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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파국 (34/39)

제33장. 파국

베르톨트는 에드가를 만나러 갔던 아델라이드가 눈가와 코끝이 있는 대로 발개져서 집무실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도 또 허탕을 친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토닥여 주고 싶지만 지금은 레니에가 아델라이드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이따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 그녀를 위로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다녀왔습니다.”

아델라이드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폈다. 베르톨트와 눈이 마주치자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델, 피곤해 보여. 어서 가서 쉬어. 난 잠시만 레니에와 얘기를 나누고 갈게.”

“네, 알겠어요.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아델라이드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베르톨트는 문 밖에 있던 클리터스에게 아델라이드를 침실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무실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침실로 가는 동안 아델라이드는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돌연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잽싸게 다가온 클리터스가 그녀를 부축했다.

“앗! 괘, 괜찮아요.”

클리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를 말간 눈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클리터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렇게 인사를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요. 제가… 경께 제대로 인사를 드린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요.”

“…….”

“전장에서부터 지금까지요.”

클리터스 부니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드디어 그녀가 인정한 것이다. 그 전장에서의 에드가였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몽글몽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무엇을요?”

“죽지 않고 살아 있음으로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됨을요.”

아델라이드는 눈물을 흘렸다. 비단 클리터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이에게 고맙고 감사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레니에가 주었던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하아. 요즘은 왜 이렇게 툭하면 눈물이 나는지.”

겸연쩍게 웃는 모습이 꼭 그녀다웠다. 클리터스가 마주 웃었다.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온 클리터스는 베르톨트에게서 놀랄 만한 명령을 받았다.

“군대를 이끌고 바젤로 이동하게.”

“군대요? 안달루스를 공격하는 겁니까?”

“아직은 아냐. 하지만 감히 우리를 상대로 그런 어쭙잖은 일을 저질렀으니 그 대가는 받아야지. 바젤로 군대를 이동해서 안달루스를 압박하고 또 무슨 일을 꾸미려 한다면 바로 공격할 거야.”

“군대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이후로 한참 동안 황제와 레니에, 클리터스는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부터 안달루스 제국을 압박하기 위한 군대가 꾸려졌다. 그 군대의 총괄 책임은 클리터스 부니에가 맡았다.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대신들의 동의를 얻는 일은 너무나 쉬웠다. 이미 지은 죄가 있는 대신들은 황제의 결정에 어떠한 토도 달지 못했다.

* * *

침실로 돌아온 베르톨트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잠들어 있는 아델라이드를 보았다. 누웠다가 깜빡 잠들었는지 낮에 보았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얼굴을 괸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어린아이같이 귀여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아델라이드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얼굴을 들려는 찰나에 귀에 꽂힌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사랑스러워서, 그만 참지 못하고 그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입술을 떼니, 그녀의 긴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그리며 눈꺼풀과 함께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아델라이드는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눈에 초점이 잡히자 잘생긴 남자가 자신을 보면서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앗,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아델라이드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베르톨트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피곤했나 봐. 계속 누워 있어. 오늘도 갔다가 허탕 치고 왔다며.”

그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따스함이 온몸으로 번져 갔다.

“레니에 님에게 들었어요?”

“응. 아그리파와 벨라루아를 만났다는 것도.”

베르톨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아델라이드의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드레스를 벗기기 시작했다.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여 이걸 입고서는 아델라드가 편하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순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눈망울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래저래 피곤하니 오늘은 그냥 안고만 잘게. 에드가 때문에 힘든데 내가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찔리네.”

“뭐, 그렇게 괴롭히는 건 아니고요….”

“…그럼 해도 돼?”

진담인 듯한 농담을 듣고는 아델라이드가 베르톨트를 곱게 흘겼다. 그러고는 웃통을 벗은 그의 맨가슴에 이마를 통 하고 대었다. 그녀가 그의 허리를 안아 그에게 파고들었다.

“잠이 쏟아져요. 그러지 말고 그냥 안아 주세요.”

베르톨트의 웃음소리와 숨결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살랑거렸다.

“이렇게 귀엽게 굴면서 나더러 참아 보라는 건 반칙이야. 그래도… 그대가 힘들다니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라도 참아야겠지?”

그가 커다란 손으로 아델라이드의 동그란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드레스를 다 벗긴 베르톨트는 슬립만 입고 누운 아델라이드를 미련이 잔뜩 묻은 눈빛으로 한 번 더 훑은 뒤에 일어나서 자신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와중에도 아델라이드의 얼굴에는 잠기운이 가득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는 그를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시선이 야릇하게 느껴져 베르톨트는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델라이드가 작게 웃더니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잘생겼어. 야하고….”

