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도와드릴게요.2021.10.04.
거친 손가락 끝에 눌린 입술 사이로 지나치게 짧은 감상이 흘러나왔고, 올리비아의 속눈썹은 풍랑에 흔들리는 나비의 날개보다 더 빠르게 팔락거렸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제 입가를 대충 쓱 문지른 올리비아는 더없이 덤덤하게 답했다.
“달겠지. 달게 먹으려고 만든 거니까. 단 걸 먹었으니 이제 말해 봐.”
잠시 말을 끊고 다과를 하나 더 집어 들고 오물거린 올리비아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죽기 전에 들은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강해지고 있는 거다.”
크라이어가 그녀의 말끝을 붙잡았다. 그에 입을 벌린 채 그를 멀거니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더듬더듬 다시 물었다.
“강……해지고 있다고? 당신이?”
거기서 더? 라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어 버렸다.
“네 번의 죽음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와락 소리쳤다.
“성! 성을 무너뜨렸다고! 당신 칼질 한 번에 제국 황궁의 성벽이 박살 났어!”
온전히 진심만이 담긴 경악에 찬 외침에 크라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선 성벽을 한 번에 파괴하는 건 무리다. 방과 방 사이의 벽이라면 몰라도.”
“뭐?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물론 성벽이든 방과 방 사이의 벽이든, 칼질 한 번으로 박살 내는 것 자체가 평범과는 거리가 먼, 아니, 거리가 멀다 못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사 몇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은 둘의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크라이어를 본 올리비아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다시 입을 벌렸다.
“어떻게 강해지는 거야?”
여타의 기사들처럼 수련을 하거나 하다못해 검이라도 뽑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했건만.
“글쎄. 정확히 말하자면.”
크라이어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이 봉인되어 있다가 하나씩 풀리는 느낌이랄까.”
올리비아는 또 말문이 막혔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 전쟁을 단신으로 일으켰다가 단신으로 황궁 기사단을 쓸어버리며 전쟁을 끝내버리는 무력이?
“당신…… 과거에 대체 뭘 하던 사람이었던 거야?”
“그걸 알면 이 빌어먹을 노예 계약을 풀 만한 단서도 알아낼 수도 있겠지”
올리비아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똑똑. 한밤중 두 번째 노크 소리 뒤로 황제의 최측근인 세바스찬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녀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황녀 궁의 내밀한 안쪽에서 불장난을 즐기던 기사의 시체가 질질 끌려나가고 몇 시간 후. 먹장구름이 가득 끼었던 밤의 하늘이 거짓말처럼 정오로 향하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각. 동글동글한 다과들이 세심하게 세공된 접시 위에 소담히 담긴 테이블에 몇몇 영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이번에 새로 생긴…….”
“북부에서 오신 기사님의 추천으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영애들의 대화 주제는 쉴새 없이 변했고, 때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만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오고, 또 다른 이야기가 뒤섞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백작가의 영애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기사 말이에요.”
수없이 많은 기사 중 누구라고 콕 짚어 말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기사의 정체를 되묻지 않았다. 현 제국에서 ‘그’ 기사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릴 기사는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황녀를 첫눈에 사로잡아 황궁에 입성한 이름 모를 노르덴국의 기사. 말을 꺼낸 영애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지만, 다른 영애들은 그녀를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귀를 쫑긋 세우며 숨을 죽였을 뿐.
“한밤중에 황녀 전하의 침실 주변에 있었다죠.”
“어, 어머나.”
“어머어머, 역시.”
한껏 목소리를 낮춘 영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침실 주변에 있었던 건 맞다. 단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어대며 으레 상상하는 것 같은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그 밤의 진실이 구구절절 알려지지는 않았기에, 사람들의 상상은 점점 더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아아, 너무 멋져요.”
테이블의 중앙에 가까운 자리에 앉은, 분홍 머리의 백작 영애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첫눈에 반하다니. 그것도 황녀 전하와 이름 없는 기사. 신분과 국경을 넘은 사랑!”
마치 연극에나 나올 법한 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기실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관계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고, 둘을 저울에 놓는다면 무게 중심이 크라이어 쪽으로 기울 테지만. 둘 사이의 사정을 알 길 없는 이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벽을 넘는 연인이리라.
“확실히 신분 차가 너무 크긴 하죠. 노르덴 국의 왕자도 아니고, 일개 기사…….”
