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0장. 탐색하는 자 (31/39)

제30장. 탐색하는 자

알렉시아 황녀가 안달루스로 돌아간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때 오스카 행정대신은 황녀에게서 은밀히 서신을 한 통 받았다. 그 내용을 읽은 오스카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가 곧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황제가 미쳤군. 어떻게 수에비의 왕비를…!’

* * *

“누가 오셨다고?”

“오스카 행정대신이 오셨습니다.”

레니에는 집사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의아해했다. 기분이 떨떠름했지만 그를 접객실로 모시라 이르고 맞이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인데 재미있군.’

접객실로 향하는 내내 비틀린 입매가 쉽사리 내려오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오스카 행정대신이 보였다. 레니에는 표정을 풀고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집사가 다가와 차를 따랐다. 오스카는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레니에와 시선을 맞추었다.

“선약도 없이 왔는데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요. 이렇게 직접 방문하신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인가 봅니다.”

“네. 중요합니다. 오늘은 공작과 백작이 아닌, 재상과 행정대신으로서 이야기하고자 왔습니다.”

국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로서 이야기하자는 말이었다. 무언가 단단히 각오하고 온 모양이었다. 레니에는 슬쩍 웃음이 나왔으나 곧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전하께선 다 알고 계신 거지요?”

“무엇을요?”

“폐하의 약혼자 말입니다. 수에비의 왕비였다지요.”

오스카는 조금도 뜸을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레니에는 놀란 나머지 잠시 굳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수에비의 왕비였다니요?”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행정대신. 어떤 연유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제게 오신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까?”

오스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레니에를 노려보았다.

“정말 끝까지 모른 척하시겠다는 겁니까? 좋습니다. 이 얘기는 안달루스의 알렉시아 황녀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증인도 있습니다.”

“증인이요?”

“네, 아델라이드 영애, 아니, 그 수에비 왕비의 오라비인 에드가라는 자입니다.”

레니에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오스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날붙이같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합니까?”

“알렉시아 황녀가 아델라이드 영애를 만난 후 초상화를 그려 에드가라는 자에게 보여 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맞다고 확답을 들었고요. 이래도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사나운 오스카의 눈빛을, 레니에는 담담하게 받아 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레니에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래서요?”

“재상!”

얼굴이 벌게진 오스카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그래서라니요?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과거 수에비 왕국의 왕비였던 여자가 스트라우스가의 양녀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 폐하의 약혼자가 되었다니요? 폐하가 이젠 황후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 아닙니까?”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을!”

“말조심하십시오, 행정대신.”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인 오스카를 향해 레니에가 일갈했다. 오스카는 씹어 뱉듯 말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은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재상은 그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폐하가 정녕 제정신….”

“경! 말조심하라고 경고했을 텐데!”

레니에가 오스카의 말을 잘랐다. 그는 순식간에 공작으로서의 위압감을 뿜어내며 오스카를 압도했다. 오스카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전하, 폐하가 그 여자를 황후로 만들겠다고 하시면 저희는 목숨 걸고 반대할 것입니다.”

“그녀는 전장에서 우리 세르비아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네. 그것만으로도 과거를 덮고도 남아.”

“덮을 수 없습니다. 적국의 왕비였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폐하의 마음은 확고하네. 결국 그녀와 혼인하실 거야.”

“폐하께서 계속 우기시면 저희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레니에의 눈빛이 서늘한 것을 넘어서 살기등등해졌다. 그러나 오스카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대신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황제가 어찌 되는지를.”

“지금… 폐위를 거론하는 건가?”

“애초에 자격이 되지 않는 여자를 세르비아의 황후로 맞을 순 없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추진하는 폐하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경의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겠지?”

“폐하가 꾸미는 일만 할까요.”

레니에는 실소했다. 오스카의 태도가 도를 넘어섰다 싶었다.

“폐위를 거론한 건 정말 신선하군.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선은 내가 반대하니까.”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지금의 황제 폐하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친척 또한 없지요. 그러니 폐하께 변고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황위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순간 레니에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전하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선대 황제 폐하의 먼 친척입니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현재, 황위 계승 서열 1위란 말입니다.”

레니에는 갑자기 아찔해졌다. 자신은 그저 베르톨트의 친우이자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살아왔다. 자신의 역할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고, 벗어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고였다.

