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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장. 만났다, 그러나 그가 아니다 (32/39)

제31장. 만났다, 그러나 그가 아니다

아델라이드는 뛰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자꾸만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분명히 달리고 있었다. 외무관에서 본궁의 접객실까지 가는 길은 또 왜 이리도 긴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에드가!’

안달루스에서 온 사절단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외무관에서 일하다 보니 알렉시아 황녀의 청혼서를 전달하러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가가 그 사절단의 일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에드가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발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기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그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쌓일 때마다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왜 나를 늦게 부른 거지?’

프리트홀트와 휴고는 이미 접객실로 가 있는 상황이었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에드가가 멀쩡하니까 베르톨트가 뒤늦게라도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문제가 있었다면 안달루스에서 에드가를 공식 사절단으로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 에드가가 무사한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나를 부르지 않았을 거야.’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숨이 찼다. 빨리 달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윤과 마리안이 아델라이드의 뒤를 따라오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달리는 아델라이드를 때때로 부축했다.

아델라이드는 그렇게 힘겹게 접객실 앞에 다다랐다. 안달루스의 기사들과 세르비아의 기사들이 문 앞에 정렬해 있었고 그 옆에는 황실 최고 시종장 올란도와 최고 시녀장 안나가 있었다.

안나가 아델라이드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델라이드는 안나를 따라 기사들 사이를 지나서 커다란 문 바로 앞에 섰다. 안나가 문에 대고 고하려 할 때 아델라이드가 돌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델라이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래. 마음 단단히 먹자. 에드가가 어떤 모습이든.’

“됐어요, 시녀장님.”

아델라이드가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 님이 오셨다고 고하는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

에드가는 베르톨트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이목구비가 아델라이드와 많이 닮은 그는 피부가 새하얗고 머리카락까지 은색이라 마치 은색 빛 무리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자신이 아는 남자 중에서 레니에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에드가는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부드럽고 서늘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마치 동화에 나오는 눈의 여왕과도 같았다. 베르톨트는 마치 젊은 아그리파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드가는 안달루스 제국에서 가져온 청혼서를 레니에에게 건넸다. 청혼서를 읽는 레니에의 미간이 일그러지더니 그가 에드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에드가의 눈빛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흔들린 쪽은 레니에였다.

복잡한 표정을 한 레니에가 무언가를 묻듯 그의 진회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보았다.

“재상. 청혼서를 이리 주게.”

베르톨트는 에드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 없는 레니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레니에가 화들짝 놀라며 황제에게 청혼서를 올렸다.

황제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은 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많은 대신들이 눈도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이런 상황이 우스웠다. 그리고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델라이드를 닮은 이 남자는 알렉시아 황녀의 청혼서를 들고 오면 안 되었다. 접객실에 있는 대신들이 이렇듯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하게 하면 안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델라이드에게 모조리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베르톨트는 청혼서를 읽지도 않은 채 에드가를 향해 낮게 말을 뱉었다.

“난 청혼서보다 그대가 더 궁금하군.”

“궁금한 것을 하문하십시오, 폐하.”

에드가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안달루스 황가의 청혼서를 가지고 온 것인가?”

긴 은발의 사내가 홀 안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벨라루아에게 향했을 때 두 사람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저의 정체가 궁금하신가 봅니다.”

은발의 사내가 베르톨트를 보며 곱게 웃었다. 사내에게서 보기 힘든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지금은 알렉시아 황녀께 도움을 받고 있으나 이전에는 수에비 국왕의 매제였습니다. 지금은 패망한 수에비 왕국 말입니다.”

‘수에비’라는 말이 나오자 베르톨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는 수에비 왕국의 에드가 죠세파 로렌느 드 발루아, 바로 폐하의 약혼자인 아델라이드 님의 오라비입니다.”

에드가가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힘주어 내뱉었다. 베르톨트는 에드가의 눈에 일순간 분노가 스쳐 지나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홀 안에 있던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오스카가 술렁이는 대신들 틈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장내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에드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그대로 전 아델라이드 님의 친오라비입니다. 지금 폐하의 약혼자인 아델라이드 님은 바로 수에비 왕국의 왕비였지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어떤 이는 숨을 쉬지 않았고 어떤 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자는 에드가뿐이었다.