그녀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다시 잠에 빠져 버렸다. 베르톨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잠들다니.’

그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불을 아델라이드의 가슴팍까지 끌어 올려 주고는 욕실로 향했다.

베르톨트는 한참 후에야 나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아델라이드는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했다. 베르톨트는 침실을 나서면서도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군대 출정과 관련한 국무회의만을 치르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 아델라이드는 침대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베르톨트가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았다. 직접 떠먹여 주려 하자 얼굴이 발갛게 변한 아델라이드가 시중을 들던 윤과 마리안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나를 봐 줘야지, 누구를 보는 거야.”

“폐하….”

그녀의 표정에서 난감해하는 마음을 읽은 베르톨트가 빙그레 웃으며 윤과 마리안을 물렸다.

“제가 먹을 수 있어요. 이리 주세요.”

“알아. 그냥 먹여 주고 싶어서 그래.”

아델라이드는 숟가락을 다시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지만, 베르톨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밑으로 내리며 수프를 한술 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침이 부실한 거야?”

그의 손에 들린 숟가락이 아, 하고 동그랗게 벌린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속이 편치 않아요. 그래도 기운 차리려고 제가 일부러 간단히 준비해 달라고 했어요.”

베르톨트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프를 떴다.

“오늘도 에드가를 만나러 갈 건가?”

에드가를 만나러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조금 미안해져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다시 입을 벌렸다. 어김없이 따끈한 수프가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갔다.

“오늘은 정신이 들지도 모르잖아요. 눈을 떴을 때 제가 곁에 있고 싶어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베르톨트를 본 아델라이드가 배시시 웃었다. 다시 수프를 뜨려는 그의 손을 잡고는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알았어. 그토록 기다리던 오라비니까 말릴 수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대 몸도 생각해야지. 그대가 아프면 나는 어쩌라구.”

주인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커다란 개 같았다. 그가 수프가 놓인 쟁반을 옆으로 치우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향긋하고 상쾌한 그녀의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 냄새… 정말….”

베르톨트의 손이 얇은 가운을 헤치고 들어와 불룩한 그녀의 가슴을 쓸었다. 아델라이드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몸이… 무거…워서 씻었어요. 오일 향…일 거예요.”

몸을 훑는 손길과 가슴으로 내려온 그의 뜨거운 입술 때문에 아델라이드의 말이 중간중간 끊겼다. 그녀의 체향을 두고 하는 말인데 아델라이드가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베르톨트는 웃음이 나왔다. 지금처럼, 어떨 때는 너무 순진해서 잡아먹고 싶어진다.

복숭앗빛 정점을 물고 핥으니 부드러운 몸이 잘게 떨렸다. 꽃잎 같은 입술 사이에서는 연신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델, 가슴이 커진 것 같아.”

“흐읏…. 그럴 리…가요. 으응….”

아델라이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지분거리던 베르톨트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쨍하고 때렸다.

요즈음 부쩍 몸이 무거워진 그녀다. 자꾸만 피곤하다고, 잠이 쏟아진다고 했다. 하지 않던 낮잠도 잔다. 가슴도 부풀어 오른 듯하다. 식욕도 없다.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델…. 진찰을 좀 받아 봐야겠어.”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이번 달… 그것 했어?”

아델라이드의 눈이 한 번 더 깜빡였다. 그리고 또 한 번.

그제야 그녀는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놀란 나머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 그게…! 마, 말도 안 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톨트가 윤과 마리안을 불렀다. 그는 주치의를 모셔 오라고 소리쳤다. 황제의 목소리엔 긴장이 잔뜩 묻어 있었다.

“네. 이번 달 생리는 시일이 지났는데 하지 않았고 음식을 먹으면 자꾸 체하는 것 같아요…. 또 잠이 쏟아지고… 쉽게 피곤해져요.”

대답을 하는 동안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증상이 모두 임신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일치하다는 것에 놀랐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둔하기 그지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주치의는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그녀의 팔목을 잡고 진맥했다. 베르톨트는 그답지 않게 잔뜩 경직된 얼굴이 되어 주치의가 하는 양을 눈을 번뜩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델라이드에게서 손을 뗀 주치의가 왕진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의 시선은 주치의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좇았다. 주치의는 메모지를 윤에게 건넸다.

“이것은 임신부에게 영양을 주는 약재라네. 음용 방법은 따로 알려 주지.”

