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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클리터스 부니에 (29/39)

제28장. 클리터스 부니에

벨라루아는 침대 위에 석고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당황해서 자신답지 않게 많이 흥분했으나 지금은 침착함을 어느 정도 되찾은 상태였다. 그녀는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방 창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바람인가 싶었지만 또다시 소리가 났다.

다시 들어 보니 바람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벨라루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가 빗장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아그리파가 발코니에 훌쩍 뛰어 올라왔다. 벨라루아는 마치 예상한 듯 여상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하시네요.”

감흥 없는 목소리였다.

“잠시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벨라루아는 감긴 아그리파의 눈을 잠깐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아그리파가 먼저 방 안에 들어섰고 다음으로 벨라루아가 들어갔다.

발코니 문을 닫은 그녀는 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은은한 빛이 마법진에 잠시 감돌다가 곧 스며들었다.

“그날 밤 네가 가고 나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너를 내놓으라며 아우성이었지. 너도 알겠지만 한번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우냐. 게다가 난 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으니…. 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욱신거렸다. 송곳같이 뾰족한 것이 가슴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을 그에게 꺼내지 못하고 벨라루아는 그저 입술만 옴짝달싹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그리파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눈은… 그때 잘못되었어. 하지만 신은 정말 잔인하고 가혹하지. 나의 눈을 가져가는 대신 능력을 다시 주셨으니.”

벨라루아는 눈을 뜨지 않는 아그리파를 보았을 때부터 설마설마했다. 그가 그날 밤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이 그의 두 눈을 가져간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러나 터럭만 한 희망은 역시나 빗나갔다.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질끈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인간을 두려워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눈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서글픔과 미안함, 슬픔이 날카롭게 그녀를 휘몰아쳤다.

아그리파는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그녀가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벨라루아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쳐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때 내가… 그렇게 가지만 않았어도….”

끄윽끅,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회한의 말이 흘러나왔다.

“가지 않았다면 넌 사람들에게 끌려갔을 테지. 그런 너를, 나는 두 눈 뜨고도 구하지 못했을 테고. 그리고 난 능력이 없어 너를 구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비난하고, 끝내는 스스로를 저주했겠지. 그러니 우리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벨라루아는 차마 바닥 끝까지 솔직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오는 것을 알았지만 무서워서 당신을 버리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고.

그렇게 난 스승이었던 당신을 배신했다고.

그렇게 난 내 사랑을 시궁창에 버렸다고.

그렇게 난 쓰레기라고.

거의 죽어 가던 아그리파를 살린 것이 바로 베르톨트였다. 산에 버려져 있는 아그리파를 발견해 황궁으로 데려왔고, 황제의 주치의가 몇 날 며칠을 치료하여 목숨을 살려 놓았다.

깨어난 그에게 황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몸이 회복되어 떠나기 직전 아그리파가 이 빚은 꼭 갚겠다고 하자 웃으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럼 나중에 자신이 찾으면 반드시 오라고.

벨라루아는 아그리파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넌 어떻게 해서 황녀에게 간 것이냐?”

대답할 수 없었다. 과거 사람들에게 당했던 고통을 돌려주고 싶었다고, 당신을 사람들에게 잃었기 때문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고통을 줄 줄만 알고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인간들을 없애 버리고 싶어 황녀의 손을 잡았다고.

아그리파를 버린 것은 그녀지만 자신 때문에 그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바닥은 아니라고, 정말 마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됐어요. 살아 있는 것 봤으니까, 잘 있는 것 봤으니까.”

한때는 이 사람에게만 의지했었는데, 이 사람만을 보았는데 지금은 터럭 하나라도 닿을 수가 없다. 문드러지는 마음을 밀어 두고 벨라루아는 냉정하게 말했다.

“벨라, 후회할 일은 하지 마. 알고 보니 아델라이드 님은 네가 감옥 안에 있을 때 연을 맺어 마력석을 내어 준 발루안 백작 부인의 여식이더구나.”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러면 더더군다나 알렉시아 황녀 편에 있으면 안 돼. 그 여자는 너를 아끼지도 않아.”

