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
다음 날 이른 새벽. 제2대대 대대장 아른프리트와 부대장 루이사는 출정 준비를 했다.
철갑 기마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 아름답고 힘찬 위용에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기마대를 이끄는 붉은 머리의 전사 루이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아델라이드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네가 폐하의 시중 노예 에드가지?”
하얀 피부에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가 너무나 강렬하게 아델라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루이사는 아델라이드를 보며 방긋 웃었다.
“네. 부대장님.”
“여유가 없어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다음에 만나면 우리, 대화 좀 하자꾸나.”
“네?”
“나 너한테 관심 있어.”
아델라이드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있던 군사들도 놀라서 아델라이드와 루이사를 번갈아 보았다. 뒤에 있던 아른프리트만 헛기침을 하며 루이사를 잡아끌었다.
루이사는 아델라이드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광경을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루이사가 기마대를 이끌고 먼저 출발한 후, 아른프리트가 이끄는 제2대대도 곧 뒤를 따랐다.
제2대대에는 약초 가방을 둘러멘 알랭이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제2대대가 출발하기 전 알랭에게 다가갔다. 이전에는 황망히 헤어지느라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했었다.
“알랭 님.”
“에드가.”
알랭이 또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심히, 몸 성히 다녀오세요.”
“고마워. 너도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렴.”
“네. 다음에 또 노래 들려주세요.”
알랭은 따뜻한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제2대대와 기마대 일부가 출정하고 난 뒤 막사 전체는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 분주했다. 황제가 지시한 전투 훈련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베르톨트는 레니에의 막사에서 장군들을 모두 모아 놓고 대진 상대와 순서를 정했다.
“이번 훈련에서 일등을 한 소대의 소대원들과 소대장 모두 일 계급 특진이다. 그리고 각각 금 200그램씩도 하사할 것이다.”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일 계급 특진도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금이라니. 한 소대가 1백 명 정도이니 금만 약 20킬로 정도를 투척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장군들의 눈에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이 내용을 안 들은 사람이 없는지 모든 병사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졌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막사는 순식간에 말끔히 치워졌고 모두들 자신의 검과 무기를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한마디에 제국군이 이리 기민하게 움직일 줄 몰랐다.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다른 왕국이나 영지들이 속수무책으로 패하는 거구나.’
젊은 황제의 통솔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는 오늘을 지나 내일까지 계속되기에 병사들은 훈련장에서 야외 취침을 할 예정이었다. 물론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군장을 모두 챙긴 군사들은 질서정연하게 훈련장으로 향했다. 황제 또한 막사에서 자신의 군장을 정비했다. 아델라이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황제의 옆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간소하게나마 장비를 모두 챙긴 황제가 막사를 나가려다가 아델라이드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내려 시선을 피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내일모레 점심때쯤 복귀할 거다. 그때까지는 진영에 남아 있는 자들과 식사를 하거라.”
아델라이드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몇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터라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황제는 대답을 잠시 기다리는 듯하더니 아델라이드가 말이 없자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후우,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네. 그건 아닌데.’
어제 황제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만 자고 일어난 이후부터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둘 사이는 아직도 어색했다.
게다가 황제는 어제 잠깐 풀어진 듯하다가 오늘은 다시 냉기가 흐르는 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서 먼저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는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로 말을 못한 건데, 황제의 눈초리로 봐서는 자신을 무심하고 매몰찬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황제가 조금 야속했다.
그녀는 황제가 나간 끝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물었다. 당신은 친밀하게 느껴질 만하면 왜 이렇게 찬바람이 부는 거냐고.
옆구리로 바람이 지나갔다.
* * *
군사들이 빠져나간 진영에는 장군들의 시중 노예들, 시침 노예들, 그 외 노예들, 그리고 진영을 지키는 병사들과 몇몇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만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노예 무리에 섞여 있는 소니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황제의 시중 노예가 된 후 행동이 자유롭지 못해 소니아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소니아 또한 누군가의 노예가 되었다면 자신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이렇게 노예들이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매우 귀하니 말이다.
아델라이드는 모여 있는 한 무리의 노예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혹시 수에비 왕국에서 온 소니아라는 아가씨를 아세요?”
그들은 모른다며 고개를 젓거나 다른 곳으로 가 보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결국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아델라이드는 직접 소니아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이 막사 저 막사 돌아다니며 남아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물어보며 다녔을 때 자신과 같이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보았다. 한쪽 다리를 절며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 다니는 이였다. 그녀도 아델라이드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델라이드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 소니아에게 다가갔다.
두 여자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서로의 존재에 벅차오르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소니아!”
아델라이드는 온 힘을 다해 소니아를 안았고 소니아도 아델라이드를 힘껏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아델라이드가 소니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어린아이처럼 우는 소니아를 더욱 다정히 감싸 안았다.
“소니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의 품에서 몸을 떼어 그녀의 얼굴과 팔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어,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난 멀쩡해. 아주 건강해. 너는?”
소니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반짝였다.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밝게 웃어 주었다.
“저도 좋아요. 아무 이상 없어요.”
“소니아. 우린 친구잖아. 그러니 그런 말투는 거북해.”
아델라이드가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소니아는 눈을 한두 번 깜빡거리더니 그제야 알았다는 듯 아! 하고 짧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곧장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그래, 에드가.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소니아. 우리 저기 가서 좀 앉을까?”
오래 서 있으면 다리를 아파하는 소니아가 걱정되어 앉자고 물어보니 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금 걸어가서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바위 위에 앉았다.
“소니아. 지금 어디에 있어?”
“하급 병사들 배식을 담당하는 곳에 있어. 에드가, 넌 어디에 있니?”
“난 황제의 시중 노예야.”
소니아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그, 그, 그 피의, 피의 황제?”
아델라이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황제를 가까이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니아는 소문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그 피의 황제가 맞긴 한데, 그렇게 피에 굶주린 포악한 사람은 아냐.”
“에드가, 너 괜찮아?”
소니아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아델라이드가 어떤 남편과 살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황제와 같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후훗. 소니아, 황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전장에서 적을 대할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런 때가 아니면 그저 평범한 사람이야. 따뜻하고 무심한 듯 친절하고. 가끔 애 같고….”
