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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간자 (13/39)

제12장. 간자

아침 일찍부터 세르비아의 수뇌부들은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전투 훈련을 끝낸 지 이틀 만에 수뇌부들을 불렀는지라 황제가 무엇인가를 구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뇌부 회의에는 황제, 레니에, 클리터스, 휴고 외 고위 장군 여덟 명이 참석했다.

“모두 잘 주무셨는가?”

황제가 웬일로 아침 인사를 했다. 모여 있던 모두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술렁이던 것도 잠시, 황제의 단호한 한마디에 막사 안 분위기는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레니에, 시작하게.”

레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화두를 꺼냈다. 그는 현재 세르비아 제국군의 전력을 다시 점검한 결과부터 보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기마단과 제2대대가 출정한 이후 전투 훈련까지 마친 제국군은 사기며 실력이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아른프리트와 루이사가 자신들이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하고 복귀한다면 바이온 왕국을 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레니에는 향후 일정까지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그러나 일정을 이야기할 때 어느 순간부터 클리터스와 장군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잠자코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모든 보고가 끝나자, 그들은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폐하. 바이온 왕국만 치고 바로 제국으로 귀환한다니요?”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폐하. 승기를 잡았을 때 좀 더 몰아붙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군들이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그제야 황제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시작했다.

“귀관들은 세르비아를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나? 물론 제국에 복귀했다가 출정했다가를 반복하긴 했지만 귀관의 병사들은 모두 꼼짝없이 2년 동안 이 전장에 있었지.”

황제의 말이 맞았다. 현재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긴 하지만 병사들이 집을 떠나온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제국의 모든 정무를 오직 전령과 레니에를 통해 보고 있었다. 즉, 병사들이나 황제가 전장을 떠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군들의 기세가 누그러지더니 저마다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베르톨트는 그 모습을 보고 쐐기를 박았다.

“이제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나. 바이온 왕국까지만 치고 제국으로 돌아간다.”

“폐하. 그럼 알레마니아와 앙주는 어찌하시렵니까? 안달루스 제국의 형제국인데….”

클리터스가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하였다.

“수에비, 카프카가 우리 손으로 넘어왔다. 바이온까지 넘어오면 안달루스 제국의 속국은 알레마니아와 앙주만 남아. 그 왕국들은 대륙에서 제일 작은 왕국이지만 안달루스 제국의 혈맹국이므로 저항이 만만치 않을 거야. 또 우리에게 넘어와도 그다지 쓸모가 있지 않아. 우리가 쏟아붓는 노력에 비해 결과는 그리 크지 않지. 즉, 비효율적이야. 알레마니아와 앙주는 언젠가 안달루스 제국을 무너뜨리면 자연스럽게 우리 손으로 넘어올 거다. 그 두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의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

“그럼 안달루스는 내버려 두고 돌아가는 겁니까?”

“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가? 처음엔 안달루스로부터 우리 세르비아가 독립하는 것이었고, 독립을 이룬 후에는? 반격을 통해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함이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안달루스 제국까지 넘보았지? 그대들이 그렇게까지 의욕적인 것은 고맙지만.”

베르톨트는 빙글거리며 부하들을 쭉 둘러보았다. 단호하게 그들의 기세를 꺾긴 했지만, 지휘관들이 안달루스 제국까지 넘보고 있다는 게 실은 만족스러웠다. 이런 기세가 아니었다면 2년 동안 파죽지세로 승리하며 독립부터 영토 확장이라는 쾌거를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달루스는 현재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한창이라 군사력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지금 붙으면 우리가 승리한다고 해도 우리 쪽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다. 그렇게까지 해서 대륙을 통일한다고 해도 전력 소모가 커서 정국을 안정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무력이 아닌 협상을 통해 외교적으로 받아 낼 수 있는 건 최대한 받아 내고 나중을 노리는 게 좋겠지. 안달루스가 지금보다 더 힘이 약해진 후에 쳐들어가든지 아니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하든지 말이야.”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숨죽여 황제의 말을 경청했다. 황제가 말한 대로 지금 세르비아 군의 전력이 최고라고 해도 이대로 안달루스 제국까지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혹 이겼다 한들 통일 후가 문제였다. 안정되게 정국을 이끌어 갈 제도나 정책, 힘이 없어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말해 주는 교훈이었다.

장군들 사이의 침묵을 깬 이는 레니에였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3일 후면 만고평야에 출정한 아른프리트의 4천 군사가 바이온 연합군을 공격할 겁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바이온의 연합이 계획대로 파괴되면 우리는 그대로 바이온의 수도로 진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모든 병사는 바이온의 국경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돌아가셔서 대대의 이동을 알리시고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번 공격이 마지막 출정이라는 것도 알려 줘서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여 주십시오.”

“출발은 몇 시경입니까?”

“수에비 왕국서부터 바이온 국경까지는 꼬박 3일이 걸립니다. 현재 병사들의 상태를 고려하면요. 그래서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것입니다.”

뒤로 물러나 있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제국군 안에 숨어 있는 쥐새끼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샅샅이 찾았는데도 색출하지 못한 것을 보면 노예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찾을 때까지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자 수하에 있는 노예들을 잘 지켜보도록. 특히 시침 노예를 들이는 이들은 더 조심해야 할 거야. 그대들은 돌아가서 부관들에게 이 내용을 알리도록.”

장군들은 놀라서 움찔거렸다. 특히 시침 노예가 있는 자들은 조금 얼굴이 붉어지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때 기록을 맡고 있던 휴고가 레니에에게 작은 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레니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이온은 군사력이 강하진 않지만 간자, 첩보 등에 밝은 왕국입니다. 그러니 작고 힘없는 왕국이 아직까지 안달루스와 우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며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그들이 독을 잘 쓴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라술러라는 약초를 이용하여 그 독에 대비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까 합니다. 들라 해.”

