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장. 황녀, 알렉시아 (16/39)

제15장. 황녀, 알렉시아

아른프리트는 가슴에 구멍이 뚫려,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엄한 기마대의 한가운데에서 붉은 머리를 날리며 아름다운 존재감을 뽐내던 루이사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전투 중에 많은 수의 바이온 병사들이 루이사가 있는 쪽으로 몰려갔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루이사의 주위에는 기마대가 있었고, 그녀 역시 세르비아 제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전사였다. 언제부터인지 그 붉은 머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잘 싸우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병사의 무리에 잠입해 있던 대여섯 명의 용병들이 루이사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벌떼가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루이사는 곧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였다. 그가 그저 일개 병사였다면 당장에 그녀를 찾아 나섰을 것이나, 그는 제2대대의 대장이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위치였다.

바이온 연합군의 머리를 쳐 그들을 무력화시켰고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황제의 군영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그게 군령이고 자신은 그 군령을 지키는 세르비아의 대대장이었다.

세르비아 제국 진영으로 향하는 내내, 아른프리트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몸은 황제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루이사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속에 있는 말을 뱉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가슴은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루이사!’

멀리서 모래 먼지가 일었다. 황제와 그 무리들이었다. 아른프리트는 눈이 커졌다. 황제가 친히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황제는 행렬의 시작부터 끝까지 달리며 병사 한 명 한 명을 눈으로 훑었다. 병사들은 말단 보병들까지 하나하나 살피는 황제의 행동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몇몇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인사를 받았다.

베르톨트는 행렬의 맨 끝에 있던 병사들에게 수고했다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맹렬히 앞으로 달려갔다. 아른프리트의 옆에 서서 그와 함께 나란히 진영 쪽으로 걸었다.

아른프리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베르톨트가 먼저 말했다.

“루이사는 걱정하지 마. 그녀는 자네보다 강하잖나.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거야.”

“폐, 폐하!”

황제의 입에서 루이사의 이름이 나오자, 아른프리트는 심장이 뻐근하여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황제였지만 그는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주군이었다. 황제의 말 한마디가 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바이온에 우리 정보원이 있으니 루이사의 소식을 곧 전해 올 거야. 납치를 했다는 것은 살려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야. 분명 저쪽에서 무언가를 요구해 오겠지. 그러니 어떻게 할지는 그다음에 고민하자고.”

황제는 신속하고 정확했다. 루이사의 납치 소식을 듣자마자 전서구를 띄워 바이온 내 정보원을 움직이도록 했다. 또한 세르비아 군 내에 있는 침투 공작 요원들을 바이온으로 출발시켰다.

아른프리트 곁에서 같이 말을 몰고 있던 레니에가 황제의 지시 내용을 이야기해 주자, 아른프리트는 황제의 탁월함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자네도 다쳤으니 어서 돌아가 치료를 해야지. 그래야 루이사를 찾을 것 아닌가.”

“바이온의 독화살이 스쳤는데 다행히도 알랭이라는 병사가 라술러로 응급 처치를 해 줬습니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렇군.”

“많은 병사들이 그 독화살을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라술러로 응급 처치를 했습니다. 이번에 라술러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살아남았으니 폐하의 시중 노예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른프리트는 진심이었다. 해독 약초인 라술러가 아니었다면 독화살을 맞은 병사들이 모두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죽어 갔을 것이다. 그 시중 노예가 아니었으면 병사들을 많이 잃었을 것이다.

또다시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떠올렸다. 아델라이드가 알랭과 라술러를 캐어 왔고 부대의 대장들에게 라술러 사용법을 알려 주기까지 한 덕분에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살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델라이드의 소중함을 느꼈다.

* * *

바이온 왕국의 북쪽. 안달루스, 바이온, 세르비아 3지역의 접경 지역에는 바오로 공작의 성이 있었다.

“각하! 세르비아의 붉은 전사가 왔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는 허리를 굽혀 가주에게 보고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너무나 하얘서 파랗게까지 보이는 피부에 가늘고 예리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얇은 입술 끝이 올라가며 비틀린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루이사 에리스타….”

10년 전에 보았던 그 탐스런 붉은 머리였다. 바오로 공작은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내 손에 들어왔는가. 너를 미끼로 그 젊은 황제 놈의 면상이나 제대로 좀 봐야겠군.’

“지금 알렉시아 황녀는 어디에 있는가?”

“루앙에 머물고 계신다 합니다.”

“길어 봐야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도착하겠군. 황녀에게 급보를 띄워라!”

남자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일었다.

“알렉시아 황녀에게, 3일 후 카롤링거 3세가 이리로 온다고 서신을 넣고 카롤링거 3세에게 보낼 전령도 준비해.”

“알겠습니다, 각하.”

기사는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바오로 공작은 몸을 일으키고 소매 끝을 가다듬었다. 목의 타이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걸음을 뗐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럼, 가 볼까? 붉은 여전사를 보러.”

안달루스 제국의 황제는 지는 태양과도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제국의 귀족 세력을 하나밖에 없는 알렉시아 황녀에게로 복속시키기 위해서였다.

회의는 안달루스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루앙에서 열렸다. 황실의 사람들과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황제의 동생 바오로만은 초대받지 못했다. 황제의 눈에는 그가 알렉시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만 비쳤기 때문이다.

