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검붉……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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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검붉……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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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검붉……은 눈?
2023.04.10.
제 호위 대상은 좀처럼 자신을 곁에 두지 않으려는 기색이지만, 무슨 변덕을 부리는 건지 가끔 별 이유도 없이 그를 찾았다.
그에 익숙해진 탓인지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케슬란은 호위 기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묵묵히 응했다.
하나, 그의 속까지 고요한 건 아니었다.
그레타와 접한 이후 분명한 기억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비어버린 기억은 시간과 분량이 들쭉날쭉했고, 지금까지 뭔가 사고를 쳤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연고를 알 수 없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 자체가 엄청난 공포였다.
그는 사냥제에서 흉흉한 사건이 일어난 후 제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제국의 기사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기억의 공백을 해결해 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술을 너무 마시면 기억이 날아가지?’
‘누가 뒤통수라도 때리고 간 거 아니냐.’
‘그런 건 의사한테 물어봐라.’
익히 예상했듯이 기사단의 선후배와 동료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믿었던 황궁 의사도 신통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글쎄요. 아무리 살펴봐도 외상은 없고……. 한 번이 아니라고요? 흐음. 제가 어디선가 기억을 잃는 병이 있다는 문서를 보긴 했습니다만. 젊은 나이에 그 병에 걸리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그 문서를 요청하긴 했지만, 자신의 경우는 그런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야 저 꺼림칙한 노르덴국의 외교관과 만날 때만 기억이 사라지니.
설마 아닐 거야, 라며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그레타와 기억의 공백을 연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케슬란은 오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몇 번이나 단장에게 달려가 호위직을 사임하겠다고 애걸하는 상상을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공포와 구역감만큼 그레타에게서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억지로라도 버티게 했다.
케슬란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자신을 아는 만큼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기민하게 발달한 자신의 관찰력과 감을 믿었으니까.
그간 케슬란은 종종 자신의 감이 이끄는 대로 큰 위험을 감수했고, 그 이후 큰 보상을 받거나 더 큰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 감이 버티라고 하니 제 발로 죽으러 가는 길을 걷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그레타의 앞에 섰다.
물론 속이 얼마나 시끄럽건 다년간 단련된 얼굴과 태도만은 기사 중의 기사로 보아도 손색없이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으로 사람을 인형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머리 뚜껑을 열어 속내를 읽지 못하는 그레타는 당연히 케슬란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랐다.
“제시간에 왔군요.”
그렇기에 그레타는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도축되기 직전의 상품을 평가하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시도 이후 두어 번 더 저 기사를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해두긴 했지.
하지만 아무리 신의 힘, 마법이라도 고작 몇 번으로 사람을 인형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인형이 되어 갈수록 대상의 의지와 생각, 그 자신을 이루던 기억이 사라지고 완성되면 그레타의 의지로만 움직이게 된다.
그 반동으로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게 되지만, 신의 힘으로 만든 인형은 그 외의 기능은 완벽하게 평소처럼 수행하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위화감을 느껴도 그러려니 넘어갔다.
눈앞의 기사가 노르덴국의 인형인 왕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의 마음에 차는 인형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힘을 쏟아야만 하나.
그리고 그 힘에 따른 대가는? 대가를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나?
그레타는 상품의 가치를 가늠하며 욱신거리는 머리를 굴렸다.
제국의 기사가 인형이 된다면 현재는 단순히 황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눈이 되겠지만, 다가올 미래에는 황가의 등에 꽂을 비수로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보니타가 알아본 바 제 호위 기사로 임명된 자는 황실 기사단에서도 꽤 인정받는 자였고.
티슨이 힘을 조금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고작 제국의 기사에 불과한 인형의 효용은 확연히 줄어들겠지만, 손에 쥔 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역시 인형으로 만들어두는 편이 낫겠어.
아마도 보니타가 이 의식의 흐름을 알았다면 헛웃음을 지으며 막았을 터.
언뜻 합리적인 결정 같아 보이지만, 말 그대로 아직 ‘기사’에 불과한 케슬란을 인형으로 만드는 힘과 대가가 지나치게 무거웠기 때문이다.
노르덴국의 왕을 완벽한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그레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제국에서 보낸 감시역을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그레타는 제 딴에는 이성적으로, 제삼자가 본다면 지극히 충동적으로 케슬란의 가치를 쟀다.
다음 순간 관자놀이를 마구잡이로 쑤시는 통증과 함께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놓아줘야겠네.
정신을 뒤흔드는 일상적인 고통에 충동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모순적으로 그 아픔 덕분에 당장은 힘을 아꼈다.
하지만 그레타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시뻘게진 눈을 꾹 누르며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다른 볼일로 불렀으니. 뭐, 그 다른 볼일이 예상대로 끝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방에 들어선 이후 계속 붙어 있던 그레타의 시선이 겨우 뺨에서 떨어지자 케슬란은 등 뒤로 흐르는 오한에 티가 나지 않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뱀의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거두어지는 동시에 뭔가 굉장히 위험한 것도 함께 지나간 듯했으니까.
하지만 팔 전체에 돋은 소름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뭔지 모를 위협이 여전히 자신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경. 이리로.”
