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충분해. (37/146)

#37. 충분해.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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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빨리도 끝나버린 무투 대회 이후, 크라이어에 대한 소문이 끊기지는 않았다. 단지 그 결이 완전히 달라졌을 뿐.

16549710952389.jpg“맙소사, 대체 누가 그런 자를 첩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 건지!”

대회의 이후 제국과 타국을 모조리 휩쓸었던 ‘황녀의 첩’에 관한 소문은 그렇게 속절없이 쓸려나갔고.

16549710952389.jpg“그 정도면 기사 단장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16549710952389.jpg“어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요!”

16549710952389.jpg“기사 단장님들 중 그 문을 홀로 그리 열어젖힐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소.”

16549710952389.jpg“그건 힘의 문제지, 겨뤄보면…….”

크라이어가 얼마나 강한지 이리저리 재보는 이들은 곧 그런 기사를 발견해 곁에 둔 올리비아의 안목을 칭송했다.

16549710952389.jpg“과연 황녀 전하. 그분께서 그리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으실 줄 알고 있었어요.”

16549710952389.jpg“어머나, 그런 것 치고는 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던가요.”

지난 소문을 꼬집는 이의 말에 부채로 슬쩍 얼굴을 가린 이가 곧 화제를 돌렸다.

16549710952389.jpg“그러고 보니 타국에서 온 기사들이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16549710952389.jpg“네. 뭐, 명분은 평화를 위한 연결고리였지만, 다들 아시잖아요.”

황녀가 단순히 그의 얼굴에 반해 첩으로 데려왔다는 것이 거짓부렁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황녀궁 주변의 궁에 마련되었던 타국 기사들을 위한 방이 하나씩 비워지고 있었다.

16549710952389.jpg“자네도 가는군.”

16549710952389.jpg“그래. 본국에서 송환 명령이 내려왔으니…….”

크라이어와 닮았다며 제국으로 보내진 이는 올리비아와 단 한마디도 해보지 못한 채 제국을 떠났고, 타국에서 온 ‘기사’ 노릇을 하던 이들도 대부분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들 중 아이작과 같은 처지였던 이도 죽을상을 한 채 짐을 쌌다.

16549710952389.jpg“후…… 이럴 때 아이작은 또 어디에 있는 건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자 아이작을 찾았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떠날 준비를 서두르는 이들과는 한참이 떨어진 곳. 정말이지 곤란하군. 아이작은 여우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황녀궁을 내려다 보았다. -후우우웅. 그가 자리 잡은 곳이 지나치게 높다 보니 강한 바람 소리가 귀를 때리고, 몸을 뒤흔들었지만 그에게 지금 중요한 건 하나 뿐.

16549710982015.jpg“젠장, 그렇게 박살을 내놓으면 쓸모를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야.”

아이작은 답지 않게 초조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16549710982018.jpg‘네 쓸모를 증명해봐.’

  크라이어는 분명 그리 말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의 사람이 되기 위해 그가 내린 첫 번째 명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무투 대회에서 모든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제가 가진 것들을 드러낼 생각이었던가. 물론 옹기종기 모여 있던 기사라는 말이 아까운 놈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제국에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리라 평가받는 이들을 상대로. 애송이들을 이겨 먹는다고 완벽한 증명은 되지 않겠지만, 어쨌건 나머지 놈들보다는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내보일 수 있었을 터. 한데, 무투 대회가 그런 식으로 끝나버렸으니…….