침실에 있던 사람들이 ‘임신부’라는 말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와중에 윤은 얼떨결에 그 메모지를 받아 쥐었다.

“임, 임신부라니? 아델이 임….”

황제의 동공이 흔들렸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회임하신 지 8주는 되신 것으로 보입니다.”

“8주요?”

“확실한가?”

아델라이드는 8주가 맞냐며 되물었고, 베르톨트는 임신한 것이 확실하냐고 되물었다.

당황한 기색이면서도 입꼬리를 크게 올린 황제를 보며 주치의는 미소 지었다.

“네, 확실합니다. 이제부터 2, 3개월간은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민한 시기이니 이 시간만 잘 보내시면 됩니다.”

주치의는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더 말하고 이제부터는 이틀에 한 번씩 방문하여 아델라이드의 건강과 태아의 상태를 살펴보겠노라고 말했다.

그가 나가고 나서 윤과 마리안도 나갔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돌아보았다.

“아델….”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깜짝 놀란 베르톨트가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를 껴안았다.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델, 기쁘지 않…은 거야?”

베르톨트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아델라이드는 깜짝 놀라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에도 계속 울먹이자, 베르톨트는 그녀의 뺨을 들어 올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눈가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럼 왜 울지?”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빡이자 뿌옇던 시야가 밝아졌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불안한 표정과 달리 그의 눈빛은 지극히 다정했다. 밤하늘과 같은 그의 눈동자에 그녀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그녀는 베르톨트의 목덜미에 팔을 둘러 그에게 착 달라붙었다. 울먹이면서도 소리 내어 쿡쿡 웃었다.

“미안해요, 베르. 내가, 내가 정말 이상하죠? 내가 봐도… 정말 이상해요.”

아델라이드는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 곳곳에 소리가 나도록 입 맞추었다. 베르톨트의 웃음소리가 몸을 통해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울림이 좋았다. 웃음소리는 특히 더 그러했다.

“미안해서요. 몸이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미처 못 알아들었어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그래도… 설마 임신일 줄은….”

지금 생각해 보니 임신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약혼한 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으니 어느 한쪽에 이상이 없는 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수에비 왕국의 왕비였을 때 자신의 육체를 저주했다. 잘 되지도 않는 육체관계를 억지로 맺고 나서는 혹시나 임신이 될까 두려움에 떨었었다.

평생 임신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온갖 모욕을 당한 자신의 육체를 사랑할 수 없어서 그런 육체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육체는 그저 고통만을 느끼게 하는 저주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아그리파의 마법 덕분에 등이 깨끗하게 나았고 마음의 상처도 동시에 치유가 되었지만, 육체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베르톨트와의 잠자리에서 지금까지 느낀 적도 없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쁨과 쾌락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 것을 알게 해 주는 몸이 사랑스럽거나 소중하지는 않았다. 임신이라는 것은 그저 남의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임신이라고 주치의가 말한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배 속에 있을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미안했다. 계속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엄마인 자신은 그런 것도 모르고 몸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어째서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 중요한 변화는 몰랐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서는 마음속에 자리했던 말들을 모두 쏟아 냈다. 듣는 내내 그는 말없이 아델라이드의 등만 쓸어 주었다.

한참 후 아델라이드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그가 입을 열었다.

“다 울었어?”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웃음이 잔뜩 묻어났다.

“우리 아이는 그대를 닮아서 마음이 올곧고 넉넉할 거야.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눈물이 많고 아빠가 엄마만 아는 바보라고 해도 이해해 줄 거야. 그러니 아이가 우리에게 온 것에 감사하자고.”

베르톨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듯이 토닥이며 흔들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아델라이드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가슴이 뻐근했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싶어 걱정스러웠다.

“아델, 섭섭하겠지만 그대와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당분간 이 일은 비밀에 부쳤으면 해. 결혼식이 끝나고 에드가 일까지 해결되면 그때 공표했으면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네, 그렇게 해요. 당분간은 우리만 알아요.”

“그리고 주치의 말대로 예민한 시기이니만큼 외무부에는 한동안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결혼 준비 때문이라는 좋은 핑계도 있고.”

“그래도 아버지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지, 할아버지는 알고 계셔야지.”

아델라이드는 부끄러우니 베르톨트가 말해 주면 좋겠다고 웅얼거렸다.