귀족 회의를 마친 후 알렉시아는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할 참이었다.

“전하, 바오로 공작에게서 급보가 왔습니다.”

“바오로 공작이?”

알렉시아는 기사가 내민 서신을 건네받았다. 붉은 봉투에는 바오로 공작의 황금색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금색의 인장은 직계 황손들만 쓸 수 있다는 것을 바오로가 모를 리 없었다. 알렉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여간 무례하기 짝이 없군.’

안달루스 황제에게는 바오로 공작이 차기 황권을 위협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알렉시아에게 그는 매우 전략적인 상대였다.

이번 루이사 납치 건은 사실 알렉시아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었다. 그런데 타국을 끌어들이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던 바오로 공작이 웬일인지 선뜻 동의를 표했다.

아니, 동의하다 뿐일까. 황녀의 계략을 실현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기꺼워하는 듯해 보였다. 알렉시아는 뱀 같은 바오로 공작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신을 뜯어 본 알렉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3일 후 세르비아의 황제인 카롤링거 3세가 바오로 공작의 성으로 온다는 내용이었다. 알렉시아는 손을 올려 이마를 쓸었다.

‘카롤링거 3세. 결국 오는가!’

그가 온다.

아직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지만 안달루스와 세르비아는 암묵적인 적이었다. 그러니만큼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시아의 계산에 들어 있던 일이기도 했다. 그 붉은 머리를 구하러 황제가 직접 올 것이라고 그녀는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는데도, 알렉시아는 기쁘기는커녕 화가 치밀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카롤링거 3세의 곁에 있는 여자는 그 붉은 머리 루이사뿐이었다. 그렇지만 정인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것이 확실한데 왜 곁에 두는지 알렉시아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루이사가 황제에게 어떤 의미이건 간에 그의 곁에 그녀가 오랜 시간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그 사람은…!’

알렉시아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세르비아 진영.

저녁이 다 되어서야 바이온에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루이사는 대륙에서 최고로 은밀하면서도 잔인한 첩보 조직에 의해 바오로 공작에게 넘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바오로 공작은 그의 영지 내 동쪽 성에 있다고 했다.

바오로 공작의 동쪽 성은 말을 타고 하루 정도면 닿는 거리였다. 베르톨트는 요원들에게 즉시 바이온의 동쪽 성으로 가라고 명했다.

“폐하. 바오로 공작은 교활하지만 멍청한 자는 아닙니다. 그자가 다른 이도 아닌 루이사를 데려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분명 무언가를 요구해 올 테죠.”

레니에는 표정 없이 냉기 어린 미소를 날렸다.

“무언가를 요구해야지. 만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위험해.”

황제의 말에 아른프리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바오로 측에서 연락이 없으면, 모레 그자의 성으로 침투하여 루이사를 구출한다. 시간을 끌면 루이사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폐하! 제가 가겠습니다.”

아른프리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지만 베르톨트는 그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세르비아의 지휘관이기 때문에 군으로 회귀한 것이지, 일개 병사였다면 그는 분명히 루이사를 구출하러 갔을 것이다. 그의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마음을 아는지라 베르톨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 말에 이어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간다.”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건 안 됩니다. 폐하께서 직접 가시다니요?”

모두들 한마디씩 하며 황제를 말렸다. 아른프리트 또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지라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폐하. 제가 반드시 루이사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십시오.”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루이사는 내게 누이와 같아. 고집불통이고 간혹 말도 참 안 듣고 제멋대로지만, 내게 스스럼없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그러니 내가 그녀를 구하러 가는 건 자네가 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지. 안 된다고 하지 말게.”

황제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한 결심을 내비쳤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10년 전.

세르비아 왕국은 안달루스 제국으로 사신단을 파견했다. 10대의 소년이 왕으로 등극하고 처음으로 파견하는 사신단이었다.

사신단 파견은 제국과 왕국 간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관례였다. 안달루스 제국은 3년에 한 번씩 사신단을 보내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대륙에 하나뿐인 제국이 강요하다시피 한 요구를 세르비아 왕국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안달루스는 다른 주변국에도 이런저런 요구를 했고 내정에 간섭하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사신단에는 국왕인 베르톨트가 외무부 대신의 비서관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섞여 있었다. 베르톨트는 안달루스의 황실과 귀족들을 직접 보고 세르비아와 안달루스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이 젊디젊은 왕이 그야말로 칼을 빼 든 것이었다.

“프리트홀트 경.”

“예, 전하.”

“안달루스 황실 구성원 중에 쓸 만한 사람이 보이던가?”

“안달루스 황제는 무능함을 화려함으로 덮으려는 자이고, 황후는 외모밖에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황태자 중엔 쓸 만한 사람이 없고, 유일한 여식인 알렉시아 황녀가 영특하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렇다면 귀족들은?”

“크게 두 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황제의 동생인 바오로 공작파와 진보 세력인 웨일스 백작파입니다.”

“음…. 아직 차기 황제에 대해 논하기는 힘들겠군.”

“네. 현재는 그렇습니다.”

“아! 저녁엔 황궁을 나가 수도 뒷골목을 좀 보고 오겠네.”

“전하. 여기서 잠행을 나가신다고요?”

“나가서 직접 봐야지. 안달루스 민심이 어떤지 말이야.”