어느 영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전히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지은 분홍 머리 영애, 앙브흐가 양손을 모아 쥐며 외쳤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에 입을 열려던 영애들이 하나둘 입을 닫았고, 그 후 한참이나 앙브흐의 재잘거림만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니까요. 하아아.”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그녀가 겨우 입을 다물자 저도 모르게 질린 듯한 표정을 지은 어느 영애가 얼굴을 감추려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영애들도 입을 떼지 않고 동시에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릴 뿐. 앙브흐의 쉴 틈 없는 재잘거림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운명적인 만남과 베일에 싸인 사랑뿐이었다. 그토록 많은 말을 쏟아내면서도 황녀와 기사의 스캔들이 정치나 외교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건 먼지 부스러기만큼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범하다면 비범하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또…….”
다른 영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돌린 앙브흐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세상에!”
“이게 얼마만 인가요!”
“맙소사.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모습을 보인 영애를 다들 한 마음으로 반겼지만, 누구도 그녀가 왜 이리 오래 나타나지 않았는지 묻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그간 그녀의 가문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주최자인 영애가 얼른 자리를 하나 더 준비했고, 곧 그녀는 테이블의 중앙에 앉게 되었다.
“정말 잘 왔어요.”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와 꽤 가까이 지내던 영애가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지만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그녀는 씁쓸하게 웃을 뿐.
“축하해요!”
그녀의 생각을 가르고 경쾌한 축하 인사가 울렸다. 앙브흐는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전부 해결됐다고 들었어요, 그렇죠?”
해맑은 앙브흐의 확신에 찬 질문에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네……. 해결이…… 됐죠.”
힘없는 목소리와 그보다 더 맥아리 없는 미소였지만, 어쨌든 해결이 되었다는 답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색이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기에 따라서 축하해주려던 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기만 했을 뿐.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앙브흐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정말 잘됐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네…….”
어설프게 웃으며 앙브흐의 손을 되도록 자연스럽게 떼어낸 그녀의 속은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앙브흐의 보드랍기 그지없는 손이 닿은 부분을 닦아버리고 싶기도 했고, 다시 꼭 잡고 싶기도 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지. 앙브흐 타렌과의 관계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연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도와드릴게요.’
그녀의 어려운 사정을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앙브흐는 정말로 그녀를 돕기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었고, 그녀의 가문은 수렁에서 벗어났다. 돈으로 시작된 문제이니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타렌 가문이 제국, 아니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대부호가 아니었다면, 예전에 파산하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가문이 망하기 직전까지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고 향락을 즐기던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닦달하며 어떻게든 타렌 가문에서 돈을 더 쥐어짜길 바랐다. 부모님에게서 도망치듯 가문을 나와 참석한 자리에서 앙브흐와 마주칠 줄은…….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까 먼저 일어날게요.”
끝까지 진심으로 해맑은 미소를 남긴 채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앙브흐에게 그녀 역시 손을 흔들어주긴 했다. 이윽고 앙브흐의 분홍색 머리카락 끝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후우…….”
누군가가 내뱉은 한숨 소리가 울렸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여기저기서 지친 기색의 한숨이 울렸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질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에 진심인 영애군요.”
그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타렌이라는 거대 가문의 후계자가 사랑에‘만’ 진심이라 대단하다는 말은 험담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아마도 누군가가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이 모두의 진심이었으리라. 이윽고 애매한 미소를 띤 누군가 한참이나 순화된 말을 내뱉었다.
“네…… 참, 맑은 영애군요.”
앙브흐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에게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괜찮나요?”
그녀와 꽤 가깝게 지냈던 영애의 진정어린 얼굴을 보면서도 그녀는 차마 괜찮다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사위에 다시 적막이 내렸다. 보통 침묵은 긍정이라 했지만, 그녀의 그늘진 얼굴을 보고 괜찮은 거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으니까.
“잘…… 모르겠어요. 당장 급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아마 머지않아 또 문제가 생길……거예요. 너무나도 쉬운 길을 알아버렸으니까요.”
아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한 번은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어도 곧 도돌이표처럼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 문제는 이리 쉽게 해결되지 않겠지. 누군가의 호의는 영원하지 않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는 더더욱. 만약 부모님의 말씀대로 타렌 영애를 어떻게든 구슬려 또 타렌의 돈을 받아낸다고 해도, 다음은? 그다음에는? 그녀는 메마른 눈으로 앙브흐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때 앙브흐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기는커녕 상상하기도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터. 그것을 알기에 그녀 역시 앙브흐의 손을 내치지 않고 잡았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앙브흐가 밀어준 다과를 도로 밀어냈다.
“타렌 영애의 선의는 정말이지 아름답고 고맙지만…….”
온전한 선의로 시작한 일이 종국에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느끼고 싶지 않았건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찻잔을 긁었다.
“타렌 영애의 선의는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물음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허공에 흩어졌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