“경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

“전하는 폐하가 전장에 나가 계실 때도 이 세르비아를 훌륭히 운영하셨습니다. 지금의 번영과 평화를 이루어 낸 진정한 주인공이시지요. 대신들에게 폐하의 전횡을 알리고 전하를 황제로 추대하자고 하면 어렵지 않게 동의를 받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설마 내가… 베르톨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가.’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고자 했는데, 힘이 되기는커녕 그에게 가장 큰 위해를 가하는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레니에의 냉정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달루스의 황녀가 안달루스 제국과의 유혈 투쟁 없는 통일을 약속하며 혼인을 청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르비아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르비아의 제국민들은 안정과 평화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폐하는 그런 황녀의 청을 무시하고 적국의 왕비였던 자와 혼인을 하려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어찌 보면 오스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행복을 세르비아의 안정보다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만일 황녀의 제의를 거절할 경우 안달루스에서 이 일을 빌미로 전쟁을 걸어올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었다.

알렉시아 황녀의 말이 곧 안달루스를 대표하는 의견이라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세르비아와 안달루스가 전쟁을 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승리는 세르비아의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현재의 군사력으로는 세르비아가 우월했다.

“안달루스 황녀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게.”

레니에는 생각을 정리한 후 한마디 뱉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황제를 독살하려 했었어. 또한 자신의 제국을 그대로 바치겠다는 것을 안달루스에서는 어찌 받아들일지 모르잖은가. 자네는 황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나?”

오스카가 내심 미심쩍어했던 부분들을 레니에가 속속들이 지적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오스카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방금 하신 말씀은 가정입니다. 하지만 폐하가 수에비의 왕비와 결혼하려 하고 있고 안달루스와 화친 또는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저버리려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대신들은 가정이 아닌 사실에 따라 움직일 것입니다.”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더군다나 폐하가 안 계시더라도 대안이 있지 않습니까. 레니에 전하라는 훌륭한 대안이.”

레니에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오스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자신의 정적에게서 황위를 제안받는 것이 기이하기도 하고 그 얄팍한 속내를 모르지 않아 우습기도 했다.

정말 만약, 레니에가 황제가 된다면 또다시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다. 귀족들의 지지를 모은 오스카가 레니에를 현재의 황제인 베르톨트를 몰아내는 데 쓰고 그 후 레니에를 몰아내기 위한 암투를 할 것이 뻔히 짐작되었다.

그리고 오스카 역시 레니에가 자신의 수를 짐작하리라고 익히 예상하는 바였다. 다만 그는 레니에가 그 싸움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자를 몰아내는 데 독수리를 쓰고 그 독수리를 다시 한 번 사냥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스카가 생각하는 최선이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에게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그는 그만 돌아가 보겠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툴툴 털었다. 접객실을 나가는 오스카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레니에는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가 비죽이 미소를 지었다. 오스카가 꽤 머리를 쓴 것은 알겠다만 그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독수리는 사자를 몰아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자는 밀림의 왕이었고, 독수리는 하늘의 왕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분야가 달랐고, 현재 각자의 영역에서 이미 왕이었다.

* * *

“그래? 오스카 경이 나의 폐위를 거론했어?”

베르톨트가 정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렉시아 황녀가 꽤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거라 믿는 것 같습니다.”

“권력에 맛을 들이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지. 하물며 오스카 경은 언제나 권력을 갈망해 왔던 자이니 황녀의 말이 달게만 느껴질 거야. 현실은 보지 못하고.”

베르톨트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지만 어느새 눈매는 서늘해져 있었다. 레니에는 그가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순간도 황제의 자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베르톨트가 자신을 다른 시선으로 보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적들과 측근들을 피곤할 정도로 견제하고 주시해야 하는 황제는 황위 계승 서열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 역시 지금껏 그것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뱉는 순간 독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경각심.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도 그런 느낌을 받고 있을지 몰랐다.

“그나저나 그자의 입에서 에드가가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아무래도 에드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그런 민감한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최면 같은 것을 이용해서 털어놓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요. 뭐가 됐든 그 벨라루아라는 마녀가 수를 쓰긴 썼을 것입니다.”

레니에는 벨라루아에게 감정이 무척 안 좋았다. 벨라루아가 아델라이드를 납치해 가도록 묵인해 준 날 이후로 그는 아델라이드에게 일종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벨라루아를 향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졌다.

“에드가가 그들 편에 있는데 이리 조용하다는 것이 불길해. 분명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을 거야. 만일….”

베르톨트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생각에 골몰했다. 레니에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계속 잠잠하다면 아그리파를 데리고 안달루스의 황궁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그, 그게 무슨!”

“다른 기사들은 걸리적거리니 나 혼자 다녀오고 싶은데, 그쪽에 마법사가 있으니까 나도 실력 좋은 마법사 한 명쯤은 데리고 가야겠지.”

