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럼 좀 더 할래?
(65/146)
65. 그럼 좀 더 할래?
(65/146)
#65. 그럼 좀 더 할래?
2022.04.14.


“도와줄까?”

“뭘?”

“서류 작업.”

“뭐?”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올리비아는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더듬거리며 아래로 끌어내렸다.
눈을 더 크게 뜰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뜬 올리비아가 다시 물었다.

“뭐?”

“머리를 다 뽑아버릴 것 같으니 그 전에 이 서류가 다 처리 되야 하겠지.”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올리비아의 머리카락 끝을 잡아 올려 능숙하게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매끄럽고 희미한 장미향이 나는 머리카락이 그의 거친 손마디에 감기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머리카락 끝에서 은근한 불길이 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올리비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머리카락을 그의 손가락에서 빼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서류를?”

“그래.”
너무나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크라이어를 향해 올리비아가 부루퉁한 얼굴로 답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퉁명스러운 그녀의 반응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이었다.
크라이어와 야, 너 마구 불러대고 나름대로 볼꼴 못 볼꼴 좀 본 사이긴 하지만, 올리비아는 엄연히 대륙의 하나뿐인 제국인 볼셰이크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다.
차기 황제인 그녀가 처리하는 서류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대단히 복잡하며 눈을 뽑고 싶을 만큼 골치가 아픈 것이기도 했다.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만약 기밀이 문제라면,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이미 봐버리기도 했고.”
그녀의 집무실 한쪽에서 볼셰이크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는 의도치 않게 올리비아가 서명을 휘갈기거나 불가 도장을 쾅쾅 찍어대는 서류를 보게 되었다.
물론, 본다고 해서 그 정보를 가지고 그가 무언가를 한 적은 없지만.

“당신한테 기밀 같은 건 없어.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건 당신도 볼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 말은.”
올리비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말? 무슨 말? 문제?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잖아.”

“아니. 네가 볼 수 있는 건 나도 볼 수 있다고 했지.”

“응. 상관없어. 말했잖아. 당신을 믿는다고.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당신 제국이 어떻게 되건 전혀 신경 쓰지 않잖아?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크라이어는 굳이 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진정으로 그러했으니까. 그는 제국뿐만이 아니라 이 대륙 전체가 어떻게 되어도 그리 개의치 않는다.
그저 이 빌어먹을 노예 낙인을 지우고 싶을 뿐.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대신에게서 벗어난다.
올리비아가 자신을 끌어 당겨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그러니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던 순간부터 변하지 않는 목표다.
그것만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 길고 어둡고 늪처럼 제 다리를 당기던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었지만, 올리비아가 손을 뻗는 순간 그 진창에서 눈이 아프도록 찬란한 빛이 되어 내렸다.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벗어날 수도 있나.
벗어날 수 있을 거다.
크라이어의 생각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지.
크라이어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연신 지긋지긋하다며 궁시렁거리면서도 펜을 놓지 않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쇄골에 자리한 낙인이 사라지고 나면 그녀와는 어떻게 될까?

‘이제 할 일이 끝났으니 당신은 당신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갈게!’
올리비아는 어쩌면 그리 말하며 그에게서 산뜻하게 등을 돌릴 수도 있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가.
무려 네 번이나 자신이 직접 그녀의 숨을 거두어갔다고 했다.
반복되는 삶에서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그녀 앞에 죽음으로 나타난 남자.
살기 위해 손을 잡았지만, 생존이 확실시된 후에도 그 손을 계속 잡고 있을 이유 따윈 없겠지.
근래 잠시간 그녀가 제게 얼굴을 붉혔었다.
고작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잘근잘근 물어 버리고 싶을 만큼 탐스럽게 달아올랐던 뺨과, 쫑긋거리며 불타오르던 귀 끝까지.
그때 올리비아를 휘감은 공기는 폐부 깊숙한 곳까지 양껏 들이켜도 모자랄 만큼 그를 만족스럽게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작은 등에서 올리비아의 생각이 훤히 읽혔다.
가까워지면 안 돼. 흔들리면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그가 고대신을 입에 담은 후 마치 그런 순간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올리비아에게서 그런 기색이 사라졌다.
자신을 피하지 않으니 다행인지, 의식하지 않으니 불행인지.
어느 쪽이건 지금은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지 않은가. 그녀의 곁에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에는?
몇 번,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그가 그녀를 떠난다는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그에게서 날아가 버리는 상황만 떠오를 뿐.
그렇다면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올리비아를 보면서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나.
결론은 순식간에 나왔다.
그럴 수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크라이어는 손에 닿는 서류를 집어 들고 제 얼굴을 올리비아가 볼 수 없게 가렸다.
지금 자신의 얼굴에는 욕망과 탐욕, 갈망과 갈증으로 부글거리는 제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을 테니까.
그는 그 상태로 물었다.