“알아. 그런 건 상관없어. 이제 가 봐요. 여기 오래 있으면 나도 의심받아.”

“벨라….”

핑계였다. 마법 능력이 탁월한 두 사람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알지만서도 그녀가 오늘은 대화를 이만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아그리파는 자리를 떠났다. 자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벨라루아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아그리파가 사라지고 나서도 벨라루아는 오랫동안 잠들지 않았다. 불 꺼진 컴컴한 방 안에서 그녀는 죽음의 사신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새벽녘, 해가 떠오르려 할 때 벨라루아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알렉시아 황녀는 다음 날 세르비아의 행정대신인 오스카를 만났다. 만나자고 먼저 기별을 넣었지만 오스카가 이렇게 빨리 수락할 줄은 몰랐다. 뜻밖이었다. 알렉시아는 오스카 또한 급했다는 것을 알았다.

“오스카 백작님은 폐하의 약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요?”

“그저 그 여자를 취하기 위해 약혼했다고 보십니까?”

“…….”

“아시겠지만,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분명 지금의 약혼자를 황후 자리에 올리려 하실 겁니다. 근본도 없는 그 여자를.”

“황녀님은 어째서 폐하의 혼인에 이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오스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프리트홀트의 여식이 황후가 되어 스트라우스 가문이 힘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자신들의 일이지 안달루스 제국의 황녀가 간섭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관심이 있죠. 전 폐하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오스카의 손이 크게 떨렸다. 잔을 놓칠 뻔했다.

그는 목울대가 꿀렁이는 게 보일 정도로 침을 크게 꿀꺽 삼키고는 고고하게 앉아 있는 황녀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전장에서도 폐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를 받아 달라고. 그러면 안달루스를 폐하의 발아래 가져다드리겠다고.”

오스카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런데 굴러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리시더군요. 본인께선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지금의 약혼자지요. 안달루스와의 전쟁 없는 통일을 걷어차면서까지 옆에 두고 싶은 약혼자라…. 그러니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녀를 황후 자리에 앉히려 하실 겁니다.”

“폐하가 전장에서부터 마음에 둔 사람이라고요?”

금시초문이었다. 놀란 오스카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반문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약혼자, 아델라이드는 폐하의 시중 노예였습니다.”

이번엔 정말 찻잔을 떨어뜨렸다. 오스카의 발밑에 떨어진 잔은 크게 세 동강이 나 버렸다. 깨진 조각 사이로 찻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시, 시중 노예는 남자였는데요. 폐하는 여자를 가까이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시중 노예건 시침 노예건.”

“다시 알아보세요. 아델라이드, 그 여자가 시중 노예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스카의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아델라이드의 지난 행적은 지나칠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참에 황녀가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한 것이다. 황녀의 이 말이 그녀의 과거를 알아내는 데 단초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여자를 세르비아 제국의 황후로 올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오스카 백작님의 가문에서 황후로 밀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세요.”

“황녀님을요?”

“네. 제가 황후가 된다면 세르비아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안달루스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백작께서는 그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최고의 공신이 되시는 거지요.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알렉시아의 고운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마치 누구를 홀리기라도 하려는 듯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말씀은 황녀님의 편이 되어 달라는 건가요?”

“뭐, 그렇기도 하지만 바꿔 말하면 제가 백작님의 편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스트라우스 가문이 세르비아를 독식하기 전에 오스카 백작님도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좋은 방법이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저를 세르비아 제국의 황후로 만들어 주시지요.”

그녀의 눈빛이 형형했다. 오스카는 앞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켜 줄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다만 덥석 손을 잡기 전에 확인할 것이 하나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사절단이 돌아가기 전에 회신을 드리겠습니다.”

알렉시아는 묘한 웃음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오스카는 황녀의 웃음소리에서 왠지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잠시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만약 프리트홀트의 여식이 황후가 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전장에서부터 폐하의 곁에 있었던 시중 노예라고?

그 시중 노예를 지금 스트라우스 가문의 양녀로 들였다는 것인가?

지금은 폐하의 약혼자가 되었고?