“위험합니다. 혹 누가 전하의 신분을 알고 해코지라도 하면….”

“아하하. 경은 나를 몰라?”

국왕은 이제 열일곱 살이지만 세르비아의 최연소 소드마스터이자 장래 최고의 무인이 될 실력자였다. 세르비아 황실 기사단장은 국왕의 무예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에게 기습을 받더라도 너끈히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도 전하는 세르비아의 현재이고 미래이십니다. 일부러 위험에 노출될 필요는 없죠.”

“경의 말도 맞아. 그래서 루이사랑 같이 갈 거야.”

“기사단 부단장 루이사 말입니까?”

“그 기사복을 던져 버리고 드레스를 입혀서 말이지.”

왕은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 소문난 말괄량이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는다고 생각하니 프리트홀트도 궁금하긴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루이사도 우리 왕국에서는 알아주는 기사잖아.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잘 알지만 나보다는 경 자신을 걱정하는 게 좋을 거야.”

청년 국왕은 아직도 여자들의 끈끈한 시선을 받는 이 마흔다섯 살의 재상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안달루스에 오기 전, 우연찮게 왕실 시녀장 안나가 프리트홀트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엄격한 그녀가 남자에게 관심을 준다는 것이 의외였는데, 그 대상이 프리트홀트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은 왜 재혼하지 않는 것인가?”

“전… 미숙한 사람입니다. 그땐 그저 일이 좋아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무감했습니다. 그래서 이혼도 당했고요.”

프리트홀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쓰게 웃었다.

“그래도 자식은 봐야 하지 않는가? 스트라우스 후작가는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하. 전하께서 스트라우스 가문의 존속까지 신경 쓰시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황송합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난 그대의 능력을 아끼고 사랑해. 그러니 그대의 주변이 편안했으면 하네.”

그건 왕의 진심이었다. 프리트홀트와 비교하면 한참 어린 왕이지만,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한 나라를 책임질 군주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다.

“후사가 없으면 똑똑하고 괜찮은 녀석을 양자로 들일까 합니다. 전 사실 딸이 좋은데 아무래도 가문을 이끌려면 사내 녀석이 더 좋겠지요. 폐하같이 영민하고 훌륭한 청년이면 좋겠습니다.”

프리트홀트는 베르톨트를 마치 아들 보듯 하였다. 엄연히 자신의 주군이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한없이 대견하고 대견한 청년이었다. 이런 청년이라면 아들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하하. 경 같은 아버지라. 내가 경의 아들일 수는 없지만 좋은 녀석이 나타나면 추천하지.”

“전하의 추천이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끝나 갈 즈음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왕은 노크도 없이 열린 문을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전하! 이 옷 꼭 입어야겠습니까?”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길게 내려뜨리고 육감적인 몸매를 하늘하늘한 드레스로 감춘 아름다운 여인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두 남자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옷밖에 없습니까? 정말이지, 이 무슨! 가슴은 왜 이렇게 부각시키는 건지, 원!”

베르톨트는 의자에서 일어나 루이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오늘 밤은 짐과 함께 데이트하는 연인 사이가 아닌가? 내가 아무렇게나 입은 여인과 데이트를 해야겠나?”

그는 웃음을 감춘 채 무표정한 얼굴로 루이사에게 말했다. 루이사는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표정을 얼른 누그러뜨리고 국왕이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흠, 흠. 전하께서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좀 불편을 감수하지요.”

루이사의 목소리가 주인의 꾸지람을 들은 충견처럼 서서히 잦아들었다. 왕의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생각보단 괜찮군. 자, 그럼 가 볼까? 레이디 루이사.”

루이사의 목이 길어지며 턱이 높아졌다. 잘 입지 않는 드레스 때문에 거동이 영 어색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엔 꽤 우아해 보였다. 그 모습에 프리트홀트는 웃음이 나왔다.

알렉시아는 오늘도 오라버니들이 다투는 소리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칠흑같이 검고 탐스런 머리카락 아래 초록색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이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알렉시아는 뭇 남성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그녀의 내부는 인간에 대한 가소로움과 멸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성정이 냉혹하고 정이 없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줄 몰랐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발아래 둔 지고한 신분 탓에 그러한 성격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항상 황제의 딸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그녀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알아서 기었다.

황궁에서 시중을 드는 아랫사람들에게도 지나치게 엄격하고 엄중했다. 속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매사 냉정하고 엄격한 그녀를 총명하고 공정하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작은, 그리고 일부러 드러낸 모습만을 피상적으로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윗사람이라고 하여 알렉시아의 마음속에서 다를 건 없었다. 무능력한 황제와 허영과 사치로 치장한 황후가 부모였다.

바로 위로는 능력도 없는 오라버니들이 황제의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으니 황실의 일원이라 하여 귀하고 존엄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모두가 그저 한심하고 우스운 존재일 뿐이었다.

알렉시아는 그날 밤도 전속 시녀인 마리와 함께 평민의 복장을 하고 궁 밖으로 나갔다. 매사가 무료한 그녀에게 그나마 활력을 주는 때가 이 시간이었다.

“전하. 이, 이러다가 황제 폐하나 황후 마마께서 납시기라도 하면….”

“소리를 낮추거라.”

