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밀당, 그 미필적 고의
아델라이드는 순간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누, 누구세요?”
“놀라긴. 나야.”
아델라이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목에 걸린 마력석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마력석?”
“그래. 나야.”
“마, 말을 할 줄 알아?”
“알지. 아까 들었잖아, 그 마법사가 한 얘기. 마법사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곧이어 마력석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델라이드는 기분이 이상해져 눈썹을 찡그렸다.
“흐응. 꽤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조, 좋은 냄새요?”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려 코를 킁킁댔다. 그 모양새가 우스웠는지 목걸이가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진짜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고, 음, 네가 꽤 매력 있다는 말이야. 안팎으로 다.”
“마법사님은 사람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줄 아세요?”
“흠, 넌 정말 마력석에, 아니 나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이렇게 무식한 주인은 처음인데.”
무식하다는 말에 아델라이드는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해 주지 않은 에드가가 살짝 미워졌다. 물론 에드가도 몰랐겠지만.
“말씀해 주세요, 전부.”
“좋아. 일단은 네가 나의 주인이야.”
“주인이요? 제가요?”
“말, 끊을 거야?”
“아, 네, 알았어요. 계속하세요.”
잠시 샐쭉거리던 목걸이는 살짝 반짝이더니 곧 잠잠해졌다.
“나를 손에 넣었다고 다 주인이 되는 건 아냐. 발루아 가문의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그 사람 몸에 닿았을 때 내가 본능적으로 느껴. 그나저나 예전부터 계속 말을 걸고 있었는데 이제야 해방시켜 주다니. 몰라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렸어. 그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답답해하고 있었을지, 원.”
목걸이의 타박이 이어졌다. 아델라이드는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여하튼 나의 주인은 너야. 내가 너와 닿아 있는 동안에는 너의 모든 감각을 나와 공유하게 될 거야. 그러니 내 흉은 보지 않는 게 좋아. 대신 난 나의 주인이 된 네게 해가 되는 모든 것을 감지해. 한마디로 너를 지켜 주는 거지. 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주인이 된 것을 보니 앞으로 꽤 중요한 일을 할 모양이야.”
“그, 그럼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는 건…?”
“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야. 너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구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 계획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거라 언제,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
“그렇군요. 그런데, 마법사님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마법사님은 무슨. 내 이름은 머레인이야. 육체가 있을 땐 여자였는데 지금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야. 중성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중성이요?”
“나도 잘 모르겠어. 너무 오랫동안 육체 없이 살아 왔더니 성별이 의미가 없어졌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말하지 말고 생각을 해. 자, 생각만으로 나를 불러 봐.”
- 머레인?
- 그래, 잘하네. 이제부턴 이런 식으로 말하자고.
- 그, 그럼 제 생각도 다 읽을 수 있어요?
- 내게 말하려는 것은 읽을 수 있어.
아델라이드는 가슴을 쓸었다. 생각을 모조리 읽힌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 뭐야, 지금? 내가 부담스럽다는 거야?
- 아, 아니에요. 부담스럽다기보다 저의 생각을 다 읽는다는 건 무서…워요.
- 큭큭. 너 정말 재밌구나. 하긴 황제한테 하는 걸 보니 짐작은 했지만.
-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화, 황제라뇨?
- 봉인되어 있어서 말은 못 했지만 네가 항상 지니고 있었으니 다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그러니, 뭐 너랑 황제랑….
“그, 그만하세요!”
당황하니까 그만 말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황제와 있었던 일을 마력석이 모두 안다고 생각하니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한숨이 새어 나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 푸하하. 너 뭐 그런 일을 가지고 그래? 내가 곁을 지켰던 이들과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겪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까짓 애정 행각 정도로 뭘.
- 그, 그래도 그런 건 좀 모른 척해 주세요.
- 흠, 알았어. 순진하긴. 그런데 황제는 꽤 섹시하더라.
“머레인!”