냄새가 난다. 확인해 보아야겠다.

생각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클리터스 부니에를 만나 봐야겠어.’

연무장은 사내들의 기합 소리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스카는 그중에서 눈앞의 나무 인형을 작살낼 듯한 기세로 목검을 휘두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클리터스 경.”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그저 하던 동작을 계속할 뿐이었다. 오스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다시 불렀다.

“클리터스 경!”

클리터스는 그제야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부른 사람이 행정대신임을 알자 의외라는 듯 그의 눈썹이 씰룩였다.

“괜찮으면 잠시 나 좀 보게나.”

오스카가 먼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클리터스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이내 연습용 목검을 제자리에 세우고는 그를 뒤따라갔다. 오스카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자신이 예의를 갖춰 대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 웬만큼 멀어지자, 오스카는 발길을 멈추고 클리터스를 돌아보았다. 자연히 따라 멈춰 선 클리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행정대신께서 제게 어쩐 일이십니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물어보십시오.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씀드릴 테니.”

오스카는 클리터스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황제가 클리터스 부니에를 매우 아끼긴 해도, 클리터스와 자신은 척을 진 것도 아니고 직접 부딪친 적도 없었다. 그런데 클리터스는 자신의 말을 듣기도 전에 벽부터 치고 있었다. 기밀이라도 캐물었다가는 대역 죄인 취급이라도 할 기세였다.

이렇게 나오는 걸로 봐서는 가벼운 질문에도 제대로 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최대한 돌려서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장에서 폐하가 시중 노예였던 여자를 매우 가까이하셨다고 들었네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가 어디 함부로 여자를 들이시는 분입니까? 더군다나 시중 노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습니다.”

“확실한가?”

“네.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스카의 눈이 번뜩였다. 손을 올려 클리터스의 말을 막은 오스카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을 떼었다.

“시중 노예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 말이야! 그게 확실하냐고 묻는 걸세.”

“네. 확실합니다. 제가 천거했으니까요.”

‘설마 내가 알렉시아 황녀에게 속았나?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황녀는 아주 확신하고 있었어.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워진 오스카는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며 클리터스는 좀 전의 질문이 그냥 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확히 무엇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그때 폐하의 시중 노예가 지금 프리트홀트의 양녀, 폐하의 약혼자라는 얘기가 있네. 믿어지지는 않지만.”

오스카는 답답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건질까 싶어 클리터스에게 말을 흘렸다. 순간 클리터스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동공이 흔들렸다.

“무, 무슨 그런 이야기가….”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정보통이어서 말이야.”

“그 정보통이 어디입니까?”

“출처는 말해 줄 수 없지만 그 어디보다 확실한 곳이네.”

안달루스의 황실은 전서조, 첩자, 마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세르비아의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특히 황제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러니 안달루스 황실에서 나오는 것만큼 신뢰가 가는 정보도 드물었다.

“그럼, 행정대신님의 말씀은 폐하의 시중 노예가 여자였고 그녀가 스트라우스가의 양녀가 되었고 지금은 또… 폐하의 약혼자라는 겁니까?”

클리터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오스카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렇다네. 어쨌든 자네 얘기는 시중 노예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이거지.”

클리터스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며, 마법을 써서 변장이라도 했나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오스카가 떠난 뒤에도 클리터스는 미동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오스카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에드가가 황제의 약혼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동시에 그간 자신의 마음속에 꽉 들어차 있던 답답한 안개들이 한순간에 걷힌 느낌을 받았다.

왜 아델라이드를 보면서 에드가가 떠올랐는지,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와 아델라이드가 왜 그렇게 친밀해 보였는지 모두 다 이해가 갔다.

결국 클리터스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와 스스로의 힘으로 가눌 수가 없었다. 심장이 마구 날뛰었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영애가 에드가였다고? 에드가가 여자였다고?’

실소가 나왔다. 한편으로는 에드가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 화가 났다.

녀석은 이미 폐하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자신이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왜 자신은 한발 늦게 알아 버린 것인가.