알렉시아는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쓰며 코웃음을 쳤다. 감히 누가 자신을 밀고할 것인가. 그랬다가는 장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 또한 무사하지 못할 텐데.

황후를 닮은 알렉시아의 또렷하고 예쁘장한 이목구비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시간낭비였고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쩔쩔매는 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만한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수도의 가장 번화한 상점가로 들어섰다. 이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멋진 찻집과 고급스러운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꽤 규모가 큰 시장이 있었고, 시장의 상인들은 골목골목마다 재미난 이국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마리, 오늘은 저기로.”

알렉시아는 턱을 들고 저 멀리 시장을 가리켰다. 그러자 마리가 앞장서서 길을 내었다. 황녀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에는 진귀한 장식품이나 골동품을 파는 가게가 많았다. 상점 앞에 있는 좌판에는 세르비아, 수에비, 바이온의 다양한 물건이 있었는데, 특히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바이온의 장식품과 보석이 매우 인기 있었다. 황녀에게 이끌려 온 마리였지만, 그녀도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넋을 잃었다.

“이거 어때? 나한테 어울릴까?”

그때 좌판 끝에 있던 육감적인 미녀가 옆에 있는 청년에게 물었다. 밝고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알렉시아의 귀에 꽂혔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흘깃 본 알렉시아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어제 세르비아 사신단을 접견할 때 보았던 사람이었다.

너무나 잘생긴 외모 때문에 눈에 확 띄었었다. 그렇게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긴 게 처음이어서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알렉시아가 어딘가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마리는 알렉시아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도, 뭐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나 싶어 깜짝 놀랐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 좌판에 모여 있던 여인들 모두가 베르톨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들 속에서 베르톨트는 자신에게 유독 시선을 거두지 않는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로브 안으로,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아 내린 검은 머리와 자신을 홀린 듯이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안달루스 제국의 황녀 알렉시아였다.

베르톨트는 알렉시아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직도 좌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루이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일이 아주 재미있어지겠는걸.”

귓가에 닿는 베르톨트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루이사 역시 사신단 접견 때 보았던 황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루이사는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작게 말했다.

“전 뒷감당 못 합니다. 일을 저지르시려면 저는 빼 주세요.”

“후후.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릴. 일은 함께 저질러야 제맛이지.”

베르톨트는 루이사의 손목을 잡아끌고 안달루스의 황녀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베르톨트는 고개를 까딱하며 다른 이들이 들을 수 없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초록색 눈동자가 커지더니 그녀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황녀는 베르톨트의 소매를 잡아끌어 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시녀 마리와 루이사는 졸지에 두 사람을 따라 달리게 되었다.

마리는 어째서 황녀가 외간 남자의 소매를 잡고 뛰어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평소 예의범절과 격식에 엄격하던 알렉시아 황녀이기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숨이 차도록 뛰는 황녀를 베르톨트는 여유롭게 따라가고 있었다. 뛴다기보다는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마침내 둘은 한적한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알렉시아는 숨을 몰아쉬며 그제야 베르톨트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곧이어 마리와 루이사가 쫓아와 옆에 섰다.

“나, 나를 아는가?”

“제국의 유일한 황녀 알렉시아 에마 마리 율리아나 아니십니까?”

베르톨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본래 황가의 직계에게 인사할 때에는 고유한 수식어와 격식 있는 경어를 함께 쓰기 마련이었다. 알렉시아는 황녀를 지칭할 때 쓰는 비유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는 청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숨이 찬 건 자신뿐이었다.

“잠행을 나오셨습니까?”

“설마, 당신은….”

알렉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제야 기억이 떠오르는 척했다. 베르톨트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전 세르비아 제국 외무대신의 비서관인 베르톨트라 합니다.”

“아, 사신단 접견 때 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알렉시아는 애써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당신 같은 외모의 소유자를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 말은 꿀꺽 삼켰다.

알렉시아는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듣고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사람도, 이렇게 좋은 목소리도, 이렇게 남자다운 느낌도, 모두 처음 보고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접견 때 보고 놀랐던 외모는 그가 가진 전부가 아니었다. 잠시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태도와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이렇게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니.’

심장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시장에서 이 사람을 발견했을 때부터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괜스레 지그시 눌렀다.

“경. 죄송하지만 전 잠행 중이라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뛰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리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성 두 분이 다니시면 파리가 꼬이지 않겠습니까. 저랑 제 친우가 황성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호위를 해 드려도 될는지요?”

뒤에 서 있던 루이사가 희끅 하는 소리를 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건 예정에 없던 거잖아. 난….”

“예정에 없던 것이지만 이렇게 귀한 분을 만나게 되었으니 영광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모시자고.”

단호한 목소리에 말을 가로막힌 여자는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힐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알렉시아는 그런 남녀를 가만히 보면서 둘 사이가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연인인가 했는데 계속 보니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정말 막역한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다만 여자가 남자에게 순간순간 쩔쩔매고 남자가 가끔씩 여자에게 명령한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이 남자에게 붉은 머리 여자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두 분은, 연인인가요?”

알렉시아의 질문을 받은 베르톨트와 루이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베르톨트는 그저 상황이 우스웠고 루이사는 이런 질문을 하는 황녀에게 거부감이 들었다. 연인으로 위장하고 잠행을 나온 것이라 그렇다고 해야겠지만, 저 고까운 말투가 거슬려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실례가 아닌가요, 황녀님?”