이내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베르톨트는 방금 전만 해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던 아델라이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품속에서 잠든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임신하면 호르몬의 영향으로 감정이 널을 뛴다더니 아델라이드도 그런 건가 싶었다. 그녀가 너무나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한참을 아델라이드만 바라보던 베르톨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지근 시녀 윤과 마리안, 최고 시녀장 안나를 불러 아델라이드의 임신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때가 되면 공식적으로 발표를 할 테니 그때까지는 이 사실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라는 황명이었다.

* * *

보고를 받는 내내 황제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레니에와 프리트홀트는 오늘따라 황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보고를 다 마친 프리트홀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물었다.

“폐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좋은 일은 무슨….”

요즘 황제의 기쁨은 아델라이드에 관련된 것뿐이다. 아델라이드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직 에드가의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저렇게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걸까. 레니에는 가늘게 뜬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에드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는가?”

“네, 잠시 깨었다가도 곧 잠이 들곤 합니다. 육체는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는데 기억은 더디게 돌아오는 듯합니다.”

“에드가는….”

베르톨트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만일 에드가가 아델라이드를 해하려 하기라도 하면 자신이 에드가를 직접 처단할 생각이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지금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레니에, 어떻게 해서든 에드가의 기억이 돌아와야 해.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클리터스가 모레 출정하면 바젤까지 가는 데 길어도 5일…. 난 안달루스에 그리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아. 모든 것은 10일 안에 끝날 거야.”

레니에의 얼굴이 굳어졌다. 친우이며 주군인 베르톨트는 한번 한 결심을 번복한 적이 없었다. 전쟁을 할 때는 그 냉철한 면모가 더 유감없이 발휘되곤 했다. 그야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황제였다. 그러니 에드가에게, 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0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윽고 레니에가 나가고 프리트홀트만이 남았다.

베르톨트는 그에게 차를 한잔 권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프리트홀트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폐하, 말씀하십시오.”

“경은….”

베르톨트가 프리트홀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팔뚝에 소름이 돋는 듯하고 목구멍이 꽉 막혀 왔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프리트홀트는 황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흠, 으흠…. 경은 곧 할아버지가 될 걸세.”

옆으로 긴 프리트홀트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프리트홀트가 입을 뻐끔거렸다.

“하, 할아버지요?”

“아델이… 그, 임…신을 했어. 벌써 8주나 되었다는군.”

“8주….”

8주라고 말하는 순간, 베르톨트는 살짝 민망해졌다. 장인이라는 존재가 이런 것인가. 생전 프리트홀트에게 느끼지 않았던 감정이 피어났다.

프리트홀트는 황제의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여러 가지 상념이 드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탁자 위 찻잔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경?”

무거운 공기를 견디지 못해 먼저 말을 꺼낸 이는 베르톨트였다. 부르는 소리에 프리트홀트가 얼굴을 들어 베르톨트의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만 조심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약혼 기간인데 아델이… 임신을 하게 만들고….”

프리트홀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베르톨트는 자신을 질책하는 듯한 말에 움찔했다. 프리트홀트 앞에서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 기쁘지 아니한가?”

“기쁩니다. 당연히 기쁩니다. 하지만 저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할아버지이기에 앞서 아델의 아비입니다. 아델이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해서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게 좀…!”

약혼한 후부터 아델라이드는 말라 갔다. 남들은 황제가 약혼자를 끔찍이도 사랑한다고 좋겠다며 쑥덕거렸지만 프리트홀트는 피곤한 듯 틈만 나면 눈을 감고 있는 아델라이드가 너무나 측은했다.

하지만 사위가 될 것이라고는 하나 황제인 베르톨트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어 두고 보던 차에 기어이 이런 사달이 난 것이었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황제가 2세를 본다고 하면 기뻐하며 축하해야겠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딸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베르톨트는 민망하면서도 서운해졌다. 다른 이는 모르더라도 이 기쁜 소식을 프리트홀트에게는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고 아델라이드의 생각도 같아서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인데, 프리트홀트는 기뻐하기는커녕 듣자마자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베르톨트가 그렇게 생각하던 때, 프리트홀트가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제가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여식인 아델라이드에 대한 걱정이 앞서 아비로서 드린 말씀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실…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얼굴을 든 그의 얼굴에는 작게나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를 본 베르톨트는 한쪽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인이 되고 나서 프리트홀트를 대하기가 쉽지 않군.’

* * *

칠흑같이 어두운 곳이었다. 사방에서 어둠보다 검은 것들이 벨라루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벨라루아는 격렬히 저항하다가 힘겹게 뿌리쳤다.

저만치 하얀 빛이 보였다. 겨우 검고 검은 것들을 떨쳐 낸 벨라루아는 빛을 향해 뛰었다.