말끝이 잦아들었다. 황제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악몽을 꾼 자신의 등을 밤새 토닥여 주던 손길이 떠올랐다.
‘그래. 그 사람 그렇게 따뜻했는데.’
아델라이드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소니아를 보니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황제가 그런 사람이라면 다행이지만….”
“그건 그렇고 소니아, 네가 하는 일 힘들지 않니? 배식을 담당하면 무거운 것도 들고 나르고, 육체적으로 힘들 것 같은데.”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내가 있는 곳엔 수에비 왕국의 시녀가 많아. 그녀들이 내 사정을 다 아니까 많이 봐주고 도와주지.”
“그럼, 혹….”
아델라이드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듣는 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에드가. 시녀들을 대할 때도 베일을 쓰고 있었으니 얼굴을 아는 이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아. 되도록이면 우리 쪽으로 오지 말고. 내가 그리로 갈게.”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에게 당부하는 김에 자신이 기거하는 막사 위치도 알려 주었다. 다행히 황제의 막사와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아델라이드가 그곳에 갈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 우리 어떻게 만나지?”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의 손을 맞잡으며 애처롭게 물었다.
“소니아. 진영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보자. 진영 동쪽에 시냇가가 있지? 그 시내 상류 쪽으로 조금 올라오면 항아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거기서 수요일 밤 10시에 보는 거야. 난 씻으러 간다고 말하고 나올게.”
“알았어. 수요일 밤 10시, 항아리 바위.”
소니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보고 싶을 때 볼 수는 없어도 이곳 어딘가에 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든든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 혼자인 것만 같은 외로움이 흩어졌다.
소니아와 아델라이드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을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황제의 오른팔이자 제국군의 전략가,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였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동시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누구신지….”
* * *
소니아와 헤어진 후 막사로 돌아간 아델라이드는 저녁을 들고 나서도 늦은 밤까지 레니에가 준 지도를 해석했다.
정신없이 몰두한 끝에 드디어 해석을 다 마치자 뿌듯함이 차올랐다. 미소가 만연한 얼굴을 들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자신이 왕비로 있었을 때도 이 지도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석하지는 않았다.
아델라이드가 그토록 온 정성을 다해 해석한 이것, 지금까지 수에비 왕국 수도의 지하 비밀 통로인 줄로만 알고 있던 이것은 논이나 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관개수로 설계도였다. 수에비 왕국의 제15대 왕이었던 루카스가 당시 천재 과학자 브라만을 시켜 비밀리에 관개수로를 설계하도록 한 것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긴 하지만, 그때만 해도 물 관리는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권력이었다. 루카스는 그 권력을 원래의 주인인 영농인들에게 되돌려 주려 했기에 비밀리에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 비밀리에 진행한 일의 결과물이 바로 이 관개수로 설계도였다. 비밀문서로서 소중하게 보관되긴 했으나 설계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관개수로를 설계할 때의 기본부터 노하우까지 속속들이 적혀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래서 발견되더라도 쉽게 내용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바이온의 고어를 수수께끼처럼 꼬아서 만들어 놓은 은밀한 문서였다.
아델라이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왔다.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 그런지 시야가 뿌옇고 몸이 찌뿌둥한 게 바깥 공기가 필요했다.
바깥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칠흑같이 까만 하늘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듯 크고 작은 별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조금 더 시선을 넓게 펼치니, 무수한 별이 마치 물결치듯 하늘을 흐르고 있었다.
이 거대한 별 무리들이 자신에게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2년 동안 제대로 밤하늘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이리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것을, 이리 눈물 나게 감동인 것을 이제야 마음 놓고 보게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아델라이드는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막사 밖으로 나갈 차비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시냇가에 가서 씻고 오기에 딱 좋았다.
황제의 말대로 자신은 황제의 시중 노예이니 아무 때나 마음대로 젖은 채 돌아다니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무 때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병사가 막사를 떠난 지금이 바로 씻을 타이밍이었다.
수건과 비누를 챙긴 아델라이드는 재빨리 시냇가로 향했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자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씻고 싶은 생각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웃옷을 벗었다. 분명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야외에서 이렇게 탈의를 한 건 처음이라 괜스레 부끄러웠다.
그러나 누가 당장 나타나더라도 가릴 필요가 없는 남자의 몸이라는 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가슴이 사라지고 남성의 성기가 생긴 자신의 몸은 봐도 봐도 놀라웠다.
웃옷과 바지를 벗어 한구석에 잘 개어 놓고 속옷만 입은 채 시냇가로 들어갔다. 휘적휘적 걷다 보니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아델라이드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고 약간 주저앉았다가 물이 생각보다 깊어서 조금 당황했다.
그렇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그토록 바라던 목욕이니만큼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비누를 몸에 꼼꼼히 칠하고 머리를 감았다. 온몸을 휘감는 청량감이 기분 좋아 흐르는 물에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올려다본 하늘이 어제와 같이 아름다웠다.
그때 시냇가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컴컴한 밤이고 인적이 없는 터라 가만히만 있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지만 아델라이드는 너무 놀라 몸을 최대한 아래로 낮췄다.
“경계가 무척이나 삼엄해.”
“알아. 하지만 우리가 노예로 위장했다는 건 다들 아직 몰라.”
“당연하지. 누가 우릴 보고 용병이라고 생각하겠어.”
“위장 마력석, 이놈 정말 물건이군.”
“그 병사가 눈치만 안 챘어도 완벽했는데.”
“지나간 얘긴 할 것 없고, 우리의 감시 대상만 지켜보자고.”
“모레 복귀할 테니 그때까지 넌 배식 막사에 잘 숨어 있기나 해.”
“내가 할 소리야.”
한 남자는 나지막하지만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였고, 또 다른 남자는 목소리가 높으면서 말 어미에 악센트가 있었다. 둘은 조금 낄낄대더니 사라졌다.
아델라이드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약간의 미동만으로도 그들이 기척을 눈치챌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저 어둠 속에서 흐르는 시냇물과 한 몸이 되어, 청력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죽은 듯이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시간이 꽤 지나서야 물 밖으로 나왔다.