황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레니에가 라술러를 알고 있는 것도, 무엇인가를 준비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클리터스와 장군들은 레니에의 말이 끝난 후 막사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가냘픈 체구에 단정해 보이는 외모를 지닌 그는 아델라이드였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조용히 걸어와 레니에의 곁에 섰다. 그러고는 원탁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폐하의 시중 노예 에드가라고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레니에를 잠시 바라봤다. 레니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개를 돌려 막사 안의 장군들을 휘이 둘러보았다.

베르톨트는 당황스러웠다. 회의를 하러 오기 전, 에드가에게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잘 다녀오라며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저 녀석, 무슨 꿍꿍이지?’

“라술러라는 약초는 동물의 체액으로 만든 독을 해독하는 약초로 수에비에서는 흔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동물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웬만한 동물의 독에는 대처할 수 있으니 알아 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사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레니에가 돌아다니며 장군들 앞에 라술러를 하나씩 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보시는 것이 라술러입니다. 잎이 뾰족한 것이 돌기가 조금 나 있고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납니다.”

장군들이 라술러를 들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베르톨트는 그저 아델라이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불렀겠지만 이렇게 시커먼 놈들이 녀석에게 반짝거리는 시선을 보내는 걸 보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내놈들에게 둘러싸여서도 하나도 기죽지 않고 행동거지도 흐트러지지 않는 녀석이 뿌듯하고 사랑스러웠다.

“라술러는 평상시 차로 우려내서 음용합니다. 독을 당했을 때, 즉 급할 때는 라술러의 즙을 내어 상처 위에 올려놓으면 됩니다. 어떤 독이냐에 따라 사용량이 달라지지만 보통의 경우 이 정도… 씹어서 환부에 올려 주십시오.”

녀석이 손을 올려 손가락으로 양을 표현했다. 베르톨트는 오늘따라 녀석의 손가락이 유난히 희고 예뻐 보였다.

“그러지 말고 좀 보여 주겠나?”

장군 중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라술러 한 움큼을 쥐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더니 손바닥 위에 뱉어 낸 다음 손목에 올려놓았다. 초록색의 즙이 하얀 손목을 따라 흘렀다.

장군들에게 아델라이드는 처음 보는 노예였지만, 아델라이드가 라술러를 씹고 뱉는 모습을 더럽거나 천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워낙 깔끔하고 섬세하게 보여 줘서 모두들 전문적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미친놈들. 다들 에드가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잖아!’

베르톨트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시커먼 놈들이 순한 양처럼 녀석을 보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자신도 모르게 서슬 퍼런 살기를 내보내자 주위 장군들이 움찔거렸다.

“혹시 지금부터 내성을 기르시고자 한다면 이렇게 차를 우려내어 주기적으로 드시면 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드시면 미각을 잃을 수 있으니 하루 세 번 이상 드시지는 마십시오. 더운 차, 냉차 모두 가능합니다. 이렇게 말린 라술러 잎을….”

아델라이드는 준비한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렸다. 라술러 잎 대여섯 개를 집어 찻잔 속 거름망에 넣은 뒤 그대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러곤 잠시 찻잔 안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클리터스 부니에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클리터스 대대장님. 한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아델라이드가 하는 양을 외우듯이 하나하나 보고 있던 차에 아델라이드가 자신을 부르자 클리터스는 깜짝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아…. 아, 그러지!”

클리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 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커다란 몸이 아델라이드의 뒤쪽으로 와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아 들었다. 황제였다.

“내가 먹어 보지.”

황제는 뱉듯이 말을 하곤 차를 들이켰다. 곧 혀가 아릴 정도로 쓴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젠장. 무슨 차가 이렇게 쓴 거야.’

아델라이드는 생각지도 못한 황제의 행동 때문에 놀라긴 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맛이 어떠십니까?”

“음, 많이 쌉쌀하구나. 그래도 뭐….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델라이드는 장군들을 보며 말했다.

“네. 많이 씁니다. 폐하께서는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처음에는 역하다 싶을 만큼 쓰게 느껴져 드시기에 힘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음용하면 쓴맛이 줄어들고 어느 순간부터는 단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내성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아델라이드는 레니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다 끝냈다는 의미였다.

할 일을 끝냈으므로 이제 나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황제와 마주쳤다. 황제는 그녀의 바로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자연히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아델라이드의 양쪽 팔꿈치 부근을 잡고 눈을 맞추더니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기다려.’

동시에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아델라이드는 순간 오늘 아침의 일이 생각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

오늘 새벽녘, 일찍 눈이 떠진 베르톨트는 자신의 품에서 자고 있는 녀석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젯밤엔 그렇게나 어색하게 굴더니 그래도 피곤했었는지 녀석은 곧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녀석의 체취를 마시며 간만에 다디단 잠에 빠져 들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왜 이 녀석에게 빠져들었는지 모르겠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빠져들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것이 마뜩지 않았고, 다음에는 남자인 녀석에게 끌리는 것이 낯설었다.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인정하는 순간부터 녀석을 향한 마음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자 더욱 보고 싶고 닿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녀석이 좋을 뿐이었다. 키스하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지금도 그랬다. 베르톨트는 웃음이 나왔다.

열망이 흘러넘치는 그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녀석의 눈꺼풀이 약하게 흔들리더니 반짝 눈을 떴다.

뜨거운 열기를 가득 담은 베르톨트의 검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떴지만 그의 시선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율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두 사람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침묵을 이기지 못한 건 아델라이드였다.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 갈 때 그녀가 입을 떼었다.

“폐, 폐하. 일어나셨습…, 읍!”

돌연 베르톨트가 입술을 겹쳐 왔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느껴지자마자 곧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드럽게 혀를 옭아매더니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 왔다. 이러다 질식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베르톨트가 입술을 떼었다.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키스를 못하는군.”

“그, 그게, 숨을, 어떻게….”

