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1장. 인재 (22/39)

제21장. 인재

이른 아침, 스트라우스가로 돌아온 아델라이드는 머레인에게 폭풍 잔소리를 들었다. 요는 목걸이를 함부로 풀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와 함께 있는 동안 목걸이를 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종당에는 머레인이 거의 애원하다시피 간청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와의 사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오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후에 있을 황제와의 외무부 회의 때문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황제의 명으로 한 달 이상 골몰한 과제의 대책을 발표하는 자리였고, 오늘의 회의로 향후 몇 달간의 외무부 일정이 새로 짜이는 중요한 자리였다.

외무부에 던져진 과제는,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 새롭게 세르비아에 복속된 영지민들을 평화적으로 흡수하는 방법, 그리고 분쟁 지역의 관리에 관한 것이었다.

꼭 전쟁 때문이 아니더라도 세르비아 제국령으로 이주민들이 유입되는 일은 흔했다. 안달루스나 알레마니아, 앙주 등의 국가와 맞닿은 곳이라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타국은 세르비아보다 열악한 여성 인권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뿌리 깊은 차별의 피해자인 여성들과 그 가족들이 국경을 넘어 세르비아로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그 때문에 불법 이주자들과 기존 영지민 사이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난민과 이민족에 대한 정책을 확립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외무부 회의에는 황제와 외무부의 수장인 프리트홀트, 그리고 그의 비서관인 아델라이드와 휴고가 참석했고, 재상 레니에도 동석했다.

협치가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도 논의하기 위해 재무부의 수장, 사법부의 수장, 행정부의 수장이 모두 참석했다. 수장들은 거대한 원형 탁자에 앉아 있었고 비서관들은 각 수장의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 그럼 모두 착석하였으니 시작하지.”

황제의 명에 따라 프리트홀트는 주요 외교 현안을 열거하고 문제를 정리했다.

“그리하여, 현재 세르비아의 가장 큰 외교 현안은 이들 분쟁 지역의 효과적인 관리입니다. 앞서 발표한 사항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불법 이주민에 대한 처리와 방지책. 둘째, 난민과 이민족에 대한 수용 방안. 셋째, 안달루스 제국과의 불확실한 국경선 명료화입니다.”

황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재 불법 이주민들이 얼마나 되나?”

“평균적으로 월 2천 명 정도이고 지금까지 약 5만 명이 이주해 왔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지역은 어디입니까?”

행정부의 수장이 물었다.

“안달루스와의 접경 지역인 툴루즈입니다. 이주민의 약 50퍼센트가 이곳에서 넘어옵니다.”

“툴루즈에서 넘어오는 이주민의 수가 점차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툴루즈와 그 인근 지역 영주들의 수탈이 더욱 심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프리트홀트의 말에 레니에가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주민들로 인한 피해와 그 규모는 어떤가?”

프리트홀트가 가지고 온 자료를 보며 답변했다.

“이주민들이 불법적으로 만든 주거가 모여 촌락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기존 영지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음은 물론 전염병을 통제하는 데에도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내년부터 폐지되는 노예 제도에 반하여 이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사고파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착취가 심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더 이상 접경지대에만 한정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접경지대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점차 내륙으로 번지고 있고, 노예를 사고파는 지역도 점차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올해 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피해는 현재까지 살인 사건으로 사망한 자가 104명, 행방불명 159명, 금전 피해로는 약 200만 바르크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00만 바르크는 세르비아 제국이 쓰는 한 해 국방비의 10퍼센트에 해당한다. 다르게 보면 영지 한 곳의 1년 치 예산과 맞먹는 규모였다.

각 부의 수장들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자료를 접한 것이 처음이었거니와 수치화하니 그 피해 규모가 피부에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사법부의 수장인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안달루스 제국과의 국경선 분쟁은 정확히 어떤 문제입니까?”

“툴루즈와 맞닿아 있는 바젤은 영지민이 약 8천 명으로 소규모이긴 하나 세르비아 삼림 자원의 보고입니다. 실제로 바젤에서 생산된 레드파인의 거래량은 세르비아 목재 소진율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에 따르면 레드파인 가공에 동원되는 인력 대부분이 툴루즈 출신 이주민 노예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젤 내에서 툴루즈 이민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고, 현재는 바젤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툴루즈 측에서 몇 차례 바젤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반년 전부터는 바젤의 신이 툴루즈 신의 아들이었다는 신화를 이용하여 바젤이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첩보에 의하면 가까운 시일 안에 바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신단을 정식으로 파견할 것이라고 합니다.”