조금 무더운 날씨였지만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더니 몸이 얼어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그녀는 재빨리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그녀의 빠르고 잰 걸음이, 이제는 보금자리가 되어 버린 황제의 막사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델라이드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얼른 해치웠다. 그리고 하급 병사들의 배식을 담당하는 배식 막사 쪽으로 향했다.
어젯밤 시냇가에서 두 남자들의 대화를 들은 아델라이드는 모종의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마력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지만 같은 처지여서 알 수 있었다.
사흘 전에 일어난 살인은 그들의 짓이고, 그들은 용병이지만 마력석으로 외모를 위장하여 현재 배식 막사에서 노예로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배식 막사는 세 개의 큰 막사를 이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크기가 상당했다. 황제와 고위 장군들의 배식을 담당하는 소규모 막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배식 막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노예들인 듯했다.
아델라이드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가려 눈만 내놓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던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을 붙잡고 물었다.
“저, 혹시 여기 소니아라는 노예 있나요?”
“소…니아? 아, 그 다리 불편한?”
“네.”
아델라이드는 다른 이들이 소니아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팠다. 소니아의 다리가 이리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 탓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델라이드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켜야 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저기, 저 오른쪽으로 돌아가 봐요. 거기 막사 안에서 아마 쉬고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아델라이드는 여자가 가리킨 막사로 걸어갔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몇몇 여자 노예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기를 건조해 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그녀들 중에서 밝게 웃고 있는 소니아가 보였다.
“소니아.”
아델라이드가 조심스럽게 소니아를 불렀다.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소니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아델라이드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고 환하게 웃어 보이더니, 바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어쩐 일이세요?”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보며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러자 소니아가 아! 하며 깨달았다는 듯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말 놓는 게 진짜 잘 안 되네요. 어쩐 일이야?”
“잠깐 밖으로 나갈까? 여긴 눈이 많네.”
“그래.”
아델라이드는 소니아의 손을 잡고 막사 밖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소니아에게만 들릴 만큼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니아. 이 막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좀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졌거나, 말할 때 어미마다 악센트가 들어가는 남자가 있어?”
“남자? 음…. 없는 것 같은데. 왜?”
소니아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간밤에 잘못 들었나 싶어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아델라이드는 문득 다른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하아. 설마 성별을 바꾸고 있는 건가?’
시냇가에서는 마력석을 잠시 떼어 둔 상태였을 수도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 그렇다면 여자는? 그런 여자는 있어?”
“앨리 목소리가 좀 허스키하고 로레인이 악센트가 있어서 억양이 좀 세지.”
“둘 다 여자야?”
“후훗. 골격도 좀 크고 힘도 세서 놀랐지만 그래도 여자인 건 확실해. 둘 다 남들보다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거든.”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의 질문이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다가 아델라이드의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멈췄다.
“왜? 뭐가 잘못되었어?”
“후…. 그렇군.”
아델라이드는 위험한 일에 괜히 소니아를 끼어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했지만 곧 마음을 굳혔다.
그들은 용병이니 신분이 노출되면 어떤 위험한 일을 할지 모르고, 그 피해를 소니아가 받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다. 차라리 미리 조심시키는 게 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소니아가 평상시와 같이 행동해야 하겠지만.
“소니아, 잘 들어.”
“응.”
“아무래도 그 둘은 나처럼 마력석을 이용해서 여자로 변장한 것 같아. 그리고 또… 얼마 전 세르비아 제국군이 살해되었잖아. 그들이 범인인 것 같아.”
소니아의 눈이 두드러지게 커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우연찮게 그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어. 아직은 나밖에 몰라. 이젠 너도 알게 되었지만.”
“하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앨리와 로레인? 그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나에게 연락해.”
“어떻게?”
“시냇가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참나무 알지? 그 나무에 이 손수건을 묶어 놔. 그럼 그날 밤 10시에 항아리 바위로 나갈게.”
“알았어. 그들을 잘 살펴볼게.”
“그렇다고 너무 의욕이 앞서면 안 돼. 감시한다는 것을 알아채면 네가 다칠 수 있어. 그러니 조심해야 해.”
소니아는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에드가, 어디 몸이 안 좋아?”
“아니. 왜?”
“얼굴이 불그레한 게 열이 있나 봐.”
소니아가 아델라이드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 차가운 손길에 아델라이드는 아까부터 뭉근하게 올라오는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괜찮아. 어제 너무 오래 시내에 몸을 담그고 있어 그런지 열이 조금 있나 봐. 걱정할 정도는 아냐.”
“약초 좀 챙겨 줄게.”
“아냐. 정말 괜찮아. 힘들면 그때 말할게. 소니아 네 몸이나 챙겨. 내 걱정 말고.”
“…알았어.”
아델라이드는 걱정스런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소니아에게 일부러 농담하듯 밝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고 한 번 토닥여 줬다.
황제의 막사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우연찮게 듣게 된 용병들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심각해서 이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잡으면 좋겠지만, 확실한 물증이나 정황 없이 고했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생각으로 무거워진 아델라이드의 발걸음이 한층 더 느려졌다.
아델라이드가 막사로 돌아왔을 때, 훈련하고 있는 병사들 백여 명이 진영에 와서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갔다. 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 가장 강력한 두 소대가 전투 훈련을 하여 승리를 결판낼 것이라 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면 훈련 때문에 쌓인 피로가 상당할 테니 내일 하루는 종일 쉴 것이라고도 하였다.
병사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이야기에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막사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황제가 돌아오면 편안히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침구를 정리하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새벽에 물을 수조에 가득 채워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복귀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도 어쩐지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몸에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밤새 열이 올라 이불을 꽁꽁 싸매고 끙끙대다, 자신의 앓는 소리에 잠깐 깨었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릴 건 뭐람. 아까 소니아한테 약초를 좀 받아 올 걸 그랬나.’
잠깐 후회가 일었지만 곧 감기는 눈꺼풀에 스러졌다.