그러던 중 그 빛 사이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녀는 그 손을 있는 힘껏 잡았다. 벨라루아의 몸이 붕 하고 들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자신을 붙잡고 흔드는 아그리파가 보였다.

“벨라! 벨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아그리파가 절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벨라루아는 손을 뻗어 그의 하얀 얼굴을 만졌다.

“아그리파….”

아그리파는 자신보다 더 아파하고 있었다. 벨라루아는 그런 그를 보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오는 듯했다.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신…, 당신이었어. 거기서 나를 끌어 준 사람…. 아그리파!”

벨라루아는 이틀 만에 깨어났다. 이틀 전, 그녀는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고 이상하리만큼 잠이 쏟아졌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길로 내리 이틀 동안 깨지 않은 것이었다.

“잠들기 전 에드가를 보러 갔을 때 그가 나처럼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어. 내가 그의 정신을 조종하지 않는데… 어째서….”

“세뇌하기 전에 그 시나리오는 누가 짰지?”

“알렉시아 황녀….”

“그럼 세뇌할 때 항상 그녀도 그 자리에 있었어?”

“응. 황녀가 어떤 기억을 넣으라고 나에게 지시했으니까 기억을 조작할 때는 항상 곁에 있었어.”

아그리파의 입매가 굳어졌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벨라루아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벨라, 아무래도… 세 사람의 정신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연결되어 있다고?”

“그래. 마법으로 세뇌를 하는 건 그래서 위험해. 서로의 정신세계가 연결될 수 있거든.”

그러고 보니 벨라루아는 언제부턴가 에드가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황녀도 그런 감정을 겪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황녀도 에드가에게 동화될 수 있다는 거야?”

“황녀는 기억을 조작하는 최상위에 있는 존재야.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포식자와도 같아. 세뇌를 당한 에드가는 그 최하위에 존재하고 있고. 그러니 그녀가 에드가의 영향을 받는 것보다 그녀의 증오와 미움이 에드가에게 가는 것이 훨씬 쉽겠지.”

“그, 그럼 나는?”

“황녀에게 너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에 해당할 거야. 물론 너 역시 그 먹이사슬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니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아마 꿈속에서 네가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고 했던 그 어둠은 황녀의 정신세계 중 일부일 거야. 이제 너는 쓸모없게 되어 버렸으니 그 어둠 속에 너를 감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아그리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우린 정신을 훈련해 온 마법사니까 그렇게 어두운 정신세계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지만 에드가는…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에드가의 세뇌는 세뇌를 건 내가 죽든가, 아니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누이 아델라이드가 사라져야 풀릴 거야.”

벨라루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황녀가 시켜서 세뇌를 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에드가를 죽이겠다 하니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한 것이었다. 세뇌 마법은 예로부터 금기시되어 와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기에 혹시라도 부작용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수습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드가를 구하기 위해 했던 세뇌가 에드가를 좀먹고 급기야 아델라이드를 죽음으로 몰고 있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에게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델라이드를 보호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이다. 황제라면 어떤 수를 써서든 그녀를 지키려 들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모든 것은 에드가가 감당할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벨라루아는 아그리파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울먹이며 말했다.

“아그리파, 이 상황을 어떻게…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이제 모든 응어리들을 내려놓고 싶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도, 미움도 없이 그저 아그리파와 평온하게 살고 싶었다.

그의 연인이 되지 못하고 그저 스승과 제자 사이로 남아도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 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 줄 알게 되었으니까.

“아그리파…. 나 이제 욕심부리지 않을 거야. 더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욕심내고 싶어. 에드가와 아델라이드를 살릴 방법이 없을까?”

벨라루아는 간절했다. 그 안타까운 남매를 살리는 것이 인간과의 질기고도 질긴 인연을 끊는 길이 될 것 같았다.

아그리파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폐하와 레니에 전하를 만나 봐야겠어.”

오늘 레니에는 평소보다 일찍 퇴궁했다. 에드가가 깨어났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몸이 안 좋아 누워 있다는 아델라이드에게는 소식을 전하지 않고 일단 자신이 먼저 가서 살펴보겠다고 베르톨트에게 말했다. 베르톨트 역시 아델라이드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에 그러라고 하며 퇴궁을 허락했다.

레니에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그리파와 벨라루아가 황제를 뵙기를 청했다. 베르톨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두 마법사에게서 벨라루아와 에드가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짐작되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혹… 안달루스에 있는 알렉시아 황녀가 이곳에 있는 에드가에게 어떤 지령 같은 것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황녀의 의지가 강하다면요.”

