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했으니까 (56/146)

#56.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했으니까2022.03.14.

다사다난했던 날이 저물고 새로운 태양이 도래한 다음 날 오전.

16549714372756.jpg“맙소사! 황녀님! 아프신 거예요?”

앙브흐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발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전혀 영애답지 않았지만,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어우러져 그다지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기실 집무실에 모인 이들 중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한 사람도 없었고. 나비처럼 날아 아예 올리비아의 치맛자락을 잡고 바닥에 앉아 버린 앙브흐의 뒤를 이어 나타난 아이작도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16549714372762.jpg“다치셨습니까?”

발목 부근을 살피는 여우 눈이 분주했지만, 어느 순간 뒷골 당기는 살기가 느껴져 아이작은 본능적으로 올리비아의 가는 발목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가늘게 접힌 그의 여우 눈이 올리비아의 뒤쪽, 정확히 말하자면 집무실의 안쪽 그림자에 도사리고 있는 크라이어에게 잠깐 향했지만, 곧바로 돌아왔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건만,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걸까. 아이작의 목을 타고 마른 침이 넘어갔다. 어째 볼 때마다 강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 일리가 없겠지. 등줄기로 흐르는 오한을 느끼며 아이작은 새어 나오려는 마른 웃음을 꾹 눌렀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국에 남아 잡은 줄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건 매우 좋은 일이리라. 좋은…… 일이겠지? 아이작은 일단 황녀에게 일정 이상 다가가지도, 일정 시간 이상 시선을 주지도 않기로 했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아니 알고 싶지도 않지만 제가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남자가 그것을 아주, 아주! 거슬려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안절부절못하면서 붕대가 감긴 발에 손을 내다 거두기를 반복하는 앙브흐를 향해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16549714372766.jpg“괜찮아. 멍이 좀 든 것뿐이야. 그보다 둘 다 고생했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치하였지만, 아이작이나 앙브흐는 그 치하마저 받기 힘든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앙브흐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르덴 국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고, 아이작은 올리비아가 준 기회를 받고도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둘의 머릿속이 빤히 들여다보인 탓에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16549714372771.jpg

16549714372766.jpg“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했으니까 그런 얼굴들 하지 마.”

그건 진심이었다. 네 번의 삶. 네 번의 전쟁. 네 번의 죽음을 겪으며 올리비아는 지나치게 많은 타인의 죽음을 목도했다. 첫 번째 삶에서야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명예롭다 여겼지만,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를 거치면서 자신의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된 만큼 타인에게도 똑같은 것을 바라게 되었다. 기실 한 사람이 아등바등 목숨을 걸고 뭘 해보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고, 한계도 뚜렷하다는 시궁창 같은 현실을 깨닫기도 했고. 그녀의 진심이 제대로 전해진 건지 앙브흐는 대번에 눈시울을 붉어져 눈물을 글썽거렸다.

16549714372756.jpg“황녀님.”

이미 목숨을 구해준 일로 냅다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돕겠다고 팔을 걷고 나선 앙브흐다. 그녀는 아예 타렌 가문이라도 안겨줄 듯 촉촉한 눈망울로 입을 열려고 했지만, 올리비아가 타이밍 좋게 막았다.

16549714372766.jpg“그래도 다음부터 제멋대로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건 용납하지 않을 거야.”

그에 앙브흐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입술을 오물거리다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국의 유일한 황녀’의 진심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해하던 아이작은 저를 향해 입으로만 벙긋거리는 앙브흐를 발견했다. 위험하지 않았다고 말을 해달라니. 재주 좋게 입술 모양으로 앙브흐가 하려는 말을 알아챈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앙브흐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지만, 아이작은 황녀에게 추호도 거짓을 고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황녀 뒤에는 그가 있지 않은가. 아마도 거짓말 따위는 금방 알아챌 수 있겠지. 아이작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크라이어는 동공의 수축이나, 심장이 뛰는 소리, 시선이나 아주 작은 몸짓 혹은 당사자도 알지 못하게 흐른 땀을 통해 사람들이 거짓을 토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앙브흐가 대놓고 앙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봐주고 있던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16549714372766.jpg“그래서 어땠어?”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답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나왔다.

16549714372756.jpg“왕궁으로 들어가는 돌은 전부 신전을 짓는 데 쓰이고 있었어요.”

16549714372762.jpg“그 신전 지하에 제단이 있다고 건축가들에게 들었습니다. 다만 확인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기 직전에 방해를 받아서. 그리고 그 신전 자체가 불길하다는 건축가도 있었습니다. 다른 건축가들은 과민반응이라고 했습니다만.”

앙브흐의 말을 아이작이 받았다.

16549714372766.jpg“신전에 제단까지.”

올리비아는 찜찜하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눈 사이를 모았다. 그에 아이작의 여우눈이 조금 더 얇아지며 난처하다는 듯 볼을 긁었다.

16549714372762.jpg“어느 모로 봐도 신전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건축물이었지만, 솔직히 무슨 신을 모시는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식견이 짧아서 도통…….”