이 믿지 못할 광경에 레니에는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에드가는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에드가라면 아델라이드의 과거를 이렇게 까발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만큼 에드가는 동생을 아끼고 사랑했건만 그런 그가 동생을 난도질할 것이 뻔한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동생이 굳이 밝히지 않았던 과거를 어찌 저렇게 당당하게 폭로할 수 있단 말인가. 레니에는 가슴이 턱 막혀 왔다.

황제의 형형한 눈빛이 에드가를 향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느낄 정도로 강한 기운이 에드가에게 쏟아졌다.

삽시간에 하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겠다는 듯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놀란 레니에가 황제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다.

“폐, 폐하!”

“용서 못 해. 이런 식으로 아델라이드를 들먹이다니!”

베르톨트의 굵은 눈썹이 일그러졌고 입매가 한껏 비틀렸다. 황제의 몸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자 대신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뒷걸음질 쳤다. 지금까지 재잘대던 입들이 모두 닫혔다.

“그만하십시오, 폐하!”

레니에가 고통스러워 몸을 움츠리는 에드가와 그를 노려보고 있는 베르톨트를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베르톨트는 제 친우를 잠시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왜 말리느냐는 의문 섞인 노기가 떠올라 있었지만 레니에의 말대로 이내 기운을 거두었다.

레니에는 휘청거리는 에드가에게 잽싸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황제의 기운이 에드가의 몸을 상하게 한 것인지 가까이에서 들리는 그의 숨결이 고르지 않았다. 레니에가 황제를 쏘아보았다.

“대신들은 모두 물러가시오. 지금은 내가 그대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군.”

황제의 형형한 기운에 대신들은 순순하게 자리를 떠났다.

대신들이 하나둘 빠져나가 홀에는 프리트홀트와 휴고만이 남게 되었다. 베르톨트가 느른하면서도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지금 무척 심기가 안 좋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왜 이런 식으로 아델라이드의 과거를 들먹이는지 이제 솔직하게 털어놓지 그래?”

그러나 에드가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레니에의 팔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베르톨트는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에드가가 고개를 들어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몽롱했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폐하. 아델라이드를… 아델라이드를 불러 주십시오.”

찰나였지만 에드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 듯했다. 아델라이드의 이름을 말할 때는 목이 메는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윽고 황제를 보는 그의 눈빛은 처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 * *

안으로 들어선 아델라이드는 한눈에 알아보고야 말았다. 그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에드가가 맞았다.

세상 모든 빛을 다 가져간 듯 눈부신 에드가가 우아하고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델라이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언뜻 봐도 에드가의 신체에는 어떤 이상도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가 있는 쪽으로 발을 떼었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드가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오랜만이구나, 아델.”

목소리가 냉랭했다. 그에게 향하고 있던 아델라이드는 한순간 걸음을 멈칫했다.

“오, 오라버니…?”

에드가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생겨난 이상한 불안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라이드는 그만 말문이 막혀 오라버니라는 말만 작게 웅얼거렸다.

자신이 아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여야 했다. 한없이 자애롭고 너그러운 눈빛과 손길이어야 했다.

에드가는 무언가가 달라 보였다. 불안한 기운이 찬 대리석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에드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에게 닿지 못해 그저 허공만 공허하게 갈랐다. 어느새 다가온 베르톨트가 그 손을 꽈악 쥐었다.

“넌 좋아 보이는구나.”

에드가의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그가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날 선 느낌은 에드가가 풍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꼬옥 감싸 쥐고 있는 베르톨트가 보내는 염려스러운 시선을 느꼈다.

“에, 에드가!”

아델라이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렸다. 베르톨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에드가에게 튀어 나갔을 것이었다.

“하긴 나의 불행이 네게는 기회였을 테니.”

에드가에게서는 여전히 서늘한 느낌이 물씬 배어 나왔다. 거기에다가 뜻 모를 말을 하며 그녀를 비난하고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아델라이드는 참고 있던 눈물을 기어이 쏟고 말았다.

앞에 있는 사람은 에드가가 아니었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비난하지도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이렇게 심장을 칼로 에듯 상처를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어째서 그런 말을… 표정을….”

아델라이드가 무너지듯 주저앉으려 하자 베르톨트가 부축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안아 들고 싸늘하게 일갈했다.

“안 되겠군.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어. 오늘 접견은 이것으로 마치겠네. 레니에, 뒤를 부탁해!”

“아니에요. 내려 줘요. 에드가! 에드가! 대체, 왜….”

놓아달라며 울먹이는 아델라이드를 베르톨트는 더욱더 단단히 안아 홀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본 에드가가 크게 휘청였다.

“에드가!”