몸은 무거웠지만 다행히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밥맛이 싹 사라져 아침을 건너뛰고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평소에 워낙 수수한 사람이라 당장은 딱히 해야 할 것이 없었으나 아델라이드는 마음이 분주했다. 황제가 복귀하고 나면 빨래니, 음식 준비니, 목욕이니, 카를로스 관리니 해서 오히려 해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아델라이드는 도무지 긴장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막사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런 노예 같네.’
비웃음이 아닌 웃음이 나왔다. 황제를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없는 이틀 동안 알게 모르게 외롭고 허전했나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뛰는 게 꼭 긴장되어서이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다고. 긴장이 아닌 그 무엇, 어쩌면 설렘일지도 모른다고.
아델라이드는 깨달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이런 설렘과도 같은 감정을 준다는 것을.
* * *
점심시간이 되어 갈 즈음, 희미하게 나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복귀한다는 뜻이었다.
멀리서부터 병사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웅장하게 들렸다. 맨 앞에는 최종 우승한 소대가 있었다. 그 많은 병사들이 동시에 뛰어오니 땅이 울렸다.
황제는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선두에 서서 힘차게 말을 몰고 있었다.
윤기 나는 검은색 애마 카를로스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황제는 훈련이 끝난 뒤라 다소 자유분방한 옷차림이었다. 진회색 바지와 단추가 서너 개 풀어진 먹색 셔츠를 입고 적색 머플러를 느슨하게 매고 있었다. 어깨 위론 검은색 망토가 바람에 크게 휘날렸다.
정리되지 않은 짧은 머리카락들이 어지러이 이마 위에 흩어졌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당당하게 진영으로 들어섰다.
황제의 뒤로 레니에, 클리터스, 휴고, 파올로가 말을 타고 도착했다. 다음으로 속속 도착한 부관들과 장교들은 자신이 이끄는 소대의 인원을 확인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진영 안으로 들어오자 고요했던 진영은 그야말로 축제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로 왁자지껄해졌다.
이틀 동안의 훈련이 어찌나 고되었는지 군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표정들에는 해냈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레니에. 클리터스.”
“네, 폐하.”
“군사들의 식사를 푸짐하게 준비하고 지친 말들을 챙겨 줘. 그리고 오늘 하루는 모두들 편히 쉬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말을 마치고 돌아선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아델라이드는 진영으로 돌아오는 병사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노예들 틈에 있었다. 황제를 보자마자 급히 그의 앞으로 뛰어나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폐하.”
황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그대로 허리를 숙이고 긴장한 채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황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래. 잘 다녀왔다.”
그제야 아델라이드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망토를 벗어 아델라이드에게 내밀었고 아델라이드는 재빨리 망토를 받아 들었다.
베르톨트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아델라이드도 그 뒤를 종종거리며 뒤따랐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 같았다.
베르톨트는 오늘따라 보통의 시중 노예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자신을 살뜰하게 챙기는 아델라이드를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표정 없는 눈빛으로 돌아가더니 머플러를 잡아 풀어 아델라이드에게 주었다.
“폐하. 먼저 식사를 대령할까요? 아니면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베르톨트의 굵고 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진무구하게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아델라이드를 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가 입술을 다시 한일자로 굳게 닫았다.
“목욕은 시냇가로 가서 하면 돼. 식사는 됐고.”
무심하게 말한 베르톨트는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냈다. 이번 훈련에서 알아낸 각 소대의 전력과 수장들의 능력을 기록한 것이었다.
군사들이 전투 훈련을 하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 베르톨트와 레니에, 클리터스는 전력을 비교하며 분석했고, 그 모든 것을 휴고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군 전력 분석서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베르톨트는 탁자 위에 종이를 펼쳤다.
그렇게 베르톨트가 의자에 앉아 일에 몰두하자 아델라이드는 조금 실망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치우고 물도 가득 채워 놓았다. 황제가 어떤 것을 원해도 즉각 대령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그 어느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후 내내 탁자에서 일을 하더니 늦은 점심을 잠깐 먹곤 다시 일만 했다.
그동안 아델라이드는 막사 구석에 계속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마구간에 한 번 갔다 왔다. 황제의 애마 카를로스를 목욕시키고 여물통을 채워 주고 돌아온 그때까지도 황제는 꿈쩍하지 않고 일만 하고 있었다.
저녁때가 넘어서야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뭔가 할 일이 생기나 했는데, 그는 저녁은 생각 없다며 검을 들고 나가 버렸다.
육체와 정신이 피곤하고 지쳤을 텐데 일을 놓지 않고 훈련도 거르지 않는 황제가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아델라이드는 왠지 모를 부아가 슬금슬금 치밀어 올랐다.
복귀 후 자신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한 번 보내지 않았다. 황제가 언제 그리 살가웠냐마는 그래도 자신만 반갑고 설레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한 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머리 한쪽을 꽝꽝 때리는 듯한 느낌에 시야가 빙글거리기 시작했다.
아델라이드는 잠시 의자에 앉았다. 내일은 소니아에게 가서 약초를 좀 받아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막사 밖으로 나온 베르톨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진영으로 복귀하고 나서 본 에드가의 반응이 놀라웠다. 지금까지 그렇게나 무심했던 녀석이 조금 친절해진 것 같았다. 말도 좀 길어졌고 자신의 눈치를 살폈다.
뒤돌아 있어도, 눈을 맞추지 않아도 녀석이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봄눈 녹듯 다정해진 모양새였다.
‘녀석. 무슨 생각인 거야?’
베르톨트는 에드가의 생각을 잠시 머리 한구석에 밀어 놓고, 눈앞에 있는 전투 훈련 분석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와 비교해서 수정할 것은 수정해야 했고, 나중으로 미루느니 지금 해 놓는 게 여러모로 좋았기 때문이다. 원래 군사 총사령관은 훈련을 마치고 나서 더 바쁘기 마련이다.
막사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녀석의 시선이 신경 쓰여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놀라운 집중력으로 일을 마쳤다.
베르톨트는 그제야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사내놈들과 구르느라 땀과 먼지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그는 씻으러 가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왕 씻으러 가는 김에 검도 좀 휘두르고 싶었다.