헐떡이는 아델라이드를 보고 베르톨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자꾸만 시선을 내리려는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이렇게 입술을 맞추었을 때는 코로 숨을 쉬어야지.”

그는 온몸이 나른해질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델라이드에게 키스했다.

아델라이드는 키스를 그렇게 오래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게 다양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또한 그가 말한 대로 코로 숨을 쉬어도 숨이 차다는 것도.

* * *

레니에는 장군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회의를 마쳤다. 내일 출발하기 전까지 진영 밖에 있는 동산으로 가서 각 소대별로 라술러를 캐라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레니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델라이드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막사를 나오자마자 그는 아델라이드의 손목을 덥석 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아델라이드는 잡힌 손을 빼려고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으나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목이 잡힌 채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폐하. 어디를 가시려고요?”

“라술러 캐러.”

“아! 제가 전에 많이 캐 왔습니다. 굳이 폐하께서 가실 필요까지는….”

“남으면 다른 이에게 주면 되지 않느냐. 가자!”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마구간 막사로 향했다.

이윽고 마구간에 도착한 베르톨트는 마구간지기 병사에게 자신의 애마 카를로스를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했다. 병사가 말을 가지러 간 사이 그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보며 상냥히 물었다.

“말을 탈 줄 아느냐?”

“아뇨. 타지 못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그의 눈이 유난히 다정하게 휘어졌다.

병사가 카를로스를 끌고 나오자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잡더니 안장 위로 훌쩍 올렸다. 너무나 쉽고 빠르게 올려 아델라이드가 거부할 겨를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앉아 있는데 베르톨트도 안장 위에 훌쩍 뛰어오르더니 아델라이드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앗, 이게 뭐야!’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을 황제 때문에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다. 행동은 매번 황제가 하는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 걸까.

“폐하. 전 걸어가도 됩니다만.”

“알아. 꽉 잡아. 이럇!”

다음 말은 없었다.

자신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인데 황제는 자신보다 말을 더 짧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무작정 말 위에 올릴 게 아니라 무슨 말이라도 하고 올리고, 그냥 말을 달릴 게 아니라 뭐라도 말해 주고 달려야 할 게 아닌가. ‘알아.’라는 한마디뿐이라니,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면서도 손길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고삐를 잡은 아델라이드의 양손 바로 옆에 커다란 손이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황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정수리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델라이드는 마치 황제의 품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를 받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에게선 묵직한 우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막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난 왜 이렇게 이 사람의 품에 있는 거지?’

그녀로서는 정말 이해 못 할 일이었다.

황제는 며칠 전 아델라이드와 알랭이 라술러를 캐러 갔던 그 언덕으로 카를로스를 몰았다. 걸어가면 꽤 걸리는 거리인데 말을 타고 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말을 멈춘 그는 아델라이드에게 닿아 있던 팔을 풀었다.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그녀는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훌쩍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아델라이드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신이 도와줄 테니 내리라는 의미였다. 그가 아델라이드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려와. 도와줄게.”

그의 저음이 공기를 타고 잔잔하게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카를로스 위에서 내려다본 황제는 햇빛을 받아 더욱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 빛나고 너무 아름다운 사람.

어쩐지 가슴이 아려 왔다.

황제의 팔이 아플까 봐 아델라이드는 얼른 안장에서 내려와 그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것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황제가 자신에게 애교 섞인 장난을 걸어오는 것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무심한 듯해도 그가 언제나 행동으로써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폐하는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라술러를 찾아볼게요.”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를 이끌어 커다란 바위 위에 앉도록 했다. 그는 마치 주인의 말을 잘 듣는 대형견처럼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바위 위에 앉았다. 아델라이드는 어쩐지 흐뭇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단단한 팔이 다가와 그녀의 팔목을 지그시 잡아당겼다. 의아한 얼굴로 황제를 보자, 황제가 그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조금 천천히 해도 돼. 와서 앉아, 에드가.”

그의 그윽하고 촉촉한 목소리는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던 그때와 같았다.

“폐하.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라술러를 캐고 가야 하지 않겠는지요?”

“넌 참…. 조금 쉰다고 어찌되지 않아.”

바위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지독히도 감미로웠다. 아델라이드는 그만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 사람은 어쩌자고 나를 이리 소중한 듯 대하는 걸까.’

처음 악몽을 꾼 밤 그녀를 안아 주고 달래 주었던 사람이 황제라는 것을 알았다. 오라비인 에드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황제의 손길이나 눈길, 목소리는 아델라이드를 꼼짝 못 하게 했다.

수에비 궁에서의 2년이라는 결혼 기간 동안 그녀는 여자로서 사랑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국왕과 관계를 맺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국왕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제대로 안을 수가 없었다.

삽입을 해도 금방 죽어 버렸고 어쩌다 가능해도 금방 사정했다.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니었다.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키스는 더더욱 한 적이 없었다.

국왕은 자신의 못난 점을 감추려 그 모든 것이 아델라이드의 잘못인 양 매질을 했다. 그와의 밤은 폭력과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달랐다.

아델라이드는 처음으로 황제의 품에 안겼을 때 남자로서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따뜻함을 먼저 느꼈다. 그녀의 아픔을 달래고 어루만져 주려는 그 온기에, 황제는 자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닿기를 원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징그럽지 않았고,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심지어 아델라이드가 스스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기까지 했다.

물론 반쯤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아침에 느꼈던 감정은 순수한 설렘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에게 호기심과 기대가 생겼던 것이다.

그녀는 생전 처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한 황제가 어려웠다. 지금도 자신을 이렇게 강렬하게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은 황제를 순간순간, 너무나 절실히 남자로 느끼고 있는데, 그는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 자신을 남자로 보고 있고 남자인 에드가에게 키스하기를 원한다. 그 갈증이 그의 눈빛과 입술, 아니 온몸에서 느껴졌다.

“에드가. 난 네가 신경 쓰여. 그것도 아주 많이.”

황제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조금 애달프게 웃고 있었다.