클리터스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이 상황이 억울했다. 어떻게 그녀가 감쪽같이 남장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여자였음을 황제가 먼저 알았다는 것이, 자신이 알게 된 지금 그녀가 황제의 약혼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나무에 기대서 있던 클리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길은 샤워장으로 향했다. 일단 훈련을 하느라 몸에 밴 땀 냄새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러고 나서 그는 녀석을 보러 갈 작정이었다.

이젠 완전히 여자가 된 녀석을.

외무관으로 가는 길이 멀고도 멀게 느껴졌다. 가까워질수록 클리터스는 자신이 그곳에 가서 무엇을 확인하려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처음엔 화가 나서,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턱대고 그리로 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이 돌아왔다.

‘가서 무엇이라고 한단 말인가. 왜 속였냐고? 왜 전쟁이 끝나고 나한테 오지 않았냐고? 바젤 시찰단으로 갈 때 왜 말하지 않았냐고?’

분노가 점점 가라앉고 머리가 식어 갈수록 뼈아픈 사실이 선명해졌다.

자신은 그녀에게 뭐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함께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감정이 통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 혼자 녀석을 마음에 두고 나중에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녀석을 마음에 묻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찾아가 무어라 말한단 말인가.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 번쯤은 고백해 볼걸.

그랬다면 지금 그녀에게 가서 네가 에드가가 맞느냐고 물어볼 용기가 났을까. 그러면 그녀는 정체를 밝히지 않아 미안하다고 했을까.

가슴속에 후회만 가득 차오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는 서글펐다.

돌연 클리터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한동안 서 있었다. 그의 시야에만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빛 머리칼이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랑였다. 에드가와 너무나 닮은, 밝은 달과 같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꿈인가….’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그 아래, 통통하고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가 오므라들었다.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 낸 환영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말을 했다. 부드럽게, 너무나 부드럽게 자신을 불렀다.

“클리터스 경, 괜찮으세요?”

“정말…인가?”

“네?”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팔랑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모양새가 여지없는 녀석이었다.

순간 뜨거운 것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분노도, 노기도, 서러움도 아니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 녀석이, 마음에 묻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여쁘고 반가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를 와락 껴안았다.

“에드가!”

아델라이드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품에 안긴 직후 머릿속이 하얘져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온몸을 버둥거리자 클리터스가 화들짝 놀라 팔을 풀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두려움과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클리터스 경. 지,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녀와 떨어진 후에야 클리터스의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알은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절박해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아델라이드는 그런 눈빛을 알고 있었다. 아주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눈빛.

정신을 차린 클리터스는 무엇인가를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며 말없이 손만 쥐었다 폈다 했다.

그렇게 클리터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고 아델라이드는 그를 두고 자리를 뜨려 했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그녀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서관님과 지나치게 닮은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사람들 중 유독 눈에 띄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분의 옆으로 갔습니다. 전 언젠가부터 언뜻언뜻 보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반가워했습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더없이 맑아 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또 기다렸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담았고 감정이 주체 못 할 정도로 넘쳐흐를 때 녀석이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델라이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그게… 그 말을 왜 제게….”

“저 혼자 마음에 담은 건데, 미웠습니다. 원망스러웠습니다. 받아 주는 이 없는 제 마음을 혼자 누르고 눌렀습니다. 삭이고 삭였습니다.”

“클리터스 경. 그, 그만하세요.”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아델라이드의 눈에 박혔다. 그 큰 덩치가, 손 한 번 대면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남자가 아닌 여자로.”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서서히 떴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과 함께 묵직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제는 감히 닿을 수도 없는 폐하의 여자로!”

클리터스와 아델라이드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나무 뒤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 클리터스에게 아델라이드의 이야기를 흘린 오스카 행정대신이었다. 그의 주름진 눈꼬리가 서서히 휘어졌다.

‘정말 재미있군. 황녀 말이 맞았어. 프리트홀트의 여식이 폐하의 시중 노예였어. 클리터스는 바보같이 그 시중 노예를 좋아했고.’