“그게 아니라 지금 황제께서 타국의 황궁으로 몰래 잠입하시겠단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아델라이드의 오라비를 찾아 주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알아. 에드가가 황궁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얼토당토않은 얘기라는 것쯤은.”

그러나 레니에는 알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그들에게서 연락이 올 겁니다. 에드가를 단지 아델라이드 님의 과거를 알아내는 데에만 이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에드가를 이용해서 그 과거를 증명까지 하려 하겠지요. 그를 어떻게 등장시킬지가 기대됩니다.”

레니에는 에드가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에드가가 그들의 편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심장이 쪼개질 듯 지끈거렸고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애가 탔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지금, 자신의 입으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이 조여 왔다.

베르톨트는 아무 말도 없이 레니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베르톨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레니에.”

레니에는 자신이 얼굴에 씁쓸한 기색을 드러냈나 싶어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찰나의 당황을 황제가 눈치챘는지 한층 더 묘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야. 왜 네 입에서 그 에드가라는 이름이 나올 때 기분이 이상하지? 아델라이드의 오라비와 꽤 친한 사이였나?”

레니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아델라이드 님이 남장하셨을 때 사용한 이름이 에드가 아닙니까. 그러니 뉘앙스가 꽤 친숙하게 들리는 것이겠지요.”

베르톨트가 씨익 웃었다.

“그것하고는 다르니까 하는 말이잖아.”

황제의 은근한 말에 레니에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자신의 감정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면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 귀신같은 황제는 자신이 몇 번 그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확신을 품고 있었다. 레니에는 어이가 없어졌다.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저쪽에서 곧 연락이 올 테니 폐하께서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저희 패만 보이고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레니에의 이 말이 베르톨트에게는 참으로 다르게 들렸다.

‘그따위 시답잖은 이야기는 집어치우라는 뜻이군.’

“에드가라는 사람을 빨리 만나고 싶군. 네 반응이 너무 재미있잖아.”

베르톨트가 턱을 쓸며 환하게 웃었다. 레니에는 진심으로 황제가 사악하게 보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말 아니다 싶은 것도 황제는 그 속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상대를 압박하곤 했다 그러니 황제가 그 특유의 눈치를 발휘할 때에는 말수를 줄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레니에는 아그리파를 만나 보러 가야겠다며 베르톨트에게 예를 취했다. 그러자 베르톨트는 크게 웃으며 도망가는 거냐고 도발했지만 레니에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문을 나섰다. 말을 할수록 초라한 변명이 될 뿐임을 알고 있었다.

* * *

오스카는 레니에 외에도 한 명을 더 만나 볼 작정이었다.

바로 아델라이드였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서 수에비의 왕비에 대해 조사해 보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나오는 것이 없었다.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왕궁 생활을 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그 잘난 황제가 선택한 여자였다. 단순히 아름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황제가 무엇 때문에 황후감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 봤자 아무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기에 오스카는 최고 시녀장 안나를 통해 접견을 청했다.

아델라이드는 안나에게서 오스카 행정대신이 접견을 요청했다는 것을 듣고 나서, 레니에를 만나 그의 의견을 물었다. 레니에는 오스카가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알렉시아 황녀와 결탁했다는 정보까지 말해 주었다.

“꺼려진다면 만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을 물리세요.”

“아니에요. 만날 겁니다. 다만 그가 저의 과거를 묻는다면… 그걸 부인해야 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당차고 야무진 대답이었다. 레니에는 그녀가 역시나 보기보다 속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직접 만나 보면 판단이 서겠죠.”

그렇게 말하며 씁쓸히 웃는 아델라이드에게 레니에가 한마디 던졌다.

“오스카 경이 아무리 불편하다 하더라도 어디 알렉시아 황녀만 하겠습니까?”

아델라이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네요.”

오스카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델라이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꽤 불편한 자리일 텐데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작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는 아델라이드 영애를 폐하의 정식 반려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애는 자격이 없습니다.”

말투로는 예의를 지키면서 정작 그 말의 내용으로는 그녀를 사정없이 깎아내리고 있었다.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듯했다.

“오늘 저를 보시고자 한 연유가 무엇입니까?”

아델라이드는 오스카의 수에 말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우선 그가 뭐라고 말하든 그의 페이스에 끌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격이 없다고 단정 지으시고 저를 인정하지 않으실 거라면 어째서 저를 보고자 하셨습니까? 이미 결론을 내리신 것을요.”

오스카의 얇은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 이 여자는 온화하게 말하고는 있어도 그 말의 내용은 마치 살갗을 베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로웠다.