“폐, 폐하. 그건 제가 너무도 미천하고 불쌍하여….”

“아니! 아니지. 너도 알잖아. 너의 마음은 부정하더라도 나의 마음까지 부정하지 마라.”

“전 남자입니다. 어찌 폐하께서 남자를….”

베르톨트는 이마의 관자놀이 부근을 짚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곤혹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나도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갖는 건 처음이니까. 아니,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갖는 게 처음이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다리 위로 앉혔다. 갑작스럽게 끌어당겨진 데다가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가 느껴지자 그녀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폐, 폐하. 전….”

“안다. 네가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밤에 악몽을 꾼다는 것도, 너의 등에 있는 상처도… 보고 말았다.”

“…….”

황제가 알고 있었다는 말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베르톨트는 그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감은 두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어떤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너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안다. 그 시간을 감내해 낸 네가 정말 대견해.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나를 밀어내려고 하지 마라.”

“폐하. 전 그런 관심과 마음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건 받는 네가 단정 지을 게 아니라 주는 내가 결정하는 거지.”

베르톨트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나도 감정에 서툰데 넌 나보다 더하구나.”

흔들림 없이 향해 오는 그의 말에 아델라이드는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며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고개를 숙인 채 베르톨트의 어깨를 잡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폐하. 전 일개 시중 노예이고, 남자이고, 상처도 많습니다.”

“알아.”

아델라이드의 목소리는 북받치는 감정에 잠겨 들어갔다.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갑자기 이런 한적한 곳으로 데려와 고백한 황제를 보기가 당혹스러웠다.

그러다가 불쑥 화가 났다.

이런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고, 부끄럽고, 아파서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왔던 감정의 댐에 구멍이 뚫린 듯 말이 쏟아졌다.

‘알아? 당신이? 무엇을!’

“전 게이가 아닙니다!”

“알아.”

“전 당신이, 당신의 관심이 부담스럽습니다!”

“알아.”

“전 당신의 친절이 불편합니다!”

“알아.”

“전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입니다.”

“알아.”

“전 당신의 손길도, 시선도 싫습니다.”

“…….”

“당신의 목, 목소리도… 싫습니다.”

아델라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눈앞이 뿌예져 황제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거짓말.”

베르톨트가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줬다. 뿌연 시야가 맑아지며 베르톨트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아프게 웃고 있었다.

베르톨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또 다른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잡았다. 뒤통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녀의 얼굴을 베르톨트 자신의 얼굴에 바싹 가져다 대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뜨겁게 바라보았고, 가까이 다가가면 델 것처럼 달아오른 입술이 닿을락 말락 그녀의 입술 앞을 서성거렸다.

황제의 고백은 아델라이드에게 답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담아 둘 수 없었기에 말한 것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아델라이드를 그저 안고 역으로 위로까지 해 주었다.

황제는 천천히 생각하자 했다. 그저 이 설레고 간질거리고 애틋한 자신의 마음을 조금만 견디어 달라 했다. 그것까지 거절하지는 말아 달라 했다.

아델라이드는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 * *

내일 이른 아침부터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각 막사마다 행군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베르톨트는 세르비아 제국으로 돌려보낼 것과 이동 중 자신이 가지고 다닐 것 등을 나누고 챙기고 있었다. 그가 분류해 놓은 짐들 중에서 시중 노예인 아델라이드가 가지고 다닐 것은 수통밖에 없었다.

“폐하. 이건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아델라이드가 간이 침낭과 황제의 짐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톨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됐어. 이건 우마차에 실으면 된다. 행군이 고될 테니 되도록이면 몸을 가볍게 해야 해. 그러니 넌 네 몸만 잘 챙겨.”

녀석이 말을 탈 수 있다면 말을 내어 줄 텐데 못 탄다고 하니 걸어가게 둘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라술러를 찾으러 갈 때처럼 자신의 앞에 태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다른 노예나 병사들이 특정인만 편애한다고 불만을 품을 것이다.

그만큼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다른 이의 시선이 없을 때라면 몰라도 행군 중에 대놓고 녀석을 신경 썼다간 그 화살이 그대로 녀석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무리하게 녀석을 챙겨서는 안 되었다.

아델라이드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걱정되느냐?”

“아,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저… 다른 이가 걱정되어서….”

“누구? 그 소니아라는 시녀?”

“네….”

베르톨트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짐을 싸고 있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은 지금 녀석 걱정뿐인데 이 녀석은 다른 이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다니, 정말 괘씸한 녀석이다.

“그 시녀가 왜 걱정되지?”

황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델라이드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베르톨트는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도 나쁘다’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뿔난 표정에 아델라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대답했다.

“아, 그게…. 그녀는 다리가 좀 불편합니다. 그래서 오래 걸으면 아플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베르톨트는 어둠 속을 절뚝거리며 걸어가던 여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이 말한 대로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이긴 했다.

그래도 베르톨트는 개운치 않은 기분을 완전히 털어 버릴 수 없었다. 황제가 감당해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알면서도 어렵게 고백했는데, 그런 자신을 앞에 두고 자꾸 다른 이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베르톨트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자 아델라이드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다리를 저는 것은 저 때문입니다. 저를 도와주려다가 들켜서 인대가 잘렸으니까요.”

아델라이드는 그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베르톨트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에드가.”

황제의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가 아델라이드의 귓가를 맴돌았다.

“폐하. 제 얘긴 나중에…. 제가 좀 무뎌지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아델라이드는 물기 어린 눈으로 웃어 보였다. 베르톨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는 그날 밤도 베르톨트의 품에 안겼다. 오늘은 자신의 침대에서 자겠다고 했으나 황제는 당분간 이렇게 푹신한 침대는 구경도 못할 거라는 둥, 오늘이 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둥, 별별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며 그녀를 침대로 유인했다.