뾰족한 기분이 드러나는 말투였다. 루이사의 기분을 알아챈 베르톨트는 그녀를 대신해 알렉시아에게 대답했다. 그는 알렉시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연인은 아니나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알렉시아의 입 끝이 살짝 떨려 왔다. 그녀는 이 남자에게 소중한 이성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거슬렸지만 곧 화사하게 웃으며 베르톨트의 옆으로 와 걸음을 함께했다. 그 뒤를 마리와 루이사가 따랐다.

알렉시아는 베르톨트의 곁에 루이사가 다가오는 것을 편치 않아 했고, 루이사는 황녀의 암묵적인 적의를 눈치채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알렉시아 황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거리의 풍경과 안달루스 제국민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알렉시아는 베르톨트와 자신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에 적당히 호응을 해 줬으며, 그것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 형식적으로 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베르톨트 님과는 대화가 잘 통해요. 우린, 꽤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아요.”

알렉시아가 수줍게 말하자 베르톨트가 피식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요? 저 같은 사람과 대화가 통한다고 하시는 것을 보니, 주변에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나 봅니다.”

“베르톨트 님이 어때서요?”

베르톨트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황녀님 주위에 사람을 만드세요. 그래야만 때가 왔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베르톨트 님이 제 사람이 되면 되지 않을까요?”

순간 베르톨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첩자가 되라는 겁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후일 타국에서도 저를 지, 지지해 주는 이가 있었으면 해서요.”

알렉시아가 손사래를 치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베르톨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그를, 알렉시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누가 봐도 나사가 한군데 빠진 것처럼 넋이 나가 보였다.

“전 황녀님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안달루스의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사람이 자신을 기억해 주었으면 했고,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것뿐이다.

세르비아의 사신단은 내일이면 돌아간다. 오늘 어떤 고리를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이 사람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저 추억만으로 남기기엔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다.

“베르톨트 님. 전, 전….”

알렉시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을 꼼지락대며 베르톨트의 발치만 내려다봤다. 베르톨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황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알렉시아 황녀. 난 그대를 지지하지 않아. 영원히 그럴 거야. 지켜보기는 하지. 그대가 권력을 잡는지 잡지 못하는지. 당신이 제국의 권력을 손에 넣는다면, 그때 다시 만나 이야기해 보자고.”

뒤에 있던 마리가 이 무슨 무례한 말이냐며 날뛰려 하는 것을 루이사가 가로막았다.

그러나 알렉시아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검푸른 눈동자와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붉은 입술을, 그저 홀린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 사람은 뭔데 나를 하대하는 거지?’

그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대하지 못했다. 어려워하고, 그러면서 부러워하거나 무서워했다. 그래서 자신도 그들을 우습게 여겼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을 알게 모르게 하대한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우스운 것은, 그것이 어색하거나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알렉시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 눈앞에 있던 잘생긴 얼굴이 뒤로 물러났다. 알렉시아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였다. 휙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첩하게 움직인 베르톨트가 날아온 단검을 맨손으로 쥐었다. 알렉시아는 놀라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루이사!”

“네. 알겠습니다.”

굵직한 한마디와 함께 베르톨트는 옷 속에 감춰 두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루이사 또한 허벅지에 숨겼던 검을 빼 들었다.

곧 복면을 쓴 열 명의 자객이 이들을 에워쌌다.

“누구냐!”

루이사가 단단하면서도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열 명의 사내 중 제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자가 킬킬대며 대답했다.

“이거, 황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리따운 기사와 아직 덜 자란 기사도 있었군.”

“하!”

루이사가 헛웃음을 날렸다. 열 명, 아니 백 명이 와도 베르톨트 한 명을 당하지 못할 것들이 까부는 모습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루이사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그러나 황녀를 지키기 위해 칼을 빼 든 것 같은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실 겁니까?”

루이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이 누군지는 알아야겠지. 난 그냥 그럴듯하게만 움직일 거야. 그댄 그대대로 알아서 해.”

“참 나, 원. 알겠습니다.”

“죽이지만 마. 남의 땅에서 문제는 만들지 말자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뒤로 물러난 알렉시아에게는 대화의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속닥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급박한 순간에도 두 사람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녀는 앞에 있는 이 잘생긴 청년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 목소리, 몸의 자태에서 그런 확신이 뿜어져 나왔다.

다만 자꾸만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루이사가 못마땅했다.

‘이 붉은 머리는 뭐야. 뭔데 저렇게 나대는 거야!’

알렉시아의 눈에서 표독스러운 적의가 뿜어져 나왔다. 절로 입매가 비틀어지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베르톨트가 루이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나서서 검을 휘둘렀다. 열 명의 사내들은 각자 흩어져 두 사람을 상대했다. 공중에서 검이 부딪히고 사내들의 신음이 들렸다.

사내들은 검이 부딪히는 순간 이 여자와 남자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 자신들에게 맞춰 대응하고 있었다.

특히 남자는 한쪽 손을 허리 뒤에 댄 채 한 발을 고정시키고 나머지 발만을 움직이며 이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행동반경이 2미터도 안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남자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자신들과는 달리 남자는 너무나 여유로웠다.