프리트홀트의 설명이 끝나자 각 부의 수장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질문을 한 다니엘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거 정말 심각한 사안이네요.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달루스와 전쟁을 치르기에는 세르비아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당분간 세르비아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바젤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안달루스에서 사신단을 파견한다면, 일단 그들의 얘기를 들어 봅시다. 그러나 외무부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예상하여 그에 따르는 적합한 해결책을 준비해 두셔야 할 겁니다.”

레니에가 프리트홀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리트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략적인 대안을 구상하여 폐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서는 두 가지 문제만 논하도록 하지. 일단 이주민들에 대한 처리와 방지책이네. 외무부에서 준비한 해법은 무엇인가?”

황제의 목소리가 근엄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의 시선은 프리트홀트의 뒤에 앉아 열심히 기록을 하고 있는 아델라이드에게 향해 있었다.

“외무부의 훌륭한 인재들이 많은 해법을 제시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제안이 있어 그 제안자의 얘기를 들어 보셨으면 합니다.”

프리트홀트의 이야기에 각 부의 수장들이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리트홀트의 뒤에 앉아 있던 아델라이드는 놀란 얼굴이 되어 그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리트홀트는 빙그레 웃으며 아델라이드를 소개했다.

“잘 아시겠지만 제 여식이자 비서관인 아델라이드의 제안입니다. 아델라이드!”

프리트홀트가 호명하자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붉어지며 미간이 일그러졌다. 멈칫하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델라이드입니다.”

아델라이드는 눈에 띄지 않게 단정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지만 그녀의 동그란 이마와 야무지게 다문 통통한 입술, 결 좋은 금발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이 났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회의장에 들어올 때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계속 힐끔거리며 그녀를 보고 있던 와중에 아델라이드가 발언권을 가지게 되자 기대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델라이드 쪽으로 아예 몸을 돌려 버렸다. 황제가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자 옆에 앉아 있던 레니에가 작게 헛기침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아델라이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문제인 이주민들의 처리와 방지책, 두 번째 문제인 이민족 수용 방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분간은 세르비아로 유입되는 이주민들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중장기적 대책이 필요합니다. 현재까지는 이 문제를 전적으로 외무부가 관리하고 있지만 이주민이 제국민으로 편입되면 이는 곧 행정부의 고민으로 직결될 것이고 사법부와 행정부, 재무부는 물론 군과도 연관이 깊어집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각 부처의 협조가 불가피합니다.”

그녀는 일사천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치 오래 전부터 연구하고 발언을 미리 준비한 사람 같았다. 만약 그러하더라도 황제가 배석하고 각 부의 수장들이 있는 이 자리에서 일개 비서관이 이리 능숙하게 발언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대들 앞에 있는 이 여자가 얼마나 총명한지 한번 보라고.’

베르톨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자꾸만 미소가 흘러나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려 하니 표정이 어색해질 정도였다.

“불법 이주민들이 유입되는 경로는 총 네 군데입니다. 이 네 곳의 특징은 접경 지역이라는 것, 그리고 신분이나 계약 방식을 막론하고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중앙에서 내놓는 불법 이주민 유입 방지 대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값싼 인력이 필요한 제국민들이 이를 암암리에 용인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근본적인 문제는 불법 이주자가 아니라 일부 제국민들의 불법 행위입니다.”

회의에 배석한 모든 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외무부에서 제안하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누어 드리는 자료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아델라이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고가 일어나서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첫째는 이 지역에 한해서는 이주민들에게 합법적인 신분증을 부여하여 이들의 경제 활동과 이동 경로 등을 관리합니다. 둘째, 이들이 경제 활동을 할 때 기존 제국민들과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경제 활동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는 누구든 제국에 타당한 금액의 세금을 내도록 합니다.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지역들을 ‘경제 완충 지대’로 선포하고 중앙에서 특별히 관리합니다. 단, 언어 및 지역 경제와 관련된 기술 시험을 치러 이를 통과한 자에 한하여 신분증을 교부합니다. 이처럼 세르비아 제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는다면 그들도 경솔하게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횡행하고 있는 노예, 인신매매 등의 문제도 점차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당 지역의 세무가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정책이 발효된다면, 세금의 누수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개괄적인 해결책입니다.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인 방안과 세부적인 정책들이 필요합니다. 이에 재무부, 사법부, 행정부, 그리고… 폐하의 지원과 지지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폐하의 지원과 지지를 언급했을 때 자신을 보고 살짝 얼굴을 붉힌 것을 놓치지 않았다. 가슴이 견딜 수 없이 저릿저릿했다.