그는 이 얼토당토않은 사실이 무척 재미있었다. 잘나디잘난 황제가 시중 노예를 마음에 두었다는 것도, 그녀를 얻기 위해 프리트홀트의 여식으로 입적한 것도, 약혼식이라는 쇼를 한 것도 모두.

‘하! 황제가 사랑에 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다니’

돌아서서 행정관으로 향하는 내내 오스카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오스카는 알렉시아 황녀의 편에 서서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고 나면, 그 대가로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생각했다. 아델라이드가 황후가 된다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계산이었다.

그만큼 그가 보기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출신의 여자와 안달루스를 지참금으로 바치겠다는 황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황후의 자리는 황제가 멋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칼을 빼 드는 폭군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현 황제는 대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반대 의견을 내는 대신은 근거를 들어 설득하는 합리적인 군주다. 그런 황제니만큼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약혼도 하지 않고 대신들이 뭐라 하든 곧바로 결혼식을 진행했을 것이니 말이다. 약혼은 황제 나름의 전략이라는 것을, 오스카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 대단한 황제도, 놀랄 만한 지략을 보여 왔던 레니에도.

오스카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가벼워졌다.

어서 가서 황녀에게 답변을 줘야 했다. 내일 사절단이 떠나기 전에.

* * *

안달루스의 사절단과 세르비아의 외무부는 양측 모두 매우 흡족한 결론을 냈다. 안달루스는 노동력이 부족한 세르비아에 인력을 제공하고, 세르비아는 나무가 부족한 안달루스에 목재를 다른 나라보다 저렴한 관세로 수출하기로 했다. 관세 인하율에 대해서는 조금 이견이 있었으나 안달루스 측에서 양보하여 합의를 보았다.

마지막까지 협상 테이블에 나타나지 않은 알렉시아 황녀는 사절단이 안달루스로 돌아가는 날 아침, 레니에와 인사를 나누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한마디 말을 하고 뒤돌았다.

“다음에는 더 좋은 소식을 갖고 찾아뵙겠습니다.”

레니에는 황제가 본인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자신만 이 자리에 내보내 기분이 안 좋던 차였다. 왠지 모르게 찜찜한 말을 하고 사라지는 알렉시아 황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끝까지 진상이군.’

깨끗하게 포기할 줄 모르는 황녀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레니에는 고개를 한 번 가로젓고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황제가 일부러 집무실에 박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보고는 하러 가야 했다.

그는 가는 길에 클리터스 부니에와 마주쳤다. 클리터스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늘따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시계를 들여다본 레니에는 30분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겠다며 흔쾌히 응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레니에의 집무실이 있었다. 레니에가 집무실 쪽으로 앞서 걸어갔고 클리터스가 뒤를 따랐다.

도착한 후, 클리터스는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레니에는 찻잔과 주전자를 내어 와 클리터스에게 차를 따라 줬다.

“내리는 솜씨는 어설프지만 맛은 괜찮으니 한번 마셔 보게.”

“감사합니다.”

“그래, 할 말이 무엇인가?”

클리터스는 앞에 놓인 찻잔을 멀거니 바라만 볼 뿐 입에 대지 않았다.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인정하지 않더군요.”

어두운 표정의 클리터스가 대뜸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레니에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아델라이드 비서관님이 에드가입니까?”

레니에는 목구멍으로 넘기던 차를 순간 뿜을 뻔했다. 가까스로 차를 삼킨 레니에가 기침을 두 번 하고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경.”

“전하. 저를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모사꾼이나 눈치도 없는 둔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아델라이드 비서관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극히 드문 일이다 보니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입니다.”

클리터스의 진지한 태도에 레니에는 잠시나마 떠올렸던 모든 변명을 입 안으로 삼켰다.

평소 순하던 클리터스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온다는 것은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뜻이고, 이런 그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리터스는 황제와 레니에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다. 그가 뱉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고 그가 하는 행동은 경망스럽지 않았다.

거기에다 마음까지 순수하고 곧은 그가 레니에의 말을 듣기도 전에 자신을 바보 취급 하지 말아 달라 청하고 있었다. 레니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겠네. 내가 자네에게 큰 잘못을 할 뻔했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 끝에 레니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경의 생각이 맞아. 아델라이드 영애가 전장에서의 그 에드가일세.”