아델라이드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 뒤 머레인의 중성적인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 *
외무부는 한 달 내내 정신없이 돌아갔다. 아니, 외무부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가 황제가 내린 과제를 처리하느라 조금의 여유도 없이 돌아갔다. 더군다나 외무부는 수장이 바뀌어 업무 파악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일의 양과 강도가 타 부처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베르톨트도 아델라이드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한 달 동안 겨우 대여섯 번 본 게 다였다.
그마저도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바쁘게 일하도록 지시했으니 무어라 불평할 수도 없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황제는 오늘도 집무실에 앉아 쉐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외무부의 상황을 보고 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명을 받은 쉐도우는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껌뻑거렸다. 결국 아델라이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서류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베르톨트는 한숨을 쉬었다. 서류를 앞에 두고 내쉰 한숨은, 실은 아델라이드 때문에 나오는 것이었다.
프리트홀트의 여식이 된 뒤로, 아니 정확하게는 외무부의 일을 하게 된 뒤로 아델라이드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녀가 이렇게 열심히 일할 줄은 몰랐다. 그것은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이처럼 쉐도우를 통해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으면 차도 한잔 같이하고, 황궁의 정원도 같이 거닐고, 식사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쉐도우의 보고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아델라이드는 무척 바쁘게 일하고 있어서 도무지 사람을 만날 틈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베르톨트는 슬며시 불안해졌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델라이드가 자신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했다.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 마음을 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멀어지면, 겨우 자신에게 열었던 아델라이드의 마음이 다시 닫힐까 봐 걱정됐다.
“폐하.”
베르톨트의 생각이 쉐도우의 목소리에 끊겼다. 황제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 님께서 서신을 주셨습니다.”
“모습을 들켰나?”
“아, 그게, 어찌 아셨는지 저를 부르시더군요. 기척을 들킨 것도 아닌데…. 제가 계속 몸을 드러내지 않자 제 쪽을 보시면서 이 서신을 폐하께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베르톨트는 서신을 받아 들었다. 봉투를 열어 보니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가 보였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폐하와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당신의 아델.]
며칠 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안과 초조함이 싹 달아났다. 서신에 방긋 웃는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참으려 해도 웃음이 비실거리며 비집고 나왔다.
‘그대는 타이밍도 끝내주는군.’
마냥 헤실헤실 웃는 황제를 본 쉐도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황제는 황실의 최고 시종장 올란도를 불렀다. 조금 살집이 있는 몸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올란도는 이미지 그대로 황실의 수많은 시종과 시녀들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 엄격한 황제도 올란도에게는 퍽이나 너그러웠다.
“올란도. 오늘 저녁은 무엇이지?”
“루앙에서 올린 해산물들이 있어 준비하고 있습니다. 따로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음, 해산물이라. 일단 메인 디쉬는 그렇게 하고 디저트를 좀 다양하게 준비해 줘.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아! 그리고 2인분으로 하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올란도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분이 매우 중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
서신을 전달하기 한 시간 전. 아델라이드는 바쁘게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 아델라이드.
- 네.
- 넌 그 서류가 계속 눈에 들어오는 거야?
- 네?
- 으이그. 둔탱이. 벌써 며칠 전부터 황제의 그림자가 와서 너를 살펴보고 가잖아
- 그림자가요?
- 그래. 너, 나를 목걸이로 달고 다닌 후부터 한 번도 황제를 보지 않은 거 알아?
- 그, 그랬나요? 일이 많아서.
- 답답하다, 정말. 황제는 이렇게 둔한 너랑 무슨 연애를 한다고.
- 머레인….
아델라이드는 입을 살짝 삐죽였다. 살면서 둔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황제를 만난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건 황제의 명이기도 한데 말이다.
- 황제가 안달이 나니까 자꾸 그림자를 보내는 거잖아. 저 그림자라는 녀석, 꽤 능력이 쓸 만한가 봐. 처음엔 나도 눈치채지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매일 오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 폐하가, 하아….