아그리파가 대답했다. 베르톨트의 진하고 굵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에드가나 벨라루아가 죽어야 하고?”

“…지금으로썬 그, 그렇습니다.”

아그리파와 벨라루아가 움찔했다.

“아니! 또 하나 있지.”

아그리파와 벨라루아가 눈을 크게 뜨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내 생각에는 알렉시아 황녀가 사라지는 것도 해결책 중 하나일 거야. 그녀도 세뇌를 하는 자이니!”

황제는 곧바로 어딘가로 보낼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며칠 전, 휴고로부터 안달루스 권력 구도의 미세한 변화를 보고받으며 세웠던 계획이 있었다.

휴고는 안달루스 황녀의 약점을 찾아내었다. 그 약점을 빌미로 안달루스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바꿀 아이디어를 베르톨트에게 고했다. 베르톨트는 휴고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안달루스를 흔들 명분을 만들었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다.

아그리파와 벨라루아는 자신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서신을 쓰는 데에만 몰두하는 황제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 * *

레니에가 침실에 들어갔을 때 에드가는 깨어 있었다. 그림처럼 곱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니에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마치 그와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처럼.

“에드가….”

“오셨습니까.”

레니에는 에드가에게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에드가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에드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제가 중간에 잠깐 깬 것 빼고는 내리 5일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5일 동안.”

레니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5일 동안 에드가가 이대로 영영 잠들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몸은 황궁에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에드가의 옆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황제가 앞에 있는데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서 빨리 에드가에게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 일을 가지고 앞으로 황제가 저를 두고두고 놀려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몸이 너무 가벼워요.”

에드가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환하게 웃었다.

‘이 얼굴이 보고 싶었어. 웃는 당신이 보고 싶었어.’

레니에는 에드가를 보며 웃음 지었다. 가슴 한편이 시리도록 저며 왔다.

“에드가, 난 그대를…. 그대가 좋아.”

에드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레니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그대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대를 알아. 그대도 나를 알고. 우린… 상황이 여의치 않아 헤어지긴 했지만 난… 우리가 서로를… 조금은 마음에 두었다고 생각해.”

레니에는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심지어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상대에게 지금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게….”

“알아요.”

에드가가 자신의 말을 자르며 한 말에 레니에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드가는 레니에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레니에는 또다시 가슴이 시려 왔다.

“전하와의 기억이 돌아왔어요. 전부는 아니지만요.”

“…돌아왔다고?”

“네. 그래서 제가 전하께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요. 전하의 이 시선… 알아요.”

에드가는 끝말을 웅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레니에는 시리디시렸던 가슴에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웃음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

“그럼 어디까지 기억이 돌아왔는지 좀 들어 볼까?”

에드가는 기억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레니에는 자신과의 지난 일들을 말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사실만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에드가의 그때 그 감정이 덧붙여졌다.

레니에의 지난했던 시간들이 보상받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은 지난 시간들을 함께 나누었다.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레니에 님. 그런데… 아델라이드를 만나고 싶어요.”

레니에는 흠칫 놀랐다. 그가 먼저 아델라이드를 만나 보겠다고 하면 기뻐해야 하건만 이전처럼 그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또다시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에드가….”

“전하와의 기억이 돌아온 동시에 아델라이드에 대한 제 기억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전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델라이드는 제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인걸요. 제… 목숨만큼이나요.”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부탁이니, 아델라이드를 꼭 좀 만나게 해 주세요.”

* * *

베르톨트는 안달루스의 바오로 공작과 물밑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는 한편 공적으로는 안달루스 제국에 정식 항의 문서를 보냈다. 그 문서에는 두 가지 사안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는 약혼자가 있는 세르비아 황제에게 청혼서를 넣은 것이 알렉시아 황녀 개인의 뜻인지 안달루스의 뜻인지를 확인해서 답변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는 만일 황녀 개인의 뜻이라면 세르비아의 황제와 약혼자를 우습게 보고 한 처사이니 세르비아로 와서 직접 사과를 할 것, 만일 안달루스 제국의 뜻이라면 세르비아 전체를 우습게 보고 한 처사이니 이 또한 간과할 수 없어 군대를 움직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통 나라끼리 청혼서를 주고받을 때에는 양측이 서로 합의한 후에 진행한다. 이는 나라 간 기본적인 예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떠한 합의 없이 안달루스가 세르비아에게 청혼서를 일방적으로 보낸 것으로, 상대를 속국으로 보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베르톨트는 이를 빌미로 강경하게 나가기로 결정했다.