결국 그녀는 베르톨트의 뻔뻔한 유혹과 은근한 애교에 두 손을 들고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아델라이드를 안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느껴지는 포근함과 안정감이 좋아 아델라이드는 눈을 감고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에드가. 내일 하루 적어도 30킬로미터는 걸어야 돼. 오늘은 아무 짓 안 할 테니 어서 자.”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은 놓이고 안심하게 되었다.

“네. 폐하도 어서 주무세요.”

녀석은 여전히 대답 하나를 할 때도 신중하게 말을 골랐지만, 베르톨트는 그래서 더 기뻤다. 망설이면서도 자신을 내치지 않고 점점 받아들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 에드가. 도망가지만 마라. 내가 갈 테니.’

* * *

세르비아 제국군의 나팔 소리와 북 소리가 아침의 공기를 갈랐다. 제국군의 기합과 합을 맞춘 발소리는 땅을 울렸다.

하늘 높이 솟은 세르비아의 깃발이 선두를 장식했고, 그 뒤로 기수들이 움직였다. 다음으로 검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정복을 입은 황제가 말을 몰았다.

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아름다움이 제국군들의 뜨거운 충성심에 기름을 부었다. 황제의 사방에 포진해 있는 재상, 대대장, 장군들 역시 늠름한 모습으로 세르비아 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길고 긴 행군이 시작되었다.

아델라이드 역시 부지런히 걸었다. 하루에 도달해야 하는 거리가 있으니, 오래 걷는다고 해서 속도가 떨어져선 안 되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견뎠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신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아! 이렇게 3일 동안 이동한다고?’

지금도 힘들어서 이렇게 헉헉대고 있는데 더 걸으면 속도가 느려지고 뒤로 처질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에게 말을 타 보겠다고 할지 말지 고민했다. 황제의 시중 노예에게는 원래 말을 주니 지금 요구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말을 혼자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앞 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힘겹게 걸었다.

한편 말을 몰던 베르톨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행군 중에도 그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녀석을 찾았다.

그리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10미터쯤 뒤에서 사람들과 섞여 걷고 있는 녀석이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저릿해졌다.

녀석과 나란히 걷고 싶었고, 녀석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자신의 옆에서 걷는 게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뒤따르는 녀석이 가슴 아팠다.

문득 베르톨트는 녀석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도 하얬지만 더욱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걷고 있었다.

‘젠장!’

베르톨트는 레니에와 클리터스를 쳐다보았다.

“이제 점심때이니 이쯤에서 야영을 하지.”

“폐하. 조금 더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레니에는 예의 그 무심한 듯 냉소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무심한 놈! 넌 병사들이 힘들어하는 게 보이지 않느냐?”

황제의 타박이 이어졌다. 레니에는 보통 때 같으면 더욱 빨리 가라고 병사들을 몰아쳤을 황제가 웬일로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며 쉬었다 가자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클리터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말들도 목을 좀 축여야 할 것 같고요.”

클리터스의 말에 레니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황제의 명에 따라 세르비아 군은 적당한 곳에 짐을 풀고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식판을 받은 아델라이드는 카를로스에게 물을 주고 있는 베르톨트의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베르톨트는 식판을 들고 있는 아델라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 것은?”

“제 식사요?”

“그래.”

“전 저리로 가서 먹으면 됩니다. 어서 받으세요.”

“…에드가. 여기 앉아서 기다려.”

그는 한숨을 짓더니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델라이드는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시킨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식판을 들고 주저앉았다.

곧 베르톨트가 식판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직접 배식을 받으러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는 아델라이드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아델라이드가 의아하게 물었다.

“폐하! 왜 또 갖고 오십니까?”

“행군하는 동안 내 식사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러니 넌 너의 식사만 챙기면 돼.”

“어, 어떻게…! 그럴 순 없습니다.”

아델라이드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황제는 손에 든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아델라이드와 눈을 맞추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명이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기세에 밀려 아델라이드는 식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자신에게 명령하듯 차갑게 말했지만, 황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지 알 것 같아 눈을 마주하지 못하겠다.

“어서 먹어, 에드가.”

“…네.”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아델라이드는 목이 메어 왔지만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출발하기 전까지 조금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평소보다 빨리 밥을 먹은 아델라이드는 신속하게 소니아를 찾았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찾아다니다가 여자 노예들이 많은 무리에서 소니아를 발견했다.

“소니아!”

“에, 에드가!”

소니아를 보자마자 아델라이드는 그녀의 다리부터 살폈다. 그러자 소니아가 괜찮다며 방긋 웃었다.

“나도 힘든데 네가 괜찮을 리가 있어?”

“괜찮아, 에드가. 어느 장교님이 오시더니 나는 다리가 불편하니 저 짐을 싣는 우마차에 올라타라고 하셨어.”

“뭐?”

“그래서 지금까지 편하게 마차 타고 왔어. 내 다리가 불편한 걸 어떻게 아셨나 몰라.”

소니아가 배시시 웃었다. 아델라이드는 순간 이것이 황제의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자신을 향한 배려였다.

출발하기 직전, 베르톨트는 휴고에게 아델라이드와 같이 말을 타라고 명하였다. 휴고는 병사가 아니라 레니에의 비서관이자 세르비아의 중간급 관리였기에 일반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말보다 더 크고 훌륭한 말을 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휴고는 의외로 선선히 응했다.

레니에와 사촌이 맞구나 싶을 정도로 평소 레니에만큼 까탈스러운 휴고였기에 베르톨트는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면 황명이라며 억지로 밀어붙이려고 머릿속에 시나리오를 다 짜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 수고는 덜었지만 베르톨트는 내심 놀라워하며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아델라이드를 자신의 앞에 태우고 말을 몰았다. 아델라이드는 자세가 불편했지만 오전 내내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의 속도로 걸었던 것을 생각하면 투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휴고가 레니에와 사촌 간이고 후작가의 자제임을 생각하면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에드가 님.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아뇨. 전혀요. 그저 황송할 따름이에요.”