“네 것을 전부 내가 봐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당신한테 숨겨서 뭐하겠어.”
너무나도 간단하고 빠르게 돌아온 올리비아의 답이 자신이 의도한 ‘그녀 자신 전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는 나를 구해주겠다고 했고, 나를 흔들리지 않고 믿었으며, 내게 숨기는 것도 없다고 했다.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나 나를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이렇게나 지울 수 없을 만큼 내게 번져들 수 있을까.
그러니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나의 황녀. 올리비아.
바짝 마른 입천장을 혀끝으로 쓸어내린 크라이어의 머릿속을 채우고 검붉은 눈동자 깊은 안쪽으로 가라앉는 생각들은 올리비아가 알았다면 기겁했으리라.
하나, 그녀는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지만, 머릿속까지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설마 제국에 관심이 있는 거야?”

“글쎄. 제국에는 관심이 없다.”

“역시 그렇잖아.”

“하지만 네가 관심이 있는 것에는 관심이 있다.”
무어라 말하려 벌어졌던 올리비아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그녀는 마치 평야 너머의 수상한 무언가, 그러니까 포식자의 기척을 살피는 토끼처럼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농담은 아닌 거 같은데.”

“농담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음. 어……. 나는 제국에 관심이 있……지.”
무려 네 번의 죽음을 거치면서도 결코 제국을 버리고 홀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회귀를 거듭하면서 제국을 위해! 라는 비장한 결심과 거국적인 마음은 거의 희석되어 버렸지만, 그런데도 피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만은 벗어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일까.
크라이어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봤다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올리비아의 꼼질거리는 미간을 톡 두드린 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가 그렇다니 나도 제국에 관심이 있다.”
그의 손가락이 앞머리를 스치고 일자로 다물렸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번지는 순간, 올리비아는 냉큼 결정했다.
좋아. 생각하지 말자. 저 괴물이 제국에 관심을 가져준다니 좋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암, 좋게좋게 넘어가야지.

“그럼. 자, 여기.”
올리비아가 서류를 건네자 순순히 받아들면서도 크라이어는 물었다.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있지. 과연 당신이 그 서류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야.”

“기억이 없어서?”
크라이어는 서류를 위에서 아래로 긁어내리듯 훑었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도 영향이 있겠지만, 설사 당신이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일을 다뤄보지 않았다면 무리…….”

“이 서류를 작성한 자, 누군지 모르겠지만 외교 서류에 맞춤법이 틀렸다. 내용 자체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다만, 얼빠진 녀석이군.”
가차 없는 크라이어의 평가에 올리비아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러다 이내 모든 것을 해탈했다는 듯한 평온한 표정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손짓했다.

“능력,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구나. 그럼 이쪽부터 저쪽까지 부탁할까?”
올리비아는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서류를 떠넘겼다.

“문제가 너무 쉽게 풀리는 거 아닌가.”

“능력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어. 문제없지. 없어.”
어떻게든 서류를 떠넘기겠다는 의지가 훤히 보이는, 귀여운 욕심으로 반들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크라이어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아, 그래. 절대 네 곁을 떠날 수가 없지. 너를 떠나보낼 수도 없지.

“크라이어?”
그의 손끝이 올리비아의 눈가에 닿을 듯 말 듯 허공을 쓸어내리자 올리비아는 의아한 듯 그 손을 바라보다 이내 활짝 웃었다.

“서류 달라는 거구나!”

“그런 건 아…….”

“달라는 거지? 맞잖아? 서류 처리 도와준다는 거잖아? 그렇지?”
답을 정해놓고 말만 하라는 듯한 그녀의 다그침에 크라이어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가끔 네 작은 머리를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갈라보고 싶어도 서류는 처리하고 봐.”
단호하게 답한 올리비아가 당장이라도 서류에 들어갈 듯 얼굴을 박으며 덧붙였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결국 그녀가 가리켰던 부근의 서류를 잡은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그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와 빠르기로 서류의 산을 무너뜨렸다.
미친 듯이 서류를 넘기던 올리비아는 하얀 종이 위로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 눈만 빼꼼 들었다.

“끝났다.”

“벌써?”

“그래.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것들만 맡겼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숫제 감동이라도 한 듯 푸른 눈망울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올리비아는 그의 손에서 처리된 서류를 바라보다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좀 더 할래?”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를 올려다보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이내 그녀의 얼굴 전체를 덮을 만큼 크고 거친 손으로 푸른 눈동자를 가렸다.

“크라이어?”

“도와줄 테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그런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