이쪽 분야에서 알아주는 베테랑인 자신들이 고작 남자 한 명과 이렇게 실력 차이가 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을 죽이지 않고 팔다리 여기저기에 가벼운 상처만을 내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복면의 사내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모두 후퇴해! 어서!”

그러자 루이사가 드레스 자락을 부욱 찢더니 대장인 듯 보이는 사내에게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었다.

그녀는 검 끝으로 사내의 허리를 얇게 베고는 곧바로 칼날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눈도 깜짝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루이사는 사내를 향해 방긋 웃은 후 베르톨트를 향해 소리쳤다.

“도저히 못 참겠어. 이제 끝내시죠!”

베르톨트가 다가오며 냉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보냈지?”

베르톨트의 몸에서 서슬 퍼런 검기가 피어올랐다. 복면을 쓴 사내들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삼켰다.

“너, 너, 뭐야? 너 뭔데, 이런!”

목에 칼이 겨눠진 자가 베르톨트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희들을 누가 보냈는지부터 말해.”

베르톨트의 입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먹이를 앞에 둔 흉포한 포식자와도 같았다. 사내는 그의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냥 죽여라!”

“말하지 않으면 그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얘기가 절로 나오게 될 거야.”

“하! 우린 의뢰자의 신분을 절대로 밝히지 않는다. 그게 이 업계의 기본이다.”

루이사가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 끝으로 귀 옆을 살짝 그었다. 그어진 선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으윽!”

“기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데리고 가서 조지는 게 어떨까요?”

루이사의 험한 말에 베르톨트가 혀를 차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아홉 명을 둘러보았다.

“이 녀석과 저 녀석을 데리고 가지.”

베르톨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검은 밤하늘을 가르며 기다란 장침이 날아왔다. 베르톨트와 루이사는 검을 이용해서 그것을 쳐 냈다.

곧이어 제법 많은 양의 장침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검으로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베르톨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서 푸르른 빛이 생겨났다. 검을 잡은 손에서부터 검푸른 오라가 피어오르더니, 곧 그의 검이 온통 검기에 싸이며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형태가 완전해지자마자 그는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그의 공격에 쏟아지던 침들이 방향을 잃고 그대로 우수수 떨어졌다.

“비겁하군!”

베르톨트는 침들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춤을 출 때마다 그 궤적 그대로 허공에 푸르스름한 빛이 그려졌다.

어둠에 가려 적의 실체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지붕 위로 튀어 올라 어느 한곳을 공격했다. 멀리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사가 주위를 둘러보니 자객들은 모두 장침에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알렉시아 황녀와 마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나 황녀와 마리가 놀란 것은 괴한들 때문이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아요. 그런데 베르톨트 님… 소드마스터이시네요.”

“네. 뭐, 그렇습니다.”

“베르톨트 님은, 세르비아의 군주시군요.”

루이사가 멈칫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들은 적이 있어요. 세르비아의 청년 왕이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고. 그리고 저분은 저를 계속 하대하시잖아요. 그게 왜 그리 자연스러웠나 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알렉시아 황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곧 기쁨의 빛으로 바뀌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군요, 저분.”

황녀의 시선은 베르톨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초점을 잃은 멍한 눈동자로 베르톨트를 보다가 갑자기 기이할 정도로 눈빛을 빛냈다.

섬뜩할 정도로 형형한 그 눈을 본 루이사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베르톨트 앞에서 수줍게 볼을 붉히던 황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렉시아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을 때는 그저 설레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압도적인 그 무엇, 바로 운명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운명이라는 놈이 온몸을 옭아매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얼마 후, 적을 뒤쫓던 베르톨트가 돌아왔다. 그는 황녀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루이사를 보았다. 베르톨트의 진하고 굵은 눈썹이 꿈틀하더니 곧 표정 없는 본연의 얼굴로 돌아왔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정중히 묻는 목소리에 알렉시아는 두 손을 올려 눈가를 훔쳤다.

“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베르톨트는 황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루이사를 바라보았다.

루이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알렉시아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저들이 사용한 무기입니다. 보신 적이 있습니까?”

화살촉처럼 생긴 그것은 독침의 일종이었다. 크기가 꽤 컸고, 멀리서도 정밀하게 조준하여 화살처럼 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니요. 본 적 없어요.”

“자객들은 황녀님을 노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끌고 가 자백을 받아 내려 하자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나 이들을 죽였습니다. 아무래도 자백을 못 하게 막은 거겠죠. 제가 끝까지 쫓지 않은 이유는, 아시겠지만 안달루스와 세르비아 사이에 외교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황녀님은 이제 돌아가세요. 저희들도 돌아가서 안달루스를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알렉시아의 시선이 베르톨트의 시선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 무언의 시선에 베르톨트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알렉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이 사람을 보내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전하.”

베르톨트를 최대한 부드럽게 불렀다. 몸을 돌리려다 만 그가 알렉시아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검기를 내보이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알아챘습니다. 전하가 세르비아의 국왕 전하라는 것을요.”

“그래서?”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냉랭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알렉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을 곤경에 빠뜨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때까지 신분이 노출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다만. 조건이 있나?”

베르톨트의 말끝에 비아냥거림이 걸려 있었다. 알렉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목소리에서 묘한 열기가 배어 나왔다.