말이 움직일 때마다 안장 밑의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말 타는 것이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아델라이드는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말 타는 법을 배우리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이번 한 번으로 족했다.

“그런데 휴고 님.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네. 물으세요.”

휴고는 아무런 표정 없이 앞을 바라보며 대열에 맞춰 속도를 유지했다.

“전 시중 노예에 불과한데 왜 제게 존대를 하세요? 휴고 님은 후작가의 자제라고 알고 있는데요.”

휴고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습관이기도 하고, 말을 낮추면 상대방이 아니라 제가 낮아지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 그렇군요.”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는데 에드가 님께는 더욱더 반말이 나오지 않네요. 후후.”

휴고 패트릭 콩데 드 모르세르는 후작가의 차남이었다.

모르세르 후작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정열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휴고의 외가인 사르 공작가는 대대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성정이 특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르 공작가를 자주 드나들었던 휴고는 특히 사촌 형인 레니에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언제나 이성적인 레니에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처음에는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으나 레니에의 탁월한 지성과 지략은 노력한다고 해서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레니에를 추월하겠다는 마음은 버렸지만, 어느 순간 휴고는 자연스럽게 레니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성적임을 넘어서 냉소적이 되었고, 모든 이들에게 존대를 하는 레니에가 인상적이어서 휴고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존대를 하였다. 심지어 신분이 낮은 자에게까지 예의를 갖춰 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청소년기의 휴고는 그만큼 레니에가 멋있어 보였다.

아델라이드의 질문에 갑자기 지나간 일들이 휴고의 머릿속을 스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휴고가 작게 소리 내어 계속 웃자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질문이 그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시 쿡쿡거리던 휴고는 이내 큼큼 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죄송해요. 옛 생각이 나서….”

아델라이드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휴고가 다시 입을 떼었다.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아슬란어와 마이스터로어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라스문어까지 익히셨습니까? 그것도 라스문어의 그 어렵다는 고대어까지.”

아델라이드에게는 잃어버린 기억 속 지난 일이었다. 그녀는 오래전 기억을 되짚으며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델라이드는 휴고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냉소적인 성향의 휴고 앞에 앉아 긴 시간을 가야 한다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대화를 하자 의외로 잘 통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언어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끊임없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화가 발전했다. 휴고도 간만에 이렇게 관심사가 맞는 상대를 만나니 매우 즐거웠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말 속에 간간이 웃음이 섞여 나왔다.

베르톨트는 처음엔 녀석을 인정머리 없는 휴고랑 괜히 같이 말을 타게 했나 걱정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둘이 아주 쿵짝이 맞아 즐겁게 대화하면서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부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자신과 녀석은 저렇게 오랜 시간 화기애애하게 대화해 본 적도 없거니와 중간중간 터지는 녀석의 웃음소리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베르톨트의 유난히 발달한 청력은 이제 휴고와 아델라이드에게 집중되었다.

“레니에!”

황제의 부름에 뒤따라오던 레니에가 앞으로 말을 몰고 왔다. 황제를 보니 인상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휴고 녀석 말이야. 언제부터 저렇게 말이 많았지?”

레니에는 얼굴을 돌려 저만치 뒤에 있는 휴고를 보았다. 휴고는 아델라이드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레니에의 귀에는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레니에는 소드마스터인 황제의 귀에는 둘의 대화가 들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말했다.

“글쎄요. 원래 의미 없는 얘긴 하지 않는 녀석인데 신기하네요. 에드가와 잘 맞는 모양입니다.”

레니에가 보기에는 휴고의 얼굴에 진정으로 기뻐하는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요즘 휴고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너무 오랜 시간 전장에 나와 있나 싶어 걱정이 들던 차였다. 조만간 휴고를 먼저 제국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밝아진 휴고의 표정을 보니 레니에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휴고도 그렇지만 에드가도 즐거워 보이네요.”

레니에가 황제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황제의 굵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에드가가?”

“네. 둘이 잘 어울립니다.”

레니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글빙글 웃었다. 오늘따라 그 표정이 무척이나 얄밉게 보여 베르톨트는 레니에를 노려보았다.

‘잘 어울리긴 뭐가! 이 자식은 눈이 삐었군.’

갑자기 베르톨트가 카를로스의 고삐를 잡아당겨 방향을 거꾸로 틀었다. 그러곤 등자를 힘껏 차서 달려 나갔다.

황제가 방향을 바꿔 말을 움직이자 전군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 쏠렸다.

황제가 말을 멈춘 곳은 휴고와 아델라이드 앞이었다. 그는 말 위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내려라.”

황제의 단호한 명령에 휴고와 아델라이드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다가 곧 휴고가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황제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자네 말고 에드가 말이야.”

그제야 아델라이드는 안장에서 내리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한없이 거대하기만 한 말 위에서 어떻게 내려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휴고가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때 황제가 휴고를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나게 했다.

아델라이드는 안장 위에서 황제가 하는 양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주위 사람들도 황제가 하는 행동을 숨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아델라이드가 생각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손이 뻗어 와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잡더니 안장에서 땅으로 가뿐하게 내려놓았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카를로스 앞으로 끌고 온 다음 다시 그녀의 허리를 들어 올려 카를로스 위에 앉혔다.

주위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따라온 레니에와 클리터스는 황제가 하는 양을 어리둥절해하며 보고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은 더 붉어질 수가 없을 만큼 붉어졌다.

황제는 카를로스 위에 앉아 있는 아델라이드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훌쩍 몸을 날려 자신도 카를로스 위에 앉았다.

“자, 이만 출발하지!”

베르톨트는 고삐를 다시 고쳐 쥐고 행렬의 앞쪽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휴고가 잠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곧바로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행군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분위기는 전과 달랐다.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노예를 앞에 태우고 말을 몬다고 입을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앞에 태운 황제가 정말 미웠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고 있을지 뻔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은 황제의 시중 노예가 아니라 시침 노예로 순식간에 전락했을 것이다.

