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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쓸데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48/146)

#48. 쓸데없는 남자 같으니라고2022.02.14.

16549713036471.jpg“알 게 뭐야. 우린 돈 받은 만큼 일하고 가면 되는 거지. 괜한 호기심은 접어두게.”

나이 지긋한 인부는 혀를 끌끌 차며 아이작의 물음을 비껴갔다.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인부는 답이 같았기에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릇 정보란 문서나 혹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흐르는 법. 한데 이곳에서는 그 어떤 정보도 흐르지 않았다. 눈이 있다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제단’이 떡 하니 들어서고 있건만, 정작 눈이 달린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없었으니까. 돌을 깨고 나르는 실질적인 일을 하는 인부들은 그저 돈을 많이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애초부터 자신들이 무얼 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그들을 감독하는 건축가들도 뭔가를 알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부들이 아닌 건축가들이 모인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한탄에 아이작의 귀가 쫑긋 섰다.

16549713036471.jpg“젠장, 이런 식으로 토대를 헐겁게 올리면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반드시 무너질 텐데!”

16549713036471.jpg“이봐. 조용히 해. 우린 명령 받은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한 건축가의 어깨를 다른 건축가가 강하게 잡아끌었다.

16549713036471.jpg“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 못 들었나?”

16549713036471.jpg“에라이 씨, 궁에 처음 들어오는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너도 처음이면서.”

16549713036471.jpg“조용히 좀 하라고.”

둘의 대화를 듣던 아이작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왕궁의 한 곳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데 궁에 처음 들어오는 건축가들을 썼다고? ‘왕궁’의 한 축을 이루는 건물을 보수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새로 올리는데 저런 건축가들을? 정보의 가뭄 속에서 뭔가 하나를 건져냈다는 느낌에 아이작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 불만에 가득 찬 건축가와 그런 건축가를 다독이는 건축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6549713036471.jpg“……니까, 이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잖아.”

16549713036471.jpg“우린 궁에서 요구한 것에 최선을 다했네.”

16549713036471.jpg“젠장, 스승님이 아셨다면 난 파문이야. 그리고 더 찜찜한 건 말이야.”

불만을 토해내던 건축가의 얼굴에 불현듯 불안이 차올랐다.

16549713036471.jpg“저기 저 녀석 보여? 자네도 알잖아. 저 녀석이.”

16549713036471.jpg“알지. 신이니 악마니 하는 거에 몰두하는 멍청이잖아.”

그의 말을 받은 다른 건축가가 혀를 차긴 했지만, 멸시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건축가들 중 종교에 심취하는 이들은 종종 있었으니까. 당장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을 몇 개 꼽아보라고 하면, 그중 반은 특정 신들의 신전이 아닌가. 처음 말을 꺼냈던 건축가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49713036471.jpg“멍청이라니. 자라나는 새싹한테 말이 너무 심하잖아.”

건축물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유순해진 반응으로 보아 자신보다 어린 건축가에게는 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를 진정시키던 건축가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16549713036471.jpg“쯧, 티를 너무 내고 다닌단 말이야. 뭐든 극단으로 가면 좋지 않다고.”

16549713036471.jpg“그건 그렇지만. 이 아니라. 내가 하려던 말은 저놈이 이 건축물이 불길하다고 자꾸 흰소리를 해대서 말이야.”

그에 처음 멍청이 소리를 꺼낸 건축가는 혀를 끌끌 찼다.

16549713036471.jpg“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거 보게나.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서 그런 게야.”

16549713036471.jpg“그런가? 그래도 건축물 전체에 깔린 문양이 처음 보는 건 맞지 않나.”

건축가는 설계도를 툭툭 두드렸지만, 정작 시선을 거의 완공되어가는 건축물에 향해 있었다. 기묘하게도 설계도로만 보면 알 수 없었던 문양이 건축물에서는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그에 한참 혀를 차던 건축가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3036471.jpg“그건…… 그렇지.”

아마도 알 수 없는 신을 위한 제단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제가 제 입으로 말했듯이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으니, 궁에서 명하지 않은 것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아야 하니까. 그런 두 건축가가 느릿하게 돌린 시선 끝에는 그들보다 어린, 아직 앳된 티가 나는 건축가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16549713036471.jpg“불길해. 너무 불길하다고.”

창백하게 질린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건축가의 중얼거림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답을 하지는 않고 그저 듣고만 있는 사람은 있었다. 아이작은 이를 딱딱거릴 만큼 떨어대는 어린 건축가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단 같은 건축물에 불길한 문양이라. 정말이지 찜찜하기 그지없었지만, 모든 것은 추측일 뿐. 어느 것 하나 확신할 만한 정보가 없다. 결국 제단을 가장한 다른 무언가는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어떤 신을 위한 제단이지? 노르덴 국의 국교가 바뀐다는 소식 같은 건 없었을 텐데. 한 나라의 국교가 바뀌는 건 꽤 큰일이다. 비록 종교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옛날과는 달리 신전에 권력이 없다 해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아이작은 제단 전체에 어지럽게 새겨진 문양을 지긋이 뜯어 봤지만 어떤 신도 떠올리지 못했다. 설마 바깥에는 연막으로 아무 문양이나 그려놓은 건가……. 아니, 신을 모시는 신성한 신전에 그럴 리는. 결국 아이작은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49713065239.jpg“이거 그냥 이렇게 끝나버리면 정보고 뭐고 건질 게 하나도 없잖아?”