그레타는 케슬란을 향해 성의 없이 두어 번 손짓했다.
기르는 개를 부르는 것과 진배없는 태도였지만, 케슬란은 표정 변화 없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마주하기만 하면 구역감이 치미는 그레타를 상대로 굳이 대거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해서 자신이 들어왔을 때 흘긋 눈길을 주지도 않고 마치 인형처럼 그레타 뒤를 지키고 있던 자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고.
케슬란의 예상대로 그레타는 턱을 치켜들고 티슨이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왼쪽으로 짧게 고갯짓했다.
“인사해요. 제 호위랍니다.”
“호위라면.”
“사냥제에서 제가 습격당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잖아요? 노르덴국에서부터 저를 호위하던 믿을 만한 이를 불렀죠.”
원래 있던 호위이자 제국의 기사를 앞에 두고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씰룩이는 뺨이나 비아냥이 다분히 섞인 목소리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진짜 호위가 왔으니 서열 정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제국의 기사. 그중에서도 황실 기사인 케슬란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취급이었지만, 본래도 그를 탐탁치 않게 보던 호위 대상이다.
물론 그레타에게 아낌 받고 싶은 욕심은 개미 다리만큼도 없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호위 대상의 요구다.
해야지. 서열 정리.
케슬란은 그답지 않게 강건한 의지를 다졌다.
그가 말도 못 하게 꺼림칙해하는 대상은 주홍 머리를 흔들거리는 그레타였지 굴러들어온 이름 모를 노르덴 국의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케슬란은 문득 ‘굴러들어온 노르덴국의 기사’라는 부분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황녀 전하께서 대회의 이후 노르덴국의 기사를…….’
‘알려지지도 않은 자라지? 그런 자를 곁에 두시다니. 단장님께서 이미 폐하께 달려가셨다고…….’
그래. 그러고 보니 황녀님의 곁에 있던 그 어둠을 닮은 짐승이 황녀 궁에 들었을 때, 타국은 물론이거니와 제국 귀족과 기사들 사이에 엄청난 설왕설래가 일어났…….
케슬란은 생각을 채 마치지도 못한 채 현실로 끌려 나왔다.
“티슨입니다.”
분명히 마주 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을 한 기사 때문이었다.
“검붉……은 눈?”
부지불식간에 새어 나온 말은 진정으로 다행스럽게도 당사자인 케슬란의 귀에도 닿지 않는 작은 소리였다.
티슨이라는 새로운 호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전까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던 온갖 생각들이 한순간 표백되어 사라졌다.
지나치게 선명한 검붉은 눈동자.
얼마 전 저 검붉은 눈과 마주했던 기억을 떠오르자 케슬란은 등이 바짝 굳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더없이 강력하고 위험한 남자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그와 완전히 같은 눈을 가진 이가 노르덴의 기사랍시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비슷한 눈동자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제 겁많은 성정 탓에 강제로 눈썰미를 갈고 닦은 케슬란은 알 수 있었다.
기이하게도 티슨의 검붉은 눈과 황녀님 곁에 딱 붙어 있던 그 남자의 검붉은 눈이 정확히 같은 농도라는 사실을.
같은 색의 눈동자, 예를 들어 제국에서 흔하디흔한 갈색 눈동자라도 사람마다 조금씩 색이 다르다.
흐리거나, 진하거나 혹은 다른 색이 조금 섞이기도 하면서 뭉뚱그려 갈색이라고 표현하지만 완전히 같은 색은 사실상 없다는 말이다.
한데, 케슬란이 딱 두 번 본 검붉은 눈동자의 색이 완벽하게 같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심상치 않은 실력과 황녀님의 눈에 들어 단숨에 곁을 차지한 내력까지 지닌 기사와?
형제나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털끝만큼도 닮지 않았기에 더욱 기묘했다.
아니, 같은 노르덴국 출신이기도 하니 닮지 않은 가족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는 통에 이전보다 머릿속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노르덴국의 기사셨군요.”
그렇지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경악을 순식간에 갈무리한 케슬란의 겉모양만큼은 변함이 없어서 그레타나 티슨은 그의 속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티슨과 손이 겹친 케슬란은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인간 같지 않은 기묘한 얼굴이나 텅 빈 목소리와는 달리 느껴지는 체온은 멀쩡해서 더더욱 괴이했기 때문이다.
진짜 이상하다고. 저 외교관도 그렇지만 호위랍시고 데려온 놈은 더 이상하잖아.
케슬란이 가벼운 악수를 나눈 후 긴장으로 차가워진 제 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두었다.
그리고 티슨과 케슬란이 마주한 순간부터 그때까지 그레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살폈다.
두 사람이 마주했을 때 혹여 케슬란이 무언가 알아채거나 그런 낌새라도 보인다면, 지난번처럼 코피를 줄줄 흘리더라도 적절한 조치를 해야만 한다.
“케슬란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하나, 케슬란은 조용히 물러났고 그제야 그레타는 치뜬 눈을 내렸다.
이제야 케슬란을 불러들인 ‘다른 볼일’이 탈 없이 끝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