“나중에, 나중에 제가 전하께 손을 내밀 때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옆에서 듣던 루이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황녀가 미쳤나? 우리 전하가 왜 너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하지? 이 구역의 미친년이 바로 저년이군.’

루이사는 속으로 거칠게 욕을 했다. 황녀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인지 자꾸 심사가 뒤틀렸다.

“그대의 청은 들어줄 수 없다. 난 일국의 국왕이야. 후에 그대의 청이 무엇일지 알고 덥석 손을 잡겠나.”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알렉시아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제가 차기 황제가 된다면 그때는 제가 내미는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황녀의 눈동자가 단호한 결의로 가득 찼다. 베르톨트는 그 단단한 초록색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황제가 된다면 일국의 군주로서 얘기하지.”

씨익 웃어 보인 그는 루이사에게 이제 가자고 눈짓했다. 그들은 알렉시아 황녀와 마리를 남겨 둔 채 그 자리를 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알렉시아의 눈에 밟혔다. 마리는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우두커니 서서 그곳을 바라보는 알렉시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전하.”

“마리,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입에 담으면 안 돼. 만약 그랬다가는 네가 나의 전속 시녀라도 널 살려 둘 수 없어.”

“예. 알고 있습니다. 이 목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린 밤공기를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아직도 미친 듯이 두근대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런 감정은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것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사람이 좋아. 저 사람을 갖고 싶어!’

어린 황녀의 마음에 열병 같은 첫사랑이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광기 같은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전하. 저 황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제가 보기엔 전하한테 한눈에 뿅 간 것 같단 말입니다. 저러다 정말 전하를 만나려고 황제가 되겠다고 날뛰겠어요.”

베르톨트가 키득키득 웃으며 한 소리 했다.

“황제가 어디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인가? 황녀는 지금 너무 세력이 없어. 그러려면 세력을 키워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잖아요. 더군다나 저렇게 생긴 여자는 성질머리가 더럽다고요.”

“그댄 왜 그렇게 입이 험한 거야!”

“아하하! 제가 무슨 레이디도 아니고, 전 기사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제 타입이 아니니까 굳이 신경 써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도 내 타입이 아냐. 그런데, 왜 난 아니지?”

“전하는 너무 잘생겼다고요. 전 너무 잘생긴 사람은 싫습니다.”

“잘생긴 사람이 왜 싫어?”

“재수 없어요!”

베르톨트는 루이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굳이 물어본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는 속으로 루이사의 연인이 될 남자에게 정말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눈이 멀어져 가는 황녀와 베르톨트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인영은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더니 복면을 벗어 던졌다. 안달루스 황제의 동생이자 제1 귀족인 바오로 공작이었다.

바오로는 어린 계집애 하나 해치우는 게 이렇게 힘이 들지 예상치 못했다. 모두 저 뜬금없이 나타난 남녀 때문이었다.

다행히 자신의 밀사들이 나타나 자백을 하려던 자객들을 모두 죽였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그 청년에게 끌려갈 뻔했다.

바오로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 붉은 머리 여자를 향해 독침을 날리려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 타는 듯 붉고 탐스런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아무런 권력도, 지위도 가질 수 없는 둘째는 보지 않았다, 언제나. 황태자였던 형만을 보고 또 사랑했다.

바오로는 언제나 어머니가 고팠다. 그리고 어머니는, 오늘 본 그 여자처럼 붉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 * *

아른프리트의 부대가 복귀한 다음 날 바오로 공작으로부터 전령이 왔다. 황제가 이야기한 대로였다. 전령은 루이사 에리스타를 되찾고 싶다면 카롤링거 3세가 직접 데려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폐하, 이것은 함정입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공작은 술수에 능한 자입니다. 어떤 비겁한 짓을 할지 모릅니다.”

장군들은 입을 모아 강력히 반대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는 천천히 눈을 떠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소드마스터다. 그쪽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무력으로 밀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수긍의 눈빛을 보냈다.

“독을 쓴다면?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어. 그러니 보통 독에는 당하지 않을 거야. 그것을 뛰어넘는 독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겠지.”

“바오로 그자는 그러고도 남을 자입니다.”

“알아. 그런데 말이야.”

레니에는 베르톨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군주였다. 무슨 말을 뱉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난 어제 분명히 루이사를 구하러 간다고 했다. 오늘이라고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황제가 장군들을 둘러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바오로 그자의 면상도 보고, 귀여운 술수를 부리면 좀 당해 주지. 너무 걱정들 말게. 아른프리트, 두 시간 후에 출발할 테니 준비하도록!”

장군들이 술렁거렸다. 우려의 눈빛을 보내는데도 베르톨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서 아른프리트의 짤막하고도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존명!”

아른프리트가 막사를 나가자 레니에가 말했다.

“제가 바오로 공작의 성까지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레니에를 돌아본 황제는 그의 눈동자에 깃든 불안함을 읽고는 피식 하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걱정돼?”

황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레니에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걱정이라뇨.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걱정하겠습니까.”

“레니에. 그리고 클리터스. 그대들.”

다시 엄중한 목소리로 말하는 황제를 향해 장군들이 고개를 숙였다.