16549710982015.jpg“보통 인간이 아닌 건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괴물일 줄이야. 아이작은 소름이 돋은 양팔을 문질렀다.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고, 찢어발기며, 짓누르던 그 지독한 살기. 무투 대회 이후, 모두가 한 번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때의 그 살기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마치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 입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이 본국에 돌아가면 이름 없는 노르덴 국의 기사는 크라이어라는 이름으로 전 대륙에 각인 되리라. 아이작은 아예 그 아슬아슬한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16549710982015.jpg“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고 제국에 그냥 눌러붙어 버리면, 평생 도망자로 살아야만 한다. 다른 나라도 아닌 제국으로 파견했던 그를 본국에서 가만히 놓아 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그를 보증해줄, 아니 아예 그를 거두어줄 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16549710982015.jpg“아아, 이제라도 힘깨나 쓰는 귀족 나리를 잡아야만 하…….”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여우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소리는 물론이고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마치 한낮의 유령처럼 그의 앞에 크라이어가 나타났으니까. 크라이어는 지독하게 위태로운, 까마득히 높은 곳을 마치 평지처럼 밟으며 움직였다. 아이작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16549710982018.jpg“너,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그의 질문에 아이작은 당혹을 수습하거나 말거나 반사적으로 답했다.

16549710982015.jpg“아이작입니다.”

크라이어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한 아이작은 얼른 덧붙였다.

16549710982015.jpg“아이작 아켄델입니다.”

16549710982018.jpg“아켄델이라.”

크라이어는 아이작을 천천히 훑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분 전. 황제 폐하의 부름으로 급히 중앙궁으로 향했던 올리비아는 짜증스레 펜대를 탁탁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16549711021817.jpg‘노르덴 국의 장례식으로 갈 사람이 결정됐어.’

16549710982018.jpg‘그 표정을 보니 알겠군.’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한층 더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를 북북 갈았다.

16549711021817.jpg‘내가 주최한 대회의에서 일어난 일이니 내가 책임을 지고 가야지.’

  흠잡을 데 없는 논리에 당연히 그러마 답했다. 더해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만약 노르덴 국에 갈 이가 자신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황제 폐하를 설득했으리라.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을 짚어낸 크라이어가 물었다.

16549710982018.jpg‘원하던 대로 노르덴 국에 가서 마법사 면상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뭐가 문제지?’

16549711021817.jpg‘사람.’

  숨 쉴 틈도 없이 나온 답에 크라이어의 미간에도 올리비아 만큼이나 깊은 골이 생겼다.

16549711021817.jpg‘노르덴 국까지 가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가서 조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올리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16549711021817.jpg‘당신은 그 빌어먹을 곳에 가면 마법사의 시선을 잡아둬야 할 테니 움직일 수 없고.’

  시선을 잡아 둔다기 보다 마법사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을 테지만, 그 말은 목 뒤로 삼켜버렸다.

16549711021817.jpg‘황녀 자격으로 가는 내가 이곳저곳 들쑤실 수도 없잖아. 물론 노르덴 국의 성의 비밀문이나 장치 같은 것들은 전부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 필요한 경우는 어디까지나 진짜 정보를 얻기 위한 거고.’

  지난 네 번의 삶에서 대륙 전쟁을 처음 선포한 것은 이번 생에서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노르덴 국의 왕이다. 고대신이니, 노예니, 마법이니 하는 이야기를 알기 전이니 당연히 노르덴 국에 대한 정보를 전쟁 전에 아주 바닥까지 긁어모았다. 입을 다문 올리비아의 미간에 패인 계곡이 점점 깊어지자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미간을 살살 문지른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16549710982018.jpg‘사람이라면 한 명 떠오르긴 하는데.’

  그의 말에 올리비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말 그대로 어깨를 푸드득 떨며 경기까지 했다.

16549711021817.jpg‘뭐?’

16549710982018.jpg‘왜 그리 놀라지.’

16549711021817.jpg‘아니, 당신이 사람이 떠오른다기에. 당신이? 당……신이?’

  올리비아가 대단히 이상한 눈으로 그를 보자 크라이어는 그녀의 눈을 가려버렸다.

16549711021817.jpg‘누르지 마, 누르지 말라고.’

  제 눈을 덮은 크라이어의 손을 탁탁 두드리던 올리비아가 잠시 주저하다 덧붙였다.

16549711021817.jpg‘아무도 곁에 안둘 거 같았단 말이야.’