베르톨트는 시냇가 맞은편에서 한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린 뒤 시냇물로 뛰어들었다. 텀벙 하는 큰 소리에 물가에 있던 몇몇 병사들이 황제를 보고는 경례를 붙였다.
하던 거 계속 하라면서 평온하게 대꾸한 그는 상류로 올라갔다. 물살이 좀 더 세고 차가웠지만 다른 이들보다 체온이 높은 자신에게는 이 정도의 세기와 온도가 딱 좋았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차가운 시냇물에 몸을 담근 채 피곤을 풀었다.
‘막사 안에서 목욕을 하라니. 그럼 네 녀석이 나의 시중을 들 테냐?’
갑자기 든 생각에 실소가 났다. 녀석의 목욕 시중을 받아 볼 걸 그랬다는 실없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조금 곤란하게 하면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다음엔 한번 목욕 시중을 들라고 해야겠군.’
베르톨트의 입매에 가벼운 미소가 묻어났다.
몸을 씻은 베르톨트는 가져온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막사로 향하는 발걸음도 아주 가뿐했다.
막사에 도착해서는 막사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근위병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휘장을 젖히고 막사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아델라이드가 그가 들어오는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델라이드는 목욕 직후 물기가 덜 마른 베르톨트를 보고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 젖은 머리카락과 깊은 눈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붉은 입술, 거의 허리까지 풀어 헤쳐진 셔츠….
눈 둘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섹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머릿속이 까맣게 뒤엉키는 것 같았다. 아델라이드가 휘청였다.
순간 빠르게 다가온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녀의 시선이 코앞에 있는 남자의 드러난 가슴팍에 꽂혔다.
코끝으로는 비누향이 훅 하고 들어왔다. 기분 좋은 냄새에 얼굴을 들어 베르톨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남자의 검푸른 눈동자가 너무 강렬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 화답하듯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열렸다.
‘이 사람…. 너무 잘생겼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앞이 아찔했다. 아델라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스스로 감았다고 생각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저절로 감기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마치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 위로 날아가는 듯했다.
“에드가! 에드가!”
그녀는 기절했다. 그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겨드랑이와 무릎 뒤로 손을 넣어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인간 같지 않은 무게였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단 말인가.
녀석의 침대에 녀석을 눕혔다. 뜨끈뜨끈한 몸에 열기가 올라 얼굴이 발그레했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한숨이 났다. 스스로의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막사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던 녀석의 모습이 생각났다.
‘바보 같긴.’
수건 중에서 부드러운 것을 고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녀석의 침대 옆에 놓았다. 열이 오르고 있으니 일단 시급히 열을 내려야 할 터였다.
이곳은 황궁이 아니니 자신의 주치의도 없었고 기껏해야 위생병을 부르는 게 다였다. 그러나 열을 내리는 특별한 방법이 없어서 위생병을 불러도 조처는 매한가지였다. 베르톨트는 직접 녀석의 몸을 닦아 주기로 결심했다.
녀석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간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고통스러워 보였다.
베르톨트는 재빨리 녀석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뽀얀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 여기서 팔을 빼내고 등을 들면 셔츠를 벗길 수 있겠다 싶어 녀석의 맨등에 손을 대었다.
그때 베르톨트의 눈썹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리고 손길이 한층 다급해졌다. 빠르게 셔츠를 빼낸 그는 녀석의 몸통을 돌려 등을 보았다.
상처로 가득했다.
아델라이드를 안고 있는 베르톨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상처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는지 어떤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나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어떤 것은 그나마 최근이었는지 아직도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제대로 치료를 하기도 전에 또 고통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베르톨트는 숨을 쉬기 힘들었다. 자신도 전장에서 이런저런 상처를 입어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지만 이렇게까지 처참한 흔적은 없었다. 이건 지속적인 고문의 증거였다.
손이 쉬지 않고 떨려 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주먹 쥔 손목에 힘줄이 터질 듯이 도드라졌다.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깊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하…, 씨발!”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분을 삭였다.
조금 정신이 든 다음, 녀석의 얼굴부터 허리까지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고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려 주었다. 처음보다 열이 많이 내린 듯했지만 아직도 녀석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드로즈만 남기고 바지를 벗겼다.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그러다가 녀석이 모로 눕는 바람에 등의 상처가 다시 보였다. 녀석은 한껏 웅크리며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아마 이불을 배만 덮어 헛헛해서 그러나 보다 생각하며 상처 난 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절로 짙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녀석이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니 다시금 숨이 턱 막혀 왔다.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지독한 시간을 견뎠고,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녀석. 녀석이 못 견디게 애처로워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느 정도 조치를 취한 후 베르톨트는 자신의 침대로 옮겨 앉았다.
편한 자신의 침대로 녀석을 옮길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깨어나면 또 기겁을 하며 자신을 쳐다도 못 볼 테니까.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려 그도 침대에 누웠다. 피곤한데도 잠이 깊게 들지 않고 중간중간 눈을 떴다. 새벽이 다가올 즈음 다시 눈이 떠진 그는 자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아까는 그렇게 불덩이처럼 뜨겁던 몸이 지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런. 너무 열을 내리게 했나? 어쩌지?’
즉시 녀석을 안아 들어 자신의 침대로 옮겼다. 황제의 침구엔 얇고 성글게 짠 시원한 재질의 이불도 있었고 털 이불도 있었기에 기온에 따라 골라 덮으면 되었다.
베르톨트는 털 이불을 끌어당겨 녀석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자신은 더웠지만 일단은 녀석이 우선이었다. 몸이 아프니 이 정도 온도가 딱 맞을 터였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차가워진 녀석의 몸을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아서 체온을 올리기 위해 팔다리를 비벼 댔다.
그 순간 베르톨트의 머릿속에는 녀석을 걱정하는 마음뿐이었다. 한 치의 이상한 생각도 없이 그는 정성껏 아델라이드를 마사지했다. 그러다가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베르톨트는 바짝 귀를 갖다 대 보았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게 점점 베르톨트의 품 안을 파고들어 왔다.
그렇게 곤히 자는 듯하던 녀석이 몸을 갑자기 부르르 떨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녀석의 입에서는 고통에 잠긴 신음이 흘러나왔고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갔다.
