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당신이라서 그래. (20/146)

#20. 당신이라서 그래.2021.11.08.

16549707012083.jpg“그래. 내가 누굴 죽여 놓을지 그렇게나 불안하면, 차라리 함께 가서 확인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16549707012088.jpg“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올리비아가 항변하려 했지만, 크라이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16549707012083.jpg“그렇게까지 했다.”

16549707012088.jpg“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신 머릿속이나 입에는 거름망이라는 게 없어? 이럴 때는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진실이 그렇더라도 그러려니 덮어두는 법이잖아.”

일견 대단히 상식적인 타박이었지만, 크라이어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16549707012083.jpg“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리했겠지.”

16549707012088.jpg“나한테도 필요해!”

16549707012083.jpg“황녀.”

크라이어는 문가에 기댄 채 올리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16549707012083.jpg“말을 돌리지 마라. 왜 함께 가지 않는 거지.”

16549707012088.jpg“그러는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함께 가려고 하는 건데.”

올리비아가 되묻자 크라이어는 웃었다.

16549707012083.jpg“내가 정말로 누군가를 죽여 놓을 것 같으니까.”

16549707012088.jpg“안 한다며! 아냐, 그래. 차라리 같이 가자. 지금 말고,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있어.”

올리비아가 척척 그를 향해 다가섰다.

16549707012083.jpg“따로 할 일이 있었군.”

16549707012088.jpg“응. 타렌 가문의 상회가 모여 있는 지역에 가야 해.”

16549707012083.jpg“타렌?”

16549707012088.jpg“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라고만 알아두면 돼. 그 가문의 후계자와 이번 사건을 파헤치러 가기로 했거든.”

16549707012083.jpg“고대신과 관련된 사건에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인다고?”

크라이어의 눈썹이 비죽 솟자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16549707012088.jpg“당연히 아니지. 사건이 일어나는 지역이 타렌 가문의 상회 지역이라, 가문 차원에서 읍소가 들어왔기에 적당히 안심시켜 주려는 것뿐이야.”

올리비아는 앙브흐 타렌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16549707012088.jpg“타렌 영애의 의욕이 좀 과하긴 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의 진술을 들으러 가는 거니까. 상회 쪽 사람들의 입을 열기에는 그녀가 있는 편이 더 낫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크라이어가 그녀의 미간을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에 그가 기척도 없이 이렇게 성큼 다가서도 화들짝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문질렀던 부분을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16549707012088.jpg“타렌 영애의 장대한 대서사시가 생각나서.”

16549707012083.jpg“대서사시?”

16549707012088.jpg“응. 타렌 영애의 대서사시에서는 당신과 내가 서로에게 첫눈에 빠져,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모든 이의 수군거림을 감수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더라고.”

크라이어의 미간에도 올리비아와 비슷한 골이 파였다. 그를 본 올리비아가 까치발을 들어 아슬아슬하게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16549707012088.jpg“거 봐. 자연스럽게 그런 표정이 된다니까?”

손을 뻗은 올리비아가 부들부들 떨기 직전, 지극히 자연스럽게 크라이어가 몸을 살짝 숙였다. 그제야 한결 편하게 그의 미간을 문지르며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16549707012088.jpg“어쨌든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니까, 바로 수긍하긴 했어. 좀 특이한 영애긴 했지.”

이윽고 그녀는 크라이어에게서 한발 물러나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16549707012088.jpg“건투를 빌게.”

16549707012083.jpg“나의? 아니면 내 상대의?”

고개를 기울이며 피식 웃는 그에게 올리비아는 단호히 답했다.

16549707012088.jpg“당신의 건투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잠시 말을 끊은 올리비아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16549707012088.jpg“혹여 대련 중에 다치거나 죽……을 것 같으면, 사정 봐줄 필요 없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당부였지만, 끝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서 찰랑대는 걱정이 너무나도 선연해서. 지나치게 선명했기에 크라이어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16549707012088.jpg“그러니까 건투를 빌게.”

방싯 웃은 올리비아는 그를 산뜻하게 밀어냈다.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16549707012088.jpg“아 참, 크라이어.”

올리비아는 마치 방금 생각났다는 크라이어를 불러세웠다.

16549707012083.jpg“뭐지.”

16549707012088.jpg“큰일은 아니고.”

괜한 말을 덧붙이는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는 이번에도 가차 없이 진실을 꽂아주었다.

16549707012083.jpg“그렇게 말한 시점에서 이미 큰일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는 것 같다만.”

그의 말에 이번에는 올리비아의 미소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녀는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16549707012088.jpg“노르덴 국에서 이번 사건에 도움을 줄 사람이 올 거야.”

그 말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타국에서 누군가의 방문일 뿐.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럴 리 없을 텐데, 크라이어의 발목부터 서릿발같이 차가운 공기가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쳤고, 그의 검붉은 눈이 심해의 구덩이보다 더 깊이 가라앉았다. -딱, 따닥. 무덤 같은 적막이 내린 가운데, 올리비아의 턱이 심하게 떨리면서 이가 부딪치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울렸다. 그녀는 본능으로, 아니 경험으로 깨달았으니까. 크라이어에게서 줄기줄기 뻗쳐 나오는 저건 단순히 차가운 공기가 아닌 살기라는 사실을. 금방이라도 목이 날아갈 듯 지독한 살의.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덜덜 떨리는 무릎이 꺾여 형편없이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일 초가 천추 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를 고대신의 노예로 만든 마법사를 향한 증오와 분노로 시커멓게 가라앉았던 크라이어의 눈에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좁아졌던 시야가 서서히 넓어지면서 그의 시야 한쪽에 올리비아가 들어왔다. 완전히 얼어붙은 올리비아의 뺨은 창백하다 못해 탈색된 것처럼 핏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크라이어의 눈에 온전히 올리비아가 담기자 그의 주변에서 폭급하게 휘몰아치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16549707012088.jpg“흐, 흐윽.”