그 시침 노예를 황제가 너무 총애하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황제에게나 자신에게나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황제의 곁으로 온 레니에가 앞을 보며 말을 걸었다.

“폐하. 많은 이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드가를 아끼시는 것은 알겠으나 이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합당치 않아?”

“불손한 말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불손한 말이라…. 황제가 시중 노예를 특별히 총애한다는? 내가 동성애자라는 그런 말 말인가?”

“폐하.”

“맞지 않나.”

“폐하!”

레니에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델라이드는 레니에가 이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놀라고 긴장된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폐하인 거 아니까 그렇게 크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

베르톨트가 레니에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싸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동안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렬의 뒤에까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밤 야영을 하기 위해 제국군이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전군이 황제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내용인즉슨 황제는 동성애자이고, 황제의 취향은 아주 곱상한 소년들이며, 현재 황제의 시중 노예가 거기에 딱 들어맞아 열렬히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삼사오오 모여 불을 떼고 그 옆으로 둥그렇게 빙 둘러앉은 다음, 낮에 있었던 황제의 행동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세르비아 제국에서 동성애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주체가 황제라면 달랐다. 황제는 대를 이어야 하므로 동성애자여서는 안 되었고,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후사는 이어야 했다.

그렇지만 꽤 많은 병사들의 머릿속에 제국에서 가장 미남인 황제가 동성애자라면 그의 침대를 자신이 데워 줄 수도 있다는 기이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황제는 병사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이 소문은 여자 노예들 사이에 숨어 있는 위장 용병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 오늘 밤 전서조를 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런 그들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니아는 아까부터 이상한 기미가 보이는 앨리와 로레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둘은 어느 순간부터 둘이서 쑥덕거리기도 하고 둘이서만 킬킬대며 웃기도 했다. 그들의 눈빛이 수상쩍어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들에게서 조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쩌지? 아델라이드에게 알려야 하나?’

소니아의 본능이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열의 앞쪽으로 가서 아델라이드를 찾았다. 아델라이드는 잠자리에 들기 전 황제의 애마인 카를로스를 살펴보고 있었다.

“에드가!”

아델라이드는 소니아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소니아. 여기 웬일이야?”

아델라이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다행히 모두들 각자 할일을 하느라 그녀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소니아가 아델라이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에드가. 앨리와 로레인이 수상해. 남들 눈치를 보면서 둘이서만 얘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일이라도 꾸미는 모양이야. 오늘 밤 무어라 말하는데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어.”

“오늘 밤?”

“응.”

“설마 전서조를 띄울 건가? 어떤 정보를?”

아델라이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른 병사들과 함께 현장을 급습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둘이서 그들을 잡아서 끌고 가야 하는 걸까?

그런데 문제는 소니아와 둘이서는 힘에서 밀려 잡아서 끌고 갈 수가 없었다. 현장을 덮친다고 하더라도 용병들에게 무력으로 제압당할 가능성이 컸다.

무력도 있으면서 자신을 믿어 주고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 물음이 머릿속에서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떠올랐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다.

‘그 사람은 제국의 지존인데.’

아무리 자신에게 구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한 나라의 황제였다.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을 잡기 위해 노예인 자신과 같이 잠복하자고 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불경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적당한 누군가가 뇌리를 스쳐 갔다.

“그분이라면…, 그분이라면 도와주실 거야.”

“누, 누구?”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분. 클리터스 대대장님.”

물론 클리터스 또한 세르비아 군의 제1대대 대대장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자리에 있지만 아무래도 황제보다는 클리터스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클리터스라면 어떠한 의심 없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세르비아 최고의 무관이니 그깟 용병 두 명을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소니아. 넌 가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들은 아마 모두가 잠든 후에 움직일 거야. 그러니 나도 병사들이 잠든 후에 클리터스 대대장님과 함께 그리로 이동할게.”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돌려보내고 1대대 야영 취침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클리터스를 발견했다. 옆으로 다가가 클리터스를 조용히 불렀다.

“클리터스 대대장님.”

클리터스는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아델라이드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다가왔다.

“에드가. 웬일이지?”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자신에게 할 말이 무엇이던가.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시냇가에서 그 둘의 이야기를 들어 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소니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오늘 밤에 그들이 무언가를 할 것 같으니 현장을 급습해 그들을 잡아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위장 마력석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에드가. 그런 일이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난 군인이야. 그러니 그런 일은 내게 맡겨.”

“아, 아녜요. 저도 따라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들은 지금 모습을 여자로 위장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잡아서 취조를 한다고 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거예요. 그럴 바에야 현장을 잡아 자백도 필요 없게 하는 게 나아요.”

“그들이 여자로 위장했으면 그거야 벗겨 보면 되지 않느냐.”

‘역시 위장 마력석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아델라이드는 위장 마력석을 빼고 말하니 무언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지금은 그걸 말할 수 없었다.

“클리터스 님. 부탁이니 제발 그들을 잡는 것만 도와주세요. 그들을 용병으로 입증하는 것은 제가 할게요. 네?”

웬일인지 녀석이 다른 때와는 다르게 무척 불안해하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가 보자꾸나.”

두 사람은 한밤중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에게 오늘 밤은 노예들이 자는 곳에서 함께 자겠다고 말한 후 일찍 그의 곁을 빠져나왔다. 베르톨트는 녀석이 자신의 곁에서 자는 것을 피하는 게 서운했지만 낮에 그런 일이 있어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남들 눈치를 보면 앞으로는 어찌 하려고.’

바이온과의 전쟁만 끝나면 제국으로 돌아가 에드가를 노예의 신분에서 풀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맘껏 사랑하고 싶었다.