다시 악몽을 꾸는 듯했다. 이 악몽은 아마 등에 있는 상처와 연관된 것일 거라고 짐작하며, 베르톨트는 어금니를 꽉 사리물었다.
몸도 안 좋은데 악몽에 시달리니 그렇잖아도 가냘픈 녀석의 몸이 심하게 축날 것 같았다. 어서 깨워 의식을 차리게 해야 했다. 이 괴로움을 꿈에서라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델라이드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에드가! 에드가!”
녀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뜨려 노력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 듯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에드가, 눈을 떠!”
무엇이 이리 아프고 괴로워서 눈을 뜨려 해도 뜨지 못하고, 소리를 내려 해도 내지 못하고, 그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녀석이 겪는 그 고통이 고스란히 베르톨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품에 안고서 큰 손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에드가, 이제 그만해. 눈을 떠. 제발, 제발 눈을 떠!”
베르톨트의 거친 소리가 막사 안을 휘감았다. 그럼에도 아델라이드는 눈을 뜨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해 주듯이 아델라이드를 품에 안고 몸을 약간 흔들면서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그렇게 안고 토닥였을까. 아델라이드의 심하게 떨리던 몸도, 흐느낌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기적같이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베르톨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계속 아델라이드를 토닥이면서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에드가. 이제 괜찮아. 이제 그런 일은 없어. 네게 일어난 일은 네 탓이 아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폐…하.”
자신을 부르는 고요한 그 목소리에 베르톨트는 말하는 것을 순간 잊어버렸다. 그저 자신을 부르는 그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신이 들어?”
시리고 깊은 눈동자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한가득했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동안 어떤 대답도 하지 않던 아델라이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또…, 당신이군요. 나를 안아 주는 사람이.”
촉촉이 젖은 아델라이드의 눈가가 곱게 접혔다.
“오늘은 나도 피곤하니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저, 전하!”
아델라이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나보다 그년이 더 중하더냐!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전하! 그런 게 아니옵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시녀라 실수로….”
“아델라이드! 그대는 많은 이들이 있는 앞에서 나를 욕보였다.”
“전하!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으니….”
“나를 욕보인 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아델라이드는 무서웠다. 자신을 향해서 손을 뻗는 저 악마가 너무나 무서웠다. 한두 번이 아닌데도 겪을 때마다 미칠 만큼 두려웠다.
그리고 아팠다.
세상의 모든 일은, 반복하면 학습이라는 것을 통해 무뎌지기도 하건만 어째서 폭력은 당할 때마다 이리 처음인 것처럼 고통스러울까.
베르톨트를 올려다봤다. 에드가로서가 아니라 아델라이드로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듯 서서히,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베르톨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
베르톨트는 놀라 눈이 커다래졌고 아델라이드는 눈을 감았다. 순간 청회색 눈동자에 가득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서툴게 댄 입술을 베르톨트의 입술이 마주 물었다.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 아델라이드의 고른 치열을 가르고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입 안을 유영하던 뜨거운 혀는 점막 곳곳을 취하고는 빠져 나갔다.
짧지만 격렬했던 입맞춤으로 아델라이드는 볼이 발개져서는 숨을 할딱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베르톨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하아… 너….”
마침내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를 볼 수 없어 아델라이드는 눈을 뜨지 않고 부족한 숨만 급히 들이마셨다.
민망해진 아델라이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베르톨트가 그녀를 그대로 안고 반 바퀴 돌아 아델라이드를 자신의 아래에 가게 했다. 그러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황제의 검푸른 눈동자에 무언가 짙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하여 아델라이드는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네 눈동자, 가끔 청회색으로 보일 때가 있어.”
아델라이드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자신의 진짜 눈동자 색이 그에게 보이는 걸까?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청회색이 더 어울려. 아름다워.”
황제는 끙 하며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그의 눈동자에 작게 일렁이던 짙은 빛이 더욱 진해졌다. 잘생긴 그의 미간이 일그러지면서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느다란 허리를 잡았다.
“지금도… 청회색이야. 빌어먹을!”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크게 물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붉은 낙인이 찍히고 있었다.
“아… 읏!”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이 목덜미 여기저기를 강하게 찍어 누르고 핥았다.
지나치게 관능적이어서 아델라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거친 숨소리로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의 귀를 입술로 애무했다.
“하아…!”
너무나 간지럽고 색스러워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고 거칠게 입술을 가르며 혀가 들어왔다.
좀 전의 부드러우면서도 배려 있는 키스가 아니었다. 너무나 격렬하고 깊어 아델라이드는 점점 숨이 찼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숨까지 모두 먹어 치우겠다는 듯 베르톨트가 거칠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키스는 원래 이런 건가? 기분이….’
아델라이드의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머릿속에 불꽃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혀가 그녀의 입 안 곳곳을 훑고 핥을 때마다 온몸의 세포까지 곤두서는 듯 몸이 저릿저릿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느낌에 그저 그의 입술 안에서 흐느낄 뿐이었다.
그는 연신 꼼지락거리던 아델라이드의 하체를 자신의 다리로 단단히 고정한 채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몸도 얼굴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격렬히 밀어붙이는 그의 입술과 혀를 속수무책으로 받아 줄 뿐이었다.
‘흐읍. 숨, 숨 막혀….’
아델라이드의 손이 단단한 그의 가슴을 약하게 밀어냈다. 거칠고 진한 키스가 계속되자 호흡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이 너무 단단하게 그녀를 옭아매고 있어 그녀로서는 그저 그의 가슴팍을 밀고 두드리는 게 최선이었다.
아델라이드의 팔다리가 버둥대자 그제야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베르톨트가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입술이 격렬한 입맞춤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수, 숨…차요….”
베르톨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자신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아델라이드를 보았다.
얼굴은 새빨갰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붉게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도 자신이 한 짓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녀석의 모습은 너무 예뻤고 자신은 순간 이성을 잃었다. 자신에게 깔려 흐트러진 녀석의 모습을 봤을 때 속에서 무언가가 확 끓어오르더니 아랫배가 당겼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밀어붙이고 말았다.