결국 알렉시아 황녀만의 뜻이라면 안달루스는 알렉시아를 내줘야 하고, 제국의 뜻이라면 두 나라는 전쟁을 하게 될 판이었다.

현재 안달루스의 황제는 적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멍청한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시아 황녀는 힘이 많이 약해진 터라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간 은밀히 황녀의 뒷배가 되어 주던 바오로 공작 또한 황태자에게 붙어 버린 상황이었다.

베르톨트의 서신을 따로 받은 바오로 공작은 알렉시아 황녀를 세르비아에게 내주자고 귀족들을 부추겼다. 귀족들의 수장 격인 바오로 공작의 뜻이 그러하자 안달루스 귀족들은 세르비아와의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며 황녀를 내어 주자고 황제를 채근했다.

마침 바젤에 세르비아 군이 주둔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안달루스 황제의 결정에 박차를 가했다. 애초에 청혼서를 넣은 것은 황녀의 뜻이기도 했고 황제는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딸을 보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안달루스 황제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세르비아 군이 바젤에 도착한 지 2일째 되는 날, 안달루스는 알렉시아 황녀를 보내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

알렉시아 황녀는 세르비아 땅을 밟는 순간 죄인이 되었다. 그녀가 세르비아 황제에게 청혼서를 넣은 것은 외교 결례에 해당하나 세르비아에서 ‘죄’라고까지 보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황제의 약혼자인 아델라이드의 오라버니, 에드가를 세뇌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세뇌를 건 마법사 벨라루아가 황녀에게 사주를 받았다고 밝힘으로써 드러나게 되었다. 벨라루아는 황녀의 명으로 세르비아의 황제에게 독까지 먹였다는 것 또한 실토했다.

재판장에는 세르비아의 대신들이 모여 있었다. 한쪽에는 아델라이드와 에드가, 벨라루아와 아그리파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무 표정 없이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알렉시아 황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두 손은 포박되어 있었다.

“에드가를 세뇌하는 자리에는 항상 알렉시아 황녀가 있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황녀?”

벨라루아가 말하고 레니에가 황녀에게 물었다. 알렉시아 황녀가 벨라루아를 잠시 노려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 말고 대답을 하세요.”

레니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를 한 번 힐끔거린 알렉시아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같이 있었습니다.”

“계속하세요, 벨라루아.”

벨라루아는 그 후로 에드가의 기억을 어떻게 알렉시아가 재구성했는지 낱낱이 실토했다. 중간에 기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에드가를 황녀가 직접 고문했다는 것까지 덧붙였다.

장내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술렁였다. 알렉시아를 향해 비난하는 소리와 야유, 눈빛이 쏟아졌다.

아델라이드는 벨라루아의 증언을 듣는 내내 몸이 덜덜 떨렸다. 마지막에 황녀가 에드가를 고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참으려 계속 입술을 짓씹으며 견뎌 왔는데 결국은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내려온 베르톨트가 곁에 와 있었다. 그가 아델라이드의 손을 꼬옥 쥐었다.

아델라이드는 그를 곁눈으로 보며 눈가를 닦아 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녀의 눈 속에는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드가는 벨라루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델라이드만을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를 만나고 싶다고 했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워낙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레니에 또한 에드가에게 조금 기다리라는 답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3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에드가는 아델라이드를 보게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재판장 안으로 들어서는 에드가를 보자마자 그에게 다가와 괜찮은지 묻고 또 물었다.

왜곡되었던 기억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다는 대답을 들은 아델라이드는 울컥하여 그의 품 안에서 흐느꼈고 에드가는 이제 괜찮다며 아델라이드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 황제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황제를 돌아봤다. 황제가 눈빛으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재판이 끝나고 그동안 못 다한 얘기를 나누자며 에드가의 손을 꼭 잡았다. 에드가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순순히 누이를 황제의 곁으로 보냈다.

언뜻 보기에는 에드가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듯했지만 레니에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니에는 에드가가 재판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 아델라이드와 만났을 때도, 아델라이드가 황제에게 가고 나서 그가 혼자 남았을 때도 레니에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 아델라이드와 함께 있을 때만 해도 애틋하고 다정했던 에드가의 눈빛은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변해 버렸다.