꼭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충족되는 사랑을, 그와 연애라는 것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많은 이의 시샘과 시선을 받을 텐데 벌써부터 저리 내외하니 그것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자신의 계획을 알면 정말 뒤로 넘어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베르톨트는 침낭 속으로 몸을 누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 * *

아델라이드, 클리터스, 소니아는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앨리와 로레인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둘은 서로 무어라 쑥덕대더니 아주 작은 종이를 꺼내어 거기에 무엇을 적었다. 그러더니 앨리라는 자가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곧 휘익- 하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고,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앨리가 손을 높이 들자 까마귀가 엘리의 팔에 앉았다.

“넌 훈련이 잘되어 있구나.”

앨리는 기특하다는 듯이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쪽 손은 펼쳐 손등 위에 먹이를 올렸다.

까마귀가 부리를 콕콕 찧으며 먹이를 먹는 사이, 로레인이 자그마한 종이를 돌돌 말아 까마귀의 한쪽 발에 묶어 고정했다.

“자, 오늘은 이것을 가지고 날아가는 거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잠깐 낄낄대더니 까마귀가 먹이를 다 먹자 날려 보낼 태세를 취했다.

그때 숲에서 웅크리고 있던 클리터스가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단검을 뽑아 까마귀를 향해 던졌다. 칼에 맞은 까마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너희들! 무얼 하고 있는 거냐?”

클리터스는 벼락같은 불호령을 내뱉으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순식간에 뽑아 손에 들었다. 앨리와 로레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크게 당황하여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노예로 위장하고 있는지라 몸에 검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대신 발목에 몰래 숨겨 뒀던 단검을 뽑아 들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클리터스를 노려보았다.

“넌 누구냐!”

“하! 나? 난 세르비아 제1대대 클리터스 부니에 대대장이다.”

클리터스가 가소롭다는 듯 말을 내뱉자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개 하급 병사도 아니고 대대장이었다. 어쩐지 검을 잡고 있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클리터스의 검이 허공에 몇 번 번쩍이고 두 사람의 손에 있던 단검이 땅에 떨어졌다. 앨리라는 자가 벌벌 떨며 말했다.

“저흰 그저 고향으로 저희의 소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고향에 가족들이 있는 아녀자들입니다.”

“웃기는군. 고향으로 소식을 보내는 데 전서조를 쓴다더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믿고 안 믿고는 대대장님 마음이나 저희 고향에서는 새를 훈련시켜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엘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델라이드와 소니아가 밖으로 나왔다. 소니아를 본 로레인이 놀라움으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너! 넌 소니아잖아. 네가 왜 여기에?”

“소니아?”

“그래. 그 절름발이 말이야.”

절름발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델라이드의 눈에 번쩍하며 불이 일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찌르고 빠져나간 듯 심장에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절름발이라고 말한 로레인 앞으로 가 그의 뺨을 휘갈겼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 아델라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쁜 새끼. 간자의 더러운 입에서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아델라이드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로레인이라는 자가 움찔거렸다. 소니아는 아델라이드 곁으로 와서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말에 타고 있는 레니에와 휴고, 그리고 서너 명의 병사가 아델라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니에는 무언가 심각한 일임을 눈치채고 말에서 내려 아델라이드 앞으로 다가왔다.

“레니에 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앨리와 로레인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시냇가에서 들은 두 사람의 대화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목조목 고하였다. 이번에는 마력석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클리터스는 이제야 완전히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앨리와 로레인은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두 사람이 우리 세르비아 군의 정보를 빼냈다는 것은 이 죽은 까마귀로 증명이 되지만 두 사람이 용병이라는 것,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병사 살인도 이들의 짓이라는 것은 증명이 되지 않는구나.”

레니에의 말에 앨리와 로레인은 땅바닥에 코를 묻을 기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앞다투어 레니에에게 변명했다.

“각하. 저희는 용병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무식한 아녀자이고 노예일 뿐입니다.”

레니에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가 병사들에게 고갯짓했다.

“저 두 사람의 몸을 뒤져 그 위장 마력석인지 뭔지를 찾아내어라.”

아델라이드는 레니에에게 위장 마력석은 신체의 변화를 가져오므로 신체와 닿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반드시 저 두 사람의 몸 어딘가에 마력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레니에는 아델라이드의 말대로 몸을 뒤져 볼 심산이었다.

레니에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앨리와 로레인에게 다가가서 몸을 수색했다. 곧 그들의 몸에서 노예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잘 가공된 목걸이가 나왔다.

그 목걸이의 중앙에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돌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아델라이드가 말했다.

“레니에 님, 이것이 마력석입니다. 마력석은 위장한 사람과 떨어지면 이렇게 보라색으로 빛이 납니다. 위장한 사람의 신체에 닿아 있으면 아무런 빛이 나지 않는 평범한 돌처럼 보이고요.”

고개를 끄덕인 레니에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거라.”

“아이고. 저희는 아녀자라니까요. 저 조무래기 녀석의 말을 어찌 그렇게 철석같이 믿으십니까?”

앨리와 로레인은 땅바닥을 치며 울고불고 하소연했다. 그 목걸이는 고향을 떠나면서 유일하게 가져온 값나가는 것이자 가문의 표식인데 어찌 그것을 가지고 마력석이니 뭐니 하느냐며 억울해 죽겠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아델라이드는 이렇게 하다가는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었다. 한숨 끝에, 돌연 아델라이드의 눈빛이 달라졌다.

옆에 있던 소니아가 달라진 아델라이드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팔을 붙잡았다. 무언가를 말리듯 고개를 젓는 소니아에게 아델라이드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소니아. 길게 끌 수 없어. 목격자인 너와 나만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 내가 알려 줘야지.”

이 일로 자신이 의심받을 수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간자를 계속 제국군 안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혹시라도 그들이 혐의를 벗고 소니아와 한 무리에 있게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결심을 내린 아델라이드는 입술을 굳게 한 번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레니에 님. 제가 저들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레니에, 클리터스, 휴고를 포함하여 모두가 놀라 일제히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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