그러나 눈물 맺힌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하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전에 녀석의 등에 상처를 냈을 그 미친 새끼가 생각났다. 순간 그 미친놈과 지금의 자신이, 에드가에게 같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톨트, 이 미친놈!’
성급하고 한심한 자신에게 욕지기가 나왔다.
낮게 욕설을 뱉으며 베르톨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괴감 때문에 얼굴이 어두워졌고 자신을 향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먼저 자거라.”
차마 아델라이드를 쳐다보지 못한 채 셔츠를 대충 걸쳤다.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는 바람같이 막사를 나갔다.
아델라이드는 윗몸을 일으켜 베르톨트가 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무안 주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몸짓을 거부로 안 것 같았다.
하지만 거부가 아니었다. 키스가 처음이라 그의 리드를 따라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가 주는 너무도 뜨겁고 강렬한 느낌을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몰랐다. 자신보다 잘 아는 그가 알려 주면 좋으련만. 아델라이드는 한숨을 쉬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미쳤군. 미쳤어.”
베르톨트는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시냇가로 향했다. 큰 보폭으로 시냇가에 금세 다다르자마자 곧장 물로 뛰어 들었다.
가운데로 들어가니 그의 허리까지 차디찬 물이 닿았다. 그는 거칠게 세수를 했다. 그래도 답답한 나머지 연거푸 세수를 하다가 아예 물에 몸을 누였다.
“남자 새끼란 다…. 후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아까 눈물이 가득 차오른 녀석의 눈을 보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 달콤하고 예쁜 입술이 서툴지만 먼저 다가와서, 그래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만, 조금만 반응하려 했는데 녀석의 목덜미를 무는 순간 달큼하면서도 묘한 꽃향기가 훅 풍겨 와 정신을 잃을 뻔했다.
녀석의 체향은 지독한 페로몬이었다. 몸을 맛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키스만으로도 가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했던 키스는 키스도 아니었다.
녀석의 입 속을 헤집고 맛보는 순간 너무도 황홀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순간 이성이 날아갔다. 할 수만 있다면 부딪혀 오는 녀석의 맨몸을 먹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그 격렬한 마음 때문에 에드가가 숨이 부족해 힘들어했다. 그걸 눈치채고 그가 시선을 들었을 때 흐트러져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 빨고 자국을 남긴 목덜미가 보였고 녀석의 눈물이 보였다.
어딘가 붕 떠 있던 정신이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베르톨트는 시냇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쉐도우.”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어둠이 내려와 땅에 착지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가서 레니에를 불러와라!”
“존명!”
쉐도우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알아봐야겠어. 내 몸이 녀석을 이렇게 원하는 게…. 내 성적 취향이 바뀐 건지 아닌지.’
* * *
레니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새벽이 오려는지 어둠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때 쉐도우가 나타나 황제가 그를 찾는다고 하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대충 옷을 여미고 시냇가로 가니 황제는 흠뻑 젖은 채로 시내 한가운데 솟아오른 바위에 앉아 있었다.
레니에는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절친한 친구인 자신에게도 황제는 어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폐하!”
황제는 레니에를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았다.
“레니에. 부탁 하나 들어줘.”
“부탁…이요?”
“그래. 부탁이야. 은밀히….”
“말씀하십시오.”
“쓸 만한 남자 녀석 좀 골라 봐.”
“쓸 만한? 어디에 쓰실 겁니까?”
“…….”
“어디에…?”
“좀 깨끗하고 예쁘장하고 하얬으면 좋겠어.”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레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후우…. 욕구 불만인 거 같아. 준비해 줘.”
레니에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가끔, 아주 가끔 황제가 심하게 욕구를 억누른다 싶을 때 동침할 여자를 준비한 적은 있었으나 황제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가 먼저 요구하다니. 그것도 남자를.
“나, 남자 말입니까?”
“…그래. 남자.”
레니에는 자신의 친구가 그런 취향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여자를 찾지 않았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신이 지금까지 몰랐단 말인가.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의문과 의심, 그리고 의아함이 미친 듯이 얽히고 있었다. 아무리 절친이라도 황제인데 성적 취향을 대놓고 묻기는 껄끄러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황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게다가 깨끗하고 예쁘장하고 하얀 남자를 좋아한다면, 그런 조건에 제일 잘 맞는 이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폐, 폐하. 그런 남자는….”
아주 미세하게 레니에가 뒷걸음질 쳤다.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황제는 소드마스터고 세르비아 최고의 기사니 자신이 암만 용을 써도 그에게 터럭 하나 상처 입힐 수 없다. 계급으로도 제국의 지존인 황제니 안 된다 거절할 수도 없다. 사적으론 절친이니 여기서 절대 불가하다 하면 친구 사이가 어그러질 수 있다.
레니에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레니에의 이상하고 요상한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친구의 표정을 읽은 순간 너무 어이없고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미친 새끼! 미쳤냐? 내가? 너랑?”
레니에는 황제가 버럭 하는 소리에 흔들리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황제를 주군으로서, 친구로서 사랑하지만 키스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으면 죽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레니에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짐승 같은 놈.”
“으으! 아, 정말. 황제 폐하 네가 남자 구해 달라면서! 이쁘고 하얗고 깨끗한!”
“그게 너냐? 너 더러운 거 내가 몰라? 몇 년을 보는 사인데!”
‘내가 아무리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디다 저를 갖다 대. 미친놈. 역겨운 놈.’
몸을 부르르 떤 베르톨트는 조금 전까지 아델라이드의 입술을 탐했던 자신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겉가죽만 그럴 듯해 가지고서는….”
레니에는 간만에 자신에게 막말을 쏟아 내는 황제를 보고 있자니 그가 어지간히 평정심을 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준비해.”
“도대체 어떤 녀석을 데려오란 거야!”
“빌어먹을. 이쁘고! 하얗고! 깨끗한! 에드가 같은 녀석 말야!”
레니에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 갔다.
“헉! 에, 에드가 말이야? 네 시중 노예?”
“…그런 비슷한 녀석.”
베르톨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돌 것 같았다.
“후우…. 폐하. 그냥 에드가랑….”