“전 황제 폐하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하로서 존경하고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대단히 위험천만하고 어이없는 일을 벌이셨지요. 이렇게 폐하를 움직이는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뵙기를 청한 것이지요.”

“행정대신께선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느 귀족들과 다르십니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그 내용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삼류 모사꾼들이 하는 말처럼 앞뒤가 맞지 않으니.”

오스카는 움찔했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나 여유가 넘쳐흘렀다.

‘회의에서 발언할 때도 느꼈지만 보통이 아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삼류 모사꾼이라니요? 무례하십니다.”

“그렇다면 폐하를 존경하고 계신다면서 그분이 선택한 것을 어째서 조금 더 지켜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왜 이렇게 섣부른 결단을 내리셨습니까?”

“지금 그 말은… 영애의 과거를 부인하시는 겁니까?”

“어떤 과거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저 평온한 저 얼굴이 오스카의 눈에는 뻔뻔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오스카의 짧지 않은 인생 동안 이렇게 상대방에게 말리는 대화는 처음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치고 나올지, 어떻게 방어할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손바닥에 절로 땀이 났다.

“영애가 수, 수에비 왕국의 왕비가 아니란 말이오?”

오스카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델라이드가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닙니다. 한때 수에비 왕국의 왕비였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오?”

“전혀요. 저도 말장난을 할 기분은 아닙니다. 다만 행정대신께 지금은 제 신분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말이군요.”

오스카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네. 과거엔 그랬지요.”

아델라이드도 환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그렇다면 아델라이드 영애가 계속 폐하의 곁에 뻔뻔하게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겠군요.”

“그건 왜죠?”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과거를 인정한다면서 왜 폐하의 정식 반려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거지?”

흥분한 나머지 오스카의 입에서 반말이 마구 흘러나왔다. 아델라이드는 씩씩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논리인 겁니까? 과거에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 누군가가 그 과거를 비난한다면 지금이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그는 아델라이드가 무슨 말을 이을지 불안했다. 그녀는 말과 상황을 트는 데 황제만큼, 아니 그보다 더 유능한 듯했다.

“그렇다면 오스카 행정대신께서 먼저, 가주와 행정대신 자리를 내려놓아야 하겠네요.”

아델라이드가 비죽이 웃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스카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행정대신께서는 과거 선대 가주 동생분의 장자로서, 가주의 양자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원래 자격이 없던 분이 그것 때문에 후계자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가문의 가주가 되셨고 그 덕에 행정대신으로 30년째 세르비아 정계에서 승승장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행정대신의 말씀대로라면 본인부터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맞습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쥔 채 아우성치려는 자신의 입을 꽉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행정대신처럼 유능하고 경륜 있는 분께서 어찌 과거의 것에 이다지도 매달리시는 겁니까. 현재를 보시고 가능성을 보시고 미래를 가늠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건 간에 현재 그 사람이 이룬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 사람이 노력한 것, 그 사람이 사고하는 것에 더 치중해서 판단하겠습니다. 행정대신께서 그러하셨듯이요.”

그녀는 말로써 오스카를 들었다 놓고 있었다. 조곤조곤 말하지만 하는 말마다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이게 합리적 판단… 아닐까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오스카가 일어나서 다소 위협적으로 내려다보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움찔하지 않았다. 그 담담한 눈빛을 본 오스카는 화가 나는 한편 왜 황제가 이 여자에게 빠졌는지 이해가 갔다.

“영애…. 그 빛나는 말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낼 것이라 자신합니까? 말은 그렇게 치장할 수 있어도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어떻게든 저 눈빛을 흔들리게 하고 싶었다.

“다음에 뵙죠. 그때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오스카는 몸을 돌려 빠르게 접객실을 나왔다.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마음은 바위를 진 것처럼 묵직했다.

정치에 몸담았던 어언 30년 동안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어린 여성이라고 해서 얕잡아 봤다. 말 못할 과거의 소유자이니 이렇게 저렇게 마구 던져도 돌덩이에 맞아 장렬히 쓰러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나눠 보고서는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것인지 여실히 깨달았다. 정말이지 무참히 깨져 버렸다.

그는 황녀의 계획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오늘 당장 황녀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자신의 세력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뜻을 모을 때가 되었다.

참담한 패배에 상처 입은 자존심은 그가 그저 전진하도록 부추겼다.

베르톨트는 레니에에게서 아델라이드와 오스카가 만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찌감치 옆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탁월한 청력으로 둘의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아예 허리를 부여잡고 웃었다.

아델라이드와 공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매번 놀라웠다. 그녀의 박식한 지식이나 화법도 그렇거니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도들이 너무나 신선하고 다양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히나 더 강렬하게 그의 마음에 내리꽂혔다.