숨을 멈춘 지도 몰랐건만, 겨우 내뱉은 숨을 헉헉거리며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목을 긁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아니 네 번에나 그의 손에 목이 잘리지 않았던가. 그녀가 정신없이 목을 할퀴는 건 아마도 본능이었으리라. 크라이어는 그런 그녀의 양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 그의 손안에 있는 보드랍고 작은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고, 끊임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크라이어는 차마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해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지 않나. 비록 그녀를 해하지는 않았지만…….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에 올리비아는 어깨를 흠칫 떨기는 했지만, 이내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가 불꽃처럼 한순간 검붉은 눈동자 속에서 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질척한 것들을 태워버렸다. 마치 정화라도 하듯 그렇게 이윽고 그녀를 한팔로 안아 올려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둔 크라이어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털을 잔뜩 세우고 경계하는 길고양이를 안심시키듯 움직였다. 하얗고 보드라운, 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을 모아 잡은 크라이어는 고해하듯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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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07012083.jpg“미안하다.”

그는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어떤 변명이나 거창한 말도 없이 그저 미안하다는 진심만을 반복했을 뿐. 올리비아는 그의 은발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그를 내려다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위한 맹세를 했을 때도 그는 거리낌 없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까. 한데, 참으로 기묘하게도……. 분명 위협을 느끼고, 공포에 질렸으며, 아직까지도 턱을 덜덜 떠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크라이어가 우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어쩐지 견딜 수가 없어진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16549707012088.jpg“괘……괜찮아. 나를 향한 거 아닌 거, 알아. 그냥 좀, 당신이 너무 강해서 놀랐을 뿐이야.”

그녀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16549707012088.jpg“역시 대련 상대들을 걱정해야겠네. 그중에서는 어릴 때부터 봐온…….”

올리비아가 아무 이야기나 떠드는 사이, 크라이어의 시선은 그녀의 목을 훑고 있었다. 서류 처리를 위해 그나마 손톱이 짧고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었기에 그렇게나 지독하게 할퀴었는데도 피가 비치지는 않았지만, 벌겋게 난 손톱 자국은 마치 낙인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16549707012088.jpg“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당신한테 매번 목이 잘려 죽었거든.”

그의 시선을 느낀 올리비아도 멋쩍게 제 목을 살살 매만지려다 흠칫했다. 부어오른 부분에 손끝이 스치자 미약한 통증이 밀려왔으니까. 그녀의 손을 잠자코 잡아 내린 크라이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마치 참회하는 듯한 그를 본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향해 욕을 날렸다. 이 멍청이 같은 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또 뭐하러 꺼내서! 흐르는 침묵이 어색하기 그지없어 올리비아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16549707012088.jpg“내가 그렇게 간이 작지 않아.”

그녀의 말에 크라이어가 그제야 고개를 느릿하게 들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16549707012083.jpg“간?”

16549707012088.jpg“아, 그러니까 이렇게 겁쟁이는 아니라고.”

‘간이 작다’라는 말을 볼셰이크 역사서에서는 담이 작고 심약한 이를 일컬었기에 습관적으로 내뱉어 버렸다. 올리비아는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슬그머니 빼낸 후, 쇄골 어름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목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16549707012088.jpg“살기 좀 맞는다고 이렇게 벌벌 떨지 않는다고.”

16549707012083.jpg“그래.”

크라이어는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수긍했지만, 올리비아는 어쩐지 그 반응이 성에 차지 않았다.

16549707012088.jpg“당신도 알잖아. 내가 전쟁을 네 번이나 겪었다는 거.”

눈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죽어 넘어졌던가. 시체의 산을 밟고, 피의 강을 건넌 것은 셀 수도 없겠지. 그런 그녀가 살기 한두 번에 주저앉을 리는 없을 터. 크라이어는 이번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올리비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16549707012088.jpg“당신이라서 그래.”

뭘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설렐 수도 있는 말이지 않나.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사이에 고여 있는 과거는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16549707012088.jpg“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같이 움직일 때, 당신이 아니라 다른 놈들이 눈알 뒤집고 달려든다고 이렇게 얼어붙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불퉁하게 그의 팔을 툭 두드린 올리비아는 그의 시선이 머물다 간 목을 움츠렸다. 아마도 이 붉은 자국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텐데. 올리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16549707012088.jpg“그리고 이 목에 자국 오래 갈 거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마.”

회복되는 기간 동안 그가 저런 시선으로 계속 주시하면……. 올리비아는 강경하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16549707012088.jpg“신경 쓰지 마.”

분명 순식간에 나을 자국은 아니었지만, 오래 걸린다고 못을 박을 정도로 심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크라이어는 답 대신 질문을 했다.

16549707012083.jpg“오래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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