레니에가 다시 에드가를 붙잡았다. 하얀 에드가가 유독 더 창백해 보였다. 에드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바르르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지러워서….”

레니에가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짓씹었다.

‘도대체 뭐야? 사람을 어떻게 한 거지?’

접객실에서 한차례 소동이 있고 나서 안달루스에서 온 사절단은 외무관의 숙소로 안내되었다. 사절단은 협상 기간 동안 그곳에서 기거하게 될 터였다.

레니에는 외무관으로 가려는 에드가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리고 와 집무실에서 따뜻한 차를 나누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네, 차가 들어가니 좀 낫네요. 죄송합니다. 초면인데 이리 실례가 많습니다.”

찻잔으로 시선을 내리던 레니에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에드가는 자신의 말을 듣고 놀란 듯한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레니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초면이라…. 우리 만난 적 없습니까? 전 에드가 경이 꽤 낯익은데요.”

에드가는 레니에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얼굴을 붉히며 푸스스 웃었다.

“아뇨, 처음 봅니다. 제가 여자였다면 공작님께서 제게 작업을 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레니에의 입매가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에드가는 의아해졌다.

‘어째서 이 남자는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리고 이 반응은 또 무엇인가? 마치 나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가는 황제를 만난 다음부터 자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무언가 놓치는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또다시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이 젊은 공작은 처음 볼 때부터 이상했다. 아니, 공작이 아니라 자신이 이상했다.

그를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비틀거리는 자신을 붙잡아 줄 때 닿은 그 온기가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잔잔한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아련하고 먹먹하게 가슴을 울렸다.

“경은 동생인 아델라이드 님에게 적대감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적대감은 우아한 표현이군요. 전 제 동생인 아델라이드가 무섭습니다. 그리고 가증스럽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델라이드 님이 수에비의 왕비였을 때 국왕에게 모진 고통을 당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고통이요? 누가요? 하아! 아델이 그러던가요?”

에드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피해자인 척 연기를 하는 겁니다. 남자를 홀려서 제 뜻대로 쥐락펴락하는 가증스러운 사람입니다.”

에드가는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레니에는 에드가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에드가의 기억을 없애고 왜곡시켰군.’

베르톨트는 그대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은 아델라이드를 안아 본궁 황제의 침실로 데리고 왔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던 아델라이드는 시간이 지나도 서러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델, 그만 울어. 더 알아봐야겠지만 에드가는 좀 이상했어. 그 벨라루아가 마법을 걸었는지도 몰라.”

아델라이드도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아팠다.

마법이든 다른 무엇이든, 무언가가 에드가를 조종하고 아프게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안타까웠다.

이제 그만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싶은데 에드가는 아직도 지옥 속에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아프고 아팠다.

“베르, 베르! 에드가를….”

아델라이드의 울음이 너무나도 처절했다. 보고 있는 베르톨트까지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에드가를 구해 줘요. 제발 그를 구해 줘요. 당, 당신은 소드마스터이고, 또 황제잖아요. 그러니 제발… 제발 구해 줘….”

아델라이드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가늘게 경련하던 그녀의 몸이 베르톨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베르톨트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놓고는 이불을 가슴까지 올려 주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결코 이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고 늘 차분하고 평온한 태도를 보이던 아델라이드였다.

그런데 그렇게 감정을 잘 갈무리하던 그녀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숨이 넘어갈 듯 울면서 자신에게 애처롭게 애원하던 모습이 안쓰럽고 아팠다.

베르톨트는 안나를 불러 아델라이드를 특별히 직접 보살피라고 명하고 침실을 나섰다.

“아른프리트 경!”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아른프리트가 얼른 황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레니에 공, 프리트홀트 외무대신, 그리고 아그리파한테 전해. 지금 당장 내 집무실로 오라고!”

* * *

황제의 집무실에 레니에, 프리트홀트가 차례대로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아그리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아그리파는 벨라루아를 동반하고 나타났다. 황제와 레니에는 벨라루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벨라루아는 웬일인지 황제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릴 뿐이었다. 황제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아델라이드의 오라비인 에드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

“말을 해! 무슨 짓을 한 거야!”

황제가 벼락같이 고함쳤다.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그가 뿜어내는 살기가 벨라루아를 거세게 압박했다. 벨라루아는 금방이라도 꺾일 듯한 허리를 간신히 붙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화들짝 놀란 아그리파는 벨라루아를 감싸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베르톨트가 서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소리쳤다.