‘정말 유쾌해. 이러니 내가 반하지 않고 배기겠어.’

한참을 웃던 베르톨트는 그녀가 보고 싶어 얼른 옆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아델라이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넋을 놓고 있는 것이었다.

“아델.”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나 자신을 안아 주는 그가 있었다.

벌떡 일어난 아델라이드는 달려가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베르톨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그리고 가슴을 울렸다.

“괜찮아?”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긴장했어요.”

그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두 번만 긴장했다가는 아주 사람을 쓰러뜨리겠어. 쉐도우가 그러는데 오스카 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갔대.”

“아, 그래요?”

아델라이드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이렇게나 부끄러움도 많고 새가슴인데 가끔 어떻게 그리 당당한지 몰라. 정말 동일인이 맞아? 이렇게 매력 넘쳐도 되는 거야?”

황제의 다정한 말에는 약혼자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델라이드와의 짧은 만남을 끝낸 베르톨트는 클리터스 부니에를 호출했다. 그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집무실에 들어선 클리터스 부니에가 곧장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 베르톨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클리터스 부니에, 당분간 내 약혼자의 호위를 맡아 주게.”

클리터스의 눈이 커다래져서는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폐, 폐하!”

“이 일을 맡아 줄 적당한 사람이 경밖에 떠오르지 않아.”

클리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경. 나와 가장 오래 전장을 구른 이가 경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호위를 부탁하는 걸세. 난 그대의 충심과 능력을 잘 알고 있지.”

“부탁…입니까?”

“그래, 부탁이야.”

“그렇다면… 제가 거절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베르톨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 곰 같은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았다. 그것은 곧 아델라이드를 향한 마음 역시 깊다는 뜻이었다.

“거절하면 받아 주지. 그런데 말이야, 난 꼭 자네가 맡아 주길 바라네.”

“왜 꼭 저여야만 합니까? 뛰어난 기사들이 많습니다.”

“뛰어난 이는 많지. 하지만 진심인 이는 드물어.”

클리터스가 베르톨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키와 덩치가 남다르게 큰 클리터스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곤 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전장에서 그 험한 꼴을 겪으면서 경과 나는 서로의 곁을 지켰어. 내게는 경이 신하이기 전에 동지야. 생과 사를 함께 넘나드는. 그렇기에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경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나를 지키듯 지켜 달라고.”

클리터스는 황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심장이 묵직하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아델라이드를 향한 감정에 푹 빠져 있어서 신하로서, 또 무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주군이 반려를 생각하는 그 마음까지.

갑자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한동안 본분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럽고 황송했다.

“폐하! 제가, 어리석은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난 뛰어난 자와 진심인 자를 곁에 두지. 그런데 자네는 뛰어나면서 진심이지 않나. 그러니 자네를 믿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

클리터스 부니에의 고개가 떨어졌다.

언제나 황제를 우러러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아델라이드를 취한 남자로만 생각했었다. 불경이었다. 어떻게 황제와 자신을 동일선상에 두고 황제를 남자로서 견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간 지독히도 어리석었던 자신을 돌아보니 짙은 탄식이 나왔다.

“폐하를 섬기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아델라이드 님을 지키겠습니다.”

“고맙네, 클리터스.”

베르톨트가 보기에 아델라이드의 호위를 마음 놓고 맡길 만한 이는 클리터스 부니에밖에 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의 감정이었지만, 지금 그가 보이는 눈빛은 주군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델라이드에게 품었던 애틋한 마음이 이제 주군의 반려를 위한 성심이라는 형태로 바뀔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베르톨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며칠 동안 세르비아 황궁은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하고 또한 조용하였다. 각 부는 맡은 일을 착착 진행해 나갔고 황제와 재상도 여느 때처럼 정무를 보느라 바빠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실상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사이 오스카는 암암리에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와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귀족들 사이에 퍼뜨렸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했다.

한편 오스카가 퍼뜨린 소문을 들은 프리트홀트는 황제를 지지하는 이들을 모으고 레니에와 그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공유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아델라이드의 일상은 그 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평온하게 돌아갔다. 낮에는 정신없이 일하고 밤에는 베르톨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그러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나고 안달루스에서 정식으로 청혼서가 날아들었다. 청혼서를 가져온 사신들은 네 명의 안달루스 황실 기사, 마녀라고 불리는 마법사, 그리고 하얗고 아름다운 한 청년이었다.

은빛 실타래같이 길고 눈부신 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은 아델라이드의 오라버니인 에드가 죠세파 로렌느 드 발루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