- 오늘은 황제를 보러 가. 네 덕에 나도 그 잘난 남자 얼굴 좀 보자.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베르톨트를 만나 얘기를 나눈 지 꽤 여러 날이 지난 것 같았다.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외무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황제 덕분이니 능력을 입증해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냐는 타박을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허투루 했다가는 황제의 명성에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르톨트는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인 프리트홀트에게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아델라이드는 어서 빨리 제 몫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델라이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서류에서 시선을 뗀 프리트홀트가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니에요. 잠시…. 저, 후작님.”
프리트홀트가 미소 띤 얼굴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요?”
“외무부 일을 말하는 거니?”
“네. 제가 비서관으로 있어 후작님께 누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휴고 님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휴고 님은 타 부서와의 공조도 무척 순조롭게 진행하시고 자료를 검토하는 것도 빠르고 정확해요. 하지만 저는 모든 게 쉽지 않아요. 아! 물론 전 이 일이 무척 맘에 들어요. 그래서 지금보다 잘하고 싶어요….”
후작이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넌 무척 유능하단다. 내 딸이어서가 아니야. 처음에 뒷말을 하던 이들이 왜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하니? 그들도 너의 능력과 성실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휴고는 스스로의 강점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 너도 그렇단다. 네가 외교 문서를 취합하고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흠잡을 데가 없어. 게다가 외국어에도 능통하잖니. 네가 있어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들이 얼마나 수월하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난 아름답고 훌륭한 딸뿐만 아니라 유능한 비서관도 두고 있는 셈이지. 난 네가 자랑스럽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지켜본 아델라이드는 정말 유능했다. 조용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그녀가 후작은 놀라웠다.
보통의 관리들이 이 정도 일을 해냈다면 생색내기에 바빴을 것이지만 아델라이드는 그런 것이 없었다. 회의 때도 그랬다. 가만히 지켜보고 기록만 하는 줄 알았는데, 보고서에 적어 놓은 의견을 보면 그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프리트홀트는 그런 아델라이드가 마냥 기특하고 예뻤다. 그리고 이런 아이가 자신에게 딸로 왔다는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감사해요.”
아델라이드의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자랐던 그녀는 아버지의 울타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프리트홀트 후작이 아버지가 된 후부터는 커다란 울타리가 자신을 지켜 주는 것 같아 든든했다. 에드가를 생각하면 조급해지긴 했지만 프리트홀트를 생각하면 훈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너의 아비다. 그러니 이젠 답답하거나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어려워 말고 말하렴.”
아델라이드에게 프리트홀트의 진심이 오롯이 전해져 왔다. 아델라이드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후작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 이 사람 괜찮네.
머레인이 반짝이며 말했다.
- 거봐. 이 사람도 네가 잘 해내고 있다잖아. 그러니 황제에게도 짬을 좀 줘. 그래야 연애가 문제없이 진행되는 거야.
- 그런 것도 알아요?
- 나 참. 내가 육체가 없어서 그렇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연애를 지켜봤는지 알아? 그러니 내 말 들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 용지를 찾았다. 그녀는 그림자에게 줄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 * *
프리트홀트는 혼자 퇴근하고 있었다. 황제와의 저녁 식사 때문에 아델라이드가 다시 궁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근래 아델라이드가 황제에게 무척이나 소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두고 둘이서만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서운했다. 그러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에 굶주렸냐는 생각이 들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후작님.”
프리트홀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황실 최고 시녀장 안나가 서 있었다.
안나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그 특유의 근성과 노련함으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지금의 자리에 오른 여자였다.
젊었을 때 혼자가 된 안나는 매우 오래전부터 후작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신분부터 현재의 위치까지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였다.
프리트홀트는 안나를 보자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최고 시녀장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이것, 아델라이드 님께서 후작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프리트홀트는 안나가 건네주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의아해하는 그의 눈빛을 보고 안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셰프가 만든 오늘의 후식인데, 폐하께서 지시하신 거라 꽤 신경 써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델라이드 님이 후작님도 맛보셨으면 하시기에 제가 조금 포장해 보았습니다.”