시선은 계속 아델라이드를 향해 있었으나 그 눈빛에는 애틋함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알렉시아 황녀를 볼 때 느꼈던, 마치 정물과도 같은 그 무표정만이 그의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간직한 채로 레니에는 심문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안달루스의 알렉시아 황녀 그대는 세뇌를 하기 위해 흑마법을 사주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레니에의 말이 끝나도 알렉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재판장 안에 있는 황제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토록 갖기를 원했었다. 그토록 옆에 서기를 원했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

자신의 아비가 자신을 세르비아에게 내어 주겠다고 했을 때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웃어서 사람들이 이제 황녀가 미친 게 아니냐며 수군거리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멈출 수가 없었다.

유약하고 멍청한 황제에 이어 그보다 더한 바보가 황위를 이어 받는 것인가. 귀족들의 수장인 바오로 공작이 그 황제를 조종하고?

그녀는 안달루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다. 이럴 바에야 세르비아에게 복속되어 젊고 유능한 황제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훨씬 좋다. 그런데 어째서, 안달루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말인가.

역시 바보들은 어쩔 수 없다. 그중 가장 심각한 바보들을 부모로, 형제로 두고 있는 자신이 가여울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자신의 뜻만 이루면 되는 일이었다.

재판장에 선 그녀의 눈에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는 에드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에드가는 아직 세뇌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아델라이드를 죽이라고 명한다면 그는 자신의 충실한 꼭두각시가 되어 아델라이드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에드가를 움직일 때가 왔다.

그녀의 눈이 베르톨트의 옆에 서 있는, 환한 빛과 같은 여자를 보았다. 알렉시아는 작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에드가.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너를 잔인하게 찢고, 숨도 쉴 수 없게 목을 조인 그년을 죽여. 다시는 말하고 웃을 수 없게 아델라이드를 죽여. 다시는 황제를 바라볼 수 없게 죽여 버려!”

주문과 같이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알렉시아의 눈이 기괴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아델라이드를 향해 움직이는 에드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베르톨트는 알렉시아의 이상한 눈빛과 입 모양을 보았다. 청력이 뛰어난 그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시아의 중얼거림이 아주 잘 들렸다.

이다음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베르톨트에게는 억겁과도 같았다. 그의 눈에는 하나하나가 슬로모션처럼 느릿하게 보였다.

호위 병사들이 무엇이라 외치며 기이하게 웃는 알렉시아를 붙잡아 바닥에 쓰러뜨렸다.

에드가가 아델라이드를 향해서 단검을 쥐고 달려갔다.

에드가의 힘에 밀려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아른프리트의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에드가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정신은 에드가가 아니라 황녀 알렉시아였다.

베르톨트는 에드가를 향해 검을 높이 들고는 사선으로 길게 그었다.

아니, 그으려 했다. 레니에가 에드가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레니에!’

그러나 이미 방향을 정한 베르톨트의 검은 레니에를 내려쳤다.

공기를 가르는 검의 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레니에가 베르톨트를 보며 우뚝 섰다. 에드가는 멍하게 레니에를 보며 그대로 얼어 버렸다. 레니에의 입에 서글픈 미소가 피어올랐다.

“폐, 폐하…!”

그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레니에!”

레니에의 몸이 종이 인형처럼 펄럭이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 버렸다. 에드가가 스러지는 레니에의 몸을 껴안으며 주저앉았다.

호위 병사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엎드린 채 그들을 보고 있는 알렉시아의 얼굴에는 기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한순간에 세차게 터져 나왔던 비명은 온데간데없이 고요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궁…의! 궁의! 궁의를 불러! 어서!”

황제의 미친 듯한 울부짖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사람들의 탄식과 비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베르톨트가 에드가의 품 안에 있는 레니에를 빼앗아 안아 그를 흔들었다.

“레니에! 레니에! 눈을 떠 봐! 레니에!”

베르톨트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 때문이었을까. 감긴 레니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겹게 올라갔다. 피로 범벅된 그의 손이 베르톨트의 손을 꽉 잡았다.

“베…르! 에…드가의 잘…못이 아니야! 알…지?”

“닥쳐! 정신 놓으면 안 돼! 너, 너…! 너 정신 놓으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악다문 베르톨트의 잇새로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 그의 눈에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레니에를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본 레니에가 힘겹게 미소 지었다.

곧이어 황제의 주치의가 달려와서는 레니에의 상태를 살폈다. 에드가는 여전히 주저앉은 그대로 망연자실해 있었다.

“베, 베르…!”

그때, 베르톨트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아델라이드가 애달프게 웃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나…. 어떡, 어떡해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그의 눈빛이 아델라이드를 훑어 내렸다. 그녀의 드레스 아래가 시뻘겋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우, 우리 아기…! 베르! 우리 아기!”

아델라이드의 몸이 스르르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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