아무리 확실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만 하는 것과 말이나 글로써 확인하는 것은 충격이 다르다. 클리터스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델라이드 님은 마력석을 이용해 남자로 위장했어. 폐하는….”

이 대목에서 레니에는 잠시 주춤했다. 클리터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또 한 번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정한 레니에는 황제의 마음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폐하는 아델라이드 님을 꽤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았던 것 같네. 남자든 여자든 상관치 않았고 남자로 위장해야만 했던 사정도 문제 삼지 않았어.”

천천히 눈을 뜬 클리터스가 레니에를 노려보았다. 레니에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남자로 위장해야 했던 사정이 무엇입니까?”

“그건… 내가 유독 경에게 약하다 하더라도 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어. 아델라이드 님에게 직접 듣는 게 예의이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폐하는 프리트홀트 경의 양녀로 아델라이드 님을 입적했고 안전을 위해 약혼자라는 형식을 빌어 자신의 곁에 두셨네. 뭐…,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말은 레니에답지 않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클리터스에게 꽂혔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건 또 무엇입니까? 그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지요?”

“아델라이드 님을 알렉시아 황녀가 납치한 적이 있었네. 황녀가 폐하를 탐내다 보니, 폐하가 사랑하는 이가 아델라이드 님이라는 것을 알고 벌인 짓이지. 그것도 마법을 써서. 하여간 그때 목숨을 잃을 뻔한 폐하를 아델라이드 님이 구했고 폐하는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황녀로부터, 마법으로부터, 또… 그 외 불손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하시는 거고.”

클리터스는 침음을 흘렸다. 알렉시아 황녀가 언급된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레니에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것 같다는 직감에 클리터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오스카 행정대신이 찾아왔었습니다.”

“오스카 경이?”

“네. 저를 찾아와 전장에서의 에드가가 지금의 아델라이드 비서관이냐고 물었습니다. 출처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확실한 정보통이라고도 하더군요.”

레니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오스카 경은 황제의 반대파네. 지금까지야 폐하가 전장에서 승전을 거듭했고 그 외에도 흠잡을 구석이 없으니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무언가 빌미가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말 거야. 그런 인물이, 폐하가 가장 아끼는 기사를 찾아가서 누구나 웃어넘길 만한 이야기를 확실한 정보라면서 꺼냈다? 이상하지 않나? 그 정보통이라는 것도…. 흠.”

레니에는 잠시 생각에 골몰하다가 눈을 빛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경은 어떻게 했나?”

“어떻게 하다니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아델라이드 님을 찾아갔나?”

클리터스는 아차, 싶었다.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무척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스카가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감정에 휩쓸려서 경거망동하고 말았다.

만일 그가 자신을 지켜봤다면, 그래서 아델라이드와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에드가가 아델라이드임을 당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클리터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레니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찾아갔군.”

“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제가 아델라이드 비서관께 하는 말을 들었다면 모든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릅니다.”

클리터스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 멍청이 같은. 머저리! 등신!’

창백해진 클리터스의 얼굴을 본 레니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됐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야.”

“제가, 제가 경솔했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오스카 경이 알아챘다고 당황할 폐하가 아니지 않나. 그저 경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입 밖으로 뱉지 않으면 돼.”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게 몸을 일으킨 클리터스는 예를 취하고 집무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로 레니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아파하지 말게. 그녀는… 처음부터 폐하의 사람이었어.”

혹시라도 피어날지 모르는 연정을 끊어 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던진 말이었다. 지금은 이 말이 클리터스의 가슴을 후벼 팔지라도 그가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 마음으로, 레니에는 클리터스의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지만 모진 말을 뱉어 냈다. 클리터스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커다란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레니에는 한숨을 쉬며 눈썹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어리석은 사람. 그게 뭐라고….”

클리터스를 향한 말이지만 이상하게 자신을 가리키는 것도 같았다. 그가 남기고 간 공기가 레니에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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