐!”

베르톨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렇게 걱정했는데 이리 무심하다니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았다.

‘괘씸한 녀석!’

* * *

막사로 돌아온 황제는 레니에에게 제국군 내부를 철저히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진영 가까운 곳에서 사고가 났으니 그 범인은 분명 군사들 안에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세르비아 제국군 진영에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델라이드는 복귀 후 레니에의 비서관인 휴고에게 일의 경위를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머쓱한 마음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하면서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오늘 일은 너무 괘념치 마세요. 에드가 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네. 엄밀히 말하면 그렇긴 하지요….”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고의 말이 맞지만 정황상 자신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 것은 분명했다.

눈에 띄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더 싫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주변을 소란스럽게 했으니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황제의 막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델라이드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면서 황제에게 무어라 말을 할지 생각했다.

‘죄송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냥 모른 체할까? 사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잖아. 후우.’

어느새 막사 앞이었다.

아까 자신에게 버럭 화를 냈던 황제의 표정이 떠올라 몸이 움찔거렸다.

그저 단순한 화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알은체할 수 없었다.

망설이던 아델라이드가 막사 안의 휘장을 젖혔다. 황제는 큰 탁자 앞에 서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돌아보거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인데 그녀 주변의 공기까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잠시 그대로 있던 그녀는 황제가 서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곤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황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조용히 돌아섰을 뿐이었다.

아델라이드는 허리를 들어 언제나 그랬듯 시선을 그의 가슴 언저리에 두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무엇이 죄송하지?”

목소리에 피곤이 가득 배어 있었다.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대답하는 아델라이드의 목소리에는 애잔함과 미안함이 실려 있었다. 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는구나.”

황제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넌 내가 너를 걱정했다는 걸 알아.”

그의 말이 떨어지자 아델라이드는 화들짝 놀랐다. 상상도 못한 묵직한 감정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하고 깊은 검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폐, 폐하!”

“넌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그렇게 무심하구나.”

“폐하. 폐하는 그저 제가 폐하의 노예이니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하고, 그리고….”

“그리고?”

황제의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짓이겨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아델라이드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이 사내가, 세르비아 제국의 철혈군주라 불리는 이 대단하고 대단한 이 존재가 자꾸 자신을 신경 쓰고 걱정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말을 하면 할수록 진창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존귀한 존재가 미천하기 짝이 없는 노예를 신경 쓴다니.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 남자가 왜 자꾸 자신을 신경 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심술궂게 대하면서도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느껴졌다. 걱정 어린 목소리도, 안쓰러운 시선도, 다정한 손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입 밖으로 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생각만 하는 것과 말로 내뱉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렇게 되면 실체가 생겨 버린다.

고개가 떨어졌다. 심장도 툭 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지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미쳤어!’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감히 폐하의 심중을 미천한 노예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감히 제가 어찌 알고….”

아델라이드는 당황하여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말을 이었다. 주워 담을 수 없다 해도 그 색을 바래게 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맞다. 네 말이 맞다.”

심장이 덜컹했다. 아델라이드는 귀를 막고 싶었다.

“난 네가 신경 쓰여. 걱정돼. 거슬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넌 무척 무심하더구나.”

아델라이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좀, 좀 많이 당황했다. 이런 기분이 처음이어서.”

의외의 말에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황제의 잘생긴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델라이드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동자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녀는 멍하니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다행인 건 내가 네게 이 이상한 감정을 가져도 넌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그보다 더 다행인 건 내가 게이는 아니라는 거지.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게이는 아니다.”

황제는 자신의 꼼수가 보이는 해석에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러니… 너와 난, 처음과 같이 황제와 노예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그를 사랑해서도, 그를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알게 모르게 황제에게 정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 한마디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던 친밀함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선을 긋는 것이 아팠다.

“알겠습니다. 폐하.”

누군가가 가슴에 바위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그녀를 짓눌러 와 속이 답답해졌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숙여 잠시 밖에 다녀온다고 하고는 막사 밖으로 급히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큰 숨을 내쉬었다. 잠시 숨을 멈추었는지 호흡이 가빴다.

베르톨트는 일부러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이를 보며 빙긋이 웃는 에드가를 보고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뾰족한 끝이 가슴을 푹하고 찌르는 듯 아파 와 마음속 분노가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 녀석. 저렇게 웃을 수 있었구나.’

그동안 지켜본 녀석은 정말 한결같았다. 그 무심하고 초탈한 말투와 행동이.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 앞에서만 그렇게 무뚝뚝한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니 좀 전 몇 시간 동안 심장을 누군가가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었다. 그러나 이걸 깨닫자마자 그 모든 고통이 탁, 하고 풀려 버렸다. 혼자만의 생각이고 고민이라 하더라도 배신감이 일었다.

녀석이 코앞으로 다가와, 그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을 때 베르톨트는 알았다. 자신의 감정을. 그리고 녀석의 생각을.

막사에 돌아오는 내내, 아니 돌아와서까지도 자신의 이 당황스런 마음을 곱씹었다.

‘나 녀석을 좋아하는 건가?’

‘나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둘 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껏 베르톨트가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남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싶었다. 자신은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육체적으로 끌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새 변할 수도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혼란스러웠다. 녀석을 어찌 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겉으론 고요해 보여도 베르톨트, 그의 내면은 극심한 갈등과 혼란으로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었다. 그러나 이 당황스러운 마음은 녀석의 대답으로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무엇이 죄송하지?”

피로가 몰려 왔다. 에드가의 입에서 나오는 죄송하다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그 순간 베르톨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에드가를 걱정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에드가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했던 그 지옥 같은 순간을 말이다.

에드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맑고 잔잔하던 눈빛이 지금만큼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이 아프게 느껴졌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는구나.”

“…….”

“넌 내가 너를 걱정했음을 알아.”

켜켜이 쌓인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폐, 폐하!”

“넌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그렇게 무심하구나.”

“폐하. 폐하는 그저 제가 폐하의 노예이니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감히 폐하의 심중을 미천한 노예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감히 제가 어찌 알고.”

에드가가 당황해하며 입을 닫았다. 베르톨트는 마음 한구석이 서걱거리며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맞다. 네 말이 맞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을, 에드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난 네가 신경 쓰여. 걱정돼. 거슬려…!”

그런데 그러면서도 에드가는 모른 체했다.

“그런데 넌 무척 무심하더구나.”

녀석을 향한 마음이 혼자만의 감정이라는 것보다 알고도 모른 체한 녀석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어리석고 또 어리석었다.

“좀, 좀 많이 당황했다. 이런 기분이 처음이어서.”

그 말 그대로였다. 베르톨트가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다행인 건 내가 네게 이 이상한 감정을 가져도 넌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그보다 더 다행인 건 내가 게이는 아니라는 거지.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게이는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은 모질었다.

“그러니… 너와 난, 처음과 같이 황제와 노예이다.”

이런 바보짓은 이만하면 되었다. 베르톨트는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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