  작게 흘러나온 그녀의 말에 크라이어는 즉각 답했다.

16549710982018.jpg‘곁에 두지 않았다만.’

16549711021817.jpg‘뭐? 사람이 한명 있다며?’

  그의 손을 치워낸 올리비아가 고개를 기울이자 크라이어는 옅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16549710982018.jpg‘밤놀이하러 온 놈을 나보다 먼저 처리한 자가 있었지. 제국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그는 허리를 굽혀 올리비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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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10982018.jpg‘그리고 내가 곁에 두는 건 너뿐이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드는 그 진심만이 빼곡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풍랑을 만난 나비의 날개처럼 세차게 파닥거렸다.

16549711021817.jpg‘음…… 좀 관계를 넓히는 편이…….’

16549710982018.jpg‘충분해.’

  빌어먹을 노예 신세가 된 후 크라이어는 사람의 온기도 싫었고, 사람과 말을 섞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한 황녀만이 예외였을 뿐. 검붉은 눈동자가 노을처럼 가라앉자 올리비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려 물었다.

16549711021817.jpg‘제국에 머무르고 싶어한다는 걸 보니 타국의 기사인 모양인데.’

16549710982018.jpg‘아켄델이라 했다.’

  동문서답이었지만, 올리비아는 즉시 되물었다.

16549711021817.jpg‘아켄델? 아켄델이라고 했어?’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뜨고 묻자 크라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0982018.jpg‘그런 성이었다. 많이 들어본 성이지?’

  이어 그는 피식 웃으며 볼셰이크의 역사가 담긴 낡은 책을 툭 두드렸고, 올리비아의 눈이 번뜩였다.

16549711021817.jpg‘아켄델 가문이라면 알지.’

16549710982018.jpg‘지금 필요한 이가 아닌가.’

  올리비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1021817.jpg‘맞아. 지금이야말로 아켄델이 필요할 때야. 은신, 잠입, 필요한 정보를 빼내거나, 필요하다면 거짓 정보를 흘리는데 그들만큼 믿을 만한 이가 있을까.’

  푸른 피가 흐르는 귀족이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렇기에 아켄델 가문이 그런 쪽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극도로 적었다. 아마도 그들이 귀족이 되기 전 인연을 맺었던 볼셰이크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

16549711021817.jpg‘아켄델이 아직 남아 있는 줄 몰랐는데.’

16549710982018.jpg‘그 부분은 직접 물으면 되겠군.’

  거기까지 떠올린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16549710982018.jpg“황녀 전하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16549710982015.jpg“네……네?”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답하던 아이작이 되물었지만, 크라이어는 곧바로 등을 돌리며 한마디 흘렸을 뿐.

16549710982018.jpg“볼셰이크에 아켄델이 필요하다고 하시더군.”

마치 낙하라도 하듯 아래로 거침없이 떨어지는 크라이어를 내려다보던 아이작은 헛숨을 삼켰다. 볼셰이크와 아켄델. 아주 옛날, 아니 옛날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오래전 인연이었다. 아켄델 가문에서는 그저 옛날 이야기처럼 내려오는 볼셰이크와의 인연. 크라이어와 마주하기 전, 농담조로 그 일이라도 들먹여 황궁에 붙어 있을까 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16549710982015.jpg“이것 참, 아켄델의 정수를 잇는답시고 개고생했던 과거가 쓸모가 있긴 있었네.”

제국의 힘깨나 쓰는 귀족?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볼셰이크에서 그를 부르고 있지 않나. 저 괴물의 아래로 들어가려던 계획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 역시 볼셰이크 곁에 있으니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터. 그렇게 아이작이 멍하니 있던 건 잠깐이었을 뿐. 여우눈을 둥굴게 휘며 웃은 그는 곧 크라이어와 마찬가지로 주저없이 아래로 걸음을 내딛었다. 추락하듯 아래로 떨어지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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