“폐하! 그만하십시오!”

레니에와 프리트홀트는 탄식을 흘렸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꽤 되어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황제는 ‘피의 군주’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적이어서 쳐 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그 대상에게는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황제가 지금은 벨라루아를 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벨라루아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아그리파를 옆으로 밀쳐 냈다. 황제의 살기가 순식간에 자신을 덮쳐 와 장기가 끊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 그러나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에드가는… 세뇌를 당했습니다. 제가 그의 기억을 없애고 뒤틀었습니다. 그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추방한 이가 수에비 국왕이 아니라 아델라이드라고 기억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추방당한 뒤 바젤에서 제게 납치되기 전까지의 기억을 지웠고, 그 자리에 알렉시아 황녀가 그를 거두어 치료해 준 덕분에 살아나게 되었다는 기억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에드가에게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몰락시키고 죽이려 한 원수입니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끔찍하게 증오하고 있습니다.”

벨라루아가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쏟아 냈다.

“이… 미친!”

황제의 눈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다시 한 번 벨라루아에게 살기를 뿜을까 봐 레니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왜 그런 겁니까? 왜 그의 기억을 왜곡시킨 겁니까?”

프리트홀트 역시 레니에와 마찬가지로 황제와 벨라루아 사이를 막아섰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에드가가 죽으니까요.”

“그게 무슨?”

“전 에드가를 황녀에게서 감추고 있었습니다. 황녀에게 순순히 그를 바칠까도 생각해 봤지만 전에 사절단으로 왔을 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안달루스로 돌아가면 재워 놓은 에드가를 깨워 세르비아로 데려오려 했는데… 돌아갔을 때 그는 이미 황녀에게 잡혀 있었습니다. 황녀는 에드가를 죽게 하고 싶지 않으면 자기가 시키는 대로 그를 세뇌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마법사 아닙니까? 황녀 정도면 충분히 제압하고 빠져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황녀에게는 마법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 혼자라면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잡혀 있는 에드가를 두고 저 혼자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들에게 당한 고통은 벨라루아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줬다. 그녀를 고문했던 사람들처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마법을 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벨라루아는 황녀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언젠가 알렉시아 황녀가 적을 어떻게 처단하는지 직접 목격한 이후로 그녀는 황녀에게 어떤 마법도 걸지 못하게 되었다.

“에드가는… 세뇌를 당하지 않으려고 황녀에게 저항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서 생활하는 데 꽤 힘이 들 겁니다. 자신이 왜 그런지도 모른 채….”

집무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벨라루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에드가가 세뇌당하기 직전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제게 폐하를 뵈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혹 자신이 미쳐 날뛰면 자신을 죽여도 되니 아델라이드를 지켜 달라고, 자신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벨라루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끅끅대며 서럽게 흐느꼈다.

에드가는 마음이 무척이나 고운 청년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벨라루아는 아그리파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관심이 갔고, 그를 지켜보면 볼수록 그가 더욱더 궁금해졌다.

결국 벨라루아는 그가 잠든 사이 최면을 걸어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알고 보니 그는 놀랍게도 아델라이드의 오라비였다.

바젤에서 철수하라는 황녀의 명을 받고서 에드가를 강제로 데리고 온 것은 순전히 충동 때문이었다. 그를 재워 놓으면 별 탈 없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미행이 붙은 줄도 모르고.

이후 세르비아에서 운명처럼 아그리파를 만난 그녀는 에드가를 아델라이드 곁으로 보내 줄 결심을 했다.

이 남매에게 더 이상 불행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큼 기구하고도 가엾은 이 사람들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이미 에드가는 황녀에게 잡혀 있었다.

알렉시아 황녀는 벨라루아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벨라루아에게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벨라루아 앞에서 에드가를 매섭게 괴롭혔다. 에드가는 죽어도 뜻을 굽히지 않을 것처럼 보였으나 지켜보던 벨라루아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굴복하고 말았다.

벨라루아는 에드가에게 기억을 새로이 집어넣었다. 그 작업을 하는 동안 에드가의 정신이 거세게 저항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작업하는 중간중간 에드가의 정신세계를 엿보았고, 그러면서 그에게 공감하고 동화되었다. 아그리파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애틋함이었다.

“세뇌는 어떻게 푸는 거지? 네가 죽으면 에드가가 정상으로 돌아오는가?”

서늘한 황제의 목소리에 벨라루아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세뇌를 건 자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그럼 세뇌를 풀 방법이 없는가?”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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