말끝을 흐린 아이작은 뒤늦게 양팔에 돋은 소름을 문질렀다. 왕궁에 버젓이 올라가고 있는 신전이 무슨 신을 모시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단지 어떤 신인지 모른다는 의문만 있었을 뿐, 그런 수상쩍은 건축물이 왕궁에 건축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16549714372762.jpg“그……리고. 그 신전을 짓는 인부들은 물론이고 건축가까지 무엇을 짓고 있는 건지 전혀 알지 못하더군요. 더해서 그게 수상쩍다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거 혹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그의 뒷말을 올리비아는 담담하게 내주었다.

16549714372766.jpg“마법이겠지.”

아이작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고, 앙브흐는 눈을 크게 떴으며 올리비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르덴 왕궁에 들어서는 누굴 모시는지 알 수 없는 신전이라. 뻔하지 않은가. 그 미친 마법사가 모시는 건 고대신이다. 심지어 제단까지 있다니. 뭘 바치는지 구태여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대륙의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걸 정화한다고 떠드는 것들이다. 신전이 완성된 후 그에 관련된 이들의 최후가 듣지 않아도 빤히 그려졌다. 네 번의 죽음이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아 목구멍에서 신물이 넘어왔다. 서서히 창백해지는 올리비아의 얼굴이 완전히 표백되기 전 아이작이 적막을 깨뜨렸다.

16549714372762.jpg“아, 그래도 명 받은 일 중에 한가지는 제대로 했습니다.”

아이작의 여우 눈이 한층 더 얇게 휘어졌다.

16549714372762.jpg“마법사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고 하셨지요. 타렌 영애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그는 가볍게 주먹 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다른 손을 앙브흐를 향해 내미는 과장된 예를 취했고, 앙브흐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방글방글 웃었다.

16549714372756.jpg“네. 맞아요. 갑자기 도망가야 한다기에 뭐 하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황녀님의 명을 받았다고 하시기에 바로 뛰쳐나왔죠.”

16549714372766.jpg“그냥 그렇게 믿고 그를 따라갔다고?”

16549714372756.jpg“황녀님께 명을 받았다고 한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구분하지 못할 만큼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아니었으니까.”

재계의 거물중에 거물인 타렌가의 후계다운 답이었다. 그에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16549714372762.jpg“그걸 아시면서 아까는 저한테 거짓말을 시키려고 하셨습니까?”

16549714372756.jpg“혹시나 설마라는 경우도 있잖아요.”

16549714372762.jpg“그렇게 안 보이는데 상당히 뻔뻔하시군요.”

16549714372756.jpg“어머나,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순진하게 웃는 앙브흐를 본 아이작이 고개를 흔들었고, 올리비아는 의외로 잘 맞는 둘을 바라보며 바닥까지 처박혔던 기분이 나아짐을 느꼈다.

16549714372766.jpg“잘했어. 만약 다음에도 마법사와 마주하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16549714372756.jpg“그 마법사가 당근색 머리 여자 맞죠?”

16549714372766.jpg“당……. 으응. 맞아.”

세계 멸망을 바라는 고대신을 모시는 극악무도한 마법사와 당근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올리비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지만, 앙브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여자를 떠올린 앙브흐는 뒤를 이어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해 끙끙거렸지만, 결국 왕세자가 너무나도 이상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다른 무언가 생각난 듯 냉큼 입을 열었다.

16549714372756.jpg“아 참, 그리고 가문에서 사용인 하나가 사라졌어요.”

느닷없는 제 가문의 사적인 일을 꺼낸 앙브흐는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16549714372756.jpg“정상적으로 그만뒀다거나 해고된 게 아니라 실종됐거든요.”

제삼자가 듣자면 고작 사용인 하나가 실종된 것이 무어 그리 큰일인가 싶겠지만, 이들 사이에서 그건 큰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큰일이 일어나기 전의 전조라고나 할까. 지난번 앙브흐가 납치되어 죽을 뻔한 사건 이후, 올리비아는 단단히 일러두었다.

16549714372766.jpg‘주변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말해.’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앙브흐는 칭찬을 바라듯 눈을 반짝였고, 올리비아는 그녀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16549714372766.jpg“사용인이라. 이쪽에도 사용인과 관련해서 일이 있었는데.”

16549714372756.jpg“일이라니요?”

올리비아는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과 암살당할 뻔했던 밤, 그리고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 이미 죽은 암살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있었던 일, 그러니까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을 뒤쫓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말까지 하고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자 아이작이 손을 반쯤 들며 말했다.

16549714372762.jpg“그 사용인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16549714372766.jpg“지금 바로?”

노르덴 국에서 돌아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또 일을 하려는 아이작을 향해 올리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16549714372762.jpg“기껏 노르덴 국까지 가서 쓸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알아 온 게 없지 않습니까. 이러나 쓸모없는 놈이라고 찍히면 여러모로 곤란해서요.”

아이작은 신랄하게 자기 평가를 내리며 고요한 어둠처럼 가라앉은 크라이어를 흘깃거리다 짧은 한숨을 삼켰다. 그가 무어라 한마디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은데, 침묵으로 일관하니. 자신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고, 황녀님과는 달리 사람 부리는 것이 거칠기 짝이 없다니까…….

1654971448504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