말을 마친 아델라이드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레니에와 각 부처 수장들의 눈에는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들 프리트홀트가 녹록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잘 알기에 자신의 여식이라 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비서관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예상 밖이었다. 아델라이드의 정연한 이야기를 듣자니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회의장을 무겁게 눌렀다. 레니에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대단하군요.”

아델라이드가 레니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칭찬에 대한 답례였다.

“외무부에 매우 훌륭한 인재가 들어왔군요. 저도 미처 생각지 못한 해법입니다. 다른 부처의 의견은 어떠한지요?”

레니에의 말이 끝나자 행정부의 수장인 오스카가 말했다.

“비서관의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하느라 다른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불법 이주자 문제가 단지 외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현재 세르비아에서 가장 골칫거리인 현안이지요. 그런데 그런 문제에 이리 명쾌하게 해법을 제시하다니 놀랍습니다. 외무부의 비서관을 저희 행정부로 데려가고 싶군요.”

오스카는 대신 중에서 정치 연륜이 가장 깊은 자였다. 레니에, 프리트홀트 등과는 반대편에 서 있으므로, 황제와도 대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오늘 베르톨트와 레니에가 가장 요주의 인물로 생각한 이가 바로 오스카였다. 그런 그가 프리트홀트의 딸을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오스카의 편인 콘라드는 그의 얘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중립을 고수하는 사법부의 수장 다니엘은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반론을 제기했다.

“놀랍고도 훌륭한 해법임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 개의 경제 특구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역이 타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더 혜택을 입게 될 수 있지요. 그 경우 세르비아 자국민보다 불법 이주민들이 더 잘살게 되는, 어떻게 보면 역차별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요?”

앉아 있던 아델라이드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미 전투 모드로 전환되어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역차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국민들이 손해를 입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경제특구가 잘 운영되어 오히려 자국민의 삶이 편안해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린 하향 평준화가 아닌 상향 평준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국은 수에비와 카프카, 바이온 왕국의 국민에게까지 제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아델라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점점 논의가 깊어지면서 자신이 말을 계속 이어 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귀신같이 눈치챈 황제가 눈썹을 한 번 꿈틀한 후 말했다.

“비서관. 주저하지 말고 계속 말해 보라.”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말로 세르비아 제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법률을 정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금, 세르비아 제국령이라 하더라도 소외되고 분열된 곳이 많습니다. 시급히 법률을 정비하여 이들에게 세르비아 제국민이라는 소속감과 일체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니에는 속으로 무척 놀라워했다. 그도 일전에 황제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델라이드가 자신의 의견과 동일한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자신이야 세르비아의 사정을 꿰뚫고 있고 또 그래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재상이기에 그렇다고 쳐도, 그녀는 아니었다. 레니에는 그녀의 통찰력과 선견지명이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졌다.

문득 레니에는 아델라이드를 닮은 에드가를 떠올렸다. 그와 매일 저녁 대화를 나눌 때 꼭 이런 기분이었다. 그 명쾌한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이 얼마나 감탄스러웠는지 모른다.

레니에는 그때의 기쁘고 즐겁던 기분을 생각하며 아델라이드를 바라봤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베르톨트는 너무나 즐거웠다. 자신에게는 훌륭한 신하가 많았다. 프리트홀트도 그렇고 레니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뛰어난 인재를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는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영민하고 뛰어난 사람일지 모른다. 그는 그녀의 가능성이 얼마만큼일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웃음이 다문 입 사이를 비질비질 비집고 나왔다.

“비서관.”

아델라이드가 화들짝 놀라 황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예, 폐하.”

