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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널 정화할 거란다. (25/146)

#25. 널 정화할 거란다.2021.11.25.

올리비아가 노르덴 국에서 온 자를 만나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길 무렵. 주홍빛 노을이 번지는 수도 외곽의 거리는 저녁 짓는 연기만 흩날릴 뿐 고요했다. 평소라면 늦게까지 까불고 놀던 아이들을 찾는 부모들의 목소리와 집으로 향하는 이들의 대화로 왁자지껄했을 터인데. 연쇄 실종과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몸을 사리며, 바깥출입을 금했다. 물론 삶을 영위해야 했기에 낮에는 일을 다녔지만, 해가 지는 밤이 다가오면 다들 주변을 살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할 뿐. 그리고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범인은 평범한, 아주 친근한 이웃의 얼굴을 한 채 평온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니, 겉으로 보면 지극히 평온해 보였지만……. -달칵, 덜컥덜컥, 크그그극. 고대신의 제물이 된 이들의 물품을 모아둔 상자를 열었다 닫고, 그 상자를 이리저리 질질 끌고 다니는 남자의 눈은 반쯤 뒤집혀 있었다.

16549708042458.jpg“타렌, 타렌, 타렌, 타렌타렌타렌!”

-탕! 상자를 내려친 남자의 번들거리는 눈이 상회 쪽으로 향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16549708042458.jpg“드디어 찾았다.”

그의 신을 강림시키는데 필요한 마지막 제물이 될 사냥감을. 앙브흐 타렌. 처음에는 돈만 뜯어낼 계획이었지만……. 남자는 윗입술을 핥으며 오늘 앙브흐가 건넨 돈주머니를 매만졌다. 보들보들한 분홍빛 머리카락, 티 없이 맑은 미소, 선의로만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그 연하늘빛 눈동자. 그야말로 아이같이 맑은 눈이 아니었던가.

16549708042458.jpg“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좋은 제물이 될 거야.”

언제나 마지막을 꿈꿔왔지만,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지목해 제물로 삼자고 생각한 적은 없었건만. 타렌가의 아가씨라고 했었지. 아마도 그녀를 납치하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 되리라.

16549708042458.jpg“고되고 힘들게 구한 제물일수록 더 보람되겠지.”

그리고 오늘 밤, 그 마지막을 위한 전야제가 시작된다. -끼이이. 상자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두 개의 빈 공간이 선연히 들어왔다.

16549708042458.jpg“하나, 그리고 또 하나.”

오늘 고대신께 바쳐질 제물들의 자리. 남자가 빈자리를 쓸어내리는 순간. -똑똑.

16549708042458.jpg“오빠. 엄마가 이거 주래.”

문을 연 남자에게 바구니를 건네는 아이는 얼마 전, 남자 근처에서 엄마가 많이 힘들다고 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16549708042458.jpg“뭘 이런 걸 다.”

아이가 건넨 바구니에는 딱딱하고 말라비틀어진 빵과 싹이 난 감자 두 덩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녀가 가진 거의 마지막 식량이라는 사실을 아는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에 아이는 눈썹 끝을 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힌 남자는 아이의 이마를 매만져주었다.

16549708042458.jpg“걱정하지 마, 오늘 밤 이후에는 아무런 걱정 없을 거야.”

아이는 그가 매만진 이마를 제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를 그린 것 같았는데. 그리고…….

16549708042458.jpg“오늘 밤?”

눈을 깜박이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16549708042458.jpg“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두고 집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보드라운 흰 빵과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을 만한 묽은 수프를 챙겼다. 의자가 삐걱거린다며 투덜거리던 이웃이 챙겨준 먹거리를 아이의 품에 안겼다.

16549708042458.jpg“이거 가지고 가서 먹어. 좀 움직여야 할 테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이는 눈앞에 있는 먹을 것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 아이의 버짐 핀 입가에 고인 침을 훔쳐준 남자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었다.

16549708042458.jpg“이거 잘 먹고 오늘 새벽에 이곳으로 오렴. 어머니와 떨어지면 안 돼.”

남자는 아이에게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쪽지에는 글이 아니라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미 파헤쳐진 공터가 아닌, 그보다 훨씬 작지만, 훨씬 은밀한 곳으로……. 쪽지를 받아든 아이는 더없이 기쁘다는 듯 마른 얼굴로 웃었다.

16549708042458.jpg“응! 오빠, 정말 고마워! 오빠한테 말하길 잘했어. 우리 엄마도 이제 덜 울어.”

아이는 그렇게 웃으며 남자를 떠나갔다. 그리고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불행하고, 남자에게는 다행히도 아이의 방문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살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지면 사람들이 밖을 돌아다니기는커녕, 창밖을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 이제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지 않나. 멀어지는 아이의 머리꼭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밖에 서 있던 남자는 이윽고 집 안으로 들어가 다시 상자 앞에 섰다. 그는 상자의 빈 곳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16549708042458.jpg“고마워해야지. 내가 너와 네 어머니를 정화시킬 테니.”

입이 찢어져라 웃는 남자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남자의 쪽지에 적힌 외지고 작은 공터. -퍽.

16549708042458.jpg“오빠? 왜, 왜 그러는…….”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덜덜 떨었지만, 남자는 입을 길게 찢어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16549708042458.jpg“널 정화할 거란다. 지금은 좀 자두렴.”