프리트홀트는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청초하고 품위 있는 안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더니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폈다.
“그럼 후작님, 살펴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시녀장.”
안나의 가슴이 두근두근 두방망이질을 했다.
몸을 돌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프리트홀트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베르톨트는 애피타이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다만 촛불에 일렁이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테이블이 크지 않아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애피타이저를 먹고 있던 아델라이드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엄한 냅킨만 쥐었다 폈다 했다. 테이블에 앉은 후로 황제는 별말이 없었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점점 더 불편해졌다.
“우리, 얼마 만이지?”
드디어 그가 입을 떼었다.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조, 조금 되었죠.”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도 표정 없는 눈동자도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군. 그만큼 오래되기도 했다는 말이고.”
아델라이드가 황제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저 남자 화났다, 화났어.
그때 머레인이 속삭였다. 아델라이드는 흠칫 놀랐다.
- 조용히 하세요. 제발.
- 싫어.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고. 남자를 이렇게 방치했으니 화날 만도 하지.
“아델라이드.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거지?”
“생, 생각이라뇨? 그냥 폐하께서, 기분이 언짢아 보이셔서.”
“맞아. 사실 그래. 그대 때문이지.”
아델라이드가 아, 하며 탄식 어린 한숨을 쉬었다. 베르톨트는 포크를 접시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난 가끔 전장에서의 그대가 그리워. 우리 둘만 있던 그 공간에서의 그대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황제가 손깍지를 끼더니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을 펴 턱을 괴었다. 그의 느른한 눈빛이 아델라이드의 청회색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 밤, 자고 가지 않을래?”
아델라이드는 너무 놀라 숨 쉬는 것도 잊어 버렸다.
- 오! 직진남! 완전 내 취향인데. 대답해, 그러겠다고. 어서 대답해.
머레인의 목소리에 아델라이드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무슨 의미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무슨 의미이신지….”
“말 그대로야. 그대를 안겠다는 게 아니라, 아니지, 안고 싶은 건 맞아. 하지만 말 그대로 안고만 있겠다는 거야. 막사 안에서는 종종 내 품에 있었잖아. 그대는 아무렇지 않은가 보지? 난 가끔 허전해.”
그는 아델라이드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슬며시 달아올랐다.
“저, 저도 폐하가 그립습니다. 그렇지만….”
“그럼 됐어. 오늘은 자고 가!”
아델라이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동안 마음 한편에 고이 모셔 두었던 그 설레는 감촉들이 살아났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황제의 맨가슴과 그의 탄탄한 몸이 떠올랐다.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 너, 왜 그래?
- 뭐, 뭐가요?
- 심장이 너무 빨리 뛰잖아.
- 폐하랑 그냥 자는 건, 쉽지 않아요.
머레인이 큰 소리로 웃어 댔다. 황제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델라이드는 마력석의 웃음소리 때문에 어깨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 그냥 자 버려. 황제도 원하잖아. 뭐가 문제야?
- 아,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 아이구. 그게 준비가 필요한 건가? 정말 답답한 아가씨구먼.
가뜩이나 앞에서 진득하게 쳐다보는 남자 때문에 얼굴도 들지 못하겠는데, 시끄럽게 울려 대는 머레인의 수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이봐. ‘네’라고 대답하고 어서 황제를 따라가.
- 하아, 정말. 시끄러워요. 좀, 조용히 있어요.
- 아이고, 완전 답답이구먼.
- 진짜 누가 답답이라고!
- 너 말이야. 여기서 나랑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 또 더 있어?
- 당신은! 당신은 어떻고요?
- 난 뭐!
아델라이드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음란마귀 같으니!”
냅다 소리를 질러 버린 후, 아델라이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레인에게 하려던 말을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어 버린 것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베르톨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나한테 하는 소린가?”
