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 실망하시지도 않을 거고! (111/146)


#111. 실망하시지도 않을 거고!
2023.04.17.


올리비아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슈가의 눈앞에서 어지러이 팔랑거렸다.

그에 앙브흐처럼 활짝 웃으며 초대장을 받아서 든 슈가가 물었다.


“언제 출발하면 될까요?”

당장이라도 황국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 슈가의 눈망울이 산책 가기 전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해졌다.


“슈가도 기대되는 거지?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초대장에는 모레 오전에 입궁하라고 되어있어.”

“모레군요.”

오늘내일 열심히 준비해서 황녀 전하께 좋은 모습만 보여드려야지!

구체적으로 뭘 준비할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슈가는 굳세게 결심하다가 이어지는 앙브흐의 말에 멈칫했다.


“아 참, 황녀 전하께서 네게 물어볼 것이 있으시다고 하셨어.”

초대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톡톡 두드린 앙브흐의 손끝을 따라 유려한 문체를 또박또박 읽은 슈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황녀 전하께서 제게 물어볼 만한 일이 뭐가 있지? 내가 아는 게 있나? 가문의 선조가 남긴 일기장이라면 지난번에 다 말씀드렸었고…….

작은 머리통을 열심히 굴린 슈가가 마침내 과거의 어느 순간을 끄집어냈다.


‘그 이후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할 필요 없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하고 싶은 일과 머물 곳’을 결정했던 날이었다.

조곤조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냥한 목소리와 뺨을 보드랍게 매만지던 따뜻하고 매끄러운 손까지.

그때를 떠올린 슈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아직, 아직 생각나지 않았는데.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이후’를 아직 찾지 못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물론 지금은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고, 그러면서 제게 찍힌 제물의 낙인을 해결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슈가는 알고 있었다.

갇혀 있던 좁은 집에서 나온 어린아이는 언제까지나 어릴 수 없다.

시간이 지나 키가 아이작만큼 커지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대신 지지대가 되어 줄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자신은 지금 붙잡고 있는 목표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걸어야 할 길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타렌 저택에 온 이후 슈가는 굳이 저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평생 해보지 않았던 일에 여러 번 직면했고, 도전하면서 몇 번은 성공하면서 또 몇 번은 실패하기도 했다.

그림에는 영 재능이 없었지만, 악기는 생각보다 더 잘 다루었으며 가진 낙인이 고대신의 것이라 그런지 문학이나 경제 같은 것보다는 역사에 훨씬 관심이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을 발견하고, 주변을 새롭게 보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제국에는 인재가 많아.’

 
귓가를 보드랍게 쓸고 지나는 올리비아의 칭찬이 두둥실 떠오르자 슈가는 조금 더 초조해졌다.

아이는 욕심만 그득했던 르위르가의 조상 탓에 고대신의 제물로 낙인이 찍혀 홀로 집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 때문에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고, 으레 그렇듯 혼자만의 생각은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응? 슈가,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런 슈가의 초조함을 금방 알아챈 앙브흐가 금방 걱정스러운 기색을 했다.


“일단 여기 앉아 봐.”

눈썹 끝이 축 늘어진 슈가의 손을 잡아 아이의 키에 딱 맞춰 주문 제작한 소파에 앉힌 앙브흐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 다정한 목소리에 슈가는 순간적으로 낙인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에 갇힌 나머지 그냥 넘겨버렸다.

평소처럼 폭신하게 온몸을 감싸는 소파의 감촉에 흐물흐물 풀려야 할 텐데 슈가는 허리를 바짝 세운 채 입술을 오물거리기만 했다.

앙브흐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슈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사이 재빠르게 슈가의 상태를 살핀 그녀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가 복구되었다.

슈가를 담당하는 사용인의 말로는 분명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별일 없다고 들었는데, 왜 셔츠가 흐트러져 있는 걸까.

구깃구깃한 주름과 엉성하게 잡힌 모양새를 보아하니 셔츠를 걷었다가 황급히 정리한 거 같은데.

사용인에게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슈가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따뜻한 차를 준비시키려던 앙브흐가 멈칫했다.


“저, 저어. 황녀 전하께 제대로 된 답을 못하면 많이 화…… 내실까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잔뜩 주눅이 들다 못해 겁을 먹은 듯 움츠린 슈가의 질문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네. 그…… 제가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

우물쭈물 답하며 고개를 푹 숙인 슈가는 정말 1초도 걸리지 않고 돌아온 강력한 부정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실 리 없어!”

앙브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시 단언했다.


“답을 못한다고 해서 절대 화를 내실 리 없어!”

근거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만함에 슈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다 아차, 했다.


“그렇지만 제게 콕 짚어 물으시는데 답이 안 나오면.”

“슈가.”

“네?”

“잘 들으렴. 황녀 전하께서 네게 어떤 질문을 하시건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으실 거야. 물론!”