“두 시간 후 아른프리트와 나는 오십 명의 기마 부대만 데리고 떠날 거야. 나머지는 내일 새벽에 바이온 왕궁을 쳐. 내가 바오로 공작을 만나고 있을 때 그대들은 바이온을 함락시키는 거지. 바오로 공작은 미처 바이온을 신경 쓰지 못할 걸세. 바오로 공작이 나와 루이사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면 그대들이 반드시 바이온 궁을 손에 넣어야 하네.”

클리터스와 장군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존명!”

“나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게.”

황제의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남은 자들의 귀에 내리꽂혔다.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찾았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막사 안에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막사에서 아델라이드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곳은 없었다. 모든 물건들이 녀석의 손길을 받아 반듯하고 깔끔했다. 막사 안의 공기에도 녀석의 호흡이 섞여 있었다. 무언가 포근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듯했다.

잠시 서성이던 베르톨트는 자신의 침대로 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오늘 새벽까지 녀석과 함께 누워 있던 곳이었다.

가만히 침대 위를 쓰다듬어 보았다. 이렇게라도 녀석을 느끼려는 자신에게 웃음이 났다.

그때, 휘장이 걷히고 아델라이드가 들어왔다. 침대 위를 가만히 쓰다듬던 베르톨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폐하, 오셨습니까.”

그녀는 베르톨트를 보며 작지만 환하게 웃었다.

‘요즘은 자주 웃어 주는군.’

웃음이 부쩍 는 그녀를 보고 베르톨트도 마주 웃었다.

“어딜 다녀오는 거지?”

“잠시 소니아를 보고 왔습니다. 진영을 구축한 뒤엔 보지 못해서요.”

“그렇군. 에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폐하.”

“이리 와.”

베르톨트가 팔을 벌리며 자신의 품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아델라이드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둘만 있으면 이제 스스럼없이 아델라이드를 껴안았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도, 간혹 저렇게 열망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곤 했다.

“어서. 황명이라고 해야 움직일 거야?”

베르톨트의 말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황제의 장난기는 때와 장소를 불문했다. 고개를 든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를 바라보며 그의 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품으로 날아온 아델라이드를, 마치 가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꼬옥 당겨 안았다. 그녀의 목과 쇄골 언저리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어째서 이렇게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는 거지?”

‘난 네가 왜 이렇게 좋은 거냐. 적진으로 가려고 결심했을 때 왜 네가 생각난 거지? 어째서 이다지도 네가 보고 싶은 거냐고.’

바오로 공작의 성으로 간다고 마음먹었을 때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 고운 눈빛과 예쁜 미소가 떠올라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하면서도 욱신거릴 정도로 아팠다.

아델라이드는 조심스럽게 팔을 올려 베르톨트의 허리춤을 잡았다. 그 어색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베르톨트가 소리 내어 웃으며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나머지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베르톨트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은 내려놓지 않았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의 팔이 그녀를 더욱 힘껏 감싸 왔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목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뒷머리를 그가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입술에 그의 뜨거운 입술이 내려왔다.

그의 혀가 입술 사이로 들어오자 그녀는 잠깐 움찔했으나, 점점 농밀하게 무르익어 가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숨이 가빠 올 때에야 입술을 뗐다. 잘게 몸을 떨며 밭은 숨을 뱉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드가.”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듯 지독히도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라이드가 살며시 베르톨트와 눈을 맞추었다.

“3일 정도, 어디 좀 갔다 올 거야. 군대도 내일 이동할 거고.”

아델라이드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와 다른 노예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어, 어디, 아니, 어째서 군대와 같이 가지 않으시고?”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라이드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영특하긴.’

“루이사를 구해 와야지.”

“어째서 폐하께서 직접 가십니까?”

“내 사람이니까.”

그의 단호한 말에 아델라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사람은 황제다. 이렇게 손수 나서서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알고 있는 황제라는 자리는 그러했다.

그런데 베르톨트는 자신의 사람이니 자신이 구하러 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균열이 일었다.

“나는 수년 동안 전쟁터를 떠돌았어. 그래서 막사가 황궁보다 익숙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목에서 얼굴을 들고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막사 안에 네가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고 설렜어.”

“폐, 폐하. 전….”

“네가 내게 미처 하지 못한 얘기들, 그건 돌아와서 들을게. 나도 네게 할 말이 있어.”

베르톨트는 그녀의 고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젠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일종의 압력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목마름을 아델라이드가 모를 리 없었다. 더 이상 감춘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처음엔 마냥 어렵고 불편하기만 한 황제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인지라 어떻게든 그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했다.

아니, 아델라이드 자신은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열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순간순간 느끼는 베르톨트의 시선에 잘게 몸을 떠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뜨거운 갈망과 열망을 온몸으로 알고 있었지만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세운 벽들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무시하려 했지만 기어이 가슴의 빈틈을 채웠고, 이제는 가득 차 넘쳐흐르고 있었다.

베르톨트만의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자신도 그의 감정에 대답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점점 더 선명해져만 가는 울림이 벅차 이젠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왠지 아련해 보였다.

“네. 말씀드릴게요. 저도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베르톨트가 그녀를 다시 강하게 안았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맞물려 마치 하나가 된 듯 뛰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을 시리게 울리는 그의 나지막한 저음이 그녀의 귓가를 채웠다.

“돌아올 때까지 다치지 말고 이곳에 있어. 이젠 네가 나의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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