황제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매를 씰룩였다.
“폐, 폐하. 그런 게 아니오라, 그러니까….”
- 죽었다.
- 하아, 정말. 그러게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아요.
아델라이드는 울상이 되었다.
“폐하. 그러니까 그게, 제 머릿속에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폐하의 품에서 안겨 있기만 할 수 없을 거 같아, 그래서….”
“됐어, 아델라이드. 나 음란마귀 맞잖아. 밤낮으로 그대를 어찌해 볼 궁리만 하고 있으니. 그대가 이리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폐하. 그게 아니라….”
“오늘은 그만 가도 좋아, 아델라이드. 올란도!”
올란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밖에 누가 있는가.”
“기사단장 아른프리트 님이 계십니다.”
“아델라이드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아델라이드. 조심히 돌아가시오.”
돌아 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아델라이드는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아델라이드는 그길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프리트홀트는 아델라이드가 예상보다 일찍 귀가한 것을 보고는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우울하고 불안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돌아온 그녀는 바로 이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니아가 살펴보러 왔지만 무어라 말을 할 수도 없어 그저 괜찮으니 어서 가서 쉬라고만 하였다. 아델라이드는 머레인이 괘씸해서 목걸이도 목에서 풀어 놓았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어떻게 그 순간 그런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
이불 속에서 베개를 팡팡 쳐 댔다. 그러다가 문득 이불을 젖혀 테이블에 올려 둔 목걸이를 가져와서는 목에 걸었다.
- 아주 재미있으시겠어요. 이제 어째요?
- 그러게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어?
머레인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델라이드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걸었다.
- 생각해 봐요. 폐하의 기분을 풀어 드려야 해요.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 방법이 있긴 한데….
- 있어요? 어떤?
- 네가 직접 가서 사과하는 거지. 내가 데려다줄 수도 있고.
- 당신이? 어떻게요?
- 이거 왜 이래. 내가 이래 봬도 꽤 짱짱한 마법사야.
- 그, 그럼 데려다줘요. 지금 당장요.
* * *
목욕을 마친 베르톨트는 머리를 말리고 시종장 올란도가 올린 와인을 음미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떫으면서도 싸한 맛이 그런대로 즐길 만했다.
그는 식당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델라이드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말한 ‘음란마귀’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했다.
아델라이드가 마력석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했을 때에 이미 눈치를 챘다. 그는 그 마력석이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델라이드와 만난 후 그는 곧바로 마법사를 불렀었다. 마법사는 아델라이드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신 벨라루아를 찾게 되면 꼭 알려 주겠노라고 마법사에게 약조했다.
그 마력석의 봉인을 해제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쉐도우의 기척을 알아낸 것도, 아델라이드와 단둘이 대화하는 동안에 어쩐지 한 사람이 더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것도 그 마력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 마력석과 대화를 하는 건가?’
식사 내내 아델라이드의 표정이 자꾸만 바뀌는 것도 수상했다. 더군다나 마력석이 빛나면 어김없이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곤 했던 것도, 베르톨트는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베르톨트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자신도 섭섭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헤어지기 전 아델라이드는 정말 어찌할 줄을 몰라 울상을 지었다.
베르톨트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젠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다.
손잡이를 잡아당겨 창문을 닫았다. 그 후 잠시 미동도 않던 그가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별안간 손에 쥐었다.
“누구냐!”
- 우와. 이 남자 정말 대단하네. 내 기척을 알아냈어.
머레인이 중얼거리며 아델라이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델!”
후드가 달린 긴 망토를 둘러쓴 아델라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어떻게, 여기에?”