“그대의 식견이 놀라워. 지금 말한 건은 이미 레니에가 구상하여 내게 보고한 것이긴 하나 지금까지 이 같은 의견을 낸 자를 레니에 외에는 본 적이 없어. 오늘 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불법 이주자들에 관한 해법을 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뛰어난 인재를 얻었다는 거로군.”

황제의 말끝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곧 폭발할 정도로 붉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하긴, 사실인데.”

다음 일정을 잡고 나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외무부 수장인 프리트홀트의 낯빛은 밝은 반면 회의장을 나서는 다른 부 수장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앞서 진행된 회의에서 행정부, 사법부, 재정부 모두 황제에게 된통 깨졌는데 외무부만은 칭찬을 잔뜩 받았으니 자연히 다른 수장들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해산하고 돌아가는 길에, 행정부 수장 오스카와 그의 편 콘라드는 따로 만남을 가졌다.

누가 들을세라 콘라드가 오스카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민 채 말했다.

“폐하가 프리트홀트 후작을 너무 편애합니다. 그의 딸을 통해서 말이죠.”

오스카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콘라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콘라드 경은 참으로 눈치가 없구먼.”

“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도 모르겠소? 대연회 때 폐하와 함께 춤을 추었던 영애가 바로 저 프리트홀트의 딸이 아닙니까. 오늘도 프리트홀트 후작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딸인 비서관을 칭찬한 것이오. 여태껏 폐하를 모시면서 여자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소.”

“그, 그런 겁니까?”

오스카가 외무부 쪽을 바라보며 입매를 한껏 굳혔다.

‘프리트홀트 후작의 여식을 좀 알아봐야겠군.’

* * *

회의가 끝나자 프리트홀트는 아델라이드와 휴고에게 강제 퇴근을 지시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했음을 아는지라 오늘만은 일찍 귀가하여 좀 쉬라는 의도였다.

사실 아델라이드는 회의 때 너무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에 살짝 피곤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 지시를 받아들여, 후작과 휴고에게 인사를 하고 외무부 건물을 나왔다.

정원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는 복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동안 오늘따라 더 싱그러운 녹음과 분수의 물소리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어서 가서 씻고 소니아와 간만에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 황제는 안 만나?

- 폐하는 공무를 보시느라 바쁘세요. 지금쯤 아마 집무실에서 레니에 공과….

- 흐음, 아까 황제의 눈빛은 그게 아니던데.

- 아까? 회의 때요?

- 그래. 내가 보기엔 당장 달려와 안을 기세던데.

- 머레인도 참. 무슨 말을 그렇게….

아델라이드가 머레인과 대화를 하며 복도의 모퉁이를 돌 때였다.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나와 그녀를 낚아챘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어떤 방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두려움과 당혹감이 섞인 청회색 눈동자가 진한 웃음이 섞인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폐하!”

베르톨트는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몸이 아델라이드에게로 바싹 밀착해 왔다.

“지금 퇴근한다며?”

베르톨트의 눈이 반짝였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언제 들어도 매혹적인 웃음소리였다.

“내가 말했잖아. 그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 오! 역시 능력자야!

목걸이가 반짝거리자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베르톨트가 그녀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

“또 이 녀석이 뭐라 하나 보군. 나랑 있을 동안은 내가 갖고 있겠어.”

그가 목걸이를 빼내자 머레인이 또다시 아우성치며 반짝였다.

- 아, 정말! 나도 끼워 달라고. 나도!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이런. 내가 왜 왔는지 모른단 말이야?”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른다고 타박하는 것 같아 아델라이드는 대답 대신 눈을 새초롬하게 내리깔았다. 베르톨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보고 싶으니까. 회의 때는 대놓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잖아.”

한 손으로 그녀의 한쪽 볼을,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반대쪽 볼을 쓰다듬었다. 발그레하게 붉어지는 뺨이 탐스러운 사과 같았다.

“회의 때… 노, 노골적으로 보셨는데요.”

아델라이드가 입술을 약간 뾰로통하게 내밀자 그가 그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지금과 같이 보지 않았잖아.”

살짝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정말 회의 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어제 황제의 침실에서 봤던 그 눈빛이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곧 터지겠네.”

“폐, 폐하!”

그녀가 눈을 살짝 흘겼다. 그는 얼굴을 더욱 가까이 가져왔다. 그의 관능적인 입술이 슬며시 뺨에 닿았고 곧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만지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어떻게 이 예쁘고 달콤한 입에서 그런 딱딱하고 이성적인 말들이 나오는 거지?”

