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역시 희미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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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역시 희미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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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역시 희미해졌어.
2023.04.13.
케슬란은 티슨이 지난 사냥제를 습격한 괴한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타국의 외교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수모를 당한 제국이 그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습격자인 티슨이 상식을 뛰어넘는 경로로 도주했을 뿐.
그는 제 얼굴로 쓰던 인부의 얼굴 가죽을 벗어 태워버린 후 외부로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황궁 내부에 들어앉았다.
습격자가 감히 황궁으로 기어들어 왔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한 조사단이 간신히 타고 남은 얼굴 가죽을 발견했을 때는 한참이나 늦었다.
외교관 신분인 그레타와 하인데르 후작인 보니타의 힘으로 티슨이 노르덴국에서 온 중요 인물로 무사히 탈바꿈한 뒤였으니까.
케슬란도 제국 기사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레타의 호위이기도 했던 터라 조사하는 내내 호되게 굴렀지만,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얻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관찰력과 감을 지녔다 하더라도 윗선에서 굴리는 대로 움직이는 입장상 모든 정황을 살필 수는 없었다.
더해서 케슬란의 운 역시 제대로 터지지 않았고.
케슬란이 티슨을 앞에 두고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레타는 안심했지만, 그녀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습격자니, 뭐니 하는 중대한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더라도 케슬란에게 티슨은 주요 인물의 범주에 충분히 들고도 남았다는 점이다.
조금 전부터 위험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의 감이 외치다 못해 고래고래 고함치고 있었으니까.
이건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아! 지나치게 수상쩍잖아. 단장님께 달려가야 하나? 아니, 아니지. 검붉은 눈이니까…….
소름이 돋다 못해 솜털까지 바짝 선 팔을 쓸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무시한 케슬란은 필사적으로 능란하게 평온을 가장했다.
위험 그 자체인 존재들 앞에서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지 않나.
그렇기에 그의 겉모습만은 한없이 단단한 제국 기사의 모범처럼 보였고, 무척이나 다행히도 그를 눈여겨 살피던 그레타와 티슨을 무사히 속여 넘길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케슬란은 참고 또 참았다.
아마도 그를 부른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리라.
제발 끝이어라.
케슬란의 지극한 마음을 알아준 건지 그레타는 오늘은 순순히 그를 보내주었다.
“이만 혼자 있고 싶네요.”
축객령은 전과 같았지만, 그레타의 곁에 티슨은 계속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달랐다.
하지만 케슬란은 그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원래 호위란 그래야만 했으니까.
물론 케슬란은 그레타의 곁에 있는 것을 한 번도 허락받지 못했지만 구태여 지금 그 사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
어깨를 활짝 펴고 등을 꼿꼿이 세운 케슬란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제야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 케슬란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려는데 닫히는 문 너머로 몇 가지 단어가 띄엄띄엄 흘러들어왔다.
“……제단을……필요…….”
“시간을 단축…….”
그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흐르는 식은땀이 아예 턱을 타고 고여 떨어질 정도로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내뱉으려던 한숨을 꿀꺽 삼켰다.
티슨과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이 완전히 같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그의 소심한 성정에서 비롯된 세세한 관찰력 덕분이었지만, 그레타가 흘린 부스러기를 담게 된 건 순전히 케슬란의 운이었다.
문이 닫히지도 않았고 케슬란이 멀어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레타는 자신의 계획을 티슨과 떠들었다.
케슬란이 듣는다 해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마치 보니타가 올리비아와 마주했을 당시 ‘올바른 신’을 들먹이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처럼.
***
케슬란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황녀의 집무실 앞에서 마른침을 삼킨 케슬란이 비장한 얼굴로 정중한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케슬란은 목 뒤가 너무 뻣뻣해서 아플 만큼 긴장한 채 집무실로 들어섰다.
노을이 지나고 어스름이 지는 밤이 다가오는 집무실에서는 잉크와 종이 냄새가 질식할 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케슬란 경. 무슨 일인지 들어볼까요.”
서류의 산에 묻힌 집무실 안쪽에서 들리는 황녀의 목소리에 케슬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노르덴국의 외교관께서 직접 호위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래. 요청하기에 그러라 허락했지. 경도 알다시피 사냥제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으로 불안하다더군.”
“외람되오나 그 호위를 직접 만나 보셨습니까?”
“글쎄.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전혀 거리낌 없이 여상한 올리비아의 반응에 케슬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황녀님의 말씀이 옳다.
노르덴국이 제국과 동맹국이기는 해도 대륙 전체로 보자면 그리 큰 영향력을 지닌 국가는 아니었다.
그런 곳의 외교관이 개인적으로 요청한 호위를 제국의 차기 황제인 황녀가 이유도 없이 일부러 찾아볼까.
심지어 명분도 있고 허락도 떨어진 마당에.
크게는 황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작게는 외교관들의 반발을 불러올 일이다.