“안 돼! 그건!”
“왜 안 됩니까?”
“그건 그저 하룻밤 욕망을 푸는 거니까. 녀석이 받아 주지도 않겠지만 받아 준다고 해도 그건 싫다, 내가.”
레니에는 자신의 주군이면서 친구인 베르톨트가 오늘따라 미련하게 보였다. 저렇게까지 지켜 주고 싶으면서, 저렇게까지 원하면서 뭘 시험해 본단 말인가. 제삼자가 보니 딱 알겠구먼.
‘폐하. 당신은 남자인 에드가가 아니라 그냥 에드가를 좋아하는 겁니다.’
레니에와 베르톨트는 둘 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 명은 부드럽고 아름다웠고, 한 명은 거칠고 섹시했다. 그러나 실제로 여자를 취하는 것은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레니에였다.
레니에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바람둥이에 가까웠지만 베르톨트는 철저히 자신을 억누르며 훌륭한 황제의 틀에 스스로를 맞추었다. 그렇기에 레니에는 베르톨트가 태어나 생전 처음 겪는 이 감정에 얼마나 당황스러워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에 무지하기 그지없는 친구는 이런 일을 좀 겪어 봐야 했다. 여성과 남성, 아니 남성과 남성 간이라도 이러한 감정은 누군가가 이야기해 준다고 깨우쳐지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깨닫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게 레니에의 지론이었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레니에는 공손히 대답을 하고는 허리를 굽혀 자신의 주군에게 예를 취했다. 그러곤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르톨트도 바위에서 일어나 시냇물 밖으로 나왔다.
몸은 흠뻑 젖었고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막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녀석을 볼 면목도 없었다.
‘검이나 휘두르자.’
베르톨트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수련을 했다. 늘 하던 대로, 그는 진영 안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수련장으로 향했다.
* * *
아침이 밝았다. 황제의 침대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던 아델라이드는 눈을 뜨자마자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와 누운 흔적이 없었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나가 놓고 어디를 가서 여태 안 들어오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무리 아팠다지만 노예인 자신만 너무 천연덕스럽게 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니 아직 어지럽고 몸에 힘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어젯밤 황제가 체온을 나눠 준 덕분에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아델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일어나 자신이 누워 있던 침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창문을 가리고 있던 작은 천들을 묶어 환기를 시켰다. 세면대로 가서 물이 부족한지 확인한 것을 끝으로 원래 자신이 기거하던 막사로 갔다. 그곳에서 세수를 하고 짧은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고 나서는 두건을 머플러처럼 돌돌 말아 목에 스카프처럼 매었다. 황제가 남긴 자국이 하나라면 모를까 여러 개여서, 거울을 보니 생각보다 눈에 잘 띄었기 때문이었다.
두건을 머리가 아니라 목에 매는 바람에 기가 막히게 예쁜 두상이 드러났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는 아델라이드의 작고 동그란 두상과 반듯한 이마를 더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하지만 두건은 하나여서 머리를 가릴 것은 없었다.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던 아델라이드는 뒤에서 쏘아보는 시선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생각보다 거울을 오래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예들 여럿이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수련하고 계시다니, 폐하는 도대체 체력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전투 훈련 마치고 나서 모두들 나가떨어졌는데 정말 대단하다.”
“그 정도면 괴물이지. 무지 섹시한 괴물!”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여 있던 노예들이 까르르 웃어 댔다. 아델라이드는 왠지 모르게 듣고 있기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다.
황제의 아침 시중을 들고 난 뒤, 아델라이드는 해석한 설계도를 가지고 레니에의 막사로 향했다.
레니에는 막사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어떤 자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언뜻 봤을 때 레니에가 검은 옷을 입은 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양새였다.
그자는 레니에에게 절도 있게 경례하더니 진영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니, 뛰어갔다기보다 사라졌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재빨랐다.
무표정하게 그 자리에 서 있던 레니에는 아델라이드를 발견하고는 급히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델라이드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레니에 님.”
“에드가.”
“일전에 주신 지도 해석을 마쳐서 지금 가져 왔습니다.”
“벌써요?”
지나치게 빠른 거 아니냐는 듯 레니에가 놀라워했다. 얼굴에 경탄한 기색이 가득했다.
자신도 너무 빨리한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 표정을 보자 조금 느긋하게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민망한 마음에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훈련 가신 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그럼 일단 들어가서 보죠.”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레니에는 아델라이드가 들어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 줬다. 아델라이드는 가슴에 지도를 부여안은 채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레니에 님이 언제부터 나에게 존대를 하신 거지?’
아주 잠깐,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안에는 휴고가 한쪽 눈에 안경을 낀 채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곧 보고 있던 문서로 다시 눈을 돌렸다.
아델라이드는 가져온 자료와 사전을 둥근 탁자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접혀 있던 지도를 모두 폈다.
“자. 그럼 설명을 들어 볼까요?”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휴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레니에의 옆으로 가 앉았다.
“먼저 이건 수에비 왕국의 비밀 지하 통로 지도가 아닙니다. 이건 관개수로 설계도입니다. 지하에 설치할 계획이었으므로 지하 통로처럼 보였을 겁니다.”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아델라이드의 설명은 짜임새 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관개수로 설계도의 노하우가 들어 있는 지도는 세르비아 제국의 관개수로 기술자들에게는 보석 같은 자료였다. 아델라이드의 이번 해석은 또 한 차례 세르비아 제국에 막대한 영향을 줄 것이었다.
아델라이드가 그들을 앞에 두고 설명하는 동안 레니에는 그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역시 시종장이 거둔 일개 심부름꾼 시종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영리하고 학식이 여간 풍부한 게 아니었다. 이런 복합적인 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데는 그만한 복합적인 지식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또한 말을 하는 모양새가 너무나 정갈하고 온화했다. 고위 귀족들도 몇 년을 수련해야 가능한 말투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었다.
‘당신은 일개 시종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사람입니까?’
레니에는 자신이 짐작하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일 리가 없다. 아니, 그 사람일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에드가는 분명 남자였다. 자신이 탈의한 것을 직접 보았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심정적으로는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