건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자신이 봐도 이건 완성되기 직전의 건물이었다. 이대로 완성된 후의 정보도 당연히 필요할 테지만, 그 전에 긁어모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수집해야 할 터. 저 어린 건축가가 말한 대로 불길한 것이라면 더욱더 완성 전에 정보가 필요한데.

16549713065239.jpg“시간이 없잖아.”

결국 아이작은 늘 그렇듯이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보고 듣는 것으로는 한계에 다다랐으니, 직접 제단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캐내야 할 터. 재빠르게 움직인 그는 돌을 옮기던 인부들 중 한 명을 깔끔하게 재운 후 그를 대신해 돌을 짊어지고 지하로 가는 입구로 향했다.

16549713036471.jpg“음? 당신 처음 보는데?”

16549713065239.jpg“아, 네. 대타로 왔습니다.”

16549713036471.jpg“그런가. 그냥 서 있지 말고 얼른 움직이게.”

16549713065239.jpg“네.”

너무나도 간단하고, 지나치게 빠르게 아이작은 인부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건설치고는 우습기 짝이 없을 만큼 허술했지만, 그들 중 의문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이런 무모하고 어설픈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을 세우고 성공한 아이작조차도. 그렇게 돌을 짊어진 아이작이 막히기 직전이 지하 입구에 다다라 어둠 속에 스며들려는 찰나. 그와 반대편에서 웅성거림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회는 놓치지 않고 제단의 지하 입구로 숨어든 아이작이었지만, 그는 제단 지하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발견했으니까.

16549713065239.jpg“아니, 저 영애가 대체 여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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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작이 뜻밖의 장소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이와 마주쳤을 때. 올리비아는 예상 가능한 곳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이와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 마주했다기보다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황궁의 도서관이자 역사관. 대륙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볼셰이크 가문의 역사가 담긴 책이 끝도 없이 채워진 곳의 한 켠. 크라이어가 있었다. -사락. 길고 거친 손끝이 책장을 넘겼고, 그와 동시에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마께로 흘러내린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락, 사락. 그를 스친 바람은 이윽고 올리비아의 뺨을 핥으며 풍성하고 매끄러운 새빨간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났다. 그렇게 얼마나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크라이어의 손가락이 책장의 모서리를 쓸어내린 순간, 올리비아는 입을 열어 그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올리비아는 어쩐지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황급히 책장 뒤로 숨어버렸다. 그녀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굳이 왜 창가에 앉아, 굳이 왜 비쳐드는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냐고! 심지어 왜 바람까지 부는 거야! 훔쳐볼 생각이 전혀 없었건만, 어쩌다 보니 훔쳐보다 숨어버린 꼴이 된 올리비아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올리비아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책장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햇살을 받은 은색 머리가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에서 미끄러졌고, 검붉은 눈동자가 나른한 빛을 발했다. -꼴깍.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킨 올리비아는 다음 순간 그 사실을 알아채고 순식간에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 올리비아는 눈치 없이 쿵쿵거리는 심장께를 퍽퍽 내려쳤다. 이게 뛰어서 어쩌자는 건데. 성화를 찢고 나온 듯 성스럽기까지 한 그의 모습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 못해 숨이 막힐 듯하긴 했다. 그렇다고 이게 뛰면 안 되지! 올리비아는 쭈그려 앉은 상태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열이 오른뺨이 뜨끈뜨끈해서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미친 건가? 회귀 4번 하더니 미쳐 버렸나? 아무리 눈이 돌아갈 정도로 크라이어가 멋지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겉껍데기일 뿐. 그는 저 얼굴로 그녀를 네 번이나 죽인 장본인이다. 물론 지금은 그 누구와도 비할 바 없는 훌륭한! 엄청난! 동료긴 하다. 마왕인지 뭔지 피에 돌아버린 고대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동지. 그래. 그는 어디까지나 동료일 뿐. 올리비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연신 문지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16549713093179.jpg“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정말 쓸데없어. 쓸데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마음에도 없는 막말을 뱉어내자 조금 시원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곁에 없을 때 속이 울렁거린 것도 저 잘난 얼굴을 항상 보다가 못 봐서 그런 것이리라. 이대로 백을 거꾸로 세고 일어나야지. 그러면 쓸데없이 달아오른 뺨이고 귀가 전부 하얗게 되어 있을 거다. 이 쓸데없이 쿵쿵거리는 심장도 제 박자를 찾을 테고. 백, 구십구, 구십팔……. 하지만 올리비아는 일까지 세지 못했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칠십 둘을 세는 동시에 치맛자락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올리비아를 머리끝까지 먹어 치웠다. 그림자의 주인인 크라이어의 욕심처럼. 그는 올리비아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음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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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13093187.jpg“올리비아.”

눈을 꾹 감고 있던 올리비아의 귓가를 타고 ‘황녀’가 아닌 ‘올리비아’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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