앙브흐는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아주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하시지도 않을 거고!”

그에 슈가의 어깨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크게 튀었다.

화를 내실까요? 라며 묻긴 했지만, 아이는 내심 올리비아가 화를 내는 것보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쪽을 더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눈을 쏟아질 듯 크게 뜬 슈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앙브흐가 살살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뭐든 걱정하지 마. 황녀 전하께서 너를 구해주셨잖아. 황녀 전하의 마음은 그때와 다르지 않을 거야.”

그때의…….

슈가는 올리비아와의 순간을 완벽하지는 않아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해도 자신의 가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슈가에게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때부터 슈가의 좁디좁았던 슈가의 세계가 크게 확장되어 다채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슈가는 입을 몇 번이나 벙긋거리다 겨우 진심을 꺼냈다.


“황녀 전하를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어요. 치, 칭찬……도 잔뜩 받고 싶고.”

아이의 입에서 지극히 평범한 아이,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랄 일이 더듬더듬 새어 나왔다.

앙브흐는 슈가가 웅얼거리며 입을 다물 때까지 손을 꼭 잡아주며 답해주었다.


“황녀 전하께서 네게 실망하실 일은 없을 거야. 늘 좋은 모습만 봐주실 거고. 칭찬은 음…… 칭찬해 달라고 조르면 어마어마하게 해주실 거야. 전하께선 다정하시니까.”

하나씩 전부 답을 준 앙브흐가 금방이라도 울 듯 발긋해진 슈가의 눈가가 진정되는 것을 보며 물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네. 가, 감사해요.”

제 속을 고스란히 들킨 슈가는 눈가 대신 뺨을 물들이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슈가가 난감한 표정으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기까지 앙브흐의 던진 몇 마디면 충분했다.


“자, 그럼 네 상의가 왜 그렇게 흐트러졌는지 말해줄래?”

뒷말이 많이 생략되었지만, 평소 동글동글하던 앙브흐의 눈이 가자미처럼 가늘어져 있었기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혈육이었던 형의 만행에 당한 적 있는 아이다. 혹시 타렌저에서도 누군가 슈가를 괴롭히고 있다면…….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확인할 게 있어서 올렸다가 급하게 정리하는 바람에.”

슈가는 영영 원래 상태로 돌아갈 일 없는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어떻게든 사용인이 입혀준 대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정리에도 어지간히 재주가 없는지 셔츠는 점점 처참하게 구겨지기만 했다.

아이의 손을 잡아 내린 앙브흐가 도와주려고 대신 손을 댔지만, 둘이 진짜 가족도 아닌데 손재주는 똑 닮아서 결국 셔츠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아.”

“으음.”

또래보다 작은 슈가와 체구가 작은 앙브흐가 이마를 맞대고 최선을 다해 셔츠를 살려보려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손을 떼어냈다.


“새 셔츠가 필요하겠어.”

“으음. 아무래도 그렇죠?”

“그보다 셔츠는 왜 올렸던 거야? 무슨 확인을 하려고?”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슈가의 셔츠를 죽죽 늘려 펴던 앙브흐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괴롭힘을 당해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저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에 대한 순순한 궁금증이었다.

요즘 먹는 양이 부쩍 늘었다고 했으니 혹시 제 몸이 얼마나 커졌나 확인하려고 했던 건가? 그렇다면 의사를 불러 정확히 수치를 알려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확실히 키도 좀 크고 전보다 살도 붙어서 훨씬 보기도 좋고.

슈가의 정수리 위치를 가늠하던 앙브흐가 어정쩡하게 돌아오는 답에 눈을 깜박거렸다.


“네. 그 확인해야 할 게 있었던 거 같아서.”

“있었던 거 같다니?”

성장한 제 몸을 확인하려 한다기에는 묘한 답에 앙브흐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답을 하는 슈가는 전부터 이어지던 욱신거림을 이제야 제대로 인지한 건지, 어느새 작은 손이 낙인이 찍힌 옆구리 부분을 하릴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앙브흐의 눈이 다시 의심과 걱정으로 가늘어지자 슈가는 짧은 한숨을 삼킨 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감춰두었던 제 속내를 들킨 것처럼 지금 감춰도 어차피 금방 알아챌 테지.


“낙인이 희미해진 거 같아요.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고, 아니. 확실한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부터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던 낙인이다.

낙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어 이토록 신경 쓰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의 몸에 있는 점처럼 의식하지 않으면 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슈가는 낙인이 희미해졌다. 고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셔츠를 들춰봤던 거구나.”

“네…… 발견한 건 목욕할 때였지만, 그때는 잘 못 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음. 아니에요.”

아이가 무언가 더 말하려다 도리질 치자 앙브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좀 봐도 될까?”

슈가는 답하는 대신 셔츠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한번 꾹 준 후 천천히 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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