황실 기사이자 차기 부단장, 그러니까 미래의 단장으로 지목받는 케슬란은 그 모든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를 빤히 응시하는 황녀님께서 답을 요구했지만, 그는 선뜻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서류의 양만 보더라도 황녀님의 노고를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결코 허튼일로 황녀님의 심기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돌아 나가서 지독하게 수상쩍은 그 외교관과 호위랍시고 온 놈에 대해 혼자 고민할까? 아니면 단장님에게 달려가야 하나? 기사단에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기는 하던가?
그야말로 한껏 당겨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온갖 가정과 불안이 머리 한구석을 스쳐 지나갔지만, 케슬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물러날 것 같았으면 오지도 않았다.
그렇지. 그냥 맥없이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어느새 나타난 건지 오늘도 황녀님의 곁에선 검붉은 눈의 짐승을 견딜 결심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보다 전에는 당장 꺼지라고 살 떨리는 위협을 하는 정도였다면, 오늘은 꺼지지 않으면 가차 없이 목을 물어뜯어 놓겠다는 농밀한 살의마저 느껴지는데 기분 탓인가.
가뜩이나 바짝 긴장했던 차에 살벌한 살기까지 한몸에 받고 있으려니, 심장은 정신없이 쿵쿵 뛰고 속은 메슥거렸으며 오늘 길에 조금 말랐던 식은땀이 다시 폭발했다.
하지만 케슬란은 뒤로 돌아 나가는 대신 검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할 말을 정돈했다.
시간이 흘러 오늘따라 진득한 황녀님 곁의 기사의 살기가 자신의 기분 탓이라고 애써 합리화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을 때.
“케슬란 경?”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나왔지만, 또렷한 올리비아의 부름이 답답한 침묵을 갈랐다.
“네. 황녀님. 송구하오나 그 호위와 관련해서 반드시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던 케슬란이 숫제 턱까지 떨어대면서도 엄숙하게 건넨 말에 올리비아의 고개가 크라이어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 덕분에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졌고, 그 직후 살을 거의 찢어발길 기세였던 크라이어의 무시무시한 살기가 확연히 줄어드는 것을 느낀 케슬란은 올리비아의 물음에 즉답했다.
“반드시?”
“네. 반드시.”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하느작거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느릿하게 팔락거렸다.
이내 쥐고 있던 펜을 내려둔 그녀가 양손을 깍지 낀 채 턱을 괴었다.
무언으로 발언을 허락한 올리비아를 향해 케슬란이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아셔야 할 사항은 눈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눈동자의 색이죠.”
그는 제국에 충성하는 기사이자 황실을 모시는 기사로서 호위 대상의 미심쩍은 움직임과 티슨의 검붉은 눈에서 느꼈던 괴이함을 열정적으로 보고하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의 기억에 종종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을 탈탈 털리기까지 몇 분 걸리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
“도련님,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줄을 당겨주세요.”
방긋 웃는 사용인을 향해 슈가는 아직 어색하지만, 최대한 웃으며 답했다.
“그럴게. 고마워.”
“아유, 제가 할 일인데요. 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저택의 유일한 아가씨를 닮은 건지 경쾌하기 그지없는 발걸음으로 떠나는 사용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슈가는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완전히 혼자가 된 슈가는 홀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모자랐는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열심히 궁리하기를 한참.
망설임이 묻어나는 더딘 걸음으로 거울 앞에 선 아이는 상의를 주섬주섬 걷어 올렸다.
“맞……나?”
슈가는 거울에 코를 박을 듯 제 낙인을 바라보았다.
바깥 공기에 그대로 노출된 맨살이 차가워져 소름이 살짝 돋을 때까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맞는 거 같은데.”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극도로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슈가는 손끝으로 낙인을 꾹꾹 누르다가 슬슬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전보다 희미해졌다.
아니, 희미해졌나? 그냥 거울이 뿌연 건 아닐까?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사용인 형아와 누나들이 얼마나 열심히 거울을 관리하는지 아니까 거울이 흐릿할 리는 없다.
그리고 거울 때문에 낙인이 희미하게 보이는 거라면 제 눈으로 그냥 봤을 때는 다르게 보여야 하지 않나.
“역시 희미해졌어.”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좀처럼 확신하지 못해 자신감 없이 내뱉은 슈가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똑똑.
“슈가, 지금 시간 괜찮아?”
남보다 조금 더 발랄한 노크 소리와 함께 그보다 훨씬 밝은 앙브흐가 슈가를 불렀다.
“네. 네! 들어오세요!”
잡고 있던 셔츠를 황급히 내린 슈가의 허락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리고 만면에 웃음을 띤 앙브흐가 외쳤다.
“황녀님께서 부르셔!”
뜬금없는 앙브흐의 말에 슈가는 어쩔 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도 동그랗게 벌렸다.
그런 아이 코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앙브흐가 곱게 정리된 정수리를 도닥거리며 재잘거렸다.
“정말 오랜만이지? 황녀님께서 황궁으로 오라며 초대장을 보내셨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시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