황제는 할 말을 고르는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사실 그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에 힘을 준 것이었지만, 아델라이드의 눈에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페하. 놀라지 마세요. 제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마력 목걸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아까 그, 음란마귀라고 말했던 것을 사, 사과드리고 싶어서예요.”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가 예전 라술러 일 때문에 노한 것을 빼고는 자신에게 이리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이 떨려 와 손을 꽉 쥐고는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폐하. 이 마력석에는 마법사의 영혼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마력석의 주인이 되면 교감이 가능해져요. 오늘 제가 말한 그 음란마귀라는 말도 실은 폐하가 아니라 이 마력석에게 한 말이에요.”
어쩐지 답답한 마음에 후드를 벗었다. 그녀의 금발이 촛불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일렁거렸다.
“이 마력석은, 아니, 이 안에 들어 있는 마법사는 머레인이라는 사람인데 입이 좀 거칠어요. 그래서 조금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그만 밖으로 말이 나온 거예요.”
베르톨트는 더 이상 표정을 꾸밀 수가 없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그녀의 맨발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후드 안에는 잠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정도로 그녀는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아델. 이리 와.”
베르톨트가 굵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델라이드는 두 팔을 활짝 펼친 베르톨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자 베르톨트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델라이드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델. 내가 장난이 지나쳤던 것 같군.”
“네?”
“우선 이 목걸이를 벗고 얘기할까? 난 누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게 영 이상해서 말이야.”
“아, 알고 계셨어요?”
베르톨트의 목 깊숙한 곳에서 웃음소리가 울렸다.
“나를 아직도 그렇게 모르는 거야? 난 그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그가 그녀의 목에서 목걸이를 풀었다. 머레인이 싫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라이드는 피식 웃음이 났다.
“이 목걸이가 자꾸 반짝이는데 무어라 하는 건가?”
“떨어지기 싫다네요.”
“그대랑?”
“아뇨. 머레인은 저보다 폐하에게 관심이 많아요. 저와 닿아 있어야만 폐하의 말을 들을 수 있거든요.”
“그렇군. 거참…. 그대를 지켜 주는 것이라기에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는 못하겠지만, 나와 둘이만 있을 때는 되도록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아델라이드가 순순하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베르톨트는 머레인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달처럼 하얗게 빛나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그녀의 동그란 뒷머리를 쓰다듬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받쳐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급했나 봐. 이런 차림으로 오고.”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아델라이드가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도 이렇게, 나의 침실로.”
아델라이드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베르톨트의 검푸른 눈동자 안에 짓궂은 욕망이 일렁였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그녀가 몸을 뒤로 빼려고 뒤척였다.
“늦었어, 아델.”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열리고 축축한 살덩이가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아델라이드의 두 손이 베르톨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손바닥에서 베르톨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으응….”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뭉개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망토가 흘러내리며 얇은 잠옷 안의 매끈한 피부가 드러났다.
아델라이드가 가느다란 목을 뒤로 젖혔다. 이내 베르톨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턱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빨갛게 부어 오른 아랫입술로 올라왔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비틀며 숨을 할딱거렸다.
“하아, 하아.”
남자를 부추기는 소리였다. 베르톨트는 달아나려는 얼굴을 잡아와 귓불을 물고 귓속으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자극하지 마, 아델.”
베르톨트의 거친 숨결이, 진득하고 축축한 입술과 혀가 그녀의 귓불 아래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애처롭게 뛰고 있는 혈관께를 좀 더 강하게 물고 빨아들이자 아델라이드의 손이 그의 팔을 꽈악 붙잡았다.
그녀의 무릎 뒤로 손을 넣은 베르톨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침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폐, 폐하.”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어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구릿빛 단단한 가슴이 보였고, 그 위로는 입을 굳게 다문 남자의 강인한 턱이 보였다.
움직일 때마다 비누 냄새와 함께 남자의 관능적인 체취가 풍겼다. 아찔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자신만큼이나 얇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베르톨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옆으로 바짝 다가와 누웠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동그란 이마부터 오똑한 콧대, 통통한 입술을 훑었다.
상반신을 조금 일으킨 그는 미친 듯이 맥박이 뛰고 있는 여린 목을 부드럽게 핥다가 키스를 퍼부었다.