16549708042458.jpg“시, 싫어. 엄마, 엄……!”

-퍽. 그 밤. 고대신의 강림을 바라는 남자의 의식이 마지막 제물만을 남겨둔 채, 두 개의 제물이 그만의 제단에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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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밤이 지난 이른 아침. 아니, 새벽이라고 해도 딱히 누구도 반박하지 않을 희뿌연 빛이 밝아오는 시각. 올리비아는 지난밤 노르덴 국에서 도착한 직후, 뭘 하기도 전에 그냥 기절해버려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했던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딸’은 아니네.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16549708042458.jpg“……전하께오서 이르시길…….”

남자는 노르덴 국의 차기 왕. 그러니까 왕세자가 전하라는 말을 줄줄 늘어놓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 왕세자 따위가 중요할 리가 있을까. 마법사는 아니더라도 그의 딸 정도는 올 줄 알았는데. 고대신과 관련된 일이니 당연히 와야만 했고. 음?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던 올리비아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당연히 와야만 하는데 오지 않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마법사나 마법사의 딸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라면 수없이 많으리라. 일단 노르덴 국은 갑작스러운 국장 준비로 내부가 벌집 쑤셔놓은 듯 바쁠 터. 그런 상황에서 크라이어의 말에 의하면 ‘내부 깊숙이 밀착’ 되어 있는 마법사나, 그 딸이 먼 길을 떠나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리고 정말 만분의 일의 확률이겠지만, ‘고대신’이라는 것이 노르덴 국의 왕실에 발각되어 그들의 몸을 사리고 있을 수도 있겠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하다못해 둘 다 병에 걸려 움직일 상태가 아닐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는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16549708071386.jpg“한 가지 묻지.”

남자의 말을 대뜸 잘라먹은 올리비아가 물었다.

16549708071386.jpg“혹여 귀국에서 현재 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나?”

가는 귀가 먹은 사람이 아니라면, 아주 명확한 답을 낼 수 있는 질문이었다. 네. 혹은 아니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야말로 동문서답.

16549708042458.jpg“제국의 관심에 감사드리며, 왕세자 전하께서 당부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범인의 신속한 검거와…….”

올리비아의 미간에 깊은 금이 갔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일단 그의 입을 막았다.

16549708071386.jpg“내가 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잖아. 다시 한번 묻지, 노르덴 국에서도 연쇄 실종 및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나?”

그제야 남자는 제대로 된 답을 내어놓았다.

16549708042458.jpg“아니요.”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올리비아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대륙 단위의 전쟁을 네 번이나 겪고, 그 크라이어의 검을 피한 것도 무려 네 번. 올리비아에게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기민하게 관찰하는 건 목숨이 걸린 것이었다. 그리고 네 번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것들은 고스란히 그녀의 경험으로 쌓였고. 그렇기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어딘가 기이한 남자의 행동, 아니 반응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간 그런 것을 올리비아는 알아챘다. 제 말에 이상한 답을 하는 정도는 제국과 척을 지겠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긴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도 말이 안 되지만, 어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할 터. 하나…….

16549708071386.jpg“이런.”

올리비아는 찻잔을 들다 미끄러졌다는 듯 남자의 정면으로 찻물을 뿌렸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위화감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이 펄펄 날 정도로 뜨겁지는 않았지만, 찻물이 얼굴 정면으로 날아갔는데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다니.

16549708071386.jpg“괜찮은가.”

무성의하기까지 한 올리비아의 말에 노르덴 국의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08042458.jpg“네. 괜찮습니다.”

그 답을 들은 올리비아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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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을 리가 있나. 찻물이 얼굴을 흠뻑 적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깜박이지도 않은 눈알에는 튀었을 텐데. 역시 이상해. 주변에 조용히 기립해 있던 사용인들이 서둘러 찻잔을 치우고, 찻물을 닦는 사이. -똑똑.

16549708071386.jpg“들어와.”

올리비아의 허락 뒤로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크라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기사를 가장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한 이빨과 강대한 발톱을 숨긴 거대한 짐승이 풍기는 은근한 위압감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으니까. 물론 강철보다 단단하고 딱 벌어진 어깨와 황녀가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던, 올리비아의 평에 의하면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을 보면 그리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크라이어가 방 안으로 한걸음 들어서기 무섭게 가면을 쓴 듯 시종일관 웃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단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은 남자의 눈은 찢어질 듯 커져 크라이어를 담았다. 그를 담은 남자의 눈동자의 안보다 더 깊은 안쪽, 남자를 인형으로 부리는 그레타의 눈이 순수하게 반짝거렸다. 아아, 드디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던 크라이어를 보게 되다니. 비록 직접 눈앞에서 보지는 못하지만, 움직이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레타는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남자에게 시선 한 조각 주지 않았다. 그는 오롯이 올리비아만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가섰을 뿐.

1654970810173.jpg“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한 예를 다하는 크라이어에게 올리비아 역시 더없이 고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16549708071386.jpg“크라이어.”

그녀가 크라이어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노르덴 국에서 온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지만 너무나도 찰나였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16549708071386.jpg“마침 잘 왔어.”

올리비아는 자연스럽게 크라이어를 제 곁에 세우며 남자를 가리켰다.

16549708071386.jpg“오랜만에 고향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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