회의 시간 내내 그랬다. 베르톨트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어젯밤 자신의 품에서 신음하던 모습이 겹쳐져 신체적인 반응을 억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도무지 참기가 어려운 나머지 이 회의가 끝나면 바로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제 입은 폐하와 입 맞출 때만 필요한 게 아니라고요.”

베르톨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는 포개지 않고 맞닿기만 한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흐음. 그래서 불만이야.”

그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입술을 포개어 왔다. 뜨거운 입술이 꾹 누르더니 미치도록 관능적인 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열리자 그 혀가 곧 미끄러져 들어갔다.

“으응.”

아델라이드가 신음을 흘리며 베르톨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우리 언제 함께 외출할까?”

“외출요?”

“황궁 밖에서, 데이트.”

하긴 밖에서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전쟁 중에는 전장을 떠난 적이 없었고 수도에 들어온 이후로는 황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저잣거리를 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거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보통의 데이트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지금 생각해 봐.”

“음, 즐거울 것 같아요. 아니,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델라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아델라이드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다음 주에 심야 데이트를 한번 하지. 근사한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극장에도 가고.”

아델라이드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극장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베르톨트의 말을 듣는 순간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극장에는 처음인가?”

“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요.”

“흐음. 요즘 인기 있는 배우들이 다음 주부터 녹턴에서 공연을 시작한다고 하더군. 그것을 보도록 하지. 실은 나도 처음이야.”

베르톨트도 아델라이드와 마찬가지였다. 그도 계속 전장에 나가 있느라 문화생활을 할 기회가 없었다. 위문 공연차 배우들이 부대를 방문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가 함께 어울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베르톨트는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아델라이드를 보며 앞으로 자신이 공부할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델라이드가 갇혀 지내며 놓친 것들을 모두 보상해 주고 싶었다.

“아델.”

그가 작지만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예, 폐하.”

“그대가 나로 인해 처음을 경험하는 것이 난 좋아.”

그의 솔직한 말에 아델라이드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저도 좋아요, 폐하.”

“지금은 좋아도, 나중엔 나의 독점욕에 숨이 막힐지도 몰라.”

아델라이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가끔씩 지독할 때가 있었다. 그 강도가 심해서 아델라이드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해지기도 했으나 그녀의 어느 한 부분도, 어느 한순간도 다른 이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그녀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가득 차올라 가슴이 저려 왔다.

“폐하는 저를 잘 모르세요. 저도 독점욕, 많아요.”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아델라이드의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그가 크게 웃었다.

“그래? 난 전혀 모르겠는데.”

“예전에 벨라루아에게 알렉시아 황녀가 폐하를 원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너무나 무서웠고 불안했어요. 폐하에게 독을 먹이는 그 계획도 황녀가 꾸민 거였잖아요.”

“무엇이 불안한 거지? 내가 그녀에게 갈까 봐?”

“아뇨.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어요. 전 폐하와 황녀가 함께 거론되는 것 자체가 너무 시, 싫었어요.”

카를로스의 위에서 베르톨트의 따뜻한 가슴을 등으로 느끼고 있어서인지,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솔직하게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뱉었다. 베르톨트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그것 참으로 대단한 질투군.”

“그러니까 폐하가 제 독점욕에 숨이 막히는 것이 먼저일 거예요.”

“하하하. 난 진심으로 그대가 그래 주면 좋겠어.”

그의 웃음소리가 진동이 되어 그녀의 등에 전달되어 왔다. 그의 얼굴이 내려와 그녀의 귓불 근처를 깨물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세상 그 어떠한 여자와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대의 질투를 받기 위해서라면 간혹 다른 여자를 입에 올려야겠군.”

“폐하!”

아델라이드가 소리를 질렀다. 미소 지은 베르톨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당겨 안았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와 길을 한참이나 둘러서 집으로 귀가했다. 카를로스는 사람이 없는 장소를 지날 때마다 번번이 멈춰 서야만 했고, 그때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고개를 돌려 키스했다.

덕분에 아델라이드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봤을 때는 입술이 부어 있고 목덜미에도 붉게 올라온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녀는 내일 또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