“흐으윽!”
그녀가 우는 듯 신음했다. 남자의 손이 얇은 잠옷 위로도 여실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둥그런 가슴을 쥐자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거친 손길이었다.
커다란 손이 둥그렇게 휜 등을 훑고 내려와 허리를 쥐었다. 그의 얼굴이 가슴 사이를 지나 배꼽으로 점점 내려갔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그의 숨결이 너무 뜨거워 델 것만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찌르르 퍼지는 것을 느꼈다.
“빌어먹을!”
베르톨트가 입술을 짓이기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잠옷 사이로 키스를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 미친 듯이 움직이고 싶었다. 해소할 수 없는 갈증 때문에 온몸의 감각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대의 냄새가, 이 감촉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안아 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몸이 이 모든 농밀한 감각을 더 알고 싶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베르톨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커다랗게 들썩거리는 그의 어깨를 보니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폐하, 전 괜찮아요.”
또다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깊은 곳에서 울렸다. 언제 들어도 참으로 기분 좋은 소리였다.
“내가 안 괜찮아. 미칠 정도로 그대를 안고 싶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참고 있는 거야.”
자신의 상처가 그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했는데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오로지 그녀만 원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배려해 주는 그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대가 남자일 때도 그랬지만 여자가 된 그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면 좋겠지만 다른 녀석들 눈에도 그리 보이니, 그게 문제야. 더군다나 그대가 나 말고도 관심을 보이는 게 새롭게 생겼잖아. 일을 질투할 수도 없고…. 난 점점 속 좁은 남자가 되어 가고 있어.”
베르톨트가 그녀의 목과 쇄골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그의 등을 살살 쓸었다. 예전에 막사에서 하던 그대로였다.
“폐하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에요. 그건 아세요?”
“알아.”
“그런 분을 두고 제가 어찌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가 있겠어요?”
그가 조금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목 언저리에 퍼졌다.
“이거…, 어디서 듣던 말 같은데?”
예전 전장에서 그가 아델라이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델라이드도 자그맣게 따라 웃었다.
“폐하가 저를 후작의 딸로 만드셨고, 폐하가 저를 외무부로 보내셨어요. 제가 제 역할을 못 하면 그 즉시 폐하께 누를 끼치게 되는 거예요. 전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요. 폐하에게 짐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베르톨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의 청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어떻게 말을 해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노력해야 그들과 비슷해진다고요. 전 지금 머리가 아니라 노력으로 승부하고 있어요.”
후에 베르톨트가 그녀를 연인으로 내세울 때, 혹여나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이들이 둘 사이를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부터 노력하고 조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인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아델라이드는 생각했다.
배려하는 마음은 베르톨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아픔과 상처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짝이 되기 전까지 그녀를 안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대가 옳아. 그렇더라도, 나한테 조금 더 곁을 내줘.”
“네. 그럴게요, 폐하.”
아델라이드가 조금 더 크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술을 맞추었다. 곧이어 그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큰일이야. 그대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서운하고, 조금만 만져 주면 달아오르니.”
저돌적인 고백에 아델라이드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가 옆으로 누워 그녀를 가슴에 꼬옥 안았다.
“우리의 첫날밤이 정말 기대되는군.”
아델라이드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말엔 정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본심은 작디작은 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저도요.”
베르톨트는 고요히 잠든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피곤했는지 그녀는 품에 안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쌕쌕 숨을 고르며 잠이 들었다.
자신의 품이 편안해서 이렇게 잘 자는 건가 싶다가도 자신은 더 닿고 싶어 잠들 수 없는데 어째 이렇게 곧바로 잠들 수 있는 건지 희한했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만나고 나서부터, 자신이 변덕이 심한 성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면모였다. 아델라이드의 행동, 표정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어이없으면서도 이 얼굴을 대하면 여지없이 무너지곤 했다.
‘그대가 아니